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방법과 그에 따른 규칙이 있고, 놀이 장소 및 시간, 놀잇감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갖춰져야 한다. 여기에 개개인이 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사(자발성)와 재미, 놀이 세계로의 몰입(일상과 구분되었다는 느낌)이란 심리, 정서적 요소가 결합될 때 놀이가 전개될 수 있다. 외형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개개인이 갖는 내면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놀이에서 기록되거나 정리되는 부분은 어디에서(장소), 몇 명이(인원), 어떤 방법과 규칙으로, 얼마 동안, 무엇을 가지고(또는 그리거나 없이) 어떤 이름의 놀이를 했는가 이다. 이는 컴퓨터의 하드나 저작도구(ᄒᆞᆫ글, ppt 프로그램 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달 및 계승될 객관적 요소이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자료를 만들 때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내용을 입력해야 하는데 이 영역은 주관적이다. 카이와는 이를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 넣는 일로 비유했다.
수학 도형단원에 자주 나오는 칠교놀이를 아이들은 놀이로 여기지 않는다. 바로 방법과 규칙은 있으나 자발성과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형은 놀이지만 내면을 채우지 못하면 놀이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밖에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학놀이, 미술놀이 등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위징아와 카이와의 놀이이해
하위징아나 로제 카이와를 비롯한 사람들은 외형보다 내면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들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내면의 문제 중에 첫 번째가 자발성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발(자유)의 특징 하나만으로도 놀이는 자연의 과정과 구분된다. 놀이는 자연 과정에 덧붙여져서 개화(開化), 장식(裝飾), 발현(發現)한다.~ 어린 아이나 동물은 재미있어서 놀이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그들의 자유(자발성)가 깃들어 있다. ~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 의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간에 한가롭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주1)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자발성이란 자연과정(외형 조건)에 덧붙여져서(갖춰진 후) 개화(開化)-시작 조건의 확보, 장식(裝飾)-다양한 형태의 전개, 발현(發現)-놀이 형태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놀이가 시작되고 전개되며 완성되어 하나의 놀이로 필요충분조건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외형은 놀이라 해도 자발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놀이가 아니라 모방이란 지적은 날카롭고 적절한 지적이다.
카이와도 이 부분에 동의하면서 그만 둘 자유를 언급했는데 이는 자발성의 부분에 그만둘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됨을 의미한다. 즉 시작-전개-끝까지 자발적인 의사가 관철될 때 놀이의 요소를 온전히 갖췄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이가 자유롭고 자발적인 활동이며 즐거움과 재미의 원천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만 둔다>고 말하면서 언제든지 그만 둘 자유가 놀이하는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주2)
자발성은 특정한 목적 즉 결과물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활동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구현될 수 있다. 만약 아이들에게 공부가 놀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자발성(자유)을 완전히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 두는 것이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의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 부모나 교사의 어떤 강제나 지시, 압박, 요구가 있다면 이는 놀이가 아닌 것이다. 저학년의 경우 글자를 쓰거나 문제 풀기 할 때 힘든지 ‘안하면 안돼요?’, ‘그만 할래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부를 놀이로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기는 그만 하래도 더 한다고 한다. 자발성이 보장되고 재미를 느낀다면 이를 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발성과 지도의 충돌
아이들에게 특정한 놀이를 지도할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자발성이다.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놀이가 선정(선택의 자유)되고, 하기 싫어도 그만 둘 수(종결의 자유) 없는 상태에서 놀이가 전개될 때 놀이가 아닌 모방(模倣-흉내 내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적극적인 참여와 몰입, 재미를 느낄 수 없다면 이것은 자발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팽이 놀이나 8자 놀이와 같이 몇몇 놀이는 즐겁게 잘 놀기도 한다. 또한 어린 아이의 경우 위에서 언급했듯이 놀이와 공부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즐겁게 놀 수도 있다. 그러나 규칙이 복잡하고 기술이 필요한 놀이는 학습의 연장선으로 여겨 노는 척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비석치기나 고무줄놀이, 진놀이는 인지, 신체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고학년이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이런 놀이를 지도하는 것은 놀이의 특징인 자발성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무의미할까?
