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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묵상글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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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유다서는 많이 읽히지도 않고 짧은 서간인데
잘 뜯어보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선 내적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얘기해줍니다.
내적 생활이란 이웃 사랑과 관련한 외적인 생활과 다른 생활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전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내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행복해야겠지요.
내적 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이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라는 것에 이의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다 서간은 기도하라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 기도도 있다는 것인가요?
그런 기도는 없고 또 없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악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 그러니까 저 웬수 벼락 맞아 죽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도만 하는,
그런 사람은 있을 것이고 많을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의 말로 바꾸면 기도의 영이 아니라 육의 영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다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나를 구원하시도록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바르티메오처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구원을 위한 내적 생활을 잘하라고 권고한 다음
유다의 서간은 이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권고합니다.
내적 생활에 이어 외적 생활에 대한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내적 생활에 관해 얘기했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했다면 이제 그것이 외적 생활로 드러날 것입니다.
곧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복음의 기쁨> 2번은 이렇게 진단하며 경고합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유다 서간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어떤 이들에게는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여기서 의심하는 이들은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을 멸망의 불에서 구하기 위해 자비를 베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유다 서간은 재미있게도 속옷까지 미워할 사람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속옷까지 미워할 어떤 이들이란 이단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이단들도 물들까 두려워하면서도 자비의 대상이니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것은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로 종합이 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기로 맘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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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일명 ‘킬링필드’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세계사를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악의 학살자라고 불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캄보디아 전체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이 인물은 바로 ‘폴 포트’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대학살극을 벌입니다.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사람들이 ‘폴 포트’의 학살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명령한 사람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 그리고 농민의 착취자라는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해 이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안경 쓴 저도 그 당시에 캄보디아에 있었다면 사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엄청난 학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나의 이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 참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으며 홀로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절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내가 틀렸습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의 덕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유일하게 권한을 지닌 이는 대사제밖에 없었지요. 대사제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한을 받으셨다고 답하시면,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과 그를 대신하는 대사제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고, 대사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면 이 권한은 부정한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은 틀렸다는 단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틀렸다는 가정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역시 ‘틀렸다’라는 단정을 너무 많이 합니다. 이런 단정 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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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다(블레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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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주님!
타인에 대한 나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차라리 제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숨은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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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데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느냐?’ 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습니다(마르11,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11,28)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11,3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 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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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와서 뉴욕 면허증을 텍사스 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타주로 이사 가면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나라이니까 그냥 바꿔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했습니다. 예약을 하는데 90일 정도 밀려있었습니다. 예약하면 이메일로 확인 서류를 보내줍니다. 서류에는 면허증 갱신 장소, 예약 번호, 준비물이 있습니다. 준비물에는 기존 면허증, 소셜 번호, 그린카드 혹은 비자, 살고 있는 곳이 표시된 페이퍼(은행 잔액 증명, 핸드폰 요금 고지서 등등), 차량 보험 서류 등이 있습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바코드를 찍거나 예약 번호를 입력하면 대기 번호가 나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양식을 기재합니다. 인적 사항을 적고, 건강 상태에 대한 물음에 예스나 노로 표기합니다.
