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광복회장이었던 김원웅은 6.25를 민족해방전쟁이라 하고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익태 선생을 민족 반역자라 칭하며 애국가 없는 광복절 기념식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좌우의 대립을 더욱 촉발시켰던 인물이다. 김원웅의 후임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죽마고우의 아버지 인 이종찬을 광복회장에 임명했다.
물론 오늘과 같은 사태가 일어 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채 말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친구와 지내면서 친구의 아버지에게 윤석열이도 아버지라 존경의 호칭을 하면서 가족같이 지낸 지가 얼마 인지도 모르게 친구가 죽마고우라고 했으니까 수십 년을 넘어 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런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자 사람보는 눈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윤석열의 심성이 너무 착했던 것인지 자신이 아버지라 했던 이종찬에게 기대를 걸면서 그를 광복회장에 임명했다. 전 광복회장이었던 김원웅의 종북적인 반 애국 자유 보수를 향해 일탈적인 행위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한다는 것이 자신이 아버지처럼 존경했던 이종찬을 광복회장에 임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윤석열의 헛된 기대였고 틀려도 많이 틀린 예상이었다. 이종찬은 김원웅보다 절대 못 하지 않은 반(反) 애국자유 보수였고, 반 윤석열이었다. 이종찬은 김구의 숭배자였으며 이승만을 결사적으로 증오하였다 그래서 1948년 정부 수립(건국)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종북 좌파 였다.
이종찬이 살아온 행적을 보면 권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변절을 수없이 하고 입신양명 주의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임자 김원웅과 그렇게 닮았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이종찬은 육사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공채 1호로 들어가 정보부(안기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두환 5공 때는 민정당 권력 서열 2위로 한때 후계자 소리도 들었다.
당시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하고 민자당을 장악할 때 이종찬의 변신(변절)이 시작됐다. 김대중의 민주당으로 옮겨가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기여하면서 김대중 인수위원장도 맡았다. 김대중의 일등 공신으로 국정원장을 꿰찼다.
이후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 당(민정-민자-새 한국-국민회의-국민회의(탈당 후 복당)-민주)에 적을 새로 두었다. 전 광복회장이었던 김원웅도 총 12번 당적을 바꿨고, 공화당 사무처 공채 7기로 “생계를 위해 당직자 생활을 했다.
이종찬은 우당 이회영의 손자로서 김원웅이 광복회장에 당선됐을 때 같이 경쟁했다가 패했다. 이때 광복회가 시대와 함께 뒤바뀐 성향을 알아봤어야 했다. 그들은 종북좌파 비슷하게 친 김구 쪽이었고 반 이승만으로 진영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이종찬은 이 진영 논리에 더해 자기가 추천한 김구 손자 김진이 독립기념관장에서 탈락 하자 반 윤석열로 돌변, 또. 변신을 했다.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이철우 연세대 법학대학원 교수)과 초등학교 친구이건 무엇이건 상관이 없었다.
이종찬은 자신이 추천한 인사가 독립관장에 임명되지 못하자 돌변하여 친일파 뉴라이트 신 보수, 수정 보수 프레임을 걸면서 광복절 행사에 불참하고 자기들 독립운동 후손 단체들만 모여 이렇게 선언했다.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덮을 순 없다고 윤석열 정부를 향해 극렬한 선동을 멈추지 않았다.
극기야 이종찬은 변신을 더해 더불당과 합세하여 윤석열 타도를 외쳐대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 민생에는 거부권을 남발하면서 일본의 역사 세탁에는 앞장서 퍼주기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역사를 퇴행시킨다면 결코 국민과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종찬은 더불당과 합세하여 시민사회와 함께 친일 주구와 밀정들을 하나하나 색출해 국민께 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된 지 79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친일파 부역의 논란을 다시금 제기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건국마저 부정하며 국정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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