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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수호성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친구를 위해 퍼다 놓습니다.
곧 이곳에 와서 보게 되겠지요.
좋은 친구들 만나고,
신앙이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정보가 많은 카페
인천가톨릭교리신학원 카페에서 공개한 게시글입니다. |
4월 16일 성녀 벨라뎃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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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글쓴이 :
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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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4월 16일
성녀 베르나데타 동정
Sta. Bernadetta (Bernarda), Virg
1844~1879년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의 동굴에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1844~1879)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특히 묵주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루르드를 방문하였고 기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루르드 홈페이지 http://www.lourdes-france.com/bonjour.htm
그녀의 이름은 마리 베르나르드(베르나데타) 수비루스로 1844년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가난한 물방앗간 주인의 맏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건강한 아이였으나, 7세부터 병으로 쇠약해져 2, 3년후에는 큰병에 걸려 임종 때까지 천식(喘息)의 고질(痼疾)로 인해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가정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예기치 않던 불행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가난해져서, 정든 집을 떠나 보잘 것 없는 초막과 같은 거처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베르나데타의
몸도 점점 약화될 뿐이었다.
베르나데타의 정신적 번민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많았다. 부모와 동생들을 극히 사랑하고 있던 그녀는 맏딸이면서도 병 때문에
가사를 돕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어머니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외출할 동안 집에서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 주는 정도 였다.
그녀의 가정은 빈궁 중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부자유를 감수 인내했다. 이 같은 탄복할 만한 태도는 견고한 신앙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의 발로이기도 했다.
베르나데타는 13세가 되어도 학교에 가지 못했고 따라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으나,
당시 그녀는 양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통학할 여가가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녀는 광막하고도 고요한 들에서 많은 기도를
바쳤다. 또한 뜨개질과 바느질도 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자기 집에 돌아오던가 아니면 아는 집에 들르던가 했었다. 남과
이야기할 때나 남의 말을 들을 때는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듣고 말했다.
14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번민하는 듯한 일상에다가 보통보다 작은 소녀로서 민감하나 쾌활한
기질이 있었으며, 다소 발육이 늦은 듯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때 그리워하던 학교를 처음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유명한
성모 발현이란 일대 사건이 돌발했던 것이다. 이 성스러운 부인의 발현은 베르나데타에게 커다란 위로와 풍부한 은총을 베풀어주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많은 슬픔과 시련의 원인이기도 했다.
1858년 2월 11일과 7월 16일 사이, 가브 강변의 얕은 굴속에서 그녀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18차례에 걸쳐 그녀는 매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는데, 그 부인이 자신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했다. 이 부인이 나중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호칭하게 되는 동정 마리아로 인정받게 되었다.(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2월11일.게시판946번)
성모 마리아의 발현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학교-최고의 영혼의 학교였다. 그녀의 영혼은 정결하고 죄의 물듦이 없었지만, 이
학교에서 성모의 슬하에서 확고한 신앙과 덕행의 기반을 형성했다. 그가 성모께 듣고 나서 전한 말씀을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주로
그녀의 이런 신앙과 덕행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베르나데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도 듣지 못했으나, 무슨 혼란이나 정신적인 이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발현이 있고 난 다음부터 거짓 환시가
유행병처럼 번졌으나, 교회 당국은 그녀의 체험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견지했다. 몇 년후 그녀는 의심 많은 불신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이 모든 것을 영웅적인 용기와 품위로써 물리쳤다.
성모의 발현은 끝났으나 그녀에 대해서의 엄격한 조사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베르나데타는 언제든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말했다. 이리하여 결국 성모 발현의 장소는 성지가 되어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매일같이 쇄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의 보통 심리로서 특별한 은혜를 받은 베르나데타에게 호기심을 품고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겸손한
그녀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이 되었는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자기가 그처럼 평판이 대단하다면 의기 양양하여 교만의 죄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나데타는 여전히 순박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소녀였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집안 일을 돌보며 양치기일을 했다.
그녀의 양친도 베르나데타와 같이 종종 방문객에게 금품을 받는 때도 있었으나 호의만을 감사하면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성모님의 은혜로 세상 재물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데타는 그러던 중 한 가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 세계를 떠나 수도원에 숨어 고요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었다.그녀는 곧 어느 수도원의 분원에서 안내직을 맡게되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고자 했으나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그녀를 위해
네베르에 있는 애덕회에 입회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이미 입회를 결심한 베르나데타에게 있어서 한가지 뼈아픈 것은 그리운 성모님을 뵈옵던 루르드의 동굴을 하직해야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참기 어려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혼연히 네베르를 향해 출발했다. 때는 1866년 7월 4일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일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오?" 이때
그녀의 대답은 "아픈 일"이라고 하였다.
