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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묵상글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나는 누구인가? 개인가? 자녀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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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는 누구인가? 개인가? 자녀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요한의 서간에 나오는 말씀인데
저는 이 말씀으로 모든 신비와 의문을 해결했습니다.
이 말씀이 말하자면 모든 존재와 활동의 원리입니다.
모든 존재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모든 존재는 이 사랑의 원리에 따라 창조되었고,
모든 활동도 이 사랑의 원리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옳고 그래야지만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육화이고 성탄입니다.
두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주님의 공생활입니다.
세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네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특히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불만입니다.
안 보여주시는 겁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까?
사랑은 사랑할 때 보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그 사랑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사랑을 싫어하고 미워하거나
다른 사랑을 사랑할 때는 그 사랑이 보이지 않겠지요?
다른 하나는 믿을 때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을 때 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것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되듯
주님의 성체와 성혈도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것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 월례회 미사를 봉헌했고,
성체와 성혈 대축일 특전 미사로 봉헌했는데 참석자가 많지 않아
부속가 중에서 마음에 와닿은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천사의 빵 길손 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고 이것을 가지고 나눔을 더 했는데,
성체를 개에게 주면 그것이 개에게 성체일지 밀가루 덩어리일지 물었습니다.
모두 성체가 개에게는 성체가 아닐 것이라고 답했고 맞는 대답이지요.
이때 저는 덧붙였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성체로 믿지 않고 영한다면 우리도 개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성체와 성혈은 한 번의 육화로 하느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고,
한 번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고,
매일 반복되고 계속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인데
관건은 그것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영하고 그 사랑을 받겠지만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은 영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랑도 받지 않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지,
성체와 성혈은 개의 양식이 아닌 천사의 양식이고
자녀인 우리의 길손 음식인지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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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늘날, ‘무엇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빈곤과의 전쟁…. 그런데 이렇게 선포하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이긴 적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졌음’을 통계에서 파악됩니다. 미국에서는 수시로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처음 선포했을 1980년대는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이 30만 명 정도였지만, 2004년에는 210만 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질병과의 전쟁으로 항생제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모든 전염병에서 인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전문가가 입을 모아 항생제의 남용과 무분별한 사용으로 슈퍼 박테리아(항생제 내성균)가 생겨 전염병이 폭발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분쟁과 전쟁에서, 당사자들은 늘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긴 것 같지만 이 역시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로 평화를 가져온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이 또 자기 생활 터전을 잃은 상처가 과연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줄까요? 이기든 지든 상관 없이, 전쟁하는 순간에 진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항상 어리석은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만함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이기는 길이고, 진짜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만 홀로 남는 것을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우리를 위해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며,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우리는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랑의 반대편만을 바라보면서 가짜 사랑을 가짜 평화를 그리고 가짜 희망을 좇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그 순간에 커다란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가 아닌 신기루와 같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진짜가 바로 우리의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 진짜가 무엇인지, 진짜 우리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와 성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좇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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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그 세계는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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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신비를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이 신비는 “계약” 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계약”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말씀도 “계약”이라는 단어입니다.
