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의 벽면에 걸려 있는 몇 가지의 조리기구 들 중에 이즈음 부쩍 나의 눈길을 잡는 물건이 하나 있다. 쓰임새가 있을 때마다 즐거움을 더해 오는 박 바가지이다.
길이가 얼추 내 팔 길이의 반 정도 되는 조롱박인데, 호리병 모양의 몸체를 세워 들고서 속을 마주하면 오른쪽으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상이다. 오른편 공간을 안아 품는 자세로 부드럽게 굽어져 있어, 왼쪽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에 딱 알맞으니 이름을 왼바가지라 불러도 좋으리라.
얼마 전에 시골에 있는 친정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시외버스 정거장에서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차표를 끊게 된 바람에 어중간하게 자투리 시간이 생겨났다. 바람을 쐴 겸 남천내 (경남 언양 지방에 흐르는 하천)의 방둑으로 나갔다. 어린 시절 멱을 감으며 놀던 냇가를 잠시나마 혼자서 조용히 걸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예상 밖으로 장날이라 그곳에까지 난전이 펼쳐져 북적거리고 있었다. 할 수없이 오래간만에 고향의 오일 장 구경이나 해야겠다며 산책삼아 슬슬 돌아보던 중에 보자기 하나를 깔고서 난전을 차려 놓은 박 바가지 전 앞에서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노오랗게 맑은 빛깔로 잘 건조된 바가지들이 눈에 띄자마자 우선 반가움이 앞섰다. 머언 지난날, 동네 초가지붕 집집마다 덩굴을 타고 올라가 초저녁 어둠을 물리치며 하얗게 피어나던 박꽃이 그립게 떠올랐다. 크고 작은 바가지들 속에는 조롱박도 몇 개 섞여 있어 갸우뚱 고개를 내밀어 보이는 양이 정겨웠다.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친정 부모님을 찾아뵙고 나오며 어둡고 쓸쓸해지던 마음이 향긋한 속내가 묻어나는 박 바가지를 들고 만지며 고르면서 잠시나마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 친구를 장터에서 우연하게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날 나는 운 좋게도 왼손잡이인 내가 사용하기에 꼭 맞춤형같이 굽어진 왼쪽 조롱박 하나를 발견하여 즐겁게 값을 치르고 고이 싸서 안고 온 것이다.
여리고 부드러웠던 속살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향긋하게, 박 바가지는 말라서 굳어 있지만 죽은 몸이 아닌 것 같다. 바가지의 자루를 잡고서 안쪽 면을 잔찬히 들여다보면 가느다란 관들이 온몸에 혈맥처럼 퍼져 있다. 이 작은 관들을 통하여 쉬지 않고 물과 양분을 받아들이며, 어린 박은 어떤 꿈을 안고서 이렇게 터질듯 둥글게 몸피를 키워낸 것일까? 어둠을 밝히려 피어나던 박꽃의 간절한 염원을 지니었기에 찬 이슬 맞을 때까지 별빛을 담아 품고서 영글어 왔는지 모를 일이다. 작아 보이지만 넉넉하며, 여려 보이지만 강인한 기운이 배어 있어 박 바가지는 속에 담겨오는 모든 것들에게 제 숨결로써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 같다.
박 바가지가 지닌 자연의 숨결을 오래 유지케 하고 싶어 나는 이 조롱박을 사용할 때면 각별히 마음을 쓰곤 한다. 자극적이거나 짙은 색깔의 음식을 담는 일은 피하고 주로 찻물을 끓일 때나, 죽이나 삶은 누룽지, 숭늉 등을 그릇에 퍼 담을 때 애용하여 한층 더 담백하고 구수해진 듯한 맛을 즐긴다. 이 조롱박 바가지를 가까이 두게 되면서 나의 왼쪽 팔이 잠깐씩이지만 제대로 기운을 차리는 것 같다. 금속성 재질이든 플라스틱으로 된 것이든 주방 용품들이 거의 모두 오른 손 중심으로 만들어져 평소에 남모르게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다가, 정말 우연히 좋은 때를 만난 것 같다. 왼손바닥에 알맞은 각도로 잡혀오는 바가지 자루의 감촉이 편안하이 내용물을 떠서 붓거나 퍼 담을 때에 흘리거나 새어 나오는 일이 없으니 미처 예상 못 했던 즐거움이다.
모처럼 손에 맞는 자연산 왼바가지를 만나게 되어 타고난 그대로 마음 편하게 왼손을 쓸 수 있는 자유로움을 짬짬이 누리면서,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속에 숨죽이며 갇혀 있는 불안감들과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이 적지 않음을 새삼 발견하여 놀라고 있다. 어릴 적엔 숟가락질이나 연필 잡기에, 성인이 되어서는 의・식・주와 관련되는 가사 작업들에 의도적으로 오른손을 길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여태 가위나 칼질은 왼 손이어야만 해 낼 수가 있고, 발톱을 깎을 때에는 양손을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쪽 것을 깎아 낼 수 있을 뿐이다. 양식을 먹을 때나 바느질을 할 때 양쪽 손을 다 쓸 수 있어 편리하기도 하지만, 버스를 탈 때는 불편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몸이 갖고 있는 방향감각과 출입문이나 버스 내부 구조물과의 방향이 맞지 않으니, 올라타며 요금을 내거나 교통 카드를 그을 때는 물론 내릴 때에도 균형을 잡기 힘든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만원 버스가 급정거라도 할라치면 넘어지지 않으려 오른손잡이들보다 몇 배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족이나 손님들 앞에서 과일을 깎아내어야 할 때는 왼손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직도 습관적으로 남아 있어 그나마 능숙하지 못한 그 솜씨마저도 제대로 발휘를 못 한다. 어쩌다가 남의 집에 손님이 되어 대접 받을 때면, 날렵하게 세련된 솜씨로 사과나 배, 감들을 깎아서 담아내는 안주인의 손놀림을 보면서 속으로 부러워해 왔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불편함에 무디어진 듯 그냥 저냥 견뎌내는 나의 왼손을 위해 생겨난 왼쪽 바가지일까? 이 소박한 조롱박 하나가 건네어 오는 친근함으로 인해 나는 이것을 잡고 쓸 때마다 그 용량의 갑절이 훨씬 넘을 만큼 많이 위안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나의 왼손가락 끝을 통해 바가지 안으로 생명의 숨결이 가 닿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해 본다. 아무튼 전에 보다 왼손의 놀림이 한결 가볍고 즐거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타고난 그대로의 내 왼손을 살갑게 받아주는 왼바가지 덕분에 이처럼 놓칠 수 없는 기쁨을 알아차리어 누리게 되었으니, 어설퍼 보이지만 왼손잡이인 모습 그대로 나도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왼바가지가 되어주고 싶다. 과잉된 불안감과 수치심들을 말끔히 털어내어 버리고 본래의 순수한 마음일 때, 눈에 띄지 않은 곳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그 누군가를 찾아 왼바가지처럼,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이며 따스운 손길을 전할 수 있으리라.
잃어버린 반쪽을 대하듯 나를 향해 온 속을 내보이며 왼바가지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자신의 모습으로 나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듯하다. “먼저, 너 자신을 알아 찾아야 한다”고 간곡히 타이르는 것만 같다.
(김정옥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