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4
1월23일[연중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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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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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u02ylo5L80
[예수회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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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구절은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 두 군데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성모님께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지며 성모님의 평생 동정과 관련된 가톨릭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형제’란 표현은 광의(廣義)의 의미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표현 안에는 친형제뿐 아니라 사촌 형제, 팔촌 형제,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들까지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 정도로 바라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눈여겨 봐야 할 또 다른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당혹해합니다. 애써 찾아오신 어머니를 홀대하는 듯한 그분의 태도에서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효도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집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혈육이나 지연 같은 사사로운 정을 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류 역사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 가장 충실했던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극도로 칭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는 프로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실생활 안에서 실행하는 데는 왜 그리 굼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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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가족 공동체>
어떤 청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친구들을 대할 때, 가족을 대할 때의 저의 모습이 다 달라요. 특히 가족을 대할 때 가장 나빠져요. 밖에서는 사람들에게 잘 하고 칭찬받는데 가족들에게는 짜증내고 투덜거리고 막 그래요. 뭐가 문제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간으로서의 핏줄보다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모두 당신 친 핏줄처럼 가족처럼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가족처럼 여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연탄길’에 소개된 ‘아빠의 눈물’을 읽어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명지가 열여섯 살 때였다. 명지네 가족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강릉경포대로 갔다. 바다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물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들의 모습이 은빛으로 출렁거렸고 바다 끝 수평선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푸른빛으로 넘실거렸다. 아름다운 나흘을 보내고 마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명지 네는 경포대를 떠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명지네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고로 명지는 다리를 많이 다쳤다 .그날 이후로 명지는 두 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몇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불행은 명지 하나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명지보다는 덜했지만 명지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명지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명지아빠는 하시던 약국을 계속 경영했다.
명지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만큼 열등감에 시달렸다. 명지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명지 아빠뿐이었다.
명지의 엄마도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지만 정상인인 엄마가 해주는 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정신까지 절룩거리는 명지에게는 엄마의 사랑으로도 끌어안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아빠는 말할 수 없는 명지의 아픔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길을 다닐 때 명지는 사람들이 동정 어린 눈빛이 싫어서 땅만 쳐다보며 다녔다. 어느 겨울엔가는 얼어붙은 땅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서 얼굴이 온통 까진 채 아빠의 약국으로 간 적도 있었다. 명지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아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보는 게 너무 싫어 ."
"명지야 , 아빠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사랑 같은 거야. 그걸 알고 나서 아빠는 오히려 그들의 눈빛이 고맙기까지 한걸."
명지 아빠는 조심스럽게 명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약을 발라 주었다. 명지 아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빠는 우리 명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명지야, 아빠 말 잘 들어 봐. 물론 아빠나 명지가 어쩌면 그들보다 더 불행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우리야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구..... 명지야, 조금만 더 견뎌. 아빠가 네 곁에 있잖아."
그 후로도 명지 아빠는 명지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명지를 지켜 주었다. 아빠의 사랑으로 명지는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명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명지도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입학식장에서 아빠는 두 개의 보조다리에 몸을 기댄 채 가슴 가득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 그들의 눈앞에서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쪽으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걸어가던 명지의 아빠는 그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명지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명지아빠는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명지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팔에 끼고 서둘러 가벼렸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명지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명지야,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사고 났을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 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너 혼자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성한 몸으로는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없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명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 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빠는 견디지 못하셨을 거야. 불편한 몸으로 살아오셨지만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빠가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오늘은 그 어린 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봐서...."
멀리 보이는 명지 아빠는 여전히 보조 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를 보고 있는 명지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명지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명지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속으로 더 많이 흘러 내렸다.