<제1독서>는 시나이에서 맺은 “옛 계약”으로, 모세를 통하여 맺어지는 하느님과 백성의 계약입니다. <제2독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하시고 상속재산을 받게 해주셨음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복음>은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성체성사의 설정을 통하여 “새 계약”이 맺어지는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이 벌어진 것은 “무교절 첫 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마르 14,12)입니다. 바로 이날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해방절의 양이 되셨습니다. 곧 당신의 피를 계약을 맺는 피로 뿌려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옛 계약’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곧 구원의 사랑이 선포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제1독서>의 시나이 계약에서, 모세는 희생된 짐승의 피를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백성에게 읽어줍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응답합니다. 모세는 나머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여기에는 계약을 구성하는 요소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백성들의 응답’이요, 셋째는 ‘피를 뿌리는 예식’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약에는 ‘말씀’과 ‘피’가 동반됩니다. 곧 ‘계약’은 ‘피의 의식’을 통해서 제정되지만, 동시에 ‘하느님 말씀’의 수용을 통해서 제정됩니다. 이처럼, 계약에 있어서 ‘말씀’과 ‘의식’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계약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뿌리는 의식은 혈연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명의 친교로 묶어짐을 뜻합니다. 사실,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친교입니다. 곧 야훼 하느님과 백성이 같은 피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로의 친교를 말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자손들”(탈출 24,5)은 이 일치로 말미암아 “가족”이 됨을 말합니다(여기에 쓰인 “am”은 본래 백성이 아니라 가족을 뜻한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마치 한 가정의 구성원처럼, 혈족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반열’에 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계약인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호의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러한 계약은 우리를 ‘형제 사이’의 우애관계로 만듭니다. 하느님의 가족으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이며, ‘서로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인 것은 바로 이처럼, 계약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 계약이 아니라면, 우리는 형제가 될 수도 없고, 한 형제로 살아 갈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약’은 구약의 ‘옛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1-34)
그렇습니다. “용서받음”이 “새 계약”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 중에 <성찬제정 축성문>에서, 사제는 포도주를 들고서 허리를 굽혀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리는 피다”
나아가서, ‘죄를 사하여’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이 ‘새 계약’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용서받았기에, 당신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한 이들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피’, 이것이 바로 ‘성체성혈의 신비’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새 계약’에 따른 새로운 관계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쪼개어 “떼어” 나누는 일로 드러납니다. 곧 자신을 훼손하고 손해 보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의 안전과 보호보다 타인의 도움과 유익을 먼저 헤아리는 일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죄 사함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으니, 마땅히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계약의 삶, 타인을 위하여 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이 미사 중에,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맺으신 “새 계약”을 우리의 삶으로 기념(anamnesis)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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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증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성체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성체로 그분께서 오시는 이유는 또 하나의 천국,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양식인 성체로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지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 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리고 “성체는 우리의 보약입니다”(성필립보 네리). “영성체는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우리의 나약함을 치료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매일의 빵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가롤로 보르메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클라라렛). 오늘 복음에서 “받아라”는 말씀에 주목한다면, 받았으면 그에 걸맞은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계약의 피”는 당신께서 어린양처럼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몽땅 내어주시는 성체를 모심으로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으시길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송가’를 보면 “선인 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 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모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사랑에로 이끄는 구체적 성체의 기적은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많이 얘기합니다. 8세기 중엽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가? 의심하였는데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마친 순간 빵이 살아있는 살로,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게 된 사건입니다. 너무도 귀한 성체를 조심하여 깊숙이 보관한 것이 아마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과 71년에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이 기적의 피는 ‘진짜 피와 진짜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은 심장 근육이며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처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1973년에 세계 보건 기구에 검사 결과를 제출하여 다시금 핵 의학 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연구했지만 결국은 성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성체성사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참조).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이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믿는 이뿐 아니라 깊은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경외심과 존경을 갖게 되는 것은 그분이 살아계심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체 기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보이는 표징입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체께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란치아노 성지 방명록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기록한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욱 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그 기도를 함께 올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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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443년 지금부터 581년 전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표현하기 쉽고,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문자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아들 수양대군에게 한글로 된 책을 만들게 했습니다. 1447년 아들 수양대군이 만든 책의 제목은 ‘석보상절(釋譜詳節)’입니다. 