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사막의 일출과 자동차 사파리를 끝내고 아침을 먹고 출발한 시간이 여덟시 가까이다. 오늘 목적지인 페스
까지는 500㎞로 여덟 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페스로 가는 길은 어제 들어왔던 길로 모래사막을 벗어나서는 우측으로 강(Oued Ziz)을 따라서 동북쪽으로 올라
간다.
동그라미를 그린 곳은 모로코에서 들린 곳이다.
모로코의 일정은 오늘이 마지막으로 오늘 페스에서 간단한 구경을 하고 잠을 자고 탕헤르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게
된다.
가이드가 스페인에서의 관광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라스팔마스 원양어업 전진기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
야기를 해 준다.
라스팔마스는 모로코(서사하라)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스페인령의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도시로 경치가 좋아서
관광객들도 많이 오는 곳이다.
가이드가 원양어선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자신이 아버지가 라스팔마스에 있었기 때문이고, 현재 모로코에 있는 원양
어선 출신 한인 중에 돈도 많고 신분도 높으며 얼굴도 예쁜 신부를 얻어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신부의 나이가 그
사람보다 25세 이상이나 젊어서 모로코에 있는 한인 노총각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숙소에서 나가는 기에 보이는 풍경...쌓인 모래와 비바람에 쓸려간 바닥과 산이 보인다.
암모나이트 화석모양이 있는 마을
길가에 보이는 풍경...구길이 있는 곳으로 화석과 옷들을 파는 곳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칠해진 건물은 학교들이다.
갈가에 보이는 풍경들...
오는 길에 보이는 오아시스 도시들
강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마을과 숲이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와 같이? 학교에 등교하고 있는 아이들
골든 스타라는 클럽...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술집은 아닐 것...음주문화가 없는 곳이니
건물 벽에 안경과 전화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아 안경가게와 전화기 가게가 있는 듯...
도심이 건물 중에 가장 깨끗한 건물이 모스크인듯
두 시간 만에 도착한 휴게소..담벼락에 걸려 있는 카페트...가서 보니 싸구려다.
이 상표의 석유회사는 모로코 국왕의 소유라고...휴게소에 있는 주유소...돈이 되는 것은 국왕이 소유한 것은 많다
네요...제일 큰 슈퍼마켓 체인점도 국왕의 것이라고...
잠깐 쉬는 동안...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사막의 다양한 모습과 더불어 지구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길로 나무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지층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부러지고 구겨진 지층을 볼 수 있다.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삭막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지루하지 않은
길이다.
여행을 단순한 경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길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
는 사람이라면 전혀 흥미진진한 길이다.
여러 가지 모양의 지층과 조산운동(造山運動)의 결과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한 지층들, 그리고 아틀라스 산맥에서
흘러온 강물이 삭막한 골짜기에 푸른 야자수 숲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지루할 틈이 없다.
사막이라는 것이 모래가 있는 곳만이 아니고 비가 오지 않는 곳이 사막이기 때문에 사막의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모로코에서 보는 사막은 사막으로서의 모든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저수지도 보이고...
저수지 주변의 풍경...미국의 그랜드케년처럼 수 억년의 속살이 그대로 보인다.
지금은 강이 말라 붙었겠지만 강물이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곳에서도 염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아틀라스에서 흘러내오는 강물 지도에는 Oued Ziz라는 강이다.
강과 산들
아이트 벤 하두의 건물처럼 생신 건물이다....안에는 작은 마을이 있는 듯
황량한 산에도 차량과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
산 허리를 뚫고 나 있는 길...
이런 계속을 끼고 있는 길을 계속 달려서 ...
골짜기가 넓어지고..
주변이 산들이 지층이 세로로 서 있다.
가로와 세로로 뒤엉켜 있는 지층..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거대한 힘이 이곳을 아렇게 구겨 놓았다는 것
을 생각하면서 가면 지루할 틈도 없다.
이 협곡도 지금 바닥을 흐르는 강물이 수억년에 걸쳐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계곡에도 마을이 있고 장이 선다....아마도 장날인 듯
어제 보았던 다데스 협곡과 비슷한 마을도 지나고...
눈이 덮인 아틀라스 산맥이 보인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아틀라스 남쪽에서 이런 풍경을 처음 본다.
