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8]우리 고향에 이렇게 큰 서화가書畵家가…
한 친구가 얼마 전 “남정 최정균 선생을 아느냐?”고 물어 듣느니 처음이라 하자, 지난 4월 예술의전당에서 펴낸 <남정 최정균 탄생 100주년 기념전> 도록을 보여줬다. 글씨와 그림의 문외한인데도 우리 고향(전북 임실) 출신이라 해 들춰본 후 깜짝 놀랐다.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이렇게 족적이 큰 서화가書畵家가 우리집 지근지처(지사면 금평리. 차로 10여분)에서 태어나 활동을 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 게 창피하기까지 했다.
전북지역의 서예가라 하면, 북두칠성같은 강암 송성용(1913-1999)과 악필로 유명한 석전 황욱(1898-1993) 선생 이름만 들어봤는데,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1924-2001. 향년 78세)은 금시초문. 도록에 실린 <논고論考> 4편을 읽고 정말로 깜짝 놀랐다. ‘한국 현대서예의 거목’이라 부르며 그의 예술과 인간 그리고 서화계書畵界에 미친 영향과 위치를 조명하는 세미나까지 겸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전시회는 그의 문도門徒를 비롯한 후학들의 작품들도 함께 보여줬다.
내가 주목한 것은 남정 예술의 뿌리가 곧바로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소전 손재형(1902-1981)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논고였다. 추사에 몰입했던 손재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국보 <세한도>를 어떻게 감상할 수 있었으랴? 그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의 <세한도>. 그 명작을 추사에 미친 한 일본인으로부터 해방 직전 돌려받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한 편의 다큐로 매우 감동적이다. ‘소전체’를 이룩한 그 소전이 어쩌다 정치에 꿈을 둬 <세한도>조차 매물로 내놓는 비극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문화애국자' 손창근 선생이 나라에 무상기증을 했다. 그 실물을 본 것만 생각해도 나는 흐뭇하고 행복하다. 오직 <세한도> 하나를 보기 위해 나 혼자 시골에서 국립박물관으로 달려오는, 하루 7시간 기차여행을 했으니 기억이 남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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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남정의 연보를 보니, 그 깡촌에서 18세인 1941년 원불교에 귀의, 대종사 소태산을 직접 모시며 원광대학교 교학부를 졸업하고 원광중고교에서 한문과 국어선생님을 17년 동안 했다한다. 진작에 그림이나 글씨에 조예가 있었겠지만, 만약에 그가 1960년 37세 나이에 '큰 스승' 손재형을 만나 15년간 사사師事받지 않고 중고교의 국어와 한문선생으로 그쳤으면 어쩔 뻔 했는가. 소전은 직장도 팽개치고 자신의 집(종로구 부암동) 가까이로 이사를 온 제자에게 ‘남정’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 남정이 88년 동양 최초로 원광대에 서예학과를 창설했다. 무슨무슨 상을 받고 국전에 특선 몇 회, 심사위원, 초대작가가 되고, 한일교류전 등을 했다던가 하는 것은 기록상의 의미일 뿐,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큰 작가가 돼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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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소전을 만나 그의 예술이 꽃을 피운 것만이 사실이다. 큰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하는 것을. 서예학과 창설이야말로 어마무시한 기념비적인 일이었고,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3개 대학서도 서예학과 창설)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했건만, 불행히 10여년만에 폐과의 수순을 밟는다. 우리나라 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같다. 몰락하는 인문정신의 퇴행, 그 자체인 것을. 그가 94년(71세)에 펴낸 역작 <서화동원>(글과 그림은 그 뿌리가 같다는 뜻)에는 그의 삶과 예술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예술세계를 말할 계제가 아닐 정도로 나로선 문외한이지만, 그의 족적을 도록으로 살펴본 바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고희기념으로 94년 원광대에 기증한 그의 작품과 소장품 350여점이 2001년 대학 미술관 화재로 전소된 것은 우리 문화계에 엄청난 손실인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다행한 것은 남정의 유족이 그림과 글씨 대표적 39건 43점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기증, 탄생 1백주년 기념전이 열렸다는 것이고, 곁들여 그를 추모하는 후학들의 작품도 걸린 것이다.
그분의 고향, 지사면의 지인형님에게 그분을 물으니 한마디로 “대단한 서예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곁들이는 말이 금평리 마을에 원불교 교당이 있는데, 면소재지에도 교당이 있다면서, 일개 면에 교당이 2개 있는 곳은 전국에서 단 한 곳뿐이라고 했다. 18살 때부터 대종사를 직접 모신 일등 신도이자 원불교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에 <강암서예관>이 있듯, 고향마을이나 지사면 소재지에 <최정균서예기념관>을 세울 일이 아니겠는가. 백범 선생이 평생 희망했듯,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 가는 '문화강대국'이 되는 길은, 지자체나 지자체 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이런 일(기념관이나 미술관 설립 등)을 시급하고(very urgent) 중요하게(very important) 생각하는 마인드와 실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