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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좋은글 & 감동글 스크랩 실낱같은 진학(進學)의 꿈
조처음 추천 0 조회 17 16.03.21 0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25사변(事變) 때에 병원(病院)건물(建物)이 파괴(破壞)되고

교회(敎會)자리가 시신(屍身)을 안치(安置) 하는 그런 곳인데

사람이 가기를 꺼려하는 쓸모없는 흉가(凶家)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 교회(敎會)가 큰 축복(祝福)을 받아

자립성장(自立成長)을 해서 (大形敎會)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곳이 내 모 교회(母敎會)이고 내가 처음 주를 영접(迎接)한 곳입니다.

내가 구원(救援) 받고 주님께서 나를 택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벡텔회사(會社)가 부산(釜山)에 화력발전소(火力發電所)를

짓는 다고 외국(外國)으로 나갔던 회사(會社) 팀들이 돌아 와서

형을 오라는 연락(連絡)이 했습니다.

나는 학교(學校)를 중퇴(中退)한 때라

형이 취직(就職)이 되 것에 별 관심(觀心)이 없었습니다. 

그 열성(熱誠)으로 교회(敎會)를 열심(熱心)히 다녔습니다.

(아랫글중에서)

 

 

 

 

 

병상에서 쓰는 나의 참회록(懺悔錄

네 번째 이야기

실낱같은 진학(進學)의 꿈

글 조 처음

형은 군대(軍隊)에 입대(入隊) 하고 나서 일 년이 지났습니다.

형이 군대(軍隊)에서 제대(梯隊)하려면 이년을 더 기다려 야 했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군의복무기간(軍服務期間)은만(滿)3년 이니까?

개월(個月)수(數)로 36개월(個月)을 꼬박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군 생활(生活)을 할 때도 형보다 2개월(個月)이 줄어서

34개월(個月)을 의무(義務) 복무(服務)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의무(義務) 복무(服務)기간이 18개월(個月) 아니면 19개월(個月)이면

만기제대(滿期除隊) 하는데 그것도 아이들은 너무 많다고 투덜대는데

예전에는 우리들과 형이 군 생활(軍生活)을 할 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지요?

나는 아직 2년을 나무꾼으로 지게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무렵에 우리 집 위쪽에 커다란 사찰(寺刹)이 하나 있었는데

사찰(寺刹)에서 농촌계몽農村啓蒙)(운동(運動)을 하는

김명수(金明洙)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시절(時節)에는 6*25전쟁(戰爭) 후라

전쟁고아(戰爭孤兒)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70여명의 전쟁고아(戰爭孤兒)들을 데려다 교육(敎育)을 시키고

먹이고 잠을 재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나이가 스무 살이 넘은 형뻘 되는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나같이 어렸습니다.

고아원(孤兒院) 아이들은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사람들은 모두 국민학교(國民學校)에 들어갔었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과거(過去)에 학교(學校) 다닌 경력(經歷)이 없어서

학교(學校)도 못 보내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고아원(孤兒院)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나라에서

모두 의무적(義務的)으로 공부(工夫)를 시켰습니다.

그들은 옷도 모두 미국(美國)에서 원조(援助)를 해준

구제품(救濟品)으로 입었고 먹을 것과 모든 학용품(學用品)은

나라에서 무상(無償)으로 대 주었습니다.

구제품(救濟品)이란 지금 우리가 집에서 쓰다가

모두 버리는 헌옷과 같은 그런 수준(水準)이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천주교(天主敎)와 고아원(孤兒院)이나

양로원(養老院) 같은 시설(施設)에만 옷과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이

제공(提供)되고 일반인(一般人)은 아무것도 얻지 못 했습니다.

내 어릴 때는 천주교(天主敎)나 고아원(孤兒院)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지금도 그 김명수(金明洙)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선생님이 읍내에 있는 불교(佛敎) 포교당(布敎堂)에다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라는 중학교(中學校)

과정(科程)의 학교(學校)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포교당(布敎堂)은 과거(過去)에 나라에서 처음 중학교(中學校)를 세울 때

이곳에서 시작(始作)된 중학교(中學校)의 전신(全身)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공민학교(公民學校)선생님 들은 모두 자원봉사(自願奉仕) 하는 사람들이고

모두 명문(名文)대학(大學)을 나온 엘리트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모두 관공서(官公署)에 근무(勤務)를 하는 분들이고

영어(英語)나 수학(數學) 같은 과목(科目)은 어렵기 때문에

특별(特別)히 고등학교(高等學校) 선생님들이 가르치셨습니다.

