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김제 트레킹
▷트래킹 일자 : 2022. 04. 17.(일)
▷트레킹 코스 : 정읍시. 김제시
▷참가자 : 형제들 7명
▶방문지 :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정읍시)
▻태인면 : 태인면 일원
▻신태인읍 : 舊(구)도정공장창고
▻정읍시 : 백제가요 정읍사공원.
정읍근대역사관
►김제시 : 벽골제
▶날씨 : 아주 맑음 (미세먼지 보통)
▶트래킹 스케치 :
이날 05:40분 서울에서 출발하자
교통소통이 원활하고 경부-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장 밖으로 봄 햇살에 반짝이는
봄꽃들이 사랑스러울 뿐더러 달리는 자체가
상쾌하고 힐링하는 기분이다~~~~
08:50경 정읍시 태인면에 도착, 태인cc.
증산리 관동마을. 상증마을. 돌챙이 고개.
낙양리 원마을 문화마을을 거쳐 신태인읍
신태인리 소재 舊(구)도정공장 창고를
탐방하고,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소재
정읍근대역사관에 도착 정읍근대역사관
김태숙 해설사님의 상세한 설명을 경청하고
친절한 김태숙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아
(구)이평면 화호리 소재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 소유 일본식 주택 내부를
탐방했다
이어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소재 지평선
축제장인 벽골제로 이동 벽골제 탐방 후
김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19:30경 서울로 출발 상경했다
이번 탐방지는 관광지 보다는 외세에 의한
수탈의 현장 호남 농민들의 애환. 恨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대사를
잇는 옛 선조들의 생활상과 정서 이를
극복하고 승화하는 정신문화를 교훈 삼아
변화와 발전적 비젼제시로 미래 지향적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탐방
이였다.
이날 유달리 화창한 날씨
역사를 탐방하고 멋진 봄의 향연을 즐긴
알차고 뜻깊은 트래킹 행복한 하루
소중한 시간에 감사하다~~~
▶신태인 구 도정공장창고
신태인 구 도정공장창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대지주가 근처 농장에서 수확한
벼를 저장했던 창고로 1928년에 건립
되었다.
외부 벽체는 붉은색 벽돌로 쌓았는데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내부는
현대식으로 고쳐 정읍시 생활문화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 근처에 벼의 상품성을 높여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하여 규모가 큰 방앗간을
두었었는데 2007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농업 수탈 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설물이다.
▶정읍근대역사관
►연혁
▻최초 건립시기(쌀 창고)→ 건립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쌀 창고로
건축되었으며 5동의 쌀 창고가
지어졌으나 현재는 1동만이 현존하고 있음.
▻화호중앙병원→ 1947년 쌀 창고를
개조하여 화호중앙병원으로 사용
▻화호여자고등학교→ 1961년 병원이
문을 닫은 후 짧은 기간 학교로 사용
▻정읍근대역사관→ 2021년 리모델링하여
역사관으로 사용
►화호리의 역사
화호리(禾湖里)는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아픔이 남아있는 마을로 부안, 김제,
정읍 등 주변 지역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름진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해당하여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들이
쌀 수탈에 선호하는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구마모토 리헤이,
다우에 타로 등 다수의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고리대금업 등 불법적인 토지 침탈로
대규모 농토를 빼앗았다.
조선의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인 지주들은 화호리에서
생산된 질 좋은 쌀을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화호리는
화호자혜진료소, 구마모토 농장 사무실,
다우에 농장 사무실 등 일제강점기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주식회사 구마모토(熊本)농장
▻일제시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 利平)가
전북 5개 시ㆍ군(군산, 익산, 정읍, 김제,
부안)지역에 3,500정(町 : 약 천만 평)의
농토를 소유하고 수 천 명의 조선인
소작인들로 부터 뭇갈림(수확량의 1/2을
소작료로 받음)으로 수탈을 한 전북
최대의 농장.
►이자(利子)
▻장리(長利 : 50%) - 춘궁기인 봄에
쌀 한 가마 빌려가서 가을에 원금
(쌀 한 가마)에 이자(쌀 반 가마)를 더해 갚는
이자율.
▻곱장리(곱長利 : 100%) - 춘궁기인
봄에 쌀 한 가마 빌려가서 가을에 원금
(쌀 한 가마)에 이자(쌀 한 가마)를 더해
갚는 이자율.
►구마모토 농장 소유의 농토는 옥구
저수지(군산시 미성동) 면적(약 백만 평)의
10배.
►농장주인 구마모토 리헤이 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머물던 사택은
군산시 개정동 이영춘 가옥(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00호 : 군산 간호대학
자리)과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의
구마모토 농장 가옥(국가 등록문화재
제 215호)으로 남아 있음.
