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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Das Schloß, 1922)
- 성은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관료의 세계, K.와 마을 주민들을 내외적으로 종속시켜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상징, 성에 대한 K.의 투쟁이 개인의 소외를 강요하는 외부세계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가능성 여부를 진단한 것이라면 성의 기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비밀을 찾는 K.의 시도도 좌절됨
1926년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이 소설은 『실종자』, 『소송 Der Prozeß』과 더불어 흔히 '고독의 3부작'으로 불리우는 장편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미완성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성작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줄거리>
어느 겨울밤에 K.는 성에 소속된 한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의 여관에서 그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직접 자기를 측량기사로 초빙했다고 주장한다. 이튿날 아침 K.는 성으로 가려고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여관으로 돌아와 두 명의 조수를 만난다. 이어 전령인 바르나바스가 클람이라는 고관이 서명한 편지를 가지고 온다. 내용은 성 당국에서 그를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 K.는 술집에서 프리다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프리다는 클람의 애인으로서 K.에게 몸을 바친다. 이튿날 두 사람은 K.의 방에서 잠을 자며 보낸다.
도착한 지 사흘 후 마을의 면장을 만난 K.는 마을에서는 측량기사가 필요 없지만 학교의 사환으로 일하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나흘 째 되는 날 K.는 술집에서 클람을 기다리다 소용이 없자 그에게 서면으로 만나자는 요청을 한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서 프리다와 함께 보낸다. 교사들과 논쟁을 벌인 다음 그는 두 조수를 해고시키고 바르나바스 집을 방문한다. 바르나바스의 누이인 올가는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녀의 동생인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로부터 외설적인 제안을 받고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프리다는 K.가 배척받는 집안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그와 헤어지고 술집으로 돌아간다.
성의 서기인 에어랑거에게 가려던 K.는 문을 잘못 알고 뷔르겔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이 사람은 그가 채용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K.는 극심한 피곤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놓치고 만다. 에어랑거는 잠이 든 K.를 깨우고 클람을 생각해서 프리다를 놓아주라고 명령한다. 다음날 아침 K.는 하인들이 담당관리들에게 서류를 분배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목격한다. K.는 다음날까지 오랫동안 잠을 자고 하녀 페피는 자기 방에서 K.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이 소설은 중단된다.
작품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나지만 카프카가 죽기 전에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 구상을 전해들은 브로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주인공 K.가 기력이 다하여 죽어갈 때, 성 당국으로부터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사정을 참작하여 그곳에 살면서 일하도록 해주겠다"는 내용이 전달되고, K.는 이 통지를 받은 다음 죽는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는 흐름은 성의 신비스럽고 어두운 정체이다. K.가 아무리 백방으로 그곳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번번이 허사로 끝날 뿐이다. 이 같은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성은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K.의 시야에 전개되는 성과 마을의 모습은 마치 그와의 사이에 놓인 다리를 경계로 현실세계와 비현실의 세계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마을은 눈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성조차도 어두움과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때문에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엷은 빛의 등불조차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K.는 한참동안 대로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희뿌연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상은 그대로 현실화되어 나무다리를 통과해 건너간 마을에서 성의 정체를 밝히려고 K.의 노력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또한 동시에 성은 마을에서 움직이는 K.의 움직임이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통제할 정도의 차가운 객관적 현실로 그를 짓누르기도 한다. 『소송』에서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요제프 K.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고재판소처럼 성은 K.의 세계에서 도달 불가능한 초현실적 영역인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작품 서두에는 작가적인 배경과 관련해 성이 상징하는 바를 암시해 주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K.는 도착 이튿날 성을 관찰하는데 그것의 중심부에 있는 첨탑 둘레의 흉벽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발코니 모양으로 생긴 것의 끝에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흉벽이 달려 있어서 이것이 겁을 먹거나 또는 버릇없는 어린애 손으로 그려진 것 같이 불확실하고도 불규칙적으로 부서지듯이 맑은 하늘에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법의 제재에 의하여 집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있는 방에 갇혀서 우울해 하는 거주자가 자기의 몸을 밝은 세상에 내놓기 위하여 지붕을 뚫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모습과도 같았다.
