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3
1월22일[연중 제3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z8I3S0n7vE
[서울대교구 박배원 베드로 신부 집전(중앙동 본당 보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성령의 현존 속에 계셨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으며, 성령의 보살핌 아래 나자렛에서 30년 세월을 사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성령의 인도 아래 광야로 나가셔서 대피정을 하셨으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 앞에 펼쳐진 인류 구원사업을 위한 위대한 여정에는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향한 율법학자들의 발언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신성 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혹독한 악담을 퍼붓습니다. 베엘제불은 마귀 중에서도 대 마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분, 가장 선하신 분 앞에 가장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사람들이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엄청난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고 길길이 뛰고 발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런 멋진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가장 첫째가는 비결은 성령의 현존과 동반에 대한 확고한 의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네 인생 여정에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더 성숙해지고, 조금은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을 매일 동반하시는데,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확실히 현존하시는데, 우리가 겪는 매일의 작고 소소한 사건 안에서 활동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 망각 속에 살아간다면, 꽤나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겨울 한 본당에 대림 특강을 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을 소상히 잘 파악하고 계시는 분들이 그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셔, 정말이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랍니다. 그래서 저를 보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낀답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숫기도 부족하고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배움도 부족했고 그럴만한 탈랜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 앞에 서서 발표를 한다거나, 공개 석상에 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이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로 완전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는데, 저도 요즘 저를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지?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러면서 결국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한 인간 존재 안에 머무시면서, 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셔서 움직이게 하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틀렸어. 나는 늦었어. 지금 이 나이에 변화는 무슨 변화? 하는 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BzoOIijtRU
++++++++++++++++++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절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 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놓아 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드릴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님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 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인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성격상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물건을 주문했을 때, 좀 크면 큰 대로, 좀 작으면 작은 대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너무 작아서 불편하면 남을 주기도 합니다. 요즘 반품을 하면 다 받아준다는데 그렇게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인지, 재능이 없어서인지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틀린 부분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편입니다. 방 안의 물건들도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진중한 편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게으른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전문가보다 더 세심하게 잘못된 부분을 찾아낸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이 그분의 말을 수긍은 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들도 본인의 눈에는 잘 보이는 것이 때로 힘들다고 합니다. 그것을 말했을 때 상대방이 수긍을 하기 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것을 볼 때가 힘들다고 합니다. 본인의 성격과 본인이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그리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격이신지요?
예전에 직장인들이 좋아하는 상급자의 유형을 읽었습니다. 가장 힘든 상급자는 똑똑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그분들을 따라가려면 쉴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성인 밑에 있으면 순교자가 된다.” 본당 신부님이 성인처럼 지내면 보좌 신부님과 신자들은 거의 순교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상급자는 똑똑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똑똑하기에 일에 실수는 없고, 업적도 낼 수 있지만, 회식도 자주하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대로 좋은 상급자는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멍청하기에 문제는 생기지만 그런 대로 뒷감당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지만 걱정이 되는 상급자는 멍청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아주 편하기는 한데 부서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년 동안 신문사에 있으면서 저는 어떤 유형의 상급자였는지 돌아봅니다.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으니 아주 멍청한 상급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니 아주 부지런한 상급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인지요?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를 좋아하시는지요?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이길 정도로 싸움에 능한 군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이 하느님께 축복 받은 왕이라는 이유로 몇 번씩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를 탐하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뉘우치던 왕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왕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완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보다, 권력보다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 칠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걷겠다는 다짐으로 아서 휴 클러프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입니다.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 노력과 상처가 부질없고, 적은 약해지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 희망이 멍청하다면, 두려움은 거짓을 말한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저 연기 속에서, 네 전우들은 지금도 도망치는 적군을 뒤쫓고 있다, 그리고, 너 없이도, 승리를 거두리라. 지친 파도들이 헛되이 해변에 부서지며 안간힘을 쓰며 한 치 앞을 못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먼 뒤쪽으로, 개울과 작은 만을 이루며, 바다가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동이 틀 때, 햇빛은 동쪽 창으로만 들어오지 않으며, 태양은 앞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오르지만, 하나 서쪽을 보라, 온 대지가 밝게 빛나지 않는가.”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2-30: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 하신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 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베엘제불이라는 말은 ‘파리들의 주님’ 또는 ‘쓰레기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실체는 더러움입니다. 더러움을 주님으로 모시게 만드는 것, 이것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거두는 열매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결코 영혼을 더럽거나 추악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시어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을까요?