기존 면허증에 대한 것도 기록합니다. 유효기간, 생년월일, 키, 몸무게, 눈 색깔, 머리 색깔 등을 적습니다. 적성검사를 위한 양식도 기재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대기 번호를 부릅니다. 창구에 가면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잘못 기재 했거나 미진한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고칠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간단히 시력 검사를 한 후에 사진을 찍으면 임시 면허증을 발급해 줍니다. 30$ 정도의 수수료를 내면 운전면허증 발급 작업이 끝납니다. 쉬운 것 같지만 처음 하면 긴장됩니다. 그런데 전 ‘사제찬스’가 있었습니다. 저의 성직자 복장을 본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자기도 신자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성당 이야기도 하고, 신앙 이야기도 하니 분위기는 편안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찾아주었습니다. 제가 실수로 잘못 적은 곳도 친절하게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30분 만에 운전면허증 발급 절차가 끝났습니다. 직원은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직원 중에서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감사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어떻게 될까?”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사제의 직무에 성실했던 사제들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세례 때 ‘인호’를 받았으니,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곳에서도 친절하게 안내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친절하게 안내받았지만, 꼭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지 못했으면 새로운 운전면허증 발급은 어려웠을 겁니다. 절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증, 소셜 번호, 비자나 그린카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제가 댈러스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신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봐줄 수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서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지 말고, 영원히 좀 먹지 않는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
우리가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할 보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자캐오처럼 회개하고,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베드로 사도는 언제든지 천국 문을 활짝 열어줄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권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권한은 능력, 재력, 권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재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한없이 약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과 정결함,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였으며, 그분의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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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을 때 혹은 애매할 때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께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은 주님의 권한이 어디서 왔는지 정말 궁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는 모든 일이 못마땅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이 그 당시 민중에게 권위를 휘둘렀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며 주님을 참 예언자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질문은 자신들의 권위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주님의 허점을 잡으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이 내려오고 그 은총으로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권위가 중요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안에서 이런 모습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유혹에 빠져 검은 마음으로 주님을 못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쉽게 이런 검은 마음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내 권위를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에서 저는 검은 모습을 봅니다. 내가 빛나고 싶어서 다른 이의 공적을 무시하거나 가로채는 모습도 봅니다.
이는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며 하느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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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카지노에 가보신 적 있을까요?
저는 예전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잠시 카지노에 들렀습니다. 사실 들렀다기보다 제가 묵었던 호텔 1층이 카지노였습니다.
카지노에는 몇 가지 없는 것이 있다고 떠나기 전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계와 창문 그리고 거울입니다.
저는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찬찬히 호텔 1층의 카지노를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시계와 창문과 거울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도박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도박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변해가는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면 시계가 필요하고 창문이 필요하고 거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빠져나오려면 똑같은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아직 내 삶이 많이 남았음을 알려주는 시계와 화창한 하늘을 보여주는 마음 창문과 내 마음과 행실을 보여주는 거울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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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 성심(聖心)뿐이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미사에 참석한 우리는 물론이고 오늘 기념하는 성 유스티노 순교자도 평생 이렇게 진리이신 주님을 목말라 찾았을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지난 성모성월 5월 어머니의 달은, 나라 사정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참 아름다운 신록의 자연에 참 좋은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6월 달력을 여는 순간 예수성심성월이란 말마디가 참 반갑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어머니의 달 5월 성모성월에 아드님의 달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예수성심이야 말로 우리의 참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성심성월,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즉 겸손한 사랑, 온유한 사랑, 지혜로운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예수성심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날마다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어제 일간지 전문가의 다음 기사 내용이 더욱 이런 물음을 갖게 합니다.
“현 세계경제는 마치 병원에서 중환자가 산소 호흡기를 달고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과 같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묘수가 없다. 자연은 고갈되고 인구는 저출산, 고령화로 치닫는다. 이젠 ‘발상의 전환’이 답이다. ‘많이 먹고 많이 싸는’ 기존의 성장주의를 버리고, ‘조금 먹고 조금 싸는’ 대안 구조가 돌파구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지난 5월은 폭풍전의 고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올 여름의 더위가 걱정됩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입니다.
“지구온난화, 한가한 소리다. 지구열탕화가 맞는다. ‘가마솥 안 개구리’는 비유가 아닌 현실이다. 지구는 가마솥과 같이 달궈지고 있고,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2019년 기준 50만명에 이른다.”
이런 부정적 비관적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진단이 우리의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 참된 회개를 요구합니다. 궁극의 길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예수성심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문장 “다산 어른의 하루”라는 일력(日曆) 6월의 주제어는 전미개오(轉迷開悟)입니다. 불교용어로 뜻인즉 “껍질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의 중심을 세우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무지의 껍질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재앙중의 재앙, 불행중의 불행이 삶의 중심을 잃는 것입니다. 6월 첫날 다산의 말씀도 좋습니다.
“인생의 시험은 매일 반복된다. 바로 어제 일으킨 분발심을 오늘도 계속할 있는 지에 대한 도전이다.”