►농촌 수탈을 일삼던 일제 강점기에
구마모토 리헤이는 호남의 중심부인
신태인 주변 주요 곡창지역 비옥한 땅
용서마을에 쌀 수탈의 목적으로
불법적인 토지 침탈로 대규모 농토를 빼앗아
자작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되고 일본인
지주들은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구마모토는 일제 초기 1913년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모집한 농업이민 25세대가
집단으로 화호리 용서동에 정착해
구마모토 집 주변에 창고 5채를 건축 했으며
일본인 및 조선인 관리사옥을 지었다.
1914년 신태인에 역이 세워지고 수탈한
쌀을 수송 수단으로 사용 했으며,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 하면서 행정과
상업의 변화가 생겼다.
해방후 일본 사람은 다들 떠나고 건물만 남아
우체국,학교,병원, 일반주민이 살기도 한다.
6,25전쟁시 4동은 불에 타고 현재1동만
현존하고 있다. 비교적 낙후된 농촌
지역이다 보니 개발은 늦어지고 세월의
흔적 속에 훼손이 적은채로 일본 근대식
건물들이 남아 보존 되고 있었다.
그후 1947년 쌀창고를 개조하여
화호중앙병원으로 사용 전국에서 난치병
환자들이 몰려 지역의 유동인구가 어느
지역 보다 많았으며 1961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폐원을 하여 한동안 학교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2013년 지역민들의 많은 관심과 노력
결과로 근대문화 역사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어 근대역사관이 개관 할수 있었다.
2021년 리모델링하여 정읍근대역사관으로
개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건축면적 약 497 m2 로 원형대로 보존이
잘 되어있으며 1층엔 전시실,아카이브센터,
사무실 2층엔 휴게 및 회의 공간으로
활용 하고 있다.
구마모토 쌀 창고 건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중 규모가 가장 큰데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마을 입구에 위치해
화호리의 역사를 전달하는 상징적인
표상으로 기능을 다하고 있다.
구마모토 가옥은 전북 최대 규모의 농장을
소유했던 구마모토가 사용하던 가옥이다.
최대의 지주로 1903년 옥구군과
태인군(화호리) 두 지역에 농장을
개설하였고 1937년 주식회사 웅본 농장을
창설 전북 최대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건축한 1층 구조로
184.5m2 규모이다.
마을 전체가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조그 마한 야산위에 대형 창고 대 지주
가마모토 가옥, 농장 사무실 관리 직원
가옥등 경관이 잘 관리 되어있다.
▶백제가요 정읍사공원
►정읍사[井邑詞] : 백제 때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백제시대부터 구전해온 민간전승의
가요로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정읍사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박병채 역)
►내용은 먼저 제1연에서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사안녕을 달에게 기원하는 간절한
발원으로부터 시작된다.
곧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운 불안한 심정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하되, 단순한 서정의 표출이
아니라 광명한 달에게 남편의 안녕까지
도모해 주기를 바라는 고대인의 소박한
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제2연에서는, 현실적으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행방도 소식도 몰라
애태우며, 불안과 의념(疑念: 의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히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자 ‘(혹시 지금쯤) 전주 저자에나
가 계시는지요’라는 가정(假定)의
의문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희구하는
가냘픈 여심(女心)의 발로로써 시작된다.
제3연(結聯)에서는 남편의 신변에 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의구심이 절정에
이르고 보니, 행상을 해서 버는 돈도 재물도
아랑곳없이 한시바삐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어느 것이나(무엇이나) 다 놓아두고 한시바삐
집으로(나에게로) 돌아와 주소서’ 하고 절박한
하소연을 부르짖고는, 제2연구에서 다시
한숨을 돌이켜 ‘어긔야(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내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 어두워질까(변할까)
두렵소이다그려(변하면 어쩔까나)’ 하는
걱정과 자탄과 애원의 말로써 끝을 맺고 있다.
<정읍사 [井邑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제 벽골제 (사적 제111호)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저수지 둑.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쌓은 것으로, 고려 17대 인종과
조선 3대 태종 때 수축(修築)하였으며,
지금은 둑의 일부와 비석이 논 가운데에
드문드문 남아 있다.
김제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벽골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로서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고대 저수지를 대표하고 있다.
벽골제의 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고대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만이
가능했을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풍납토성과 같이 거대한 토성을
축조할 수 있는 수준높은 기술력과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정비한 백제에 의해 3세기 중엽에
벽골제가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축조의 주체세력 또한 백제의 중앙으로
인식되어 왔다.
►김제 벽골제 제방 축조상태.
벽골제의 초축 기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아니라 신라본기의 訖解尼師今
21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연구자들은
구체적인 비판없이 벽골제가 위치한 지역이
백제 고지라는 이유로 벽골제의 초축을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찬술 방식을 살펴보면,
마한에 대한 정보가 매우 소략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벽골제 시축에 대한 내용은
백제본기에는 원래부터 없었고
마한과 관련된 기사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화호중앙병원 개원 당시 사체보관 안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