놀이에서 ‘자발성’과 ‘지도’는 모순(矛盾)이다. 자발성이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矛)이라면 지도는 막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방패(盾)다. 둘이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그래서 놀이는 지도되는 것이 아니라며 놀이를 지도하는 것은 아이를 기만(欺瞞)하는 것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주3) 있다. 그들은 아이들이 놀고 싶을 때 놀게 하고 싫증나면 그만둘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놀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일이며 자세라며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놀이를 지도하지 말고 어른들끼리 놀면 아이들이 하고 싶어 놀겠다고 할 때 함께 노는 것이 놀이지도의 전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주4) 자발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견해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만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놀이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인간은 생존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동물과 달리 앞 세대의 지적,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 다양한 도구, 먹거리, 집, 옷, 예술품 등 물질적인 것을 비롯하여 언어, 종교, 예술 등 정신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유형의 문화에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 무형 문화이고 이는 앞 세대의 전수 즉 교육을 통해서 습득해야 한다. 여럿이 집을 짓는다고 하자. 짓기 전에 여러 유형의 것들이 버티고 있다. 주위에 지어진 집, 망치며 못, 대패 등이 유형의 것이라면 설계하는 것, 도구를 다루는 방법 등은 무형의 것으로 이는 앞 세대에게 배워야 한다. 교육받지 않고서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교육이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반 요소로 학교 교육을 포함한 광의의 개념이다.
놀이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탈춤이나 강강술래, 진주 오광대 등 많은 무형문화재와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국가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특정 지역이 아닌 넓은 지역, 소수의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많은 사람에 의해 구현되었고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풍물이나 탈춤, 강강술래와 같은 놀이(전수자), 매듭, 갓, 활 등을 만드는 기술(장인)은 배워서 전승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데 놀이는 배우지 않고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된 까닭은 어릴 적 경험 때문이다. 어른들은 놀이를 따로 배운 적이 없고 그냥 놀다보니 알게 되고 즐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배움의 과정이 있었다. 만약 배운 적 없이 저절로 알게 되었다면 세계 여러 나라의 놀이가 똑 같아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말하는 것도 따로 배운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자. 놀이도 말과 같이 생활 속에 한 축이었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을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말이나 놀이는 물이나 공기와 같이 생존의 조건이었는데 너무 밀착되어 있었기에 그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흔해서 소홀히 다뤘다가 물은 사먹어야 하고 툭하면 황사경보로 숨 쉬기 조차 위협받고 있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격언에 딱 맞는 말이다.
인간에게 말(언어)과 같이 중요하고 필요한 문화유산은 놀이다. 말이 ‘필요에 의한 문화유산’이라면 놀이는 정신, 정서의 측면에서 살아있음, 살아갈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에 대한 문화유산’이다.주5)
“인간은 인간이라는 단어가 완전한 의미를 갖는 곳에서만 놀이를 하며, 놀이를 할 때에만 완전한 인간이 된다.”(프리드리히 실러)주6)
이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마셜 매클루언은 “놀이가 없는 사회나 인간은 하나의 공허한 자동기계(로봇)와 같은 ‘좀비상태’로 침몰한다. 만약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한다면 우리는 놀이를 해야 한다. 오직 놀이의 즐거움만이 완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준다.”주7)
고 했다. 여기에서 놀이는 완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가리켜준다고 했는데 이는 놀이란 머리가 아닌 가슴과 발로 가리키는 곳으로(놀이의 현장성, 직접성) 가야 함을 의미한다.
과거의 놀이 환경
나는 1970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서울 외곽에 살았다. 주변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 온 사람들이 많았고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대부분이었다. 한 집에 서너 가구가 세를 들어 살았고 아이들이 넘쳐 났다. 도로는 포장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거의 반반 이었고 집과 집 사이에 크고 작은 골목이 있었다. 넓은 공터나 골목으로 가면 형이나 누나, 또래가 늘 이런 저런 놀이를 하고 있었고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그곳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오징어놀이를 비롯하여 다방구(진치기), 깡통차기, 말뚝박기 등의 놀이를 했고 여자들도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했다. 때론 형이나 동생들과 이웃 동네로 놀이 원정을 가기도 했다. 주로 구슬이나 딱지(동그란)치기였는데 형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나나 동생들은 물주(도구제공) 겸 참관자의 역할이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놀이로 보냈다. 부모님은 저녁에 돌아오셔서 숙제나 일기를 말로만 점검하고 별다른 간섭이 없었다. 학교는 교사들이 주관하고 아이들이 종속된 시간을 보냈다면 집에서는 온전히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도 공부시간을 제외한 쉬는 시간, 점심시간 중 일부도 내 시간이었다. 이를 표로 나타내보자. 물론 편차가 있겠지만 교사나 어른 주도의 시간과 아동 중심의 시간이 비슷했고 점심, 등하교 시간과 같이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회색시간도 아동주도시간에 가깝다면 오히려 구속받는 시간보다 자유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물론 학원은 주판학원이 있었는데 소수가 다녔기에 논외로 한다. (참고:위의 표는 나의 경험을 기준으로 추정한 것으로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강하다.)