마르코 복음서는 그 이유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한 가지 실마리를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 복음 장면이 있을 때까지 예수님의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분에 대한 여러 평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라는 그들의 말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실제로 알지 못한 채 한 말이었습니다.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듣고 더 나쁘게 평가하는 마음이 율법 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따금 이와 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가 험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겪어 보지도 않고 더 나쁘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더욱이 험담하는 자리가 교회의 봉사자들을 향한 자리라면, 어쩌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봉사자들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율법 학자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 슬기로운 신앙인이,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2-27)
마귀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에게만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난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사람’으로만 보였습니다.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싫고, 마귀들이 쫓겨난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생각해낸 ‘논리’가 바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논리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에게 복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합리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사탄, 즉 우두머리 마귀라고 해도, 부하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는 뜻인데, 부하 마귀들이 우두머리 마귀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거슬러서 싸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귀들의 속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단합이 잘 되는 조직체가 아니라, ‘분열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 존재입니다. 만일에 마귀들이 분열되어서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될 뿐인데, 마귀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귀들은 자살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24절-26절의 말씀은, 마귀들이 단합을 잘하고 결속력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은 스스로 멸망하는(자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도 마귀들의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기는 싫어서 그냥 침묵을 지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27절의 ‘힘센 자’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들을 가리킵니다. 그 ‘힘센 자’를 묶어 놓는 ‘더 힘센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라는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재물’은 마귀들의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고, ‘재물을 털다.’ 라는 말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마귀들을 쫓아내실 수 있고,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는데, 마귀들은 아버지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것과 똑같이 아들 예수님에게도 복종해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에도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8-30)
여기서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는 일반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죄’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죄, 그리고 예수님을 안 믿는 죄로 해석됩니다. “용서받을 것이다.”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구세주로서, 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또 하느님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들에는 용서, 사랑, 자비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는 말씀은, ‘회개해도 소용없다.’처럼 들리는 말씀인데,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런 뜻은 아니고, 그만큼 ‘큰 죄’ 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든지, 또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부정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받기를 거부해서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께 악령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업적이 일상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악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악의 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28절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을, 모든 죄와 모독하는 말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기 34,6-7)
=====================
[대구대교구 김용한 세례자 요한 신부님]
어떤 물체든 단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과 물건은 입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체적인 구성을 쉽게 내적, 외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입체적인 구성은 물론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과 사물의 입체적인 부분들을 제대로 보고 살아갑니까? 쉽게 말해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두루 잘 살핍니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니 삶의 경험상 흔히 우리들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일면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외형만을 보고서 전체를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특정한 존재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우리는 ‘편견’이라 합니다. 그럼 편견에 치우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요?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은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제대로 공부한 자신들뿐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리고 그 편견 속에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입은 것도 그렇게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 꼬락서니도 그렇고...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도 모르는 예수라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라삐’라는 칭송의 소리를 듣기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라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이 그들 귀에는 무척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복음의 말씀도 그들 귀에는 제대로 들릴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과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우리 역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은 아닙니까? 율법학자들처럼 내가 만든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본당에서 함께하는 형제자매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나 혼자만 잘났다는 편견에 빠져버린 신앙생활 속에서...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만큼 굳어진 자신의 생각과 판단 속에서... 형제자매들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 주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생의 거울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모든 것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혹시나 모를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혹 나 자신이 편견 속에 빠져 쓸데없는 아집과 고집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특히 구원의 길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면은 더욱더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멘.