교과서(敎科書)와 학용품(學用品)도 무료(無料)로

모두 고아원(孤兒院) 원장(院長)님이 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몸소 집에 찾아 와서 어머니께

내일 개학(開學)을 하니 학교(學校)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주님을 영접(迎接)하지 못 했던 때라

그 분들의 말씀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의 사모(師母)님은 내가 국민학교(國民學校)에 다닐 때에

이해종 선생님이라고 1~2학년 때 담임(擔任)선생님 이었습니다.

지금 생각 하면 지금도 그 두 분 내외분(內外分)의

은혜(恩惠)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 학교(學校)가 밤에만 수업(受業)을 하는

야간(夜間)중학교(中學校)에 해당(該當)되는 것이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가 내리는 날이면 낮에 일을 하던 아이들이 노니까?

오라고 불러서 수업(受業)을 했습니다.

낮에는 땔나무를 하고 밤에는 공부(工夫)를 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

이라고 하지만 낮에 일을 하고 밤에 수업(受業)을 하려고 하면

무척 졸리고 하품이 나오고 선생님의 말씀이

들어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그렇게 2년이 흘러갔습니다.

나는 집에 땔 나무꾼으로 살면서 2년을 버티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제대(除隊)를 하고 돌아 왔습니다.

우리 집은 다시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옛날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부대(部隊)서 형은 어디서 구했는지 많은 돈을 가져 왔습니다.

알고 보니 나를 공부(工夫)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리고 형으로의 동생에게 한 약속(約束)을 지키기 위해

군에서 받은 작은 봉급(俸給)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貯蓄)을 한 돈과 제대(除隊) 할 때에

부대(負袋) 내에서 전우(戰友)들과

부대(部隊) 내 간부(幹部)들이 걷은 송별금(送別金)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집으로 가져 왔습니다.

지금은 이런 제도(制度)가 없겠지요?

그런 형이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나이 마흔이 조금 넘어서 간경화(肝硬貨)로 쓰러지시고

곧 바로 이 세상을 떠 나셨습니다.

 

그 날 형은 시장(市場)에서 교복(校服)을 한 벌 사왔습니다.

그 때 형은 교복(校服)으로 나에게 빚진 미안 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내가 삼년을 땔나무를 하느라 고생(苦生)을 했다는

미안함의 표시(表示)기도 했습니다.

형은 영어(英語)와 일본어(日本語)를 잘 해서

발전소(發電所)를 짓는 미국(美國) 파시획벡텔 회사(會社)

라는 곳에 취직(就職)을 했습니다.

그 회사(會社)에는 봉급(俸給)을

월급(月給)으로 주지 않고 주급(週給)으로 주어서

우리의 삶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지냈습니다.

나는 중학교(中學校) 일 학년(學年)에 입학(入學)한 것이 아니라

3학년에 편입(編入)을 해서 초등학교(初等學校)에서 함께 졸업(卒業)한

동창(同窓)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동창(同窓)들은 내가 중간(中間)에 편입(編入)해 들어 온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 하는 친구(親舊)들이 많았습니다.

하나의 시샘이고 질투(嫉妬)에서 나오는 심술(心術)이지요!

중학교(中學校)에 들어 간 그 이듬해에

졸업(卒業)을 하고 고등학교(高等學校)에 들어갔습니다.

집안에 가족(家族)은 많고 생활비(生活費)는 많이 들어가고

형이 타오는 주급(週給)은 한계(限界)가 있었습니다!

그 해에 발전소(發電所)가 완공(完工)이 되고

미국(美國) 벡텔회사(會社)가 떠나고

형은 다시 실업자(失業者)가 되었습니다.

회사(會社)에서는 형을 함께 가기를 원했는데 가는 곳이 외국(外國)이라

형은 가기를 원했으나 가정(家庭)을 꾸려 나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타국(他國)에 가는 것을 아버지가 원치 안했습니다.

그 무렵에 내 학비(學費)와 생활비(生活費)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나는 또 학교(學校)에 내는 공납금(公納金) 때문에

학교(學校) 담임(擔任)선생(先生)에게 시달리기 시작(始作) 했습니다.

일 년에 4기분인데 3개월(個月)이 1기분이고 일 년치가 밀렸습니다.

하루는 교장(校長)이 교실로 찾아와 나를 불러냈습니다.