첨탑 주위의 '겁을 먹은' 어린애라는 표현이나 '우울해 하는 거주자', '구석진 방의 거주자' 등의 의인화는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를 상기시켜 준다.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관료의 세계라고 할 성은 확실히 헤르만 카프카의 권위적인 이미지와 유사하다. 심지어 벤야민 같은 사람은 성이 아버지의 형상일 뿐 아니라 부패한 아버지 세계의 상징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체험의 형상화가 아니다. 카프카에게 있어 부자갈등의 모티프는 세계의 원칙으로 화해 거대한 부권지배의 체계나 불합리한 권력기구에 대한 체험으로 확장되는 특성을 갖는다. 비록 개인적 모델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이것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인을 지배하는 권력 메카니즘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소설은 개인적 갈등을 초월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후세대의 인류에게 세계의 숨겨진 모습을 체험하는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성은 K.와 마을 주민들에게 내외적으로 종속시켜 이들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성주인인 백작의 허락 없이는 마을에 머물 수도 없고, 모든 것은 성의 소유이며 일상의 삶을 지배하면서도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특성은 바르나바스 가족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관리의 추악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삶을 묵묵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은 부패성과 동시에 불투명한 속성으로 K.를 압도한다. 마을에서 성으로 가는 길은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 형태로 K.를 지치게 한다. 마을에서도 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의 특성은 고관인 클람을 통해 가장 명시적으로 노출된다. 그는 천변만화하는 프로테우스적 존재라고 엠리히도 지적했지만 마을에 올 때와 갈 때가 다르고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가 다르며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혼자 있을 때와 대화중일 때가 다른 변화무쌍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올가는 말한다. K.는 클람의 전 애인인 프리다와 정사를 벌이는데 클람의 세력은 공사에 구분이 없어서 K.의 침실에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는 초월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마을사람들과도 면담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술집 여주인의 말은 그와의 면담을 원하는 K.의 의지를 좌절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클람의 존재는 K.에게 불운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바르나바스를 통해 편지를 보냄으로써 늘 K.를 감시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클람의 정체는 술집 여주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K.와는 불가분의 숙명적 관계임이 드러난다.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이 불행해지는 일도 없었으며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우두커니 서 있지 않아도 됐고 (……) 또한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인생에 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았을 거에요. (……) 이 모든 것을 보아도 충분히 클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 당신은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 또한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클람은 당신의 병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불행해지는 일"이란 말을 술집 여주인의 견해로서 이 같은 그녀의 주장은 클람의 애인 프리다와 결혼하려는 K.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 당국과 접촉하려는 최대의 목표 앞에서 여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K.의 행위에서는 에로스적 욕망 속에서 자기파괴를 실현하는 카프카 인물들의 특성이 반복되고 있다. 동시에 프리다를 이용해 성에 접근하려는 의도를 보임으로써 애정과는 무관하게 여자를 물화시키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투명하면서도 일체의 삶을 지배하는 성의 모습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클람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된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은 K.에게도 적용되는 특징이다. 그는 성을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영역으로 인식하면서도 나는 투쟁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말함으로써 성을 투쟁 대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의 전편을 통해 성과 접촉하여 측량사로서 채용되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이는 동시에 그는 이미 3장에서 프리다를 안 직후 그녀에게 "클람을 버리고 내 애인이 되어주시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몰려오는 적 앞에 노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여자는 적과의 투쟁을 위한 선전포고의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권력자 클람으로부터 프리다를 탈취함으로써 에로스를 투쟁의 방편으로 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K.의 투쟁이 지닌 이중성은 성에 도달하려는 열망 외에 성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자유인으로 있기를 원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성』의 몽상적인 흐름을 본 독자가 느끼는 의문은 도대체 성은 실체로 존재하는 대상인가, K.는 정말 측량기사로 초대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성의 정체는 K.가 접하는 여러가지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호한 본질을 보여준다. K. 자신의 체험이나 그 체험에 대한 해석, 다른 쪽의 정보나 이에 대한 해석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로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면장에 의해 당신이 채용되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그 가치가 의문시되고, 이런 견해는 다시 술집 여주인에 의해 무시된다. 더구나 K.는 뭐든지 오해하는 버릇을 지닌 인물임으로 그의 시각으로 독자에게 비쳐지는 성의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K.가 측량기사로 초대되었다는 증거도 그 자신의 주장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과거부터 같이 일하던 그의 조수들이 클람으로부터 파견된 것이 틀림없다는 프리다의 주장에 K.가 반박하지 못하는 것도 서에 대한 K.의 이중적인 태도와 더불어 성의 초월적인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정황들을 볼 때 성은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부친 콤플렉스에서 각인된 작가의 동경과 불안의 산물로 여겨진다. 동시에 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성에 대한 K.의 투쟁이 개인의 소외를 강요하는 외부세계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가능성 여부를 진단한 것이라면 성의 기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비밀을 찾는 K.의 시도도 좌절된다는 작품구조는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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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Der Prozeß, 1915)
카프카는 펠리체와 파혼하고 난 직후에 『소송 Der Prozeß』의 집필을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사후인 1925년에 가서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장편이다.
