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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자모임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일 행
http://www.ilta.or.kr/html/main.html 일타스님 홈피
생활속의 기도법 **동곡 일타스님
기도성취의 지름길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란 지극히 적다. 우선 머리 속이 갖가지 생각들로 얽히고 설켜 있으니 혼돈이 지극하고, 말과 행동으로 지은 업들이 '나'의 앞길을 막고 있으니 마음먹은 대로 살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걱정들.... 자기 걱정, 가족 걱정, 남에 대한 걱정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기 마련이요, 돈과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애착과 모든 욕심을 남김없이 비우고 사는 것 또한 용이하지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버릇 때문에 비우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비우지도 못하고 내 마음대로도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도 '나'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냥 가만히 앉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오히려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업(業)만큼은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꼭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부처님이나 큰 힘을 지닌 보살님께서 세운 행원력(行願力), '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행원력에 의지하여 간절히 소원을 비는 기도 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기도인의 자세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한다'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등의 말을 자주 듣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급한 소원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또, 일체 중생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해탈과 관련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하지 않는 기도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기도는 비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비는 것이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든 힘이 있고 자신이 있을 때는 신심(信心), 곧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하고 자신이 없을 때는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신앙(信仰)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신앙이다. 신심이 아니라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매달려야 한다. 내 마음대로도 남의 도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특별히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자 한다.
1) 간절한 기도
기도를 할 때는 지극한 마음, 간절한 마음 하나면 족하다. 복잡한 형식이나 고차원적인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간절하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지극한 마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
간절하다는 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갖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 소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뭉쳐야 한다.
"잘 되게 하소서. 잘 되게 해주소서.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마음을 하나로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신라의 원효 스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이야기하면서,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져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얼어죽든 굶어 죽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밥 생각, 불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를 하다 보면 처음 얼마 동안은 마음이 잘 모이지만, 조금 지나면 갖가지 잡념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게 된다. 몸이 고단하다는 생각, 내가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공연한 기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기도를 망쳐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억지로 없애려 한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더욱더 일어나는 것이 번뇌 망상의 속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가 생기고 잡념이 일어나는 고비를 만나면, 거듭 소원을 곧게 세우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빠져들게 되고, 잠깐이라도 깊은 기도 삼매에 빠져들면 불보살의 가피력을 입어 소원을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북 영천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50대 초반의 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수년 전, 그 처사는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굴신조차 할 수 없는 허리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사는 들것에 실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침도 맞고 한약도 달여 먹었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구니 스님이 된 처사의 여동생이 찾아왔고, 여동생은 관세음보살 기도 할 것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부르면 죽을병도 능히 고칩니다. 그까짓 허리병 하나 못 고치겠습니까? 누워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니, '노시는 입에 염불한다'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외우십시오."
얼마 동안 처사는 동생이 시키는 대로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그러나 깊은 믿음이 없었던 그는 열심히 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영영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염불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 버렸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고 어찌 허리 병이 나을까 보냐? 나도 참 바보지. 일은커녕 걷지도 못하고 방구석에만 누워 있어
야 하는 이내 신세...... 아, 차라리 콱 죽어 버리자.'
그는 가족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도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 먹고 죽어 버리게 농약 가져오너라. 빨리 가져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족들을 향해 '농약 먹고 죽어 버리겠다'고 소리치자, 견디다 못한 가족들은 다시 동생 비구니 스님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세요. 틀림없이 허리가 나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고쳐? 여러 소리 말고 농약이나 가져와! 콱 죽어 버리게."
"그렇게 농약 먹고 발광하다 죽고 싶소?"
"그래, 이제 사는 것도 지겹다. 빨리 농약이나 가져오너라."
헛간으로 뛰어간 동생 비구니는 농약 한 바가지를 푹 퍼 가지고 와서 오라버니의 입 앞에 갖다 대며 소리 쳤다.
"자, 입을 벌려요. 내가 부어 넣어줄테니까."
"......"
"뭘 망설여요? '아' 하라는데......"
처사는 여동생의 당돌한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농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지런히 외우세요. 부지런히 외워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되면, 묘한 약이 생기기도 하고 용한 의사를 만나 병이 금방 낫게 될 것입니다."