수녀원에 도착한 베르나데타는 삼 일째 되는 날 모든 수녀들이 모인 가운데서 성모님의 발현의 내막을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순명지덕으로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그후는 다시 그 이야기 하는 것을 엄금 당했다. 그녀는
도리어 그것을 기뻐했다. 그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없이는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고 다만 마음에 만 새겨두어 종종 성모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드렸다.
수련기 중에 그녀는 중병에 걸렸었다. 모두들 그녀가 나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서원을 허락받아 기쁨에 넘쳐
서원식을 다 마치고 나자 기적처럼 다시 완쾌되었다. 그러나 교회 규정상 같은 동료들과 함께 수련기를 마쳐야 했다.
베르나데타가 병중에 취한 태도는 실로 인내의 모범이었다. 그녀는 고요한 수도원에서 병약한 몸으로 일생을 보내 세인이 놀랄만한
대사업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의 숨은 희생이나 순명, 극기, 겸손, 인내, 타인대 등의 여러 덕행에 있어서는 출중한 바가
많았다. 이는 하느님 대전에는 하나 하나의 찬란한 보석처럼 보였을 것이고, 쌓이고 쌓인 그의 공덕은 얼마나 많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베르나데타는 여러 번 병상에 누웠다. 그러다 마침내 재기불능이 되어 35세,1879년
4월 16일 루르드에서 성모를 뵌지 21년째 되는 해까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면서 임종을 맞았다.
루르드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란 것을 입증해 주었으며, 베르나데타가 운명한 지방인
네베르에서는 그녀의 기도로 생존시와 사후에 많은 기적들이 생겼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그녀의 성스러운 생애를 증명해 주셨다."
겸손하고도 가난한 동정녀의 덕은 장례 때부터 이미 빛나는 영예를 획득했으나, 성인품에 오른 다음은 한층 더 찬란한 광채를 발하게
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낮춘 베르나데타는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 마리 베르나데트 수비루 동정의 편지에서
(Ep. ad P. Gondrand, a 1861: cf. A.Ravier, Les ecrits de sainte
Bernadette, Paris 1961, pp. 53-59)
여인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두 여자 아이들과 함께 가브 강변에 땔나무를 주으러 갔을 때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목장 쪽을 바라보았더니 나무들이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동굴 쪽을 바라보니까 파란 띠에 흰옷을 입고 있는 한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양쪽 발등에는 노란 장미꽃이 꽂혀 있었고 그의 묵주도 같은 노란 색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을 바라보았을 때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 눈을 부볐습니다. 그리고는 묵주가 든 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십자 성호를 긋고 싶었으나
이마에다 손을 올릴 수가 없었고 손은 이내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부인은 자신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하려고 했습니다. 제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마침내 십자 성호를
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부인은 손가락 사이로 묵주 알을 굴렸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묵주의 기도를 끝마치자 환시는 사라졌습니다. 환시가 사라지자 두 여자 아이들에게 무얼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말해줄 게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흰옷을 입은 한 부인을 보았는데 누군지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나보고 거기에 되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했으나 저는 거절했습니다. 어떤 내적인 힘에 이끌리는 것을 느끼면서 일요일 날
거기에 다시 갔습니다.
그 부인은 제가 세 번째 갈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가던 날 나를 보고 보름 동안 자기에게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니까 사제들에게 가서 거기에다 소성당을 짓도록 청하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부인은 제게 샘에서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둘러 보아도 샘이 없기에 저는 가브 강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게 아니라면서 손가락으로 샘을 가리켰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약간의 더러운 물밖에 없었습니다. 손을 넣었지만 손으로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땅을 후비었더니 마침내 마실 수 있는 물이 조금 나왔습니다.
세 번은 버리고 네 번째 마셨습니다. 바로 그때 환시가 사라지고 저는 거기를 떠나 왔습니다. 그 다음 보름 동안 거기에
찾아갔었습니다. 그 부인은 월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제게 나타나 사제들에게 소성당을 짓도록 청해 달라고 다시 부탁했고
저더러 그 샘에서 몸을 씻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몇 번이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 부인은
제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팔을 펼치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는 자기는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보름 동안 부인은
제게 또한 세 가지 비밀을 계시하셨고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그 비밀을 충실히 간직해 왔습니다.
♬Ave Maria-Gregorian C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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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본명도 벨라뎃다인데요. 항상 부활절이나 그 부활절을 전에 있는 사순절과 맞물려서 다른 이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것 같아요. 올해도 부활절과 일치했거든요
+. 안녕하세요~ 모래무지님...^^* 반갑습니다!! 저의 수호성녀도 "벨라뎃다" 성녀 신데요~ 다시한번 성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저의 생활도 되짚어 보게 됩니다... 성모님의 달~ 5월... 특별한 은총안에서 머무르실 수 있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그곳 루르드 언제 다시가서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 정말.
그러고 보니 벨라뎃다 이시군요. 부르기도 좋고 너무 맘에드는 본명입니다.
"뎃다 벨라다" 후후 성녀님 죄송합니다. 어? 모래무지님도 벨라네 정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