그런 길을 계속 올라가면서 중간에 한 번 쉬고 두 시간을 더 달려서 아틀라스 산맥이 보이는 경치가 좋은 Hôtel T
addart 라는 곳에 도착을 하여 레스토랑에서 베르베르인의 전통음식인 타진으로 식사를 하는데 아틀라스 산맥에
서 먹은 모로코식 양갈비, 토드라 계곡 입구에서 먹은 쿠시쿠시와 더불어 모로코에서의 3대 특식이다.
어느덧 평원 비슷한 곳이 나타나고...
이런 도시를 지나는데...지도에는 미덜트라는 도시이다.
길가에 이런 호텔도 보이고...
초록색의 탑을 가진 모스크도 보인다.
조금 더 가서 Taddart는 호텔 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이 길을 지나는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거나 숙박을 한다고...
식사가 나오기전...일부러 벽난로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모로코의 전통음식인 타진을 앞에 두고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위해서 한 잔
호텔 옆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앞에 있는 나무도 만든 조형물
내부 공사중이라서...안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Hôtel Taddart...관광차들이 수시로 들어오고 나간다.
건물 뒤에는 이런 수영장이 있다...이 사진은 구글에서
호텔에서 보이는 전경...경치가 좋은 곳이다.
사하라에서 나가는 길에 보이는 도시 풍경..비디오는 그라나다의 알 함브라 궁전의 이야기다.
수억년의 세월을 보여주는 지구의 속살들...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야자수 숲들
고개를 넘으면 사하라사막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눈을 이고 있는 아틀라스 산맥이 북쪽에 보이고 평원을 지나서 저 산맥을 넘게 된다.
이번 여행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아래는 라스팔마스 원양어업기지애 대한 기사이다.
여행은 지식을 얻기 위함이니...
아래 글은 원양어업 전진기지 50년이라는 광주 문선생이라는 분이 쓴 글이다.
조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던 섬
49년 전인 1966년 11월, 대서양 스페인령 그란카나리아 제도에 '강화 1호'라고 적힌 어선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남지나해와 인도양, 대서양을 가르는 두 달여 항해 끝에 선원 40명이 발을 디딘 곳은 그란 카나리아 제도 제1 항
도시인 라스팔마스였는데요, 선원들과 수산개발공사는 이곳에 원양어업 전진기지를 세웠습니다. 당시 북태평양에
서 명태잡이로 외화를 번 우리 정부는 추가 어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라스팔마스를 대서양 공략의 교두
보로 삼게 되었습니다.
라스팔마스는 카나리아제도에 있고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령이나 모로코 영토였으나 반환하지 않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명태 잡고 참치 낚아서 돈을 얼마나 벌겠느냐고 웃을 수 있겠지만, 1960년대 우리 산업에서 차지하
는 수산업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는데요, 당시 우리나라 한해 수출액이 2억 5,030만 달러였는데, 그 중 수산물이 4,
200만 달러로 전체의 17%를 차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9%)와 자동차(8%)가
차지하는 비중(17%)와 똑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정부가 수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은 아닌데요,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시절, 나랏 돈으로 어
선 한 척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부는 일본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빚을 끌어다 배를 사고 만들었습
니다. 당시 라스팔마스엔 10여 년 전부터 진출해 있던 일본 선단들이 철수를 시작했는데, 한국 선사들은 일본이
남긴 중고 배를 주로 사들여 조업에 나섰다고 합니다. 금융 수산 박성웅 상무는 이렇게 회고했는데요, "일본 선주
들은 배를 팔면서 고급 어종은 반드시 일본에 넘겨야 하는 일종의 '노예계약'을 강요했지요. 어쩌겠습니까. 돈 없는
입장에선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고 기죽을 한국인들이 아닌데요, 특유의 성실함과 발품을
팔아 불리한 조건을 극복했습니다. 이곳에서 오랜 기간 선장을 했던 남상태 서해수산 대표의 말에 따르면 "어디에
문어가 있는지, 갑오징어가 있는지 귀신같이 알아냈고 밥 먹듯 밤샘 조업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어선은 우리와
어획량이 상대가 되지 않아 주변국에서 한국 선원을 부러워하고 탐냈었지요."
스페인 어선이 그물을 5번 놓을 동안 우리 어선은 8번을 놓았고, 베테랑 선장들은 세네갈, 기니, 기니비사우, 시에
라리온 등 아프리카 연안 수천 km 어장에 언제 어디 가면 무슨 고기가 잡히는지 손금 보듯 훤했을 정도였다고 합
니다. 이렇게 열심히 해준 선원들 덕분에 라스팔마스에서 벌어들이는 외화는 갈수록 불어났는데요, 조업 첫해인 1
966년 252만 달러 어치 물고기를 수출했고 10년 만인 1976년엔 4,500만 달러어치를 팔았습니다. 1987년 한 해
에는 1억 1,0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었는데, 이는 독일에 파견됐던 간호사, 광부 1만 9,000명이 15년간 송금한 금
액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라스팔마스 선단들은 우리나라가 중공업을 앞세워 본격 성장기에 들어가기 직전인 1987
년까지 21년간 모두 9억 7,000만 달러(1조 원)를 벌어들였습니다.