여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처사는 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은 불렀다. 소리내어 관세음보살을 찾기가 쑥스러워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7일째 되던 날 저녁, 처사는 문득 꿈을 꾸었다.
처사가 사는 동네에 의사 한 명과 세 명의 간호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악성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모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동네 사람 모두를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처사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의사 앞으로 가자, 의사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처사를 끌어당겨 청진기로 진찰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예방주사로는 당신 병을 고칠 수가 없소, 저 침대 위에 누우시오."
처사가 침대 위에 눕기 바쁘게 의사는 맥주병 만한 큰 주사기를 가져와서 인정 사정을 두지 않고 허리에 꽉 찌르는 것이었다.
"아야!"
처사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고,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 자신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불편한 곳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구제 불능의 허리 병이 완전히 나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처사가 조급증과 무기력 속에 잠겼을 때 영영 기도를 그만두었다면 어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을 수 있었겠는가? 여동생 스님의 적절한 방편으로 처사는 관세음보살을 찾는 기도를 마음속으로라도 할 수 있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허리 병이 완쾌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수많은 생각들을 잘 단속하여야 한다. 오히려 잡생각이 일어날 때일수록 마음을 곧게 다져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나를 속일 불보살은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더욱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요긴하게 마음에 새겨라. 기도 성취의 비결이 '간절 절(切)'이 한 글자 속에 있음을!
물체의 형상이 길면 그림자도 길고 소리가 크면 메아리도 크듯이, 내가 드리는 정성이 크면 클수록 불보살의 감응(感應)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간절 切'이 한 그림자가 온몸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매에 빠져들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력을 크게 입게 된다.
부디 지극한 마음, 간절하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당부 드린다.
2) 요행수를 바라지 말라
둘째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자력(自力)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 까닭이 기도 법을 몰라서라기 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곧 기도를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수십 년을 절에 다닌 신도조차 요행수를 바라며 기도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도에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는다.
태양은 어느 곳에나 평등하게 빛을 준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빛을 받는 물체의 모습과 비례한다. 같은 태양 빛을 받는 사물일지라도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가 바르고, 형상이 길면 그림자가 길며, 형상이 짧으면 그림자가 짧은 법이다. 이처럼 불 보살의 광명 정대한 자비는 언제나 중생들의 정성과 함께 할 뿐, 요행을 바라는 마음과는 결코 함께 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요행수를 바라고 기도를 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측신(厠神)에게 기도하면 재수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변소에까지 밥을 가져가서 기도를 하고, '아무개가 족집게'라는 소문을 들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곳을 찾아가 점을 보기까지 한다.
사실은 신(神)이 내린 용한 점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하다못해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야지, 점을 보러 가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알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나'도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넘겨짚어서 하는 말일뿐이다. 그러므로 헛된 것에 의지하여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불자라면 불 보살의 광명 정대한 자비에 의지하여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치는 자력(自力)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점쟁이가 소원 성취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도를 한 번 해 볼까?"
"내가 절에다 많은 돈을 시주했으니 부처님께서 봐 주겠지."
이렇게 요행수를 바라는 기도는 마음에 때를 잔뜩 끼게 하고, 언젠가는 사도(邪道)로 빠져들게 한다. 나아가 진실한 불법은 10만 8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업장이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인 것이다.
정녕 지나치게 타력(他力)에 의존하여 자기 속까지 빼 주게 되면, 올바른 신심(信心)을 회복해 가지기가 매우 어렵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서 요행수를 떠난 자력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만 하면 업장은 저절로 맑아지고 복은 저절로 찾아 들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이여, 부디 명심하라.
부처님을 돌로 만들었든 쇠로 만들었든 나무로 만들었든 기도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도하는 장소가 사찰이건 집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지극 정성을 드리면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복은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부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신심 있는 기도를 하라. 신심 있는 기도를 할 때 환희심이 샘솟고, 환희심이 생기면 신심도 더욱 확고해진다. 아울러 환희심이 가득한 곳에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고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신심 있는 자력의 기도, 이 기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 능력에 맞추어서 일심 지성(一心至誠)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요행수를 떨쳐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름지기 요행수를 버리고 참된 '나'의 신심을 다 바치는 기도를 하라. 이것이야말로 기도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비결이요. 기도를 통하여 해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요긴한 가르침인 것이다.