<줄거리>
은행지배인 유제프 K.는 30회 생일날 아침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체포당한다. 체포는 되었지만 일상생활은 계속 이어가는 형태였다. 그는 체포 시에 방이 어지렵혀진 것을 옆방의 뷔르스트너 양에게 사과하며 공격적인 애무를 한다. 그러나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법정에 가서는 자신을 보호하며 법정을 마음껏 야유한다. 법정은 온갖 불투명한 것 투성이어서 몇 시에 오라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막상 찾아가 보아도 어둡고 답답한 것이 마치 미로와 같다. 그는 체포당국과 접촉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패하고 만다. 또한 소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법정에 관계되는 여인들, 법정소속 화가, 변호사, 교도신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31회 생일 전날밤에 찾아온 처형관들에게 채석장으로 끌려가 아무런 절차도 없이 살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요제프 K.는 유죄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를 부인한다. 오히려 법정에 가서는 "죄는 이 조직과 고관들에게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죄를 부인하면 할수록 그는 죄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시인하는 길만이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즉 부인유죄, 시인무죄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이다. 여기서 법정세계의 인물들 중 누구에 의해서도 유죄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직 주인공 자신의 법에 대한 '무지'와 '죄의 부인'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는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동정하던 감시인들을 '개'라고 칭하며, 어머니를 벌써 몇 년째 찾아보지도 않았고, 직장으로 찾아온 사촌 여동생도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송을 위해 뇌물로 매수를 하려는 의도까지 갖고 있다.
하지만 의식 속의 행동과는 달리 무의식적인 반응에서는 죄를 부인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는 아는 검사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기피하고, 검사와의 요트놀이도 거절하며, 마지막 장에서 처형관들이 방문할 때는 미리 예고도 없었는데도 기다린 듯이 검은 예복을 입고 대기하는 형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일기에서 『실종자』의 카를 로스만을 '무죄인'이라고 표현한 데 비해 요제프 K.는 '유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펠리체와의 약혼 직후 쓰여졌고 카프카가 파혼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요제프 K.가 31회 생일 전날 파혼을 결심하며 파혼이 이루어진 베를린의 호텔방을 '법정'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요컨대 순수세계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포기했지만 이것은 동시에 외부세계에 대한, 즉 소속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죄의식을 낳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자신이 언급하는 요제프 K.의 '유죄', 작품 내에서 거론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죄가 자아의 분열에 의한 내면의 반영에 기인한다고 할 때, 관심은 그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법정의 정체로 향하게 된다. 우선 법정은 정체가 불투명하고, 확인되는 면모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K.를 감시하는 감시인들은 그의 밥을 먹어치우고 내의를 훔쳤다는 이유로 태형을 당하며, K.가 확인한 법전은 포르노 사진첩으로 밝혀진다. 또 피고인 K.자신의 집무실보다 훨씬 초라한 판사의 방은 어두컴컴한 지붕 밑의 다락방에 위치해 있고, 변호사의 방은 이보다 더 비참해서 바닥이 구멍으로 사람의 발이 빠지면 아래층의 천정으로 그 발이 보일 정도이다. 카프카가 이 작품을 쓴 후에 친구들 앞에서 1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카프카 자신도 너무 웃어서 낭독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브로트의 증언을 보면 『소송』에서의 희극성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이 희극성이 웃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카프카에게서의 희극성은 '검은 유머'라는 지적대로 갑자기 웃음을 정지시키고 싸늘한 침묵이나 잔인한 공포를 유발하는데, 법정세계 역시 우스꽝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시종 숨막힐 정도로 피고를 조여 오는 잔인한 본질을 노출한다. 피고에게 재판시기나 장소도 알려 주지 않는 불친절 외에도 현기증을 안겨 주며, 결정적인 권한이 있는 최고 재판소는 일체의 접근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이런 법정에서 피고가 느끼는 것은 '배멀리'와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출구부재의 확인이다.
