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원래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으며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다교 측에서보면 전도양양한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주님께서 낚아채십니다. 그 과정도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런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스포츠에 무척이나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라면 답답해 미칠 정도로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코린토 1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6-27)
그리고 어느 날 노인이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7-8)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후에도 복음 선포자로서만이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투잡’을 한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일컬어 학자들은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때 혈기왕성한 촉망받는 유대교 젊은이로서 율법을 준수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장 역할에 충실했던 그였습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주님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마 이후 일련의 회심과 쇄신의 과정을 거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말을 갈아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이런 고백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 한번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주로 어디에다 집중시키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혹시라도 언젠가 모두 썩어 없어질 유한한 육체에만 모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재미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삶을 주님의 뜻에 걸맞게 재구성하는 영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 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심을 알게 된다. 이때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회심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룬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을 지낸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나 자신과 모두가 주님 안에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퇴근할 때마다 자기 집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천재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을 펼친 아인슈타인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아인슈타인을 천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죽음 이후 그의 뇌를 훔쳤던 병리학자(토마스 하비)가 있었습니다. 천재의 뇌는 어떻게 다른 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뇌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앞서 퇴근할 때 자기 집을 찾느라 애 먹었던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에서는 천재였지만, 모든 부분에서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부분에서 천재였고, 가끔 천재였던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지 않을까요? 어떤 모임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천재입니다.
이런 천재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천재’인 자기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별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부정적 생각으로 좌절에 빠지면서 자기의 천재성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 ‘가끔 천재’의 모습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동조했었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심과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기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의 출신, 학식, 기득권 등이 자기 천재성을 세상에 발휘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면서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상의 지혜가 아닌 천상의 지혜,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면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천재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와 같은 깊은 회심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회심을 통해서만 주님의 일을 하는 진짜 천재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당신은 자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훨씬 많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닻을 풀고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항해를 시작하라. 돛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라. 탐험하라. 꿈꿔라. 발견하라(마크 트웨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참된 회심의
시간입니다.
회심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닌
하느님의
입장에서
만나는
회심의 참된
기쁨입니다.
회심의 기쁨은
먼저
스스로를
정화하는
자정(自淨)으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정직하게
인정하며
과오를
겸손하게
드러냅니다.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에서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해
성장합니다.
바른 길로
이끄는
복음의 길은
회심으로
회복됩니다.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는
회심으로
더욱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의 빛은
우리의 진정한
회심입니다.
회심 없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 지를
드디어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소금은
우리의
회심으로
짠맛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회심이
복음입니다.
회심의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나누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되십시오.
우물 안에서
벗어나면
복음은
보편적인
구원의 소식이
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1.25) -일치 주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더 나은 삶으로의 응답!'
오늘 복음(마르16,15-1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방인의 사도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의 대변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회개하기 이전에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며 살았던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모질게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사도22,6-10 참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니아스를 도구로 쓰시어 그를 회개하도록,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니아스는 자신을 찾아온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22,14-16)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부르시고,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말과 너를 통해서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날마다 더 나은 삶으로 응답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더 나은 삶으로의 '응답과 애씀'이 바로 '회개요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