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9]창경궁 달빛관광 유감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덥다기보다는 아예 너무 뜨거워, 추석 당일 낮에도 짜증이 더럭더럭 납니다. 예년에는 9월 중순쯤 되면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고, 낮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심합니다. 한국민속촌을 아들내외와 손자 이렇게 갔는데, 추석이라고 가족과 함께 온 관광객으로 밀려 터지는데다 날씨까지 사람을 볶아대니 제대로 구경을 할 수조차 없었지요.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날씨(기후) 걱정을 했더니 ‘9살’이 우리 대화에 끼어듭니다. ‘인간들이 만든 거지요?’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데, 언제 정말 망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후욱- 들어오는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오후 5시엔 열흘 전쯤 아내가 인터넷예약한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부부’ 처남내외와 ‘창경궁 야연’구경을 하러 인사동(장수하늘소)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6시30분 창경궁 내에서 문화해설사를 만나 8시10분까지 몇 곳을 돌면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70년대 후반, 당시는 창경원 야간 벚꽃놀이가 유명하여, 딱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동물원도 있을 때였고(식물원은 지금도 있음), 창경궁으로 명칭도 격상되지 않았지요. 일제는 강점기때 궁宮을 원苑으로 격하하고 동물원-식물원-호수 등을 만들어 관광지로 만들었지요. 88올림픽 직전에 동물원을 과천으로 옮기며 복원작업을 시작했으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학교가 창경궁을 끼고 있어, 운동장에서 하는 따분한 교련시간에 몰래 높은 담을 넘어 궐내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지요.
추석 프로그램인 ‘창경궁 야연’은 또 뭡니까? 야연夜宴을 ‘달빛관광’으로 하면 몇 배 더 운치가 나지 않나요? 누가 ‘야연’이란 말을 쓴다고, 어느 유식쟁이가 굳이 한자를 쓰는지 모를 일입니다. 두 살 위 처남부부와 1년에 고작 한두 번 같이 하는 만남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대화’가 되니까요. 갈수록 무도해지는 정치현상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도 주고받지만, 인문학 관련 이야기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모두 세계에서 알아주는 자연과학 학자인데도(물론 모두 정년퇴직),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인문사회계열 관련서적의 독서와 과학자적 성찰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형편없고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한 호학열, 학구심도 대단하여 1시간반 동안 가이드의 해설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저와 잘 통하게 마련이겠지요.
궁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창경궁은 1418년 조선 임금 중 가장 터프한 태종 이방원을 위해 세종이 창건하여 ‘수창궁’이라 했지요. 이방원은 살아생전 왕권을 물려준 유일한 왕이나 병권兵權은 5년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본인이 쥐고 있었고,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케 한 것도 세종의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1483년 성종이 3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궁을 확장한 후 창경궁이라 개명합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려야 하는 등 ‘할마마마’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게지요. 원래 창덕궁과 함께 구분없이 ‘동궐東闕’로 불렸었지요. 오늘날 남아 전하는 <동궐도> 2점(고려대박물관 등)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경복궁과 동궐이 소실돼 1616년 중건했으나 1830년 대화재로 거의 다 타고 다시 4년뒤 중건했으니, 400-500년 된 건물은 두세 개밖에 안되지만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홍화문을 넘어서면 맞닥뜨리는 다리 ‘옥천교’의 돌은 그대로이기에 보물입니다. 명정전明正殿이 정전이지만, 다른 궁과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인 것은 위치가 애매하여 편법을 쓴 것이지요(군자남면君子南面-임금은 마땅히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해야 한다-에 위배되지요). 편전인 문정전 역시 방향이 틀려먹었습니다. 문정전에 불을 지른 노인네를 사건직후 엄벌에 처했다면, 몇 달 후 숭례문(남대문)을 방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아쉬운 일입니다. 문정전 마당(명당)에서 영조는 어릴 적 그렇게 총애하던 사도세자를 큰 뒤주에 가둬 1주일만에 죽게 만드는 ‘임오화변’은 1762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당시 11살 정조(이산, 이성)는 울며불며 할바마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바마마를 살려달라고 떼를 씁니다. “세손은 들어가 있어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던 영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군요. 정조는 9살 때부터 혼자 쓰던 일기를 두 달간 한 줄도 못썼답니다. 그로부터 22대 임금으로 등극하는 1876년까지, 정조는 14년 동안 죽을똥살똥 노론의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독학자습, 6예六藝을 익힙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명궁名弓이 되고, 말도 잘 타고 칼도 잘 썼다지요. 말하자면 27명 임금 중 <홍재전서>라는 문집까지 남긴,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일한 왕입니다.