====================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평화와 일치의 성령>
어느 집이고 집안에 문제 하나쯤 없는 집이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여자들은 음식 걱정을 하고 남자 형제들은 이번에도 또 큰소리는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이번에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용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하지만 영락없이 또 형제들 간에 다툼이 생기고 부모님 앞에서 큰소리를 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 이유가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 욕심은 물질적인 욕심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차라리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서로 갈라져 망해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가족이 서로 갈라진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그리고 조금씩 양보합시다. 성령은 우리를 평화와 일치로 향하게 하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고도 하였다.” (3,22)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라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는 ‘앙켈레베치’의 표현이 새삼 의미롭게 다가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과 일어난 모든 일 또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봐도 앞면과 뒷면이 있고, 우리 몸도 앞뒤가 있습니다. 그리고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또 슬픔이 다가옵니다. 기회가 오는 듯싶다가도 위기가 물밀듯 다가옵니다.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다가도 한순간 몰매를 맞고 비난과 거부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상황이나 현실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무게로 밀려올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주 표현하는 것처럼, 곧 물 반 컵을 두고 한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다른 사람은 ‘물이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았네.’라고 서로 다른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우리 네 삶에는 이처럼 항상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정하면서 一喜一悲하지 않고, 위기가 기회이며 기회가 위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참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나 자신을 나 자신답게 사는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응답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초기 갈릴래아에서 초기 전도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사람이 여러 지방에서 구름처럼 몰려왔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운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찾아오기도 했었습니다. (마르3,21참조) 더욱 오늘 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 고도 하였다.” (3,22)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히 율법 학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로서는 참 어처구니없는 트집이고 생각이긴 하지만, 그들에겐 아주 심각한 내적 혼란의 표현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구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 데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만 우리에게도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지고 있는 대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직설적으로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3,23.26)라고 사실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보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사탄은 결코 스스로 분열하고 자멸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한 민족이나 공동체 심지어 개인의 흥망성쇠와 파국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이며 불화에서 파생함을 우리는 보고 알고 있잖아요. 이처럼 대부분 내부의 분열로 망하며 끝장이 났는데, 이런 분열을 획책하는 어두운 세력이 바로 사탄이 하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사탄은 사탄끼리 싸우지 않음을 율법 학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마귀들을,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어라.”(마태10,8; 마르7,7; 루9,1)라고 당부하면서 마귀를 쫓아낼 힘과 권한을 주셨으며, 당신 자신도 힘센 더러운 영들과 마귀들을 ‘묶어 놓고 ’(3,27참조) 쫓아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영들과 사탄을 쫓아내는 것은 베엘제불이 아니라 당신 자신임을 표명하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탄에 대한 승리는 사탄의 힘을 빌려 이룬 성과가 아니라 바로 당신과 성령의 힘으로 이룬 승리라고 밝히십니다. 성령의 힘을 입지 않고서는 우리는 악령을 제압하고 추방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사탄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선 오늘 복음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28.29) 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표현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든 죄, 곧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죄는 물론 신성 모독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은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죄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어떤 단서도 조건도 제한도 없다고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어떤 죄이며, 그 죄가 얼마나 큰 죄이기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에게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증폭되어 갑니다. 사실 말에 속지 않고 말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도 죽어야 하듯이, 성서의 표현도 죽을 때만이 참으로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않는 죄가 없지만 용서하신다고 해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상대가 그 용서를 받지 않은 죄를 말하는 것으로 저는 알아듣습니다. 하느님 용서의 한계나 제한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의 닫힘과 거부이며, 이런 거부와 닫힘이 곧 그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의지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 (3,30) 고 예수님의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요10,37.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라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율법 학자들이야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 곧 용서받지 못한 죄를 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과 독선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큰 구원의 틀에서 지금의 우리네 삶과 모든 것을 성령의 활동과 숨결을 함께 호흡하고 수용할 수 있길 바랍니다.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것이 아니라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 는 표현처럼, 본디 우리는 참된 진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찾고 싶기 때문에 진리인 주님을 찾아왔고, 그분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시89,25)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정신과 전문의 고백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문의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만나 상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부 간 갈등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 마음의 병은 고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말로 맞지 않는 관계일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이혼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부부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부부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운전하고 자신은 보조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 아내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과속 방지턱을 지나갈 때 친구가 브레이크를 늦게 밟아서 차가 덜컹거린 것입니다. 