책의 내용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중요한 것은 자세하게, 그렇지 않은 것은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인 조선시대에 불교의 부처님을 주제로 책을 쓴 것은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이미 1000년 동안 불교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1447년에 발표하였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자비와 덕이 하도 커서 마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춘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한글의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립니다. 세종대왕 역시 한글이 널리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식사를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할 때,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은덕이 천개의 강에 비추는 것처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의 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지난 5월 5일에 본당에서는 ‘첫 영성체’가 있었습니다. 18명의 어린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이렇게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지 않게 만드신 것은 ‘흐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강약, 고저, 장단’이 있습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공기도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구름도 비가 되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립니다. 사람의 피도 끊임없이 흘러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야 하고, 그렇게 흐르는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돈도 흘러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나라의 것들이 강한 나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들이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흐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오천 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잘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버려요.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 되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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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십계명 중에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 아시지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 이 말은 주일을 하느님 안에서 지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날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날, 하느님이신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없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라는 계명은 단순히 미사를 빠진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빵의 모습으로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외면했기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왜 성인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종교를 초월해 일을 하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수녀님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한 힌두교 신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쪽에 오셔서도 일해주십시오. 우리 쪽에도 굶주리고 아픈 이들이 많습니다. 라고 하자 수녀님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체가 없는 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갈 수 있으면 제가 가겠습니다. 성체가 없는 곳에서 저는 하루도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제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위상이나 능력보다 성체를 그 중심에 둔 삶을 살았음이 바로 수녀님을 성인 대열에 들게 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그리스도인인데, 주님 믿는 사람인데, 그 중심이 어디 있습니까? 그 중심은 성체와 성혈이어야 합니다. 성인 성녀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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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왜 잡을까?
지팡이를 왜 잡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팡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말은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지팡이를 잡는 사람은 이미 이런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허리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한쪽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팡이에 손을 뻗어 잡을 때 지팡이는 그 사람의 힘이 되어줍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인정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모습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세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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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을 모시는 은총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빵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빵은 씹히고 분해되어 존재가 없어져야 그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밀알이 양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한 과정입니다. 어둡고 침침한 땅속에서 싹이 트여 세상에 나오면, 또 다시 뜨거운 태양을 견뎌야 하고 통통한 밀알이 되면 꺾이고 갈고 짓이겨지는 고통을 견디며 가루가 됩니다. 가루는 다시 태양보다 뜨거운 불에 익혀져야만 비로소 먹음직스러운 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입에 들어간 빵은 씹히고 뭉개어져 형체도 없이 철저히 분해되는 그때서야 인간에게 이로운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양식이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인간의 치유를 위해 그 많은 상처를 감내하셨고, 인간의 영광을 위해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면 당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이처럼 거룩하신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나와 주님이 따로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입니다. 나의 몸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겸손과 고통, 인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작은 주님의 양식을 다른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성체 성혈 대 축일을 맞이하여 인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크나 큰 사랑을 되새기며, 힘들 때나 기쁠 때, 나의 모든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성체 성혈 대 축일을 맞이하여 저희도 주님과 같이 나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체를 통하여 내 몸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2. 나의 몸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 사랑을 깊이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다시 이웃과 나눌 때 주님의 진정한 사랑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3. 성경 속에서 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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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사의 은총과 축복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이하여, 17년전 2005년 10월 어느날, 불암산 가슴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도 미사를 드리신다는 황홀한 느낌에 영감받아 쓴 “온 세상 제대로 삼아”란 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으시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주님의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주님의 태양 성체 모시고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복된 우리들이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태양 성체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랑의 성월같은 6월 예수성심성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나와 사랑안에 살다가 사랑에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입니다.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오늘 6월 첫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듯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체성사의 은총과 축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이런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 괴로움으로 사경을 헤맬 때 생각나는 신부님!”
“내일 비어있는 날, 신부님 생각만 났습니다. 내일 꼭 뵙겠습니다.”
“다정하신 신부님처럼 아버지도 잠깐 제가 잠들었을 때, ‘우리 따알’하고 미소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서서히 숨이 떠났어요.”
