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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Ein Landarzt, 1917)
<줄거리>
밤의 종소리를 듣고 나이 든 시골의사는 중환자에게 불려간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 그는 마차를 끌 새 말 한 마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그의 말이 과로로 인해 죽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동네사람들에게 말을 빌리려고 하지만 눈보라가 치는 밤에 말을 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돼지우리에서 튼튼한 말 두 마리가 나타난다. 이어 낯선 마부가 말을 마차에 메고는 마차를 출발시킨다. 의사는 짐승 같은 마부에게 하녀 로자를 맡기는 것이 싫어서 가기를 거절하지만 이미 마차는 환자의 집에 도착해 있다.
처음에 보니 환자는 전혀 아픈 게 아니다. 그러나 말들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있을 때 다시 확인하니 환자인 소년의 엉덩이에는 치료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다. 환자의 집에서도 의사는 로자에 대한 격정을 멈출 수가 없다. 이번에는 의사 자신이 환자가 되어 소년의 옆에 눕혀진다. 소년의 부모와 누이가 이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 합창대의 이상한 노래가 들려 온다. 소년은 의사의 무능을 비난한다. 주변 상황이 위협적으로 변함에 따라 의사는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채 서둘러 마차에 오른다. 그러나 말들이 올 때와는 달리 천천히 마차를 끄는 가운데 합창대의 노랫소리가 뒤를 따른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한밤의 벌판에서 헤맨다.
이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인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일인칭 화자로 나오는 시골의사는 트리쉬에서 실제로 시골의사로 있었던 카프카의 외삼촌 지그프리트 뢰비의 특징을 지녔다는 점이다. 앞에서 간단히 소개된 대로 그는 카프카가 가장 따르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쓰여진 1917년에는 펠리체와의 두 번째 약혼이 있었고, 8월에는 결핵으로 인한 최초의 각혈이 있었다. 12월에 들어서 카프카는 재차 파혼을 하게 된다.
시골의사에게는 대치된 두 영역이 존재한다. 하나는 하녀 로자와 독신자로 살아가는 의사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눈보라가 치는 먼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환자의 집이다. 여기서 밤에 그를 호출하는 종소리는 작가인 카프카 본래의 자아인 작가적 존재로부터의 부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카프카는 문학에서 자신의 본래 사명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사이의 갈등이라는 중심 테마가 여전히 카프카를 괴롭히던 이 무렵은 결혼에 대한 갈등이 각혈로 인해 한층 더 심화된 시기이고, 이런 정신적 배경이 시골의사가 움직이는 공간에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독신자로 하녀와 살아가는 공간은 소외된 영역이다. 의사는 아무에게서도 말을 빌릴 수 없는 동네에서 고립된 채 하녀인 로자의 소중함도 모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로자에 대한 인식은 짐승 같은 마부가 등장함으로써 새롭게 그를 괴롭힌다. 환자에게 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면전에서 하녀를 덥석 끌어안고 얼굴을 갖다 대는 마부 때문에 그는 출발을 포기하려고 한다. 거기에 가는 대가로서 하녀를 헐값에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자와 자기의 문학적 존재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약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작가의식과 동일하다. 약혼자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듯이 작품 끝까지 의사는 로자에 대한 걱정을 금하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대가는 관능적 삶의 포기이지만, 평생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로자에게 집착하다가 두 영역의 중간지대에서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로자가 마부를 피해 문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실내로 숨은 뒤 환자의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에 의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마부의 습격으로 산산히 부서지는 문소리이다. 자신의 본분을 찾으러 가는 그 순간에도 에로스적인 삶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그를 환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말들은 비지상적인 것들이다. 그 자신의 말이 죽은 것은 문학적 영감이 죽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미지의 영감의 힘이 등장하여 그를 본래의 자아와 만나게 해준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녀와 살아온 의사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껍데기 자아라면 환자는 본래의 자아이다. 이것은 그가 환자 곁에 누운 뒤 들리는 목소리를 통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알겠느냐?" 나의 귓속에다 대고 소곤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나는 너를 별로 믿지 않는다. 너도 또한 네 발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엔가 내던져졌을 뿐이다. 도와주는 대신에 너는 나의 죽음의 자리를 좁게만 해주고 있다."
