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만에 전달된 상해임시정부 애도 편지
1930년 12월 대구 달성. 인흥마을의 수봉 문영박 선생이 50세에 세상을 떠나자 10개월 후 1931년 10월 상해임시정부에서 선생을 애도하기 위해 추도문을 보냈는데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主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
어르신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내용인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다. 즉 ‘한국 역사를 의미하는 분’이라는 부분이다.
도대체 상해임시정부에 어떤 기여를 했기에 이런 극존칭의 추도문을 썼을까?
가족까지 감쪽같이 속여 엄청난 군자금을 보냈는데 이는 인수문고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1910년부터 수봉이 자비를 털어 20년 동안 모은 8500여 책을 사들였는데 1책이 2~3권 분량이라니 약 2만권 분량으로 안동 도산서원의 2배에 육박하며 문중문고로는 국내 최대권수를자랑한다.
1910년이면 나라를 빼앗긴 해가 아닌가?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설립되었으니 아마 고액의 책 대금이 상해임시정부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서고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전집이 많은데 중국 서책을 비싼 값으로 쳐주었다고한다.
이 추도문이 발견된 사연 역시 극적이다.
상해임시정부는 조문을 전달하기 위해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교재를 국내에 밀파하지만 안타깝게도 문건을 전달하기 전에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고 만다.
1963년 수봉 사후 32년 후 이교재의 자손이 집을 수리하기위해 여기저기 손을 보고 있는데 천정에서 보따리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걸 열어보니 바로 이 조문이 담겨진 편지.
혹독한 고문에도 이교재 열사는 함구했기에 이 문서가 32년 후 빛을 본 것이다. 이교재의 부인 홍태출 여사와 아들 이정순은 32년 만에 원주인이자 상주인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을 찾아 이 문서를 드렸으니 전달한 이나 전달 받은 이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조문은 물론 특발문까지 있었다. 1930년대 당시 국제정세와 임시정부의 절박한 사정 그리고 군자금을 부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발문에도 大孝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중국에서 상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마 1931년에 문영박의 아들이 이 편지를 받았다면 아마 군자금을 선뜻 내놓지 않았을까. 만약 일경에게 이 편지를 빼앗겼다면 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고 남평문씨 한옥마을은 사라졌을 것이다. 어째튼 증조부와 부친은 아무 이유 없이 40일을 구금 당해 온갖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일단 가둬둔 것이다. 그 물증이 32년만에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독립운동가 이교재 순국열사도 기억해야 할 대상. 김구 선생이 환국했을 때 이교재 열사를 가장 먼저 문상을 했다고 한다. 요즘 말하면 스파이 역할을 했을 텐데 당시 임정에서 그의 비중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증손자가 이 서류를 조심스레 꺼내는 것을 지켜 보았다. 증조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비단에 인쇄된 글자 한 자, 한 자가 애국의 혼처럼 보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문영박 선생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댓글 모놀답사지로 딱 좋은 곳인데요...에효
에효~~~222
지금 열심히 책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책에 들어갈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