아이들이 많았기에 학교도 많았고 학교엔 운동장이 있었다. 시골과 달라진 것은 인원이 많다는 점 뿐이다. 운동장은 최상의 놀이터였다. 철봉에서는 허수아비, 늑목에서는 하늘 땅, 정글짐에서는 도둑잡기 등 운동시설은 중요한 놀이도구이기도 했다. 시골의 마당 놀이는 골목놀이로 대체되었다. 자동차가 거의 없어서 골목마다 놀이가 펼쳐졌다. 개발되지 않은 빈 공간도 좋은 놀이터였다.
놀이방법도 다양했다. 전국 각지의 아이들이 모이니 같은 놀이라도 놀이방법과 규칙이 조금씩 달라 더 재미있는 방법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놀이 표준형’이 모색되면서 각 놀이가 갖는 최상의 형태, 변화한 환경에 적합한 형태가 마련되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 구멍 자치기가 행해졌는데 이 시기에 원형 자치기로 바뀌었고 너무 길고 복잡한 단계도 대폭 줄여나가면서 도시형으로 개량되었으며, 제기차기도 많이 인원이 즐기기 위해 누가 더 많이 차는가 보다 종드리는 것이 중심이 되는 동네제기가 널리 행해지기도 했다. 또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어른들의 일로 여겨졌는데 학교 앞 문구점과 동네마다 가게가 있기에 아동이 물건을 살 기회가 대폭 확대되면서 동그란 딱지, 구슬치기가 꽤 오랫동안 대표 놀이로 자리잡게 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고무줄 구매가 쉬웠고 여럿이 할 수 있는 고무줄놀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반면 도시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비석돌, 돌로 된 공기, 버들피리 등과 같이 자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는 놀이들은 유행에 편승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라스틱 공기가 나오면서 공기는 꽤 오랫동안 여아들의 주된 놀이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가 대략 80년대까지 이어졌다.
놀이가 성립하기 위해 놀이 시간, 놀이공간, 놀이방법과 또래, 허용적인 분위기 등의 객관적인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또한 주관적인 조건인 방법 전수는 자연스레 이뤄졌고 놀이 종류는 계절에 따라 유행에 따라 다양성을 확보했으며 재미있었기에 매일 놀았다. 이런 상황에서 놀이가 아이들 문화에 주축이 되었고 그 안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다. 현재 놀이와 관련해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어린 시절엔 충분히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에 기초해 현재의 놀이를 해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달라진 놀이 환경
사회의 경제구조가 1차 산업인 농업 중심에서 2차, 3차 산업으로 빠르게 바뀌면서 그에 맞추어 삶의 모든 영역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변화 속도가 빨랐기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생긴 주거, 교통, 교육 등을 비롯하여 가치관, 인간관계, 직업관 등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속출했다. 사회가 변하면 놀이도 변할 수 밖에 없다. 놀이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 요인은 TV의 보급이다. 전국 <통계청>
년도
1967
1970
1971
1973
1974
1975
TV수
66062
378331
527888
962119
1306163
1613276
년도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TV수
3729229
4082219
4921595
3846368
6134274
4752250
“지난 61년말 KBS TV가 첫방영을 시작할 때만해도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유댓수는 2만대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79년에는 5백20여만대로 불어나 인구 1천명당 1백 40대가 넘고 4가구당 3대 꼴로 널리 수상기가 보급됐다. 0.5%에 불과하던 가정 보급률이 75%까지 끌어올려진 것이다.”(동아일보 1980.6.26.일)
통계청에서는 1983년 이후에 가구당 보급률을 아예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이후로 거의 가구당 1대 이상씩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통계조사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TV가 보급되고 그로 인해 놀이 시간이 줄어들었다. 어린이 만화영화를 비롯하여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면 놀던 아이들이 놀이를 중단하고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두 번째 요인은 오락실과 전자오락의 확산이다.
“DDR(댄스 댄스 레볼루션)로 대표되는 아케이드게임은 1990년대 후반까지 PCB(비디오 기판)게임 형태로 다양한 연령층을 끌어들이며 국내 문화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다.특히 1998년말 뮤직·댄스 시뮬레이션 게임기인 DDR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전국의 오락실은 2만5000여개로 급증,‘한 집 건너 오락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장했다.그러나 현재 전국의 오락실은 1만2000개에 불과해 2∼3년 사이 무려 50% 이상 급감한 상태다. (국민일보 2002.3.5)”
1980년대 중반부터 오락실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오락실이 운동장이나 공터에서 직접 몸으로 하던 놀이를 대체했다. 오락실에는 아이들로 북적였는데 놀이터는 텅빈 현상이 확산되었고 이후 개인용 PC가 보급되면서 놀이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예전과 다른 놀이환경에서 휘청거리던 놀이문화는 학원의 급증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놀이연구가들이 입을 모아 세 번째 요인으로 학원에 의한 놀 시간 축소를 꼽는다.
