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牧胡)’는 13세기 원(元)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장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몽골인(胡)을 말한다.
《고려사》에는 하치(哈赤), 달달목자(達達牧子), 달단목자(韃靼牧子), 탐라목자(耽羅牧子)로도 등장한다.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된 후에 원은 제주도의 동서에 목마장을 세웠고, 이 목마장은 원 조정이 관리를 맡아 주재하였다.
목호의 수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목호들은 공민왕의 즉위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펴자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이 공민왕의 명에 따라 2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이를 '목호의 난'이라고 한다
‘왜구(倭寇)’는 전근대에 활동했던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바다를 따라 가까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와 관계를 맺고 사략 해적이나 일종의 수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잉글랜드의 사략선, 오스만 제국과 바르바리 해적 등이 있다.
고대 일본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 도래인으로 인한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약탈 경제가 발달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가설로는 지진해일로 인해 경제 기반이 무너지자 해안가에 거주하던 이들이 약탈에 뛰어들면서 왜구가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고려 말 왜구는 일본의 남조 정부가 북조와의 전쟁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침략하면서 발생하였고 남조가 멸망하는 1392년 이후로 격감하게 된다.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은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의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10년(1223년)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어로는 와코(わこう)라고 하여, 일본에서 도적의 상징으로 경멸조로 불렀다.
왜구를 완전 섬명한 장군은 최영의 휘하에 있던 이성계였고, 그 전쟁을 황산대첩이라 한다.
황산 대첩의 흔적은 남원의 ‘피바위’로 남아 있다.
그 후, 최영과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명나라의 요동 정벌을 명하고, 반대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
하여 우왕과 최영을 죽이고 조선을 세우게 된다.
요동은 고려의 땅이었다.
요동은 조선 시대에 명에 복속되었으며, 청나라가 이어 받다 청일 전쟁으로 일본 해군의 근거지가 되고, 그후 유럽 제국 세력의 조차지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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