지난밤 받은 가톡 메시지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목말라하는 참 가난하고 사랑스런 영혼들의 고백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치유의 사랑을 찾는 영혼들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사랑의 성체성사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높이 오르고 싶다면 일상의 바닥부터 한 걸음씩 쌓아나가라.”<다산>
높이 오르는데 매일미사 은총보다 더 좋은 사랑의 수행은 없습니다. 신앙의 평생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매일미사는 못하더라도 매일미사전례문은 꼭 렉시오디비나 하기를 권합니다.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어
지식을 밝힘에서 앎이 지극한 단계로 나아가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에서 세상을 평안케 하는 단계로 나아간다”<다산>
역시 매일 정성스럽게 거행하는 미사를 통해 깨닫고 실현되는 진리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 초대송으로 시작된 오늘 하루입니다. 이어지는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도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이어 무려 24절까지 계속되는 성체송가가 성체성사의 무한한 은총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성체성사적 삶’ 하나만 있을뿐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은 하나하나 거룩한 ‘주님의 감실’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형제자매들을 함부로 대함은 성체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좌우간 성체성사의 신비안에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생명의 신비, 인간의 신비등 모든 신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비에 대한 답이 성체성사안에 다 있습니다. 평생을 공부해도 초보자 신분을 벗어날 수 뿐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사제서품후 35년 동안 매일미사에 강론을 해왔지만 여전히 힘들어 초보자의 마음으로 겸손히 하루하루 삽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안에 계신다.”(가톨릭교리서;1324항)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인해 준다.”
성체성사없이 살수도 없거니와 참사람이 되는 길도 없다고 감히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극히 거룩한 미사인 새계약의 제사를 실제 집전하는 분은 제2독서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새계약의 중개자이자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탈출기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을 완전히 능가하고 완벽히 보완하는 교회의 새계약의 성체성사가 오늘 복음에서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말그대로 찬미와 감사의 희생제사요, 화해의 제사인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한몸의 일치를 확인하는 성체성사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사랑의 선물인 성체성사 은총이 부단히 공동체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또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삶 모두의 뿌리에 성체성사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저절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찬미와 감사의 은총에 감격하여 드리는 다음 고백기도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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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십자가의 길 바로 앞에서
최후의 만찬이 조촐하게 거행됩니다.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이전에
주님은 지극히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심으로써
기꺼이 기꺼이 죽으십시다.
당신의 살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에
살점 후벼 파는 쇠갈고리 달린 채찍도
사랑이신 주님의 처참한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당신의 피를 남김없이 뿌리시기에
손과 발 꿰뚫는 대못도
옆구리 깊게 찌른 창도
생명이신 주님의 영원한 삶을
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빵이 살아 계신 주님의 몸이 됩니다.
포두주가 살아 계신 주님의 피가 됩니다.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왜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릅니다.
믿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멘!
다만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살과 피로 먹힘으로써 살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삽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살아계시고
우리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제 살기 위한 게걸스러운 먹어치움이 아니라
벗을 살리기 위한 고결한 먹힘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가난한 벗들 배불리는 아름다운 나눔으로
억눌린 벗들 일으키는 정의로운 희생으로
버림받은 벗들 품에 안는 따뜻한 함께 함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받아먹고 마시어
또 하나의 성체와 성혈이 되어
미련 없이 아낌없이 먹힐 때
오직 그렇게 먹힐 때에만
아멘은 진정 아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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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보편교회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사목적 이유로 주일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 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체의 의미는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밀떡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합니다. 가시적인 빵과 포도주는 형태에 불과하나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까지도 그 형태 안에 현존합니다.
이 성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실체로 변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머물러 계시며 이를 신자들이 받아 모시는 성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동시에 은총의 성사입니다.
성인들 그리고 은수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삶은 성체가 신앙의 핵심적 삶임을 그들의 삶으로 증거하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 비안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업이란 선업을 한데에 다 모아도 미사 성제만 못합니다. 그 선업은 사람이 한 것이고 미사는 하느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도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이지만, 미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사람에게 주시는 희생입니다. 성체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놓여지는 제대와 성체가 보존되어 있는 감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주일 저녁부터 토요일 까지 자기의 독방에 머물며, 토요일과 주일에만 성찬례에 참석합니다. 일주일간의 영적 투쟁에서 견딜 수 있게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성체가 선교사의 근거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방 신부의 체험얘기입니다.