그러므로 '검은 유머'는 웃음이 아니라 웃음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변신 Die Verwandlung』에서 지배인이 도망치는 꼴은 우습고 권력층이라는 점에서 후련하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레고르와 그의 수입에 의존하는 가족의 미래가 암담해지는 것처럼 법정의 특성 하나하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끔찍한 속성을 보여준다. "카프카에서의 유머는 웃어야 할 지 진지하게 있어야 할 지 모르게 한다"는 엠리히(Wihelm Emrich)의 주장대로 법정의 모습은 끔찍하다는 점에서 희극성이 부인된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외관에서 비극성이 부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K.를 체포하는 법정당국의 정체는 불투명한 가운데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이며 여러가지 면에서 죄를 다룰 자격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외관을 지니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권력과 잔인함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접근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K.가 아무리 시도를 해봐도 대화는 커뮤티케이션이 아니라 그것의 단절에 기여할 뿐이다.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뿐만 아니라 K.자신의 내면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을 체포한 당국과 투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국에 도움을 받으려고 함으로써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의식적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죄인처럼 행동할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정황에서 그의 윤리상의 죄가 드러나는 사실을 볼 때, 정상을 벗어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법정 역시 실제의 법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사회 속에 투영된, 자신의 생존방식을 보는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이 지닌 냉혹함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에서도 불기피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윤리적 죄는 K.의 퍼스낼리티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카프카는 아포리즘에서 인간의 으뜸가는 죄를 '성급함'과 '태만'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K.가 법정과 투쟁하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는 부단히 성급한 태도와 태만한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정을 자기 추측대로 찾아가는 것이나 변호사와 해약, 소송이 진행되는데도 여자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 은행장 대리와의 관계, 상인 블로크를 대하는 태도, 모친에 대한 냉담 등 그의 모든 관행은 카프카 자신이 말한 으뜸가는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사회에 보여준 성급함은 바로 그 사회에 의해 모든 재판절차가 무시된 채 그를 처형하는 성급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본 작품의 해석을 둘러싼 핵심은 여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그는 시종일관 여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데, 카프카의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진정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충동적이다. 물론 창녀의 속성을 지닌 여자들 쪽에서 유혹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성애는 공격적이며 독신자답게 결혼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자들로부터 성적충동을 받고 벌이는 성애 외에 그가 여자들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소송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것들이다. 뷔르스터너양이나 레니와의 관계도 그녀들이 소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설 때는 주저 없이 버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K.의 성애는 애정과는 유리된 탈인간화의 것이고, 여자를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 물화시키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법정사환의 부인을 빼앗겼을 때는 법정과의 투쟁에서 맞이한 '최초의 명백한 패배'로 인식하는 데서 이런 자취는 발견된다.
K.의 성애에는 육체의 소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엠리히는 뷔르스트너양의 '식도'에 키스한 K.가 식도를 잡힌 채 칼을 맞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다음은 K.가 1장에서 뷔르스트너양과 연출하는 성애장면과 10장에서 처형되는 장면이다.
"알았어요, 가요"하고 K.는 말하더니 뒤따라가서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그녀의 입과 얼굴에다 마구 키스를 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발견한 샘물에 혀를 빼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식도 부위의 목에다 키스를 하고 오랫동안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손이 K.의 식도를 누르는 동안 다른 사람은 그의 가슴 깊숙이 칼을 꽂고 두 번 회전시켰다.