뒷좌석의 친구 아내는 크지는 않지만 “아이쿠”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 친구가 아내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더랍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은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말 대신 평소에 “왜 놀라? 뭐 이런 걸 가지고 놀라? 이게 놀랄 일이야?”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로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판단적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감정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기감정만이 아닌 상대 감정을 존중하고 헤아리며 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감정을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감정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주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즉, 제일 먼저 보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다는 기준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기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것>
마르코 3,22-30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착한 사람을
악하다 하는 것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끔 하시는
착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을
헛되다 하는 것은
참된 사람을
참되게끔 하시는
참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옳은 사람을
그르다 하는 것은
옳은 사람을
옳게끔 하시는
옳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곧은 사람을
비뚤다 하는 것은
곧은 사람을
곧게끔 하시는
곧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맑은 사람을
흐리다 하는 것은
맑은 사람을
맑게끔 하시는
맑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을
어둡다 하는 것은
밝은 사람을
밝게끔 하시는
밝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사람을
더럽다 하는 것은
깨끗한 사람을
깨끗하게끔 하시는
깨끗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사람을
차갑다 하는 것은
따뜻한 사람을
따뜻하게끔 하시는
따뜻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거칠다 하는 것은
부드러운 사람을
부드럽게끔 하시는
부드러우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살가운 사람을
쌀쌀맞다 하는 사람은
살가운 사람을
살갑게끔 하시는
살가우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거짓은 밝혀진다>
소위‘열심 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활동하고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봉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출혈을 낳으면서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들리는 여러 말 때문에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 3,21)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기도 하였고, 율법학자들은“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고도 하였으며 사람들은“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반대자가 상대하기 거북하고 비겁하다고 해서 그를 악령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로 몰아붙여 매장하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상대방의 속을 환히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 3,30)
물론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선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시는데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결코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삽시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교황님의 두 강론 주제 머릿글이 새로웠습니다. 늘 읽어도 깊고 새롭고 아름다운 교황님의 강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희망과 사랑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도록하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라.”
문득 이 말마디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라.”
아름다운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자들에게 하루중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은 아마도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찬미가와 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지 평생 삶을 요약하는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찬미가2절
“전능하신 하느님, 이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날마다 평생 끝기도후의 강복의 은혜로 선종의 죽음도 맞게 되리라는 예감도 듭니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강론시,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이라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부득이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전쟁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잊지 못합니다. ‘청년기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기에는 일하고 싸우고, 노년기에는 병마(病魔)와 싸운다.’는 말마디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의 염원과는 역설적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전쟁이요 흡사 인류사는 전쟁사같습니다. 지금도 안팎으로 계속되는 다양한 전쟁입니다. 어느때 보다 한반도는 전쟁위기라 합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치는 만세육창중 세 번째 만세가 “대한민국-한반도 만세!”입니다.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전쟁이요,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상처의 치유와 회복도 요원케하는 전쟁의 폐해입니다.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이구동성 말합니다.
우리 수도승 영성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제가 수도생활초부터 참 많이 주의깊게 다뤘던 주제이며 강론중에도 다음 같은 요지로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모릅니다.
“우리 수도자는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적전투를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기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 찬미의 전사이다.”
얼마나 멋진 주님의 평생 전사들인 우리 수도자들의 신원인지요!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이 전사들입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의 영적훈련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요 온갖 수행들입니다. 특히 하루의 영적전투에서 영적승리를 위한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문득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더불어 우리를 격려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판 글자도 생각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주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적수들인 율법학자들의 집요한 공격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영적승리를 폄훼하여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왜곡합니다. 말그대로 가짜뉴스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들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밝힙니다. 악의 동맹이 얼마나 강고한데 영리한 사탄들이 결코 갈라서는 분열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수 있다.”