저도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어머니에게는 투덜거렸던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가족에게 대하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내가 이중 인격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투덜거리면 다 내가 싫다고 달아나버리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족, 그 울타리에서는 내가 마음을 놓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받아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그 공간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회복하기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 따듯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인 바로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자녀들의 감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이런 가족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도 우리처럼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것입니다. 마치 명지의 아빠가 명지를 위해 목발을 짚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가족으로 만들고 싶으면 누군가는 먼저 그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속해 있는 사람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참 가족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참으로 우리가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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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통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에서는 이동하고, 빨간불에서는 멈추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도 두 가지 색이 있습니다. 전화가 오면 두 가지 색이 표시됩니다. 파란색을 누르면 통화가 되고, 빨간색을 누르면 거부가 됩니다. 친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꼭 받아야 할 전화는 당연히 파란색을 누릅니다. 모르는 사람, 받고 싶지 않은 사람,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빨간색을 누르게 됩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전화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찮다는 이유로, 지금이 편하다는 이유로, 미안한 마음에 빨간색을 누르는 것은 아닌지! 날씨가 추워서, 비가 와서, 너무 더워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전화를 하시는데도 외면한 적은 없는지요? 젊은 신부님이 가끔씩 어머니의 전화를 빨간색을 누르면서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어머니가 늘 귀찮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귀찮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또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직을 그만 두게 될 경우에는 세상에서 잘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평생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보속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헌신과 기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이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의 의도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제대로 갈 수 없으니 오직 사제직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의 경조사나, 부모님의 생일이나, 경제적인 문제를 신경 쓰기보다는 맡겨진 일을 먼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휴가 때도, 쉬는 날에도 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따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제 동료들과 지내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동생 수녀님은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도 휴가 때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쉬는 날에는 멀리 있어도 찾아뵙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직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이겨내라는 의미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기 보다는 사제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나태한 삶을 살아간다면 사제직에 머물러 있어도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준비를 소홀히 하고, 권위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33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저 자신의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가족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믿어주었던 친구를 배반하고, 거짓과 모략으로 출세라는 허황된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얻는 것은 화려한 집이고, 비싼 옷이고,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함께하지 못합니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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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가장 확실한 가족이시다.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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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혈연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내주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게 하여 줍니다. 혈연관계보다 앞서는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 혈연관계와 똑같은 관계를 맺게 하여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이의 신앙이 혈연관계 앞에서 무너집니다. 자녀들을 대하는 몇몇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뜻이 그 관계 안에서 절대로 앞설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자녀의 행복이 신앙보다 더 앞서고, 자녀의 성적이 하느님의 뜻보다 먼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앙의 길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그런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더 좋은 삶의 환경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하느님께 기도할 마음을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목표한 대학에 들어가면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그 직장에 취업하게 되면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여 봅시다,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믿음을 지키고자 때로는 소중한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도 배우지 않은 자녀가, 과연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다 얻은 뒤에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돌아올 수야 있겠지만,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님과 “형제요 누이”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듣는 마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길은 예수님과 가장 특별한 관계를 맺는 길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정말로 믿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꼭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신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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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보겠다면서 많은 결심을 하고 실천할 것을 계획합니다. 물론 계획한 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참 드물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결심하고 실천 계획 세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면서 절제와 극기, 봉사와 기도 생활을 무리하게 계획합니다. 실패로 돌아선 신앙생활의 결심들 앞에 늘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 다른 신앙생활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저 예수님 발치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도 애써 이해하려 겸손되이 경청하는 것입니다. 제 계획에 눈멀고 귀먹어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사실을 반성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였던 신명기계 역사서의 정신은,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듣는 귀를 가지는 것이 변화와 회개의 시작입니다. 듣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결심하고 계획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길을 무작정 나서는 무지한 사람들의 반복된 죄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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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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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이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언급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신앙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4,36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포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입니다. 가족이 중시되고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강조됩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혈통을 가진 이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자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새 기준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혈통이나 민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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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 35)
오늘 복음은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친척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단지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찾아온 것인지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앉아 있는 군중들과 밖에 서 있는 가족들의 위치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혈연관계인 가족들은 정작 밖에 서 있고, 생면부지의 군중들은 예수님과 가까이, 주변에 둘러앉아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군중들이 예수님의 둘레에 앉은 까닭이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겠지만, 둘러앉아 듣는다는 것은 상하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상징하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듣는 사람들 간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흔히 순명과 불순명의 차이를 ‘들음 안과 들음 밖’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일견 예수님의 둘레에 앉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살려는 사람이며, 밖에 있는 가족은 듣지 않고 살지 않는 사람들로 구조상 보입니다. 이로써 이제 새롭게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낡은 혈연적 관계 중심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가족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새 가족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이고 영적 가족의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 여부에 달려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 34~35)라는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선언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입교 혹 입문성사란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入(들 입)이란 의미처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며, 끊임없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새기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새로운 신앙 가족은 이렇게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 여부에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가족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에 대해 복음은 전혀 어떤 단서를 주지 않고 있으며, 그런 이유는 인간적인 감정 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다른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미 자기 뜻을 밝히신 바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 14,2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파견되셨다고 확신하셨기 때문에, 친척들이나 가족들의 의도에 당연히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적인 가족 관계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더 우선했던 것이라고 보입니다. 또한 지금껏 관습적인 혈연관계의 끈으로 이어져 살아 온 제자들 역시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요구 사항이었음에도, 이미 당신의 제자들은 이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 제자들이 바로 당신 말씀의 증인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연유가 계획했거나 의도한 발언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32)라는 전갈을 듣고, 즉각적으로 이런 말씀을 통해서 당신 뜻을 가족과 제자들 그리고 군중들에게 표명하신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다른 예수님의 형제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1,38)는 고백처럼 어느 제자들보다 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따르셨잖아요. 그러기에 어머니 마리아는 한평생 예수님의 탄생에서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까지 동행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으며, 예수님 승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도록 당신 존재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리아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예수님의 참된 어머니이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인간의 표본이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신앙의 모델이십니다.
