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갈현동 314번지에 위치한 수국사는 조선왕조의 유서 깊은 원찰(願刹)로 유명하다. 조선의 제7대왕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 그는 나이가 서른여덟에 즉위한 탓에 후궁을 많이 거느리지 않았고, 따라서 후사도 많지 않았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에게서 2남 1녀, 근빈 박씨에게서 2남 등 두 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다.
‘폭군 세조’ 죽은 아들 위해 사찰 세웠다
요절한 아들 덕종 위해 ‘정인사’ 창건
덕종부인 인수대비 110칸 규모로 정비
조선말 월초스님 퇴락한 사찰 재 중창
<사진> 조선시대 세조임금이 일찍 죽은 아들 덕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수국사. 현재는 옛날 모습 대신 황금법당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다.
세조의 보위를 이를 장남인 의경세자 (懿敬世子, 1438∼1457, 후에 德宗으로 추존)는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成宗)의 아버지다. 자는 원명(原明)이고, 초명은 숭(崇), 이름은 장(暲)이다. 1445년(세종 27년)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수양대군)는 왕위에 오르자 도원군을 세자에 책봉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도원군은 틀림없이 성군이 될 것이요.” 세조는 세자에 책봉된 뒤 왕실을 보좌하고 있던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을 세자비로 받아들여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자을산군(者乙山君, 후의 성종)을 낳았다. 그녀는 후에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던 도원군의 얼굴은 늘 좋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조카인 단종을 죽인 장본인이야. 이 업보를 어찌해야 하나. 내가 임금이 되어도 주변에서는 수군거릴 거야.”
심약한 도원군은 악몽을 자주 꾸곤 했다. 그러면 꼭 큰어머니인 현덕왕후(문종의 아내로 세조의 형수이자 단종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괴롭혔다. “네 아버지는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야. 그러니 너도 왕위에 오르는 것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되는 거야. 으아아아아아…”
나날이 쇠약해지던 도원군은 가위에 눌리는 꿈을 자주 꾸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20세를 겨우 채우고 죽고 말았다.
“어이하여 아비를 두고 네가 먼저 세상을 떠난단 말이냐. 흑흑흑…”
세조는 크게 상심했다. 몇 일을 어전회의에 나오지도 않고 출입을 삼가다 모습을 드러냈는데 얼굴에는 증오심이 가득했다. 대상은 도원군의 꿈에 자주 나타난 현덕왕후였다.
“도원군이 죽은 것은 단종의 어미인 현덕왕후의 소행이다. 이미 죽은 자이지만 용서할 수 없다.” 성격이 불같았던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리고는 세조 4년(1459) 내수사(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에 명했다.
“도원군의 왕생을 위해 그가 묻혀 있는 인근에 절을 짓도록 해라. 설계는 설준선사에게 맡겨라.” 왕명은 속히 시행됐다. 설준스님은 사찰의 모든 전각을 손수 계획해 고양시 동쪽 봉현(현재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정인사(正因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인 도원군을 덕종(德宗)으로 추존했다. 서오릉 내에 위치한 무덤도 경릉(敬陵)으로 높여 불렀다. “내 아버지는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나를 낳아준 분이 아니더냐. 그러니 자식된 도리로 아비의 덕을 기려 이렇게 추존하는 것이니 경들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짐의 명을 받들도록 하라.”
삽화=김승연 화박
덕종의 부인인 인수대비 한씨도 남편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찰에 대해 관심이 각별했다.
“선대임금을 기리는 사찰이 부실하기 짝이 없소. 너무 급하게 지어 재목도 좋지 못하고 쓰임새도 정밀하지 못하니 판내시부 이효지에게 중창할 것을 명해 주세요.”
그리하여 1471년 2월부터 중창불사는 시작돼 이듬해 사월초파일에 크게 낙성법회를 여니 절 규모는 총 110칸에 달했다. 그 아름다움이 봉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정인사는 당시 고승으로 추앙받던 신현스님이 주석하며 왕실의 원찰로 더욱 발전했다. 경종1년(1721)에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신 명릉의 사찰 명칭을 이전해 수국사(守國寺)라고 불리며 유지돼 왔다. 이후 시대를 지나오면서 불교를 배척한 조선왕조에 의해 퇴락의 길을 걸었고 잦은 전란으로 사찰이 퇴락해 버렸다.
<사진> 수국사비.
이후 세월이 흘러 1897년 중창의 기회가 온다. 당시 북한산성 총섭으로 지역불교를 관장하고 있던 월초스님은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리다가 한 벌의 불기(佛器)도 없이 구석에 방치되다시피한 불상을 발견하고 연유를 물었다.