당시 라스팔마스 선원 채용엔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는데요. 38년 전 라스팔마스에 온 박덕 ㈜서경 대표는,
"대졸, 고졸 고학력자는 물론 장교, 회사원까지 라스팔마스에 왔다. 일부 지원자는 국회의원 빽써가며 선원이 되
려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2년 6개월 근무하면 부산에 집 두 채 살 돈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 지역 한국인들은 197
0년대 후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당시 원양어선 210척에 선원 1만여 명과 교민 5,000명 등 1만 5,000여 명이
라스팔마스를 무대로 활동했습니다. 총영사관도 이때(1976년) 개설되었습니다.
라스팔마스 달러 뒤에는 혹독한 희생이 따랐습니다. 라스팔마스 시내가 바라보이는 산라사로 공동묘지 한쪽에는
한인 위령탑이 있습니다. 지난 48년간 대서양 해역에서 조업하다 숨진 선원 124명의 유해가 안치된 곳입니다. 여
기에 목월이 헌사를 남긴 것인데요, 목월은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 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는 라스팔마스 선
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가 살아있다고도 했습니다.
현지 선원들은 목숨 건 조업의 연속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는데요, 1979년 8월 태창수산 소속 '81태창호'는 세네
갈 수역에서 한밤중에 문어와 돔을 잡다 4만 t 급 상선과 부딪쳤습니다. 선원 30명이 죽고 2명이 가까스로 구조되
었는데요, 이러한 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열악한 환경도 문제였는데요, 선원들은 뜨거운 적도 부근에서
주로 조업했지만 선실에 에어컨, 선풍기는 없었고 발도 펴지 못하는 길이 150cm, 너비 50cm 작은 관만 한 개인
공간에서 겨우 새우잠을 잤습니다. 보통 해상에서 2, 3개월 머무는 데 식수가 부족해 양치질과 세수는 바닷물로
했고 먹구름이 몰려오면 하이티아를 준비했다가 짧은 소낙비에 몸을 씻었습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하사금으로 선원 회관이 만들어지면서 발족한 한인회는 교민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현
지 한인들은 배편을 통해 두 달 만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려고 줄을 설 정도로 고국을 그리워했는데요, 한인회는 풍
어제와 사물놀이, 야구, 낚시, 골프, 바둑 동호회, 체육대회 등을 통해 교민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본국에 재난이 닥
치면 곧바로 성금을 조성했고, 88올림픽 등 국가 경사에는 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버마 폭탄 테러와 KAL기 피격
등 모국이 위기에 처하면 함께 흥분했고 슬퍼했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 만난 한인들은 한순간도 모국을 잊은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는데요, 1990년대 서부 사하라에 파
견된 국군의료지원단 장병들에게 철마다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챙겨준 이들도 이곳 한인들이었습니다. 어머니회
는 사고로 희생된 선원들의 자식을 돌봤고, 한인 2세와 현지인을 위해 장학금을 모았습니다. 라스팔마스를 먼저
거쳐간 일본인들도 위령탑과 기념비를 만들지 않았지만 한인들은 '한국광장'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라스팔마
스 한인들이 지탱해온 원양산업은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바람이 거센데요, 외교력과 자금력
을 앞세운 중국은 한국이 활동해 오던 아프리카 연안 어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 시진핑, 후진타오, 보시라이 등 중국 지도부가 잇달아 라스팔마스를 찾았습니다. 중국 어선은 불법 조
업을 하다 아프리카 연안 경비대에 나포되어도 곧바로 풀려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인데요, 1980년대 후반 아프
리카 연안국들이 영해를 확대하고 다른 나라 조업을 규제하면서 한때 210척에 달했던 한국 선단은 현재 50여 척
으로 줄었습니다. 한국 배의 선원 역시 중국, 베트남, 아프리카인들로 교체됐습니다. 한때 1만 5,000명을 넘었던
라스팔마스 한인들은 계속 줄어 지금은 1,200명가량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최근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을 중심으로
라스팔마스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에 기대를 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