그렇기에 이토록 공개적인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발설하였다는 것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누이에 대한 억한 마음에서 깎아내리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어머니와 가족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 표현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 역시도 고향 본당에서나 가까운 고향 근처 성당에서 강론이나 피정할 때 제 엄마가 오시기도 하셨는데, 그거야 당신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은 심정에서 오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어머님 마리아께서 일부러 찾아오신 까닭은 단지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기에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오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하느님의 가족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늘 주님 가까이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가를 깨달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행하려는 사람이다, 는 점을 꼭 잊지 맙시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형제와 누이로 만들기 간절히 원하셨기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3,3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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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속았다”라고 말하는 어느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연애한 지 석 달 만에 서로 ‘내 남자, 내 여자’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결혼까지 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황홀감이 있었지만, 결혼과 동시에 하나씩 깨졌습니다. ‘내 사랑’이 아니라 ‘내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누군가 ‘결혼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면서,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기에, 나와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것입니다. 치약 짜는 것도, 빨래를 벗어두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모두 달랐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연애할 때의 그 감정이 이렇게 쉽게 사라졌을까요? 사랑이란 신기루 같은 것일까요? 사실 사랑에만 빠져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적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니,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요.
사랑은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오로지 상대방에게 맞춰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제는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나만을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가정을 만드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고, 배우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신경 써야 합니다. 이 밖에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은 것도 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익어갈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혈연에 따른 가족이니 그 사랑이 더 지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뛰어넘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르시지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제까지 다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혈연관계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만 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로 새로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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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것>
마르코 3,22-30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착한 사람을
악하다 하는 것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끔 하시는
착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을
헛되다 하는 것은
참된 사람을
참되게끔 하시는
참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옳은 사람을
그르다 하는 것은
옳은 사람을
옳게끔 하시는
옳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곧은 사람을
비뚤다 하는 것은
곧은 사람을
곧게끔 하시는
곧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맑은 사람을
흐리다 하는 것은
맑은 사람을
맑게끔 하시는
맑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을
어둡다 하는 것은
밝은 사람을
밝게끔 하시는
밝으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사람을
더럽다 하는 것은
깨끗한 사람을
깨끗하게끔 하시는
깨끗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사람을
차갑다 하는 것은
따뜻한 사람을
따뜻하게끔 하시는
따뜻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거칠다 하는 것은
부드러운 사람을
부드럽게끔 하시는
부드러우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살가운 사람을
쌀쌀맞다 하는 사람은
살가운 사람을
살갑게끔 하시는
살가우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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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참 가족>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간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 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면 서로 통합니다. 하느님과 통하면 이웃과도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마음도 몸도 하늘을 향하여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3,22)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면 그다음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뒤로 밀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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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한가정, 참가족, 참사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합시다”-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저를 감동하게 한 것은 따뜻한 친절이었습니다. 서비스업, 섬김의 직무는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직무입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최우적 조건은 친절한 환대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법정스님의 책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의 종교는 친절함이다. 가능할 때마다 친절하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입니다.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친절함이란 작은 행동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톰피터스 말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입니다.
종교의 진수는 친절로써 표현됩니다. 친절한 인품 자체가 치유의 시작입니다. 어제 만났던 두 분의 의사가 참 친절했습니다. 한 분은 순환기 내과 여의사로 거의 10년을 치료해주는 분이고, 한 분은 26년동안 치과치료를 해주는 치과의사로 두 분다 한결같이 친절하고 실력 좋은 분들입니다.
“약 먹으면 됩니다. 하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순환기 내과의사의 친절한 말에 순간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약으로 산다는 것은 은총으로 산다는 것이니 약먹고 죄짓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새로이 합니다. 새삼 병의 치유에 약보다도 더 좋은 우선적 치유제는 친절, 희망, 기쁨,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치과병원에서는 의사와 더불어 네분의 간호원들이 신들린 듯 일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복음선포의 현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전쟁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참으로 섬김의 직무에 열심한 아름다운 모습들은 늘 감동을 선사합니다. 월요일이라 이렇게 환자분들이 많으냐 물으니 늘 그렇다 했습니다. 참으로 1.사람좋고, 2.실력좋고, 3. 환경좋은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지닌 분으로, 매일 제 강론을 읽으며 꼭 답글의 메시지를 보내는 하느님의 뜻을 한결같이 실행하는 분입니다.