작심삼일에 머물지 말고 한결같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中)은 지극히 선한 것이고, 용(庸)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면서 오래 할 수 있으면 중용(中庸)이다.”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한결같이 올바른 상태의 중용의 지혜는 예수님은 물론 성 베네딕도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무지하고 사악한 이들과 지혜로운 예수님과의 대결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지로 왜곡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은 흡사 기득권에 찌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보는 듯 합니다. 눈밝은 민초(民草)들은 예수님의 온갖 행적들은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아채는 데 무지에 눈먼 권력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지혜롭게도 요한의 세례를 예로 들면서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어느쪽도 대답할 수 없기에 이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예수님 역시 “모른다”로 답하심으로 논쟁을 끝냅니다. 무지와의 논쟁은 끝이 없고 오히려 유혹에 휘말릴수 있기에 이렇게 조기에 끝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유다 사도의 가르침도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예수성심의 자비와 지혜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유스티노 순교자입니다. 성 유스티노는 2세기초 그리스 사람으로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진리를 찾았던 구도자였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이요, 이를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성인은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지만 영혼의 허기는 여전할 뿐 만족할 수 없던중, 어느날 에페소의 바닷가를 걷던중 노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다음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은 즉시 끓어올랐고,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엄습해왔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유익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들로부터 참 진리이신 예수님께로의 삶의 전향이 이뤄진 유스티노는 130년경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합니다. 성인이 그리스도교에 빠진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150년경 로마로 건너가 평신도 신학자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을 가르치고 호교론 학파를 설립합니다. 성인은 2세기 호교론자들중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대표적 저서로는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적 방어와 반대파의 주장을 누르는 빼어난 논쟁 능력은 많은 적들을 낳게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인 165년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의 순교를 당합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첫날을 여는, 평생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 살았던 성 유스티노의 예수님께 대한 순교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길이자 진리요 희망이자 생명이신 예수성심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 속에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63,4-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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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진리를 아는 길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아는 것을 고백하기를 원치 않으니 나도 내가 아는 것을 말하지 않겠다’(참조 마태 21,27; 마르 11,33; 루카 20,8 )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릇된 방식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감추어져 있으니 근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진리를 찾는 이가 자신이 찾고 있는 바를 이해할 충분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경우이고, 둘째는 진리를 멸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찾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들을 자격조차 없는 경우입니다. 이 비판지들은 응당한 반박을 받았고, 수치스럽게 물러갔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영혼이 무화되지 않고 하느님을 제 속에 흡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대답하기가 어려운 물음입니다. 나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영혼에게 주는 모든 선물은 그분 자신이다." 만일 하느님이 자신 이외의 다른 선물을 영혼에게 주신다면, 영혼은 그것을 거절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추십니다. 영혼이 하느님 안에 잠기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합니다. 그러하기에 영혼에게 속한 것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영혼과 합일하실 때, 영혼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이 온 세상에 충만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영혼을 일컬어 “세상”이라고 부른 이유와, 어떻게 영혼이 복에 이르는지를 상세히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시기바랍니다. 즉, 그분이 “주님”과 “성령”이시라면, 우리도 영적 “토양’일 수 있고, 생명의 숨, 곧 “주님”과 “성령”이 스며들 수 있는 영역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179)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이슬람교의 정통을 자임하는 파를 수니파라 부르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다. 알라가 무하마드를 통해 계시한 신언(神言)의 집대성으로서 <꾸란> 경전 이외에, 무하마드의 생애와 이적 그리고 언행과 가르침에 관련된 성스러운 설화들로 구성된 이슬람교의 신앙 전승 자료를 '수나(Suna)라고 부른다. 어원적으로 수나는 ‘전통으로 받아들여진 관례' 라는 포괄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슬람교 정통파 수니파는 <꾸란>의 권위만이 이니라 바로 이 ‘수나'를 인정한다는 것이 첫째 특징이다.