“아니, 저 부처님은 왜 공양도 받지 않고 저런 자리에 놓여 있습니까.”
“예, 수국사에서 모셔온 부처님인데요. 워낙 절이 퇴락해 비바람이 닥쳐 부득이 우리 절에 모셔왔는데 마땅히 모실 장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초와 향공양을 한번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야기를 들은 월초스님은 그 자리에서 발원했다.
“어디에 계시든 부처님을 모셨으면 공양을 잘 올려야 하는 법이거늘. 내 마땅히 저 부처님을 제자리로 모셔 향과 차 공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리라…” 월초스님의 발원이 현실화될 기회가 왔다. 1900년 고종임금은 태자인 아들 척(, 훗날 순종)이 깊은 병을 앓자 월초스님에게 부탁해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서 100일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래. 이번 기회는 부처님이 내게 진관사 불사를 하라고 주신 거야.” 월초스님은 지극정성으로 기도에 임했다. 기도 80일되던 날 태자의 꿈에 한 노스님이 나타났다.
“어디가 아프시오. 내가 태자의 병을 치료해 드리리다.”
태자는 자신의 몸에 금침을 놓자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추상전하. 지난밤 꿈에 노승이 나타나 제게 아픈 곳을 물은 뒤 치료를 해 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픈 곳이 말끔히 치료됐사옵니다.” 고종임금은 월초스님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며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바라는 바를 물었다. “예, 소납은 산에서 사는 중이라 아무 바라는 바가 없사옵니다. 다만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을 잘 봉양하는 것이 제 업인 바 일전에 진관사에 갔다가 방치돼 있는 부처님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더구나 그 부처님은 과거 조선 왕실의 안위를 지켜 주었던 수국사에서 모셔온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선대 임금들과 왕실의 어른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해 준 부처님을 모시는 차원에서 수국사를 중창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종은 월초스님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렇소. 효심과 신심은 둘이 아니라고 했소. 선대 어른들을 받느는 효심을 근본자리로 삼아 왕실의 원찰을 복원하는데 힘쓰겠소.” 고종은 직접 대화주를 자처해 왕실이 힘을 보탰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전하의 뜻에 따라 소신들도 미력하나마 수국사 중창불사에 나서겠사옵니다.”
모금액은 삽시간에 25만 8000냥이 됐다. 그래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와 중면 산황리에 토지를 매입해 사찰의 기본자산으로 삼고, 1907년에는 왕실로부터 하사된 금일봉으로 개금과 탱화불사를 마쳤다. 이를 본 지역의 사찰에서도 동참이 이어졌다.
“불교에 관심이 없던 조정에서 수국사 불사를 한다고 야단인데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불교계 사찰에 이같은 여론이 형성되면서 1908년 부처님오신날에는 통도사 범어사의 여러 스님들이 월초스님의 원력을 도와 힘을 보태 괘불탱화와 금강번 31위를 조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108평 규모의 황금목조 법당이 완공돼 은평지역 불자들의 신심을 고양시켜 주고 있다. 황금사원으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지난 1992년에 부임한 자용스님이 ‘수국사 중흥’을 내걸고 한국을 대표하는 황금사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단청을 황금으로 시작하면서부터다.
<사진> 1984년 목탁새가 사는 것이 확인돼 목탁모양으로 새집을 만들어 놓았다. 매년 늘어 6쌍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빈 집만 있다.
황금 개금불사는 지금도 계속 중이다. 황금사원의 유명세와 더불어 수국사는 목탁새가 사는 사찰로 유명했다. 이는 지난 1984년 4월에 목탁새 한 쌍이 대형목탁에 둥지를 튼 뒤, 매년 초여름이면 찾아와 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부터다. 지금은 목탁새는 사라지고 목탁모양의 집이 사찰 공포아래에 매달려 있다.
수국사에는 초전법륜상도 조성돼 있다. 초전법륜상은 석가모니 부처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녹야원에서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으로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다. 오비구성상은 부처의 초전법륜에서 깨달음을 얻고 최초의 비구가 된 다섯 스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을 이용할때는 간선버스 702번 또는 광역버스 9701, 9703번 이용하여 선정고교 앞 하차한다. 길 건너편에 수국사 안내표지판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오면 황금법당이 보인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6호선 구산역에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서오릉방향 1km가량 올라오면 수국사 안내판이 나온다.
참고자료: 삼각산 수국사비, 수국사 안내 리플렛, <내 안의 길>(이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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