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장대(金藏臺) 초입 기찻길 아래에는 '동도명기홍도추모비'가 서 있다. 홍도는 조선 정조 시대 기생이다. 본명은 최계옥(崔桂玉), 자는 초월산(礎月山)으로 홍도는 정조가 내린 별호였다. 홍도는 아름다웠고, 시와 서 그리고 가무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스무 살 때 궁으로 들어가 예원(藝院)에서 활동하다 정조의 장인인 박준원(朴準源)의 소실이 되었다. 박준원이 사망 후 그녀는 경주로 돌아왔다. 경주 사람들은 그녀를 악부(樂府) 최고의 스승으로 여겼다고 한다. 홍도는 순조 22년인 1822년 마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가진 모든 재산은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도 崔桂玉(1778~1822)은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달래주던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는 대중가요의 홍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홍도 崔桂玉은 조선후기 정조·순조 년간에 활동한 경주의 이름 높은 기생이다. 당시 세도 정치하에서 농민층의 동요가 심각한 시기를 살았으면서도, 우리 음악에서 雅樂보다 오직 俗樂의 발굴 장려와 후학지도에 전념하였던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의 민중들은 최계옥을 樂府최고의 스승[師宗]으로 받들었다. 1851년 그의 사후 30여 년 뒤에 천인신분인 최계옥을 위해 기생층과 풍류객, 그리고 향리 등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재물을 모아 ``동도명기홍도지묘``라는 비명을 세웠다. 여기서 최계옥은 본관이 경주이고 아버지 崔鳴東과 세습 관기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생몰연대와 활동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기생의 묘비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최계옥의 묘비명은 선영이 있는 형제산 아래 도지동 627-1에 위치해 있다. 홍도 최계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서울 궁궐에 상궁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의 활동과 국왕 정조의 장인인 朴準源과의 관계 그리고 말년에 고향 경주에 돌아와서의 활동 등을 살펴 당시 사회 풍속상의 한 단면을 살펴보게 된다. 당시 사회관습인 종모법에 따라 최계옥은 어려서부터 官妓가 되었으며 詩와 書, 그리고 미모에 뛰어났고 가무 또한 출중하였다. 나이 20에 상의원에 선발되어 창경궁에 들어가서 상궁이 되고 기생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더구나 정조 임금께서 최계옥에게 홍도라는 별호를 하사한 일은 매우 특이하다. 더구나 국왕 정조의 장인인 朴準源의 소실이 되기도 했다. 자식은 생산하지 못하였으나 정치의 정상에 있던 남편이 죽은 다음 고향 경주에 돌아왔다. 경주에서 홍도 최계옥은 궁궐에서 배우고 익힌 최정상의 실력으로 속악에 심혈을 기울여 마음껏 후진을 양성하여 마침내 東都樂府의 師宗이 되었다. 당시 기생에 대한 사회의 관념은 분명히 천시하였으나 적어도 1930년대까지는 지식층에게 격조 높은 기쁨을 가져다준 특수 신분으로 활동하여 왔다는 점도 아울러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이 홍도묘비명은 소중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