바로 여기 힘센 자 사탄을 제압하는 더 힘센 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불세출(不世出)의 영적 전사인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지 강조합니다. 너무나 자명하고 뚜렷한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 악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고의적, 악의적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에 따라 겸손하고 유연하게 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닫아거는 완고함앞에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스스로 자기감옥에 갇힌 무지의 수인(囚人)들이 바로 성령을 모독한 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하권은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의 최종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평생 전쟁터에서 지낸 다윗은 마침내 모두를 평정하고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니 온전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이런 평생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분은 하느님이심을 마지막 구절이 분명히 합니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사무하5,10)
다윗이나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참으로 천하무적 주님의 전사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과 예수님은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평생 전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흘렸는지요! 반면 예수님은 아무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온전히 사랑과 섬김, 겸손과 평화의 영성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믿음과 사랑,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말씀과 기도로 일치를 이룬 주님의 전사들의 공동체라면 부패도 분열도 없을 것이니, 바로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무장시켜 당신 성령의 전사, 평화의 전사, 복음의 전사로 세상 삶의 전쟁터에 파견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무시와 악시의 죄에서 구하소서!>
지난 토요일과 오늘의 마르코 복음의 얘기를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보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이 찾아오고,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율법 학자들이 와서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 악령들을 쫓아낸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늘에서 온 힘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하느님을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엘제벨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율법 학자들도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들의 비뚤어진 시선을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단죄하십니다.
이런 비뚤어진 시선 중에 선입견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똑바로 조사해보고, 식별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안에 들어와 형성되어 있는 견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잘못 보고 안 좋게 보게 하는 내적 기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개와 같은 관점이 안에 있어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욕심이 안에 있으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보게 되고, 자기 안에 악이 가득하면 모든 것을 다 악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색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안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에 의한 주님의 악령추방을 악령에 의한 것이라고 보게 하는 것일까요?
이들에게 악령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을 악령이라고 보는 걸까요?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악령이나 더러운 영들도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있는 것은 성령이든 악령이든 영적인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교만과 악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도 보통 사람의 교만 정도가 아니라 주님마저도 무시하고 악시할 정도의 교만일 겁니다.
제가 무시와 악시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무시라는 말은 있어도 악시라는 말은 없지요. 제가 만들어낸 말로서 악으로 보는 눈이라는 뜻입니다.
교만의 눈 어떤 것입니까? 교만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도, 없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지요. 우리말의 업신여김 곧 ‘없이 여기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의 눈 선한 것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조리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요, 하느님의 선한 업적도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며, 한 달란트 받는 자가 주님을 모진 분으로 보는 것과 같은 눈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독한 교만은 무시를 넘어 죄악시하게 합니다. 특히 성령을 악령으로 모독하게 하는 죄악시인데, 이런 죄악시를 가진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죄에 매이게 하는 무서운 교만을 경계하고,
이 죄악에서 구해주십사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9)
<성령 모독죄!>
오늘 복음(마르3,22-30)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담을 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22)
'베엘제불'은 '집의 주인', 혹은 '신들을 거느리는 이'란 뜻으로, '마귀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대피정 하실 때,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신 예수님께 이런 악담을 퍼부을 수 있을까?
이런 악담을 퍼붓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8-29)
우리도 삶 속에서 종종 악담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느님의 사람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건설될 수 있도록 애쓰는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성직자들일 수 있고, 수도자들일 수 있고, 깨어있는 신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람들은 누구의 이익과 불이익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와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악담을 한 적은 없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주일학교 학생들과 일본으로 성지순례(나가사키와 히라도)를 떠납니다. 아침 6시에 김해공항으로 출발해서 수요일 밤늦게 돌아오는 2박3일의 짧고 굵은 순례여정입니다. 기도와 마음으로 함께해 주세요♥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I5xWm_1mVM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 26)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 위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창조는 일치와
협력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삶의 본질또한
일치와 협력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협력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갈라서면 언제나
참혹한 결과뿐이었음을
우리 역사는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망쳐버린 우리의 협력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나라와 가정과 개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치의
근원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일치가 일치를 낳고
협력이 협력을 낳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모든 생명의
최상의 길이신
성령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이
망쳐버린 소중한 관계를
일치의 빛으로
치유하고 계십니다.
성령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