“2일 부산시교위에 따르면 부산시내 입시학원은 지난 80년 6곳에 불과했으나 85년 14곳,87년 21곳으로 늘어났으며 88년에는 무려 16곳이 신설됐고 89년에도 4곳이 새로 생겨 현재 41곳에 이르고 있다.”(연합뉴스 1990.3.2)
1990년대 경기 호황과 맞벌이 부부의 급증, 입시 과열 등의 요인은 학원의 촉발적인 증가를 가져왔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속셈, 태권도 등의 학원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놀이시간 뿐 아니라 놀이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놀이 시간의 감축은 시대변화와 비례했고 주거 환경도 아파트 형태로 바뀌면서 골목이나 공터가 사라졌으며 골목엔 아스팔트와 주차장으로 놀이공간도 사라지게 되었다. 게다가 초등 고학년이나 중고생들이 동생들에게 놀이를 전해주어야 하는데 모두 입시에 매달리다보니 놀이방법 조차 단절되는 결과를 낳았다. 고무줄 놀이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졌고 그로부터 10여년 지난 2017년에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공기놀이조차 단절 위기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자발성과 지도의 관계 (결론)
놀이를 지도하면서 자발성까지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지도란 것은 근본적으로 대상의 상황보다 지도하려는 목적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발성과 지도 가운데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의 문제이지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되돌려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끼리 놀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놀이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유롭게 놀이할 수 있는 시간의 확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 공간 조성,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친구 마련 등의 외적인 조건은 놀이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로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놀이 방법이나 규칙의 단절은 위와 같은 외적인 조건이 갖춰진다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앞 선 세대(어른들) 즉 놀이를 해보거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의 몫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놀이도 문화이고 그렇기에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놀이 지도가 레크레이션과 같이 지도자 중심의 일회성, 이벤트 형식이라면 이런 지도는 놀이회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놀이에서조차 종속성을 기를 뿐이다.주8) 스스로 하고 싶어서, 여러 놀이 중 선택해서 놀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지도라면 지도는 자발성을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놀이는 현장성이 강하기에 놀이 방법이나 규칙 등과 같이 기록된 것 이외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나 흐름 등 비가시적인 요소들을 잘 알아야 원활하게 전개될 수 있다. 지도를 통해 이런 것까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를 잘 배워서 스스로 놀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8자 놀이를 지도했다. 이때는 자발성보다 규칙을 이해하고 술래와 놀래의 역할을 알게 했다. 모여 있기보다 흩어져 있어야 하고 술래와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보면서 자신이 어느 곳에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지도를 받는 것이다. 처음 설명 듣고 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놀이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도 8자 놀이는 다행히도 방법이나 규칙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 어렵지 않게 이해했고 각자의 수준대로 놀이를 파악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나가서 8자 놀이를 해도 되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더니 몇몇이 그려진 놀이판에서 논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자주 보였다. 술래를 뽑고, 심지어 술래를 놀리면서 도망가고 쫓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신나했다. 지도로 시작한 놀이가 아이들의 자발성으로 완성된 것이다.
놀이지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스로 놀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지도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모색하는 것이 놀이지도자의 역할이다. 놀이를 지도하는 것은 자발성의 씨를 뿌리는 일이다. 싹이 나려면 먼저 씨를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기다려야 한다. 씨 뿌리는 행위는 씨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땅 속에 씨가 발아될 수 있는지는 심는 사람의 손을 벗어나 있다. 그러나 심을 때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을 최대한 마련해 준다면 더 많은 새싹을 돋아날 것이다.
각주> 주1)하위징아, 이종인 옮김, 『호무루덴스』, 연암서가, 2012. 41~42쪽. 주2)(로제 카이와, 이상률 옮김,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2003.29쪽. 주3)편해문, 『놀이가 밥이다』, 소나무, 2012. 참조 주4)마을공동체 교육 연구소, 소장 문재현. http://www.maul.or.kr/) 주5)여기에서 ‘필요나 존재에 대한 문화유산’이란 말은 인간에게 언어와 놀이가 갖는 역할과 가치를 따졌을 때 중심이 되는 구분점이라 여겨 필자가 고안한 개념이다. 주6)에바칼로/기요르기 발로그, 박성원 역 , 『자유놀이의 시작』, 행동하는정신, 2014. 4쪽./정낙림,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책세상, 2017. 141~166쪽 실러의 놀이 철학(인간의 완성과 놀이충동)이 자세하고 쉽게 설명되어 있다. 위의 인용은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1795)에 실린 글이다. 주7)노르베르트 볼츠, 윤종석 옮김, 『놀이하는 인간』, 문예출판사, 2017. 14~5쪽. 주8)서준호, 『교실놀이 백과』, 지식프레임, 2014.
