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허가" 효과
마23:2~3을 보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말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았을까?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 효과란 것이 있다. 도덕적인 행동을 하면 “나는 사회에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후부터 자신이 하는 어떠한 비도덕적인 행동도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목사나 神父는 여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착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중세기 때의 교황과 神父들도 그랬으며, 요즘 중대형 교회 목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세상 사람들이 종교인을 “위선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 종류의 위선자들이 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겠다는 “착한 외침”으로 혁명과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富를 나누어주며 평등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있는 자들의 것을 빼앗아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농업혁명이든 산업혁명이든 정보혁명이든 富와 관계된 혁명이 일어나면 반드시 인간사회에는 “구별과 차별”이 생겨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공장 굴뚝에서 뿜어내는 오염물질과 거리의 쓰레기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자 콜레라와 폐결핵이 무섭게 번졌다. 이런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노예가 되어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했으며 그 결과로 빨리 죽었다.
1842년 영국정부가 밝힌 맨체스터의 평균수명은 17세에 불과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마르크스도 자신의 세 자녀를 잃었다. 자본주의의 악폐(惡弊)를 체험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새로운 분배방식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상”... 이거야말로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현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일하고 가능한 최대한으로 받아내자”로 바뀌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다.
1977년 <타임지> 표지는 “마르크스는 죽었다”였다. 인간의 탐욕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산주의가 등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인간의 탐욕이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탐욕이 인간의 理念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p.s.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상” 얼마나 좋은가. 목사 사회가 이를 모범적으로 실행했으면 좋겠다. 사회주의를 따르는 동기들이 이 문제에 앞장서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