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의 관공서에서 일하는 한국인이다. (재일한국인은 아니고, 그냥 우연히 취직이 이곳에서 된 관계로.) `월드컵한일공동개최`를 즈음하여 일본 각지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코리안 붐`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울러 요즘들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일본인이 증가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한국과 일본의 긍적적-발전적 관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기대는 5월 31일 일본에서 개막식 행사 보도를 지켜보면서, 완전히 무너져갔다. 물론 보통의 일본인들의 의식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론을 앞장서는 각종 매스컴의 태도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 `공동개최`? , `고독개최`!
한국에서는 KBS, MBC, SBS의 지상파 방송3사가 모두 `지구촌의 대축제` 월드컵 개막식의 상황을 면밀히 보도했다는 것으로 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동안 얼마나 우여곡절을 거쳐 맞이한 역사적인 날이었던가! 단독개최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공동개최`라는 형태로 일본과 공유할 수 있는 역사적인 개막식이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일본의 매스컴은 좀 달랐나 보다. 후지TV, 일본TV, 아시히TV 등 일본의 주요 민방은 개막전 중계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채널을 돌리면서 아연실색했는데, 다른 민방에서는 월드컵과 전혀 상관없는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 경기를 틀어대는가 하면, 유명연예인들을 동원한 토크쇼도 눈에 띄었다. 아울러, 성형수술을 테마로 한 인기 쇼프로도 월드컵 개막전과 동일 시간대.
일본의 각 민방은 `역사적인 21세기 지구촌 첫 축제의 개막식`을 포기하고, 자기 갈 길 걸었다.
그나마 체면을 차려 준 곳이라면 공영방송인 NHK(일본방송협회)였다. NHK가 가지고 있는 5개채널(위성방송 포함) 중 2채널을 할애해, 고맙게도(?) 월드컵 개막전을 보도해 주었다. (물론, 그 시간대에도
다른 채널에서는 미국의 메이저 리그가 방송되고는 있었다.)
한국에서의 개막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본도 절반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월드컵의 첫 서막에 각종 매스컴이 그렇게도 태연하다 못해 무성의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중계권료와 광고수익 등을 고려하여 많은 민방이 중계를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전혀 무관계의 나라도 아닌, 공동개최국의 개막식에 무관심할 수 있는 그 정신상태가, 내 정신상태로는 이해가 안되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공동개최`가 아니라 한국만의 `고독한 개최`였던 것이다.
2. NHK, `재 뿌리기 작전?`
그나마 유일한 지상파 보도 채널이었던 NHK의 만행도 만만치 않다.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방송을 안한 민방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못하진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개막식 보도라면, 연합으로 제작하여 전 세계로 송출하는 전파를 그대로 받아 내보내는 것이 상식이다. 즉, 한국인이 보는 영상과 다른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이 보는 영상이 같단 소리다. 그것이야 말로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도 가능한 `세계적 공유`가 아닌가?
그러나, NHK는 달랐다. 대규모의 제작진과 게스트를 동원하여 개막식 경기장에 등장했다. 물론 많은 제작진이 내한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사람들의 진심이 궁금해질 정도의 비상식적인 보도를 했다.
일단, 귀빈룸이라고 불리는 유리창으로 된 개별실을 하나로 전세내고 그곳에 카메라를 두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데려온 최고의 남자연예인 키무라 타쿠야(SMAP 멤버)와, 98년 일본대표팀 감독이었던 오카다를 축구전무가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아나운서 2명과 함께 그들 4명은 잡담으로 일관했다.
키무라 타쿠야 :`이런 역사적인 개막식에 직접 참가할 수 있어 너무 기쁩니다.`
오카다 : `98년도에는 경기장에서 긴장하면서 스탭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해설자적 입장으로 와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등등... 이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은 내용들이다. 굳이 개막식에 방 하나를 전세내서 이 게스트들 얼굴을 잡아가면서 보도할 사안이 아니다. 이런 게스트들과 아나운서의 잡담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다보니, 정작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퍼포먼스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이래저래 잡담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가 잠깐 스쳐가듯 그라운드 비춰주고, 다시 토크쇼. 쓸데 없이 귀빈룸 유리창 밖에서 자기네들 취재하는 모습을 멀리서 잡아 보여주면서 `우리 여기 있어요. 잘 보이나요?` 이러면서 다들 손 흔들고 있고.