식도에 키스를 한 K.의 식도가 집행관의 손에 눌리는 제스쳐를 통해 이미 K.의 성애는 죽음과 소송에서의 파멸을 예고해 준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성애와 죽음의 혼합은 삶을 향유하려는 성욕과 이 외부적 삶의 형태에 대한 반대성향, 즉 죽음의 욕망, 두 방향에 대한 분리된 자아의 흔들림이라고 여겨진다. 환언하면 이것은 에로스로 표현되는 외부사회 지향의 자아와 타나토스를 지향하는 순수세계의 자아로 분열된 나머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두 방향을 동시에 추구하다 좌절하는 카프카적 양가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K.는 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양방향을 쫓다 하나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뷔르스트너양과 만나고 온 뒤 '만족했지만 좀더 만족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법정사환의 부인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그녀를 빼앗기로 만다. 삶과 죽음의 양방향의 자아를 쫓는 K.는 죽음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다. 우선 체포된 직후 갑자기 그는 자살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며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는 집행관들을 끌다시피 하고, 심지어 처형 직전에도 자살의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생과 사의 앰비벨런스를 가장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K.는 자기 머리 위에서 칼이 오고갈 때 그것을 빼앗아 들고 자기 가슴을 찔러 버리는 것이 자기 의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목을 돌리며 주위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끼는 자살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의식 속의 의도는 발동되지 못하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살이 의무라는 의식 속의 자각은 죽음 직전까지 '자유스럽게 목을 돌려 주위를 살피는' 무의식적인 삶의 애착으로 분열되어 나타난다. 죽음 역시 동경의 대상이지만 성취되지는 못한다. 죽음은 K.의 내면세계에서 소망되지만 동시에 처형될 때까지 자아에 의해 끝까지 수용되지 않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다.
소송의 전과정을 통해 죽음과 더 친숙한 태도를 취하지만, 죽음으로써 출구부재의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은 보여주지 못한다. 소송에서 K.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유일한 길은 화가 티토렐리의 제안에서 감지된다. 그는 소송문제를 조언해 주는데 있어 가장 사실적인 논리를 지니고 있어 열쇠가 되는 핵심적 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가 K.에게 열거하는 방법은 진정한 무죄선고, 형식상의 무죄선고, 그리고 지연작전 세 가지가 있는데, 진정한 무죄선고는 일단 배제된다. 이것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최고재판소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형식상의 무죄선고는 별다른 수고가 필요없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시적인 무죄선고일 뿐이다. 즉 무죄가 되면 다시 체포되고, 다시 무죄가 되고 또 체포되고 하는 식으로 끝없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끝없이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지프스의 형상을 닮고 고달프고 긴장된 방법이지만 악순환이 계속되는 동안 삶은 이어지는 결정적 장점이 있다. 바로 이것이 요제프 K.에게 주어진 유일한 출구하고 보여진다.
지연작전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늘 긴장 속에서 피곤하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앞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유죄선고를 막아주지만 동시에 진정한 무죄선고도 저지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은행지배인으로서의 K.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경쟁적인 생존형태로서 자유를 포기한 종속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K.는 티톨렐리가 제시한 방법을 진정한 무죄선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죄선고가 불가능하듯이, 이런 형태 외의 존재방식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긴장되고 피곤하며 종속적이지만 삶을 지탱해 주는 가능한 생존방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불가능한 방법을 고집하다 좌절한다는 점에서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소송』의 전체적인 구조는 고유한 '존재'를 지향하는 순수자아와 '소속'을 지향하는 사회적 존재의 갈등을 다루는 카프카의 문학적 명제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법을 필요로 하면서 그 법 때문에 파멸하는 『법 앞에서 』의 시골사람 같이 요제프 K.는 소송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 살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그 세계에 의해 처형된다. 다시말해 그는 이 세계와 더불어 생존할 수도, 이 세계를 떠나서 생존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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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카프카(1883-1924)의 미완성 장편소설.
1912년작. 카프카는 자신의 일기에 이 작품의 제목을 『실종자』로 하였으나 막스 브로트에 의해 『아메리카』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소송』, 『성』과 함께 고독의 3부작으로 불린다. 또한 근원적인 우화의 변형이 이 작품의 중심이다. 한 인간이 가부장적인 질서를 어기면 권위에 의하여 죽음 내지는 추방의 형벌이 주어짐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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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미완성 유작 『실종자』에 나타난 추방과 실종의 의미 ― 『디 에센셜 프란츠 카프카』
『성』, 『소송』과 함께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 장편 소설 중 하나인 『실종자』는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집필되어, 1927년 카프카의 친구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사후에 출간된 장편 소설이다. 초판본에서 이 소설은 막스 브로트에 의해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카프카 생전인 1913년에 이미 『실종자』의 제1장인「화부」가 출간된 바 있었다.