이것은 분열된 두 자아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 자아 내면의 독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본래의 자아로 귀환한 뒤에도 자신을 하녀를 약탈당한 의사로 규정하는 등, 끊임없이 로자를 돌아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순수자아인 환자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는 핀잔을 듣는다고 볼 수 있다. 환자와 로자는 상호대치된 영역의 상징들이다. 작가적 부름이라 할 환자치료 때문에 로자와의 관계가 방해받는다면 순수자아인 환자는 로자에 대한 의사의 집착 때문에 방해받는다. 환자의 상처가 장미빛이라는 것은 로자로 대표되는 에로스적 삶이 작가적 존재를 방해한다는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카프카의 발병이 약혼을 종국적으로 포기하게 하듯이 의사는 환자의 병 때문에 로자와 궁극적으로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로자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것은 환자의 흔들리는 태도에도 기인한다. 소년은 "죽게 내버려 둬라"고 하다가 다시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의사의 눈에도 환자는 건강한 것으로 보였다가 다시 커다란 상처가 발견되기도 한다. 작가적 삶과 지상적 존재의 사이에서 여자문제가 카프카를 시종 괴롭혔듯이 환자의 상처에 대한 판단도 계속 흔들린다. 심지어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제 로자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죽고 싶다고 한 말은 옳고 타당했다. 나 역시 죽고 싶다. 끝없는 겨울, 여기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 말은 죽어 버렸고 마을에서는 말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나의 밤의 종소리의 도움을 빌어 온 지방이 나를 괴롭혀 왔는데, 이제는 로자조차 희생시켜야 했다. 여러 해 동안 내게서 주의조차 듣지 않은 그 처녀, 나의 집에서 살아온 그 아름다운 처녀를 - 이 희생은 너무 크다. (……) 최선의 의지로서도 로자를 나에게 들려줄 수 없는 이 가족들 …….
로자에 대한 걱정은 본래의 영역에서 다시 사회적 삶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영역의 대표자인 의사와 환자는 갈등의 구조에서 너무 지쳐 둘 다 죽고 싶어한다. 또한 환자의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로서의 그는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는 자문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본문을 찾아왔지만 그로서도 치료는 불가능했고 대신 로자만 마부에게 빼앗겼다. 그것은 '너무 큰' 희생이다.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린 결과는 어느 곳에도 소속하지 못하고 한겨울의 무주공간에서 떠도는 운명으로 결말지어진다.
의사를 각성시켜 주는 계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들이다. 가령 "그 자의 옷을 벗기라, 그러면 나으리니,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를 죽이라"고 노래하는 합창대와 비지상적인 말들이다. 이것들을 통해 자신의 본래영역에 돌아왔지만 자신의 의술도 잃었고 로자도 잃어버린 운명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집에 갈 수 없다. 꽃 피어나는 나의 찬란한 의술은 사라져 버렸다. (……) 발가숭이로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에 몸을 내맡겼다. 현세의 마차와 비현세의 말을 몰아 이 늙은 사나이 나는 빙빙 돌고 있다. (……) 속았구나, 속았구나! 한번 밤 종소리가 울린 것을 따르다니. 다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이라는 표현은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일깨워 주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본분으로서의 의사의 옷을 벗긴 그는 벌거벗은 채 의사 역할도 끝난 늙은이로서 빙빙 도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세계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는 두 세계의 중간지대를 빙빙 돌며 한겨울의 혹한을 견뎌야 하는 운명에 빠진 것이다. 작가적 세계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 그것 때문에 일상의 삶을 포기했지만 스스로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결정은 늙은이로서는 그대로 종국적인 성격을 갖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이 그를 덮치는 것이다.
결국 두 개의 자아에 대한 양방향의 집착은 동일성을 상실하는 불행한 시대를 인식시켜 주고 그 결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혹한의 추위를 안겨준 채 무주공간에서 떨게 하는 비극적 운명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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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1914)
<줄거리>
어느 탐험 여행가가 유형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근무하는 장교는 자신이 긍지를 갖고 능숙하게 다루는 처형기계로 어느 죄수의 처형을 보여주려고 한다.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처형관인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기계의 우수하고 완벽한 성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죄수는 야간보초 중 잠이 든 것과 상관에게 들켰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죄목이었다. 기계를 다루는 장교는 어떤 범죄건 확실하기 때문에 조사나 심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죄수로 끌려온 사병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처형기계는 죄수의 몸에 그가 위반한 죄목을 바늘로 기록하고 몸에서 흐르는 피를 닦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12시간이 지나면 죄수는 죽어서 구덩이로 던져지게 되어 있다. 이런 처형제도는 전임 사령관이 애착을 갖고 실시하던 것인데, 그가 죽고 신임사령관이 부임한 이후에는 논란거리여서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제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탐험가는 거절한다. 탐험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장교는 죄수를 석방하고 자신이 직접 기계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런데 기계는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는다. 장교는 고문하는 대신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 단편의 주제는 비인간적인 권력제도가 갖는 정의의 극단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권력 자신의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고집하거나 사이비 종교적인 광신적 수단에 의존하는 맹종성, 맹목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의 모든 사법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법, 사법, 집행 등 모든 것이 기계를 담당하는 장교의 한 손아귀에 들어 있다. 또한 피고의 죄는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장교가 말하듯 '어떤 범죄건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의 처형은 이미 범죄 자체와는 무관하다. 