교장(校長)왈~ (曰) 이 학교는 자선단체(慈善團體)가 아니다.

돈 없는 사람은 내일부터 학교(學校)를 나오지 마라!

청천 벽력같은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교장(校長)의 이름을 기억(記憶)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정(事情)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高等學校) 2학년(學年)

학기(學期)말에 학교(學校)를 중퇴(中退)하고

그날 집으로 돌아 와 가족(家族)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의 상처(傷處)가 평생(平生)을 두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해 학교(學校)를 퇴학당하기 전에 교내(校內)

가을 녘에 개교(開校)기념(記念) 마라톤 대회(大會)가 열렸습니다.

그 무렵 나와 함께 초등학교(國民學校)도 함께 졸업(卒業)한

문**이란 친구(親舊)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親舊)가 나를 이끌다 시피 나의 오른 팔을 당겼습니다.

그 순간(瞬間)에 주께서 나를 택하시고 작은 개척(開拓)교회(敎會)로

택하여 이끄신 것을 그때도 믿었고 지금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때도 믿었고 그 순간(瞬間)에 마음이

무엇에 이끌리 듯 한 느낌을 받았는데

내가 앞에서 뛰고 있었는데 그 친구(親舊)가

나보고 잠간 어디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간곳이 어느 작은 개척開拓敎會)였습니다.

그 순간(瞬間)에 그 사람이 내 인생(人生)을 바꿔 놓고

친구(親舊)는 그 후에 그는 교회(敎會)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 곳이 옛날 일제(日帝) 때까지 시신(屍身)를 안치(安置) 하는

의료원(醫療院)영안실(永安室)을 하던 자리인데

6*25사변(事變) 때에 병원(病院)건물(建物)이 파괴(破壞)되고

교회(敎會)자리가 시신(屍身)을 안치(安置) 하는 그런 곳인데

사람이 가기를 꺼려하는 쓸모없는 흉가(凶家)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 교회(敎會)가 큰 축복(祝福)을 받아

자립성장(自立成長)을 해서 (大形敎會)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곳이 내 모 교회(母敎會)이고 내가 처음 주를 영접(迎接)한 곳입니다.

내가 구원(救援) 받고 주님께서 나를 택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벡텔회사(會社)가 부산(釜山)에 화력발전소(火力發電所)를

짓는 다고 외국(外國)으로 나갔던 회사(會社) 팀들이 돌아 와서

형을 오라는 연락(連絡)이 했습니다.

나는 학교(學校)를 중퇴(中退)한 때라

형이 취직(就職)이 되 것에 별 관심(觀心)이 없었습니다.

 

그 열성(熱誠)으로 교회(敎會)를 열심(熱心)히 다녔습니다.

내게는 주의 성령(聖靈)께서 임하시고 주의 내리신 계시(啓示)도

환상(幻想)으로 보여 주시고 믿음으로 최선(最先)을 다 했습니다.

부흥회(復興會)도 참석(參席)을 하고 기도원(祈禱院)도 다녔습니다.

주께서는 어디를 가나 항상(恒常) 나를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열여덟 살에 주일학교(主日學校) 반사(班師)를 했습니다.

사람이 부족(不足)하여 주일학교 총책(總責)을 맡은 부장(副長)을 했습니다.

교회(敎會)는 부흥(復興) 성장(成長)을 했습니다.

마귀(魔鬼) 사탄(詐誕)은 이때 나타나서 방해공작(妨害工作)을 했습니다.

교회(敎會)에 차츰 시험(試驗)이 들기 시작(始作) 했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교회(敎會) 나가는 것을 반대(反對) 했습니다.

하루는 성경(聖經)과 찬송가(讚頌歌)와 성경(聖經)통신(通信)학교(學校)

전 과정(科程)을 수료(修了) 했는데 형이 모두 책자와

모든 자료를 아궁이에 처넣은 일이 벌어 졌습니다.

교회(敎會)에 자주 가니 제사(祭祀)도 거부(拒否)하고

항상(恒常) 아버지와 형과 나와 교회(敎會) 때문에 다툼이 벌어 졌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고난(苦難)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럴수록 믿음은 더 강해 졌습니다.

글이 길어 죄송(罪悚)합니다.

어둠이 깔리니 쓸쓸하군요! 그리운 어머님 아버지 형과 누나

그리고 동생들 모두 그립습니다!

모두 다 고인(故人)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감사(感謝) 합니다.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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