전염병자 행세를 하고 중국 변방을 통과하고 하수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모방 신부가 한국에 들어온지 1년밖에 안된 1837년에 병이 납니다. 열병에 걸렸는데 약도 쓸 수 없고 음식도 안 맞아 먹지 못하니 사실 수 없다고 판단한 샤스탕 신부가 병자성사를 줍니다. 그런데 모방 신부가 성체를 영하기 전 일어나면서 ‘내 병은 나을 겁니다’라고 말한 뒤 성체를 영하고 기도한 후 기적같이 병이 낫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의 중심이며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 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성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인도된 사람만이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합당하게 만나뵈올 수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성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며 죽음의 해독제이고 불멸의 약’이라 말합니다. 성체는 과거에 당한 상처를 치유해 주고 다가올 해악에 대해 무장시켜 줍니다. 성체는 악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 몸에 성체를 모신 감실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처럼 살것을 이 대축일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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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후에스카(Huesca)으| 성합
스페인 -1648년
1648년 11월 30일 새벽 스페인의 후에스카( Huesca) 시에서 하느님께 불경스럽게도 감실이 부서지고 축성된 성체가 가득 모셔져 있는 성합을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도둑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새벽에 높은 탑에서 삼종기도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궁정에서도 오두막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삼종기도를 바쳤다.
“주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시도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지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성당의 종지기가 종을 치고 나서 탑에서 내려오기 전에 날씨를 살펴보려고 사방을 보았다. 그 때 그는 저멀리 떨어진 밭 위에서 마치 수백 만 개의 다이아몬드가 아침 하늘에 찬란한 빛을 내는 듯이 이상한 빛이 뻗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종지기가 제의실로 내려올 때 그는 지난 밤에 감실의 성합을 도난당한 것을 알고 너무 놀라 쓰러 질 뻔 하였다. 밭에서 나는 이상한 빛과 성체가 없어진 것이 무슨 연관이있을까? 성물 관리인과 함께 다시 탑을 올라갈 때까지 그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탑에 올라갔을 때 그 성물 관리인도 밭에서 나는 그 이상한 빛을 보았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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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을 들려줍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동물을 반으로 가르고 그 피를 제단과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이스라엘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법규를 충실히 지킨다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탈출 19,5-6 참조) 복을 내리신다는 계약입니다(탈출 20,6; 신명 30,16 참조).
이 계약을 체결하고자 모세는 소를 잡아 번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탈출 24,4-6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는 제사였음을 알려 줍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옛 계약(구약)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새 계약(신약)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중개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대사제’를 통해서, 불완전한 제물인 동물의 피가 아닌 흠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완전한 제물’이 되시어, 당신의 피를 십자가라는 제단과 우리 위에 흘리시며 맺으시는 ‘완전한 계약’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신앙의 성조들이 맺은 계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이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 제사는 날마다 성찬례 안에서 되풀이되어 기억되고 재현됩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려고 ‘몸’과 ‘피’를 내주신 주님의 깊고 진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도 다른 이에게 몸과 피를 내주도록 재촉합니다(2코린 5,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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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주십니다.
우선 피를 흘린다는 것으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임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당신 희생의 목표가 되는
'많은 사람'이란
그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도 주십니다.
내 몸을 내어 주는 것
내 몸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면서
제자가 되는 것을 넘어
종이되십니다.
스승인 존재가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 것은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주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표현으로
일이 마무리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시면서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그것을 받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즉 앞에서도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그분의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야기한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여야
그 사랑은 내 안에서 피어납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시기에
우리는 우선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시면서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 갈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갈망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쁨의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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