<줄거리>
열일곱 살난 카를 로스만은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가 아이를 낳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님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진다. 뉴욕항에 도착한 카를은 배에서 상원의원인 부유한 외삼촌을 만나게 되고, 카를은 이제 그의 도움으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카를이 외삼촌의 사업 친구의 별장 방문 초대를 임의로 수락하자 그는 곧 조카를 추방한다. 오갈 데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 길거리에 버려진 카를은 두 명의 부랑자를 만나게 된다. 그를 받아들인 두 사람은 계속 카를에게 해를 끼친다. 아일랜드인 때문에 그는 억압적인 근무 조건의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런 다음 그는 두 부랑자가 뚱보 여가수 브루넬다와 같이 살아가는 아파트에서 하인으로 고용되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착취당한다.
이 지점에서 줄거리가 끊어진다. 카프카 비평본은 몇 개의 미완성 단편을 나열하는데, 그중 두 번째는 잘 알려진 ‘오클라호마 자연극장’이다. 첫 번째 단편에서 카를은 브루넬다를 일종의 휠체어에 태우고 마을의 거리를 지나 ‘제25호 사업장’으로 향한다. 마지막 장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장면에서 카를은 오클라호마 극장의 벽보를 발견한다. 그 극장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한다. 꼼꼼한 면접 끝에 카를은 극장 모집원에 의해 ‘기능직 노동자’로 채용된다. 텍스트의 이 부분은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긴 기차 여행을 하면서 카를이 처음으로 ‘미국의 광대함을 깨닫는’ 장면으로 끝난다.
카를 로스만의 운명은 절망일까 구원일까
카프카 연구에서 오클라호마 극장에 대한 평가는 주인공의 구원과 치명적인 종말 사이를 오간다. 막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는 카를이 극장에 채용되고 양친과 만나 해피엔드로 끝내려 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극장의 유토피아적 성격은 미심쩍다. 「화부」의 자매 격인 「선고」와 『변신』에서는 아버지에 의해 극형이 선고되는 반면, 『실종자』에서는 극형이 유보된 채 추방 상태가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다가 구원되고, 그런 다음 또다시 새로운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누구나 환영한다는 모집 벽보 내용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환상이나 꿈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오클라호마 극장으로 가는 기차 여행 중 시계(視界)에서 사라져 실종된다.
오클라호마 자연 극장은 카프카가 그려 본 꿈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다. 카를은 누구나 지원만 하면 채용되는 곳에 소속되기 위해 이틀 밤낮 동안 기차 여행을 한다.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조차 분명치 않다. 천국을 향하든 지옥을 향하든 그것은 소설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설 결말에 대한 낙관론이나 비관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15년 9월 30일 자 카프카의 일기에 따르면 카를 로스만은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와 비슷한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로스만과 K,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는 결국 둘 다 똑같이 처벌받아 죽임을 당한다. 죄 없는 자는 보다 손쉽게, 때려눕혀지기보다는 옆으로 밀쳐지는 식으로.” 카프카적 의미에서는 현세에서 죄가 있든 없든 누구나 벌 받게 되고 처벌받은 상태에 있다.
카프카는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실종자』 역시 해피엔드로 끝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며, 제목에서 보듯이, 미국 산업 사회에서 실종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카를 로스만이 극장 채용 이전에 이미 결정적으로 파멸했으며, 이미 실종된 카를이 다시 시야에 나타난다면 그것을 카를의 부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거의 무한대적인’ 방대한 극장 세계는 피안의 세계이며 초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카를 로스만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 가지 입장은 유능한 이민자의 성공적인 경력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인 ‘아메리칸 드림’과는 달리 카프카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은 선의와 순진한 소년의 충격적인 사회적 탈락을 보여 준다. 작품 전체에는 낙원에서 죄로 인해 추방되고, 그 이후 시련을 겪게 되는 성서 모티프가 관철되고 있다. 정의감이 강한 실향민이자 실종자인 카를은 무자비한 권위와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비인격적 세계인 타국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 천사와 악마가 등장하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오클라호마 세계 극장의 아이디어는 모든 사람에게 운명적인 죽음의 영역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소설은 아메리칸드림에서 근면과 미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개인이 사회에서 상승할 수 있음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실종자』는 일종의 성장 소설, 변형된 아메리칸 드림
『실종자』는 주인공이 점진적인 발전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전통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일종의 성장 내지는 교양 소설로 볼 수 있다. 성장 소설은 내면의 갈등이 시작되고 그것이 내부의 투쟁을 겪으며 자기 실현을 추구해 나가던 주인공이 마침내 갈등의 해소, 조화와 화해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출생, 성장, 우정, 사랑, 발전, 화해 등을 기본 모티프로 하는 전통적 성장 소설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전개에서는 비합리적 상황에서 좌절하는 주인공과 여러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카프카는 성장 소설의 규범과 전통을 무시하고 ‘투쟁과 몰락’이라는 단순한 과정으로 압축시킨다. 하녀를 임신시킨 죄로 자유를 박탈당한 카를의 성장 행로는 빌헬름 마이스터와는 달리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 대신 ‘검’을 들고 있으며, 주위에는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는 데서 이미 상징적으로 암시된다. 검을 든 여신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가상이며, 검과 바람은 가차 없는 처벌과 관대한 환영을 동시에 보여 준다. 일찍이 괴테를 비롯하여 당시 유럽인에게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던 아메리카는 결국 부정적인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기 마련이라는 괴테의 말과 달리 비효율이 죄가 되는 20세기의 미국 사회에서 카를의 선의와 양심, 정의는 노력과 방황에도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성장으로 보답받지 못한다.