<첨부하는 말>
* 내용이 길어서 작은 제목을 붙였습니다.
* 각주는 놀이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붙인 것입니다.
*쉽지 않은 문제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서 조금 신중하게 정리했습니다.
*생각이 다르거나 주장에 반박하고 싶으신 분은 주저없이 토를 달아주시면 논의를 진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누군가가 정리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갈 수 있게 스크랩 금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논의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댓글놀이지도에 자발성까지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놀이지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스로 놀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씨뿌리는 행위는 씨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 어쩌면 저는 자발성이란 씨만을 중시여겨, 돌밭에도 뿌리고 물 속에도 뿌리고 심지어 그냥 놔두기도 하며 흐뭇하게(?) 씨앗을 바라보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싹이 나지 않는 것을 환경 탓으로만 여겼죠
단단한 껍질을 깨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씨앗들을 보며 굳이 싹 틔우라고 해야하나..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씨앗 그 자체로 살면 어떠나.. 이미 씨앗이 좋은데 뭘 그리 고민하며 싹을 틔우려 하나.. 다른 사람들은 못 찾아낸 씨앗을 발견한것 만으로도 어딘가.. ... 부끄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의 현재 모습입니다
지난 심화연수 때 둘쨋날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때가 있었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놀이지도자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정적, 행정적 지원 및 책임을 지는 자. 교육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루쏘처럼, 최대한 아이들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 제대로 된 지도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놀이에 깊숙히 개입한 날엔 자책을 하며 보냈고, 반대로 자유놀이나 아이들이 원하는 놀이로 시간을 보낼 때엔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해 두 해 아이들을 만날수록 뭔가 허전하고, 좀 더 규칙을 강조하기도 하다가 그냥 놔두기도 하고, 규칙이 어려운 놀이를 지도하다가 바로 놀이를 바꾸기도 하고, 아이들이 재미없어 하면 규칙을 그 자리에서 바꾸기도 하며 그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쉽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놀이지도의 중심. 철학. 가치관. 대표님의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글에서, 이 모든 것을 읽고 점검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더 고민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첫댓글 놀이지도에 자발성까지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놀이지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스로 놀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씨뿌리는 행위는 씨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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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는 자발성이란 씨만을 중시여겨, 돌밭에도 뿌리고 물 속에도 뿌리고 심지어 그냥 놔두기도 하며 흐뭇하게(?) 씨앗을 바라보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싹이 나지 않는 것을 환경 탓으로만 여겼죠
단단한 껍질을 깨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씨앗들을 보며 굳이 싹 틔우라고 해야하나..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씨앗 그 자체로 살면 어떠나..
이미 씨앗이 좋은데 뭘 그리 고민하며 싹을 틔우려 하나..
다른 사람들은 못 찾아낸 씨앗을 발견한것 만으로도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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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의 현재 모습입니다
그 씨앗이 보통 씨앗이 아니라 생명의 근본이기에 보듬어 싹 틔워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심화연수 때 둘쨋날 활동가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때가 있었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놀이지도자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정적, 행정적 지원 및 책임을 지는 자.
교육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루쏘처럼, 최대한 아이들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 제대로 된 지도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놀이에 깊숙히 개입한 날엔 자책을 하며 보냈고, 반대로 자유놀이나 아이들이 원하는 놀이로 시간을 보낼 때엔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해 두 해 아이들을 만날수록 뭔가 허전하고, 좀 더 규칙을 강조하기도 하다가 그냥 놔두기도 하고, 규칙이 어려운 놀이를 지도하다가 바로 놀이를 바꾸기도 하고, 아이들이 재미없어 하면 규칙을 그 자리에서 바꾸기도 하며 그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쉽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놀이지도의 중심. 철학. 가치관.
대표님의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글에서, 이 모든 것을 읽고 점검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더 고민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긴 답글이 시원한 소낙비 같습니다. 생각만 하고 글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어찌어찌 정리하고 혼자 흐믓해 했는데 이렇게 응답하시니 고맙습니다. 더 힘내서 새로운 주제로 함께 하고자 합니다.
함께 읽고 토론해볼 거리로 좋은 주제네요.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토론해봤으면 합니다.고민하고 있던 부분에 답을 주시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