여기서 마치려나 했더니, 이번에 여자 아나운서가 방 밖으로 나가더니, 기자석 쪽에 있던 프랑스 전 대표 프란 선수를 발견하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참 퍼포먼스로 회장은 무드가 올라가 있는 상태인데, 그 때 자기네 카메라 들고 가서 프란한테 인터뷰를 시도하려는 저의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내용이 있는 인터뷰도 아니고, `여기 와서 보니 어떤 느낌이세요?`, `이번 프랑스도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이런 하나마나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작 장본인인 프란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말이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일본의 스튜디오로 연결하더니, 난데 없이 헬리콥터를 띄워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 경기장의 야경을 비춰주는 것이었다. `바로 이곳이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 경기장입니다.` 등등...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개막식행사 한참 무르익을 판에 난데 없이 헬리콥터를 띄워 개막식과 상관도 없는 요코하마 경기장을 보여준단 말인가?!
그리고 나중에는 98년 프랑스 대표의 전 감독을 귀빈룸까지 데려와서 통역까지 붙여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이번 프랑스의 전력, 가능성.. 월드컵에 대한 추억` 등등. 물론 이런 인터뷰 도중에 비춰지는 것은 게스트들과 프랑스 전 감독의 얼굴 뿐. 경기장에서는 춤추고 노래하고 화려한 퍼포먼스가 한창일텐데, `니들 맘대로 짖어라.. 우린 우리끼리 논다.` 이런 식으로 개막식 중계를 하고 있었건 것이다.
이쯤 되니 유일하게 지상파에서 개회식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NHK를 보고 있던 나는, 시청을 포기. 다른 민방의 쇼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개막식 중계라고 할 수 없었다.
마치 `한국의 개막식에 재라도 뿌리자`라는 심보로 보였다. 특히, 이러한 만행이 공영방송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일본측에서는 이번 개막식에 일본색이 하나도 없어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매스컴의 이러한 불손한 태도를 봐서, 과연 일본이 그런 것에 트집을 잡을 자격이나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일본색이 없어서, 그에 대한 반감으로 매스컴이 재뿌리기 작전으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개막식은 한국에서 했고, 그 준비의 우선권은 한국에 있지 않는가? 어디 두고보자... 요코하마 결승전에서는 `한국색`이 나오는지.. (물론 한국이 결승전에 올라가서 한국팀이 나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
그러나, 나는 일본인을 미워할 생각은 없다. 매스컴이 미웠을 뿐이다. 개막식 중계를 지켜본 일본인 중에 적지 않은 수가 NHK에 항의 전화 및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왜 제대로 개막식을 안보여주느냐? 제대로 퍼포먼스를 볼 수가 없었다.`라고..
이러한 여론에 밀려 황급히 NHK는 다음 날은 6월 1일 개막식 퍼포먼스를 30분 하이라이트로 재편성해서 `상식적으로` 방송했다.
아울러, 한국전 당시에 일부 매스컴 이외에는 일반인들은 많은 수가 한국을 응원해 주었고, 골을 넣었을 때는 함께 기뻐해 주었다. (참고로 동경의 어느 공원의 스크린에서 일본인과 함께 한국전을 지켜본 필자.)
다만, 난 개막식 중계에서 보여준 일본 매스컴의 만행에 분노할 뿐이다. (흠... 그런데 10일의 한국과 미국전은 일본 지상파의 어느 곳에서도 중계예정이 없다고 한다. 흠... 대체 어쩌면 좋지.... -.-)
아무튼 기분같아선 우리도 결승전 중계에 복수를 하고 싶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옹졸한 일본 매스컴 관계자를 용서할 수 밖에. 왜? 우리는 그 놈들하고 질이 다른 `우수한`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