유럽 이민자들은 다인종 다국적 미국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프랑스계 들라마르슈, 아일랜드계 로빈슨, 중유럽계의 미첼바흐와 테레제 등 주요 등장인물들은 『실종자』가 20세기 초 유럽계 이민 모델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카를 로스만은 부모에 의해 구대륙에서 쫓겨난 일종의 징벌 이민자다. 소설에서 특히 동유럽 유대인 이주민들의 힘든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실제로 카프카의 사촌들 오토, 프란츠, 에밀 카프카는 미국으로 이민 가 살았고, 카프카는 이들과 편지를 교환하곤 했다. 이는 『실종자』를 구상하는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처음 미국 뉴욕에 도착한 카를 로스만의 후견인으로 설정된 인물도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외삼촌이다. 로스만은 곧 그로부터도 다시금 쫓겨나면서, 기묘한 인물 군상들 사이에서 시련을 겪게 된다. 아들과 아버지의 세계 사이의 갈등에서 패자는 항상 아들이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카를 로스만은 “현대의 시시포스로, 소속의 바위를 영원히 헛되이 굴리고 있다.” 그는 그냥 도망친 생존자가 아니라 카프카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실종자다. 그리고 실종된 사람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망으로 선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종 사망자다.
『실종자』에는 엘리베이터, 고층 건물 등과 같은 많은 근대의 상징들이 등장한다. 1908년에는 15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이 뉴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고층 건물의 건설은 특수강의 개발에 의한 엘리베이터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 『실종자』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고층 건물들은 일종의 파놉티콘 같은 것으로 그려진다. 괴테의『빌헬름 마이스터』에서 탑 사회의 파놉티콘 비전이 20세기에 현실로 나타나는 곳은 역설적으로 미국이다. 그러한 장소 중 하나가 카를이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한 옥시덴털 호텔이다. 카를은 그곳에서 범죄 의심까지 받으며 쫓겨난다. 그리고 비서 테레제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이민자들의 불안정한 삶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공사장에서 추락해 죽음을 맞는다. 또한 좁은 방 하나에 여러 세대가 부모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우글댄다고 하는 뉴욕 동부의 슬럼가 이야기는 화려한 초고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뉴욕이 유토피아가 아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선취한 디스토피아의 한 버전임을 드러낸다.
카프카가 볼 때 산업사회 속의 현대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다 결국 고향을 잃어버리는 존재다. 카프카는 구스타프 야누흐와의 대화에서 카를의 종말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군중은 서둘러 달리며 시간 속을 돌진한다? 어디로? 그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행군하면 할수록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고 있다고 믿지만 헛되어 힘을 소모할 뿐이다. 그때 그들은 제자리에서 행군하면서 공허 속으로 추락할 뿐, 그것이 전부다. 인간은 여기서 그의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카를 역시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든다. 카를이 이틀 밤낮 기차 여행을 하면서 어둡고 좁은 찢어진 듯한 계곡을 끝없이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을 안고 떠나는 내세 여행처럼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그러기에 독자에게 더욱 깊은 비극적인 여운을 남긴다.
1927년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나온 『실종자』 초판 이미지. 당시 제목은 막스 브로트가 붙인 ‘아메리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