종교 유무에 관계 없이 온힘을 다해 이웃을 배려하며 한결같이 친절히 사는 분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어제 저녁식사전 뜻밖에 보여준 수도형제들의 형제애가 저를 감동케했습니다. 제 오른쪽 볼 옆에 있는 검은 둥근 반점에 세분의 형제가 동시에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한 형제는 ‘오상’이라 하며 웃었습니다.
“오상인 줄 몰랐습니다.”
대답하면서 혹시 오상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순간적 형제애의 진한 체험이었습니다. 어제 강론시 원고에 없던 서두에 나눴던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입니다. 저는 말을 바꿔, “미사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단연코 말하고 싶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 이름을 간절히 부름으로 나았다”는 일화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부의 다음 말씀도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큰 위로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여기에다 성 치프리아누스의 한 말씀도 추가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 교부학이 소중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성염 전 교황청 대사의 설명에 의하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서사시인 성경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붙여 들려주는 것이 교부학, 성전’이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문가인 성염 대사의 업적 역시 불가사의입니다. 지난 30년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열다섯 권을 라틴어-한글 대조본으로 분도출판사의 교부문헌 총서로 편찬했고, 열권 가량을 더 펴낼 계획이라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83세의 노령인 지금도 하루 열시간 번역하며 공부한다 하니 말그대로 하느님에 취해 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말마디도 떠오릅니다. 10여년전 성염부부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교수님이 좋다하여 써드렸던 시도 생각납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잠깨는 숲
새로 시작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오늘 마르꼬 복음의 장면이 그대로 미사를 연상케하는 분위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닌 세례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명은 참으로 유일하게 하느님의 뜻에 인도되었음을 봅니다. 시편40장을 인용한 히브리서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전삶을 요약합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복음의 주고 받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문답이 너무 생생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 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또 참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수행자로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한결같이 따르고 섬기고 닮아가는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고 우리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은혜로운 미사전례를 통해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뤄주는 미사보다 더 큰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1인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위기의 시대에 이제 많은 외로운 이들이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루는 미사전례를 찾을 거란 예감이 듭니다.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사랑의 대 서사시가 성경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늘 노래하는 시편 성무일도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시이자 노래이자 기도인 시편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는 최고의 시인인 하느님을 닮아 저절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시, 노래, 기도에다가 춤까지 결합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니 바로 제1독서의 샘솟는 열정의 다윗이 그 모범입니다.
다윗은 싸움도 잘하고, 시도 잘짓고, 기도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또 여기에다 오늘 제1독에서 보다시피 춤도 잘 춥니다. 주님의 궤를 모시니 너무 좋아 춤을 추는 모두를 갖춘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온힘을 다해 춤을 추었듯이 온힘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했을 다윗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사랑이란 시입니다.
“사랑을
글로 써내면 시가 되고,
사랑을
색깔로 그리면 그림이 되고,
사랑을
소리로 부르면 노래가 되고,
사랑을
몸으로 풀면 춤이 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그대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온힘과 온마음의 사랑으로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가족 공동체를,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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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다윗의 기도.
오늘 다윗은 온 힘을 다해 주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이것이 실은 춤 추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은 다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면 잠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화내면 화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싸우면 싸움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원망하면 원망도 기도입니다.
반대로 성당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주님 앞에 있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성무일도를 아무리 정성 드려 바쳐도 주님 앞에서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묵상을 아무리 잘해도 주님 앞에서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 명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현전(現前)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의 모범입니다. 이어지는 독서에서 다윗의 아내 미칼이 다윗을 맹비난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과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참 볼 만 하더군요!”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 대신 나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무엇을 하든 현전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하면 그것이 기도임을, 다윗에게서 배우고 다윗처럼 기도하기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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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참가족!>
오늘 복음(마르3,31-35)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3,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참가족!
어제는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26명(선교사6명,예수회3명,신자17명)이 순교하신 나가사키 순교지를 순례했습니다.
26명의 순교 성인 중에서 6명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님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스페인(4명)과 포루투칼(1명)과 멕시코(1명)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멕시코 선교사였던 필립보 성인(24세)은 인도에서 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배가 좌초되어 붙잡히시게 되었는데, 이곳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이곳에 남아 순교하셨습니다.
또 한 분이신 루도비코 성인(12세)은 가장 어린 나이에 순교하셨는데, 본래는 체포시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자청하여 체포되어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형장에 가서는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힘이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26명의 순교 성인들이야말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참가족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참가족입니다.
우리도 참가족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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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ShAtuAU_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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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실행은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뜨거운
실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실행할 줄 모르는
우리들에게 실행을
가르쳐주십니다.
탯줄보다 더
뜨거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실행하는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깨어나게 하는
실행으로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실행은 실행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행을 우리에게
남겨두셨습니다.
실행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형제와 누이
어머니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실행 속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계의
중심이 실행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소금 또한 실행으로
녹아들며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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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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