창경궁의 경춘전은 1752년 정조가 태어났고, 영춘헌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한 곳입니다. 밤이어서 그렇지, 집복헌은 사도세자와 순조(정조의 아들)가 태어난 곳이라는 안내문을 읽으면, 역사가 그리 멀리 있는게 아니고 바로 우리 앞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조차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까부는 ‘벌거벗은 대통령’이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오직 한심할 따름이지요. 가장 엄정한 게 역사인 것을. 함인정은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유퀴즈’를 한 곳입니다. 춘당지 연못은 활을 쏘고 무과시험을 치르던 곳이고, 임금이 집춘문을 통해 성균관을 방문, 대사례도 치르고 세자 입학도 시켰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읊어대는 해설사로부터 들은 얘기는 중국에도 없는 '일월오병도' 등 많고 많지만, 결론적으로 나라를 잃은 슬픈 민족의 과거사에 지나치 않습니다. 건축상식도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궁궐 지붕에 솟아난 수많은 공포를 덮은 그물을 순우리말로 ‘부시’라고 하는데, 왜 그것이 필요했을까요? 또한 정전 앞 물을 담아놓았다는 ‘드므’라고 불리는 큰 항아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수수께끼인 셈치고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성종의 태실이 왜 창경궁에 있게 됐는지도 상식과 교양차원에서 알면 좋겠지요. 알아야 할 것은 이밖에도 수두룩박박입니다만, 솔직히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더워 ‘달빛여행’이 힘들어지더군요. 어느 가을날 단풍철에 오시면 또다른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춘당지에 노니는 원앙과 백로, 오리들도 보겠지요. 해설사 섭외가 마땅치 않으면 저를 불러주셔도 됩니다. 하하.
홍화문 옆에 선인문이라는 협문을 보셨나요? 이 문을 통해 정조는 한 달이나 두 달에 한번 건너편 지금의 서울대병원(연건동) 자리에 있던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에 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고 기리며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같은’ 통곡을 했다고 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능을 참배한 후 수원행궁에서 7박8일동안 환갑잔치를 벌여주었을까요? 혜경궁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남편을 ‘죽게’ 만들고, 아들을 잃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겠지요. 그러니 저절로 <한중록>이 탄생됐을 것입니다. 정조는 그야말로 ‘모태효자’였습니다. 25살에 임금 등극하며 한 첫 마디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노론세력들이 벌벌 떨었겠지요. 세손 14년동안 정조를 죽이려는 노론의 음모는 수도 없었다지요. 절치부심, 와신상담, 마침내 할바마마의 신임을 얻어 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는 딱 그때뿐이었습니다. 정조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지고, 사악한 일본의 침략도 받지 않았을 건데, 역사에 ‘만약(if)’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조임금, 한 분의 이야기로 천일야화도 될 수 있을 듯, 알려드리고 싶은 사실은 쌔고쌨지만, 이만 접습니다. 유튜브에서 <최영록TV> 검색한 후 <'궁궐의 도시' 한양과 5대고궁' 편을 보면 요약된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로선 족할 따름입니다. 추석연휴도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저는 내일 귀향하여 나락을 베는 등 추수秋收를 한 후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농한기, 월동기라도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이유는 역사도 정치처럼 생물生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