둘째는, 보다 현실적인 교단 정치의 정통성에 관한 견해 차이인데, 수니파는 무하마드 이후 제도적으로 선임 방식을 통해 이슬람의 법통을 이어온 역대 칼리프들의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8-9세기쯤에 이르러 수니파 안에서는 신학적으로 극단적인 모순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한바리 파(Hanbalite)처럼 종교적 교리를 문구대로 해석하려는 극단적 보수주의가 있는가 하면, 무타질리 파(Mutazilites)처럼 이슬람 교설을 합리적 정신으로 재해석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정통 이슬람교임을 자처하는 수니파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온 가장 큰 분파적 집단을 시아파라 부른다. 첫째 특징으로서 시아파는 이슬람교 신앙 공동체 법통을 이어오는 지도력의 정당성과 관련해, 무하마드 사후에 ‘권력에 의해 오염된 종교 공동체가 선출한 칼리프의 권력 계승과 종교적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시아피의 주장은 알라의 유일한 예언자 무하마드의 정통성은 정치적 ‘선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직간접적인 혈통 '계승'을 통해 이어가야 한다고 하여, 무하마드의 사촌이면서 사위였던 4대 칼리프 알리(Ali)만이 정통성을 잇는다고 보고 그 이전 칼리프는 인정하지 않는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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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 (11,28)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하는 것이오?”(11,28)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던진 그들처럼 오늘을 깨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결은 다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 권위가 도전받고 참 권위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느끼게 되어 복종하게 되는데, 이같이 어떤 지시가 복종 될 가능성을 지배dominat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의 핵심적인 원천이 권한(권위) authority인데, 이러한 권한은 보편적인 가치 체계를 지닌 그것의 사용을 합법적으로 허락할 때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전통적 권한 Traditional Authority (=영원한 어제의 권위)으로, 현재의 사회질서가 신성하고, 그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는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지위, 계급, 전통, 관습이나 문화적 유산에서 비롯합니다. 둘째, 법적, 합리적 권한 Legal-Rational authority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법, 제도, 계약 등 공시적 규범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법률이나 규정에 따라 권한이 부여되며, 선거 등으로 뽑힌 사람이나 조직의 공식적 직위를 부여받은 책임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카리스마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비범하고 개인적인 은총)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개인의 비범하고 초인적인 힘이나 영웅적인 힘에 대한 애착에 기초한 권한으로, 여기서 카리스마는 기적을 행하거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하늘이 내려 주신 재능’이라고 정의합니다. 막스 베버는 권한(권위) 이론에서 전통적, 법적 합리적 권한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 그리고 감성 등을 억제하는 주 원천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항하는 다른 형태의 권한으로 카리스마적 권한을 제시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한은 당대 사람들에게나 현대인에게 베버가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깨닫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 보이는 기미를 전조前兆 현상이라고 표현하듯이, 유다 지도자들과 권한 논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오늘의 전조였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권한과 권위에 위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블랙리스트의 제거 1순위에 오른 분이셨잖아요. 그런 그분이 자신들의 텃밭에서, 나오바리(=마당)에서 난데없이 공개적으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시고, 너희는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1,15.17참조) 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곧 율법에 근거해서 합법적으로 ‘성전세’를 포함해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던 그들에게는 성전에 관한 확고한 기득권과 권위에 심각한 도전과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다, 는 표현처럼 그들은 선제공격의 차원에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11,28)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한 밑바닥에는 상실한 권위에 대한 자기방어 차원과 함께, 예수님의 권위를 묵살하려는 의도에서 어떻게라도 예수님의 답변에서 시비와 꼬투리를 잡으려는데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악한 질문 의도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선문답하시듯, 그들의 허를 찌르듯,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11,30) 라고, 오히려 대답을 대신해서 난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참으로 장군에 멍군으로 응수한 절묘한 한 수, 기발한 묘수이지 않나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 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고도 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 즉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자신들의 믿음이나 신념, 진리보다는 대중의 시선 곧 백성의 민심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11,33) 그들의 대답에 대응하여 예수님 또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11,33) 하고 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누누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5,17,19)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음이 닫히고 굽은 이들에게 牛耳讀經(=쇠귀에 경 읽기)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태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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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평생 구도자로서 진리를 탐구하던 유스티노 성인은 참된 진리를 그리스 철학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리스 가정에서 태어나 그 문화 안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그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유스티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 등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유스티노가 그리스도교로 마음이 움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순교자들이 보여 준 용기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제2호교론」, 12장).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철학에서 진리를 찾았지만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입교하게 되었다는 유스티노의 고백은, 과학이나 다른 세속 학문에서 진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바로 용기 있는 순교적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피의 순교는 할 수 없지만, 삶 안에서 순교는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을 모두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치를 실천하며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순교입니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고 영원한 가치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에서 진리의 빛을 보고, 주님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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