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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태5:38-42
오늘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이 일어난 지 73주년이 되는 6.25상기 기념주일입니다.
73주년이 되었다는 말은 73세 이상이 된 분들만이 6.25를 경험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하가 되는 분들은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경험하였습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은 6.25사변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6.25사변은 우리나라가 경험한 가장 큰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다음에 가장 격렬했던 전쟁이 6.25사변이라고 할 때 얼마나 심각한 전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종전선언이 되어야 끝나는 것인데 6.25전쟁은 아직 종전이 되지 않고 휴전상태입니다.
6.25전쟁의 상흔은 이상가족문제와 남북 간의 심각한 대치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헌법상 남한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물론 북한의 주적도 남한입니다.
북한은 핵무기와 같은 최신무기를 개발하여 남한을 위협하고 있고 남한은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공언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살벌한 분위기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이런 한반도의 현실이, 같은 민족끼리의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그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업그레이드 시킨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 하시면서 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5가지의 중요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요,
먼저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 ‘너희가 이렇게 들었다’고 당시의 형편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고 하시면서 그 말씀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하십니다.
즉 구약의 말씀을 업그레이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구약의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패턴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의심의 눈초리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저 분이 누구신데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엄청난 잘못을 하는가?’
여기에 대해 주님은 스스로 답을 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절)
주님은 스스로 내가 가르치는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 즉 구약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누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어떤 사람이 건드릴 수 있으며 어느 누가 온전하게 한다고 다르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그 분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신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말씀을 누가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누가 실천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오른편 뺨을 맞으면 화를 내고 자기도 상대방을 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어떻게 왼편 뺨을 내밀 수 있을까?’
이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상식적으로는 당연합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사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실천이 되지 않기에 세상은 발전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악순환이 게속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북 간의 관계에서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은 남한을 계속 위협하고 남한에 대하여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하였습니까?
지금은 말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남한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런 북한에 대하여 남한도 지지 않습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이것이 안 되니까 미국과 핵무기를 공유해야한다는 말을 합니다.
북한이 도발하면 그 이상으로 보복을 하겠다는 말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한반도는 어떻게 될까요?
남북한의 관계는 더 험악해져가고 남북한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평화공존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악순환을 끊고 이 한반도에 평화가 임하고 전쟁의 소문이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분노와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와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당시에 통용되는 율법적이고 상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절)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에 기록된 말씀인데요,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3-25)
이 율법을 주님께서 온전하게 하셨다고 해서 이 법이 잘못된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이 법은 너무나 귀한 법입니다.
먼저, 이 법은 생명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법을 정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으면 내 눈도 상하게 되니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울러서 이 법은 보복을 최소한으로 막는데 유용한 법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보복을 할 때 받은 것보다 더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대방이 한 대 때리면 자기는 두 대, 세 대를 때립니다.
그러나 이 법을 통하여 두 대를 때리지 않고 한 대만 때리게 함으로서 보복의 악순환을 최소한으로 막게 됩니다.
오늘날 이 법은 국가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시행되고 있는데요,
우리가 사기를 당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국가가 사기당한 돈을 청구해서 갚아주게 합니다.
이러한 법은 타락한 세상에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법은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유지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법에 불과합니다.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되지만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은 이 법을 어기고 두 배, 세배, 네 배 그 이상의 보복을 가할 때 그들을 징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소리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복수는 근본적으로 악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되고 폭력의 악순환은 결국 둘 다 망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복금지법 이상의 또 다른 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사랑의 법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사랑의 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인데요, 잘 알려진 것만큼 시행하기는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든지 아니면 오른손 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전부 상대방을 가장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여러분, 상대방이 오른손 등으로 오른뺨을 때리면 아파서가 아니라 가장 큰 모욕감을 느껴서 참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에 왼편을 돌려댈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잘못했어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데, 더군다나 자기는 잘못이 없는 대도 이런 일을 당하면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롯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검과 몽치로 무장하여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제자들이 칼을 빼서 종의 귀를 자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아야 하고 이것까지 양보해야 합니다.
여러분, 죽으면 죽었지 이것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못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고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인간의 분노와 보복과 악함으로 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까지 참아야 하고 이것까지 양보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까지 참았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뺨을 맞기고 조롱하는 자의 조롱을 온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감당하셨을 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셨기에 우리도 해야 하고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며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승리하신 비결이고 또한 성도들의 승리비결입니다.
둘째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값이 나가는 옷을 겉옷입니다.
그러기에 고발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은 겉옷을 가져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겉옷은 이불과 같은 역할을 했기에 밤이 되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속옷이라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속옷 뿐 아니라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십니다.
겉옷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내가 누릴 합법적인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합법적인 권리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의 권리를 밭을 가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으로 비유합니다.
밭은 가는 소는 그만큼 수고하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것을 먹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주님의 일에 수고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 있고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스스로 대접받는 일을 포기합니다.
복음이 비난받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 되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은 절대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보장한 법이고 권리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고집하고 포기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악한 모습으로 그대로 나아갈 것이고 보복과 전쟁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군대는 얼마든지 사람을 징집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이 너무 힘들어서 감당하지 못하자 로마 군인은 구경꾼 중에 하나인 시몬을 지목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울했지만 로마군인의 징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 오리만 가지 말고 십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억울하게 징집되었지만 기쁨으로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떨쳐버리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리를 동행할 때 상대방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는 오른편 뺨을 치면 같이 오른편 뺨을 치는 대적의 관계입니다.
강하게 때리면 상대방은 더 강하게 때려야 합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도 빼앗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오리를 가야한다고 하면 어떻게든지 십리를 더 가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으로 이 한반도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고 평화와 통일의 희망은 점점 더 멀어지고 맙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최소한 같이 때리면 안 됩니다.
왼편까지 돌려대면 더 좋습니다.
속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주면 됩니다. 겉옷까지 주면 더 좋습니다.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오리를 같이 가주어야 합니다.
십리까지 가주면 더 좋습니다.
예수님은 악에 대해서 악으로 반발하지 않고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쪽이 폭력을 썼는데 다른 쪽이 이에 반응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자 폭력은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십자가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 아니라 서로 사는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힘으로 분노를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갈 때 이 땅은 더 살기 좋고 더 행복하고 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줄 믿습니다.
(202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