장교가 내리는 판결은 완전무결하고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죽은 전임사령관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장교는 한계를 모르는 권력에 종속되어 왜곡된 정의의 이념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맹종은 스스로 처형기계에 누워 희생될 만큼 광적인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판결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할 기계는 예기치 못한 불완전한 작동을 보여준다. 법제도의 충실한 수호자이며 신봉자인 장교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이 미혹이고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소송 Der Prozeß』의 요제프 K.와 장교는 법에 대한 전도된 관계를 보여주는 일면이 있다. 즉 K.가 법에 의해 '무지한' 결과로 죽는 데 비해 장교는 법을 신봉하면서 수호하는 법의 종사자로 희생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 앞에서』의 시골사람이 좀더 확실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가 법을 구경하기 위해, 법의 내부를 보기 위해 평생 기다리다 죽는다면, 장교는 평생 법을 지키고 법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왜곡된 정의가 스스로 지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미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법의 정신을 오해하여 정의의 왜곡된 제도에 맹종하다가 그 제도 자체가 허물어지는 의미인 것이다. 장교가 상징하는 왜곡된 정의는 무의미하고 허망한 종말을 통해 그 실체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그의 '살아 있을 때 그대로의' 죽은 모습은 그처럼 그가 확언하던 구원의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문학적 자기처단의 기록으로 보는 브로트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장교의 죽음은 외부세계에 종속되어 집착한 카프카의 자기처단이라는 형상으로 비유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복종하는 제도를 따르다가 그 제도에 의해 파멸하는 장교는 외부세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절망적인 최후를 암시해 준다. 그가 구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표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탐험가의 역할은 예술을 지향하는 자아의 한 변형으로 보여진다. 예술가가 과학자의 얼굴로 등장했다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면, 이 사람이 유형지의 비인간성과 잘못된 법제도에 반대하면서도 간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유형지처럼 소외와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외부사회로 향하려는 자아를 적극 제지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느낄 수 있다.
탐험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낯선 사정에 결정적인 간섭을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탐험가는 이 유형지의 주민도, 유형지를 통치하는 국가의 국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사형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거나 그걸 방해하려고 한다면 너는 외국인이니 까 잠자코 있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거기에 더 이상 답변할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생각이 막혀 버렸다. 견문을 넓히려고 여행을 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의 재판제도를 개혁하겠다는 당치도 않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의 여러가지 사정은 역시 호기심을 끄는 것이었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만의 주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수는 사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이며, 동족도 아니거니와 동정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서술시점의 기준이 되는 탐험가의 태도는 확실히 방관적이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유형지의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연의 진리와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탐험가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장교의 확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죽은 얼굴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지만, 탐험가는 유형지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적어도 옳지 않다고 말할 과학자의 진실에 대한 용기마저도 결여한 채 서둘러 섬을 떠난다. 더구나 기계담당 사병과 풀려난 죄수가 함께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이들을 유형지에 두고 가버린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태도에서 장교와 탐험가는 대조적이다. 잘못된 믿음이지만 장교는 강한 추진력을 갖고 확고부동한 자세인 데 비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할 용기를 탐험가는 갖고 있지 못하다. 끝까지 관찰자로 남을 뿐이다.
탐험가가 카프카의 예술적 자아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의 의지를 못 가진 방관자의 우유부단한 태도이다. 즉 어느 하나의 세계에 소속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양가치적 자아의 소산이라고 보여진다. 이 세계가 모순된 제도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의 정의가 왜곡되었으며 곳곳에서 비인간적인 잔인함이 드러나 있고 이런 잔인한 세계의 제도를 추종한 결과가 허무한 파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낼 뿐 아니라, 세계를 진실하게 개선할 예술가로서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연약한 의지의 형상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 작품이 살인기구의 기능을 통해 전쟁을 풍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나치즘의 강제수용소를 예언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지만, 이것이 『소송』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예술과 삶이라는 분열적 위기를 한참 겪는 시점에 쓰여졌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장교와 탐험가라는 대조적인 인물이 한 공간에서 연출되는 묘사를 볼 때, 내외 세계의 분열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특히 법과 제도의 무거운 주제가 일단락된 뒤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기 전의 묘사가 일상의 진부한 찌꺼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카프카에게 되풀이하여 나타나듯이 최후의 승리는 외부사회의 삶이 차지한다는 결말구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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