이제 장을 바꾸어 불 보살 가피의 유형과 사례를 함께 묶어 살펴보도록 하자.
삼종 가피 속에서
기도는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소원이 있으므로 기도를 하는 것이고, 기도를 하는 이상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소원을 성취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불보살은 어떻게 가피를 보여주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여 가피를 입은 사례들을 유형별로 나누면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현실에서 바로 가피를 입어 소원이 성취되는 현증가피(顯證加被), 꿈을 통하여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시하는 몽중가피(夢中加被), 언제나 은근하게 보호를 받는 명훈가피(冥勳加被)가 그것이다.
이들 삼종가피(三種加被) 중, 다급한 일을 당한 사람이 기도를 할 때는 현증가피 또는 몽중가피를 입는 경우가 많고, 평소에 안락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명훈가피를 입어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가피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예를 들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현증가피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다급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다급한 일이 발생했지만 내 마음대로도 할 수 없고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면 그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다급한 생각에 음식 맛은커녕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지극히 기도를 하면 느닷없이 좋은 일이 찾아 들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증가피, 불보살께서 현실에서 바로 자비를 나타내어 가피력을 증명해 보이는 현증가피인 것이다.
나에게 자주 찾아오는 신도 중 일명 '부장판사 보살'이라는 분이 있다. 지금은 나이 70세가 다 되었지만, 약 20년 전 남편이 부장판사를 지낼 무렵에 처음 인연을 맺었으므로 아직까지 '부장판사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녀에게는 경기 여고 동창생인 반야행(般若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반야행은 매우 불심이 깊었으며, 동창생인 그녀에게 불교를 믿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나에게 데리고 온 것이다. 평생 어려움을 모르며 살았고 남편이 부장판사에 올라 있는 그녀였으므로 처음부터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스님, 불교를 믿을까요? 다른 종교를 믿을까요?"
"마음대로 하시오."
이렇게 까불까불하면서 몇 차례 찾아오더니, 하루는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나타나 다급한 일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저에게는 육군 소령으로 제대한 남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지요. 그 동생이 제대후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밑천이 모자란다며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기둥인데 어떻게 됐든지 성공해야지'하는 마음에서 있는 돈을 탈탈 긁어 빌려주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요구를 하여 남의 돈을 빌려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이란 게 애초부터 사기꾼의 꾐에 빠진 것이어서, 돈을 몽땅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빌려서 준 돈이 얼마나 됩니까?"
"제가 모아 놓은 돈은 고사하고 남에게 돌려쓴 돈과 이자만 하여도 5백만 원이나 됩니다."
그 당시로는 5백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으므로 남편과 상의하여 해결할 것을 권하였다. 판사 부인은 펄쩍 뛰었다.
"아이구, 스님. 우리 남편은 다른 일에는 관대하지만 돈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엄합니다. 우리 남편이 알면 저는 쫓겨납니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성당에 찾아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씀만 일러 주셨습니다. 스님,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내 마음대로도 안되고 남의 도움도 구할 수 없을 때는 부처님이나 하나님한테 '이 빚을 갚아 달라'고 매달릴 수밖에..."
"스님,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살님이 사는 대구 삼덕동에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법당에서 3일 동안 절을 하겠습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법당 한쪽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십시오. 적어도 3천배를 해야 합니다.
3천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대겁(三大劫) 동안 이 세상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한 번씩 절을 하는 것입니다. 시방 삼세 3천 부처님께 한 번씩 지성껏 절하면서 소원을 빌어 보십시오. 지극 정성을 다해 절하십시오. 그렇게 하기를 3일만 하면 부처님 중 적어도 한 분은 가피를 내려 틀림없이 지금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오."
부처님께 매달리기로 결심한 그녀는 이튿날 아침 관음사로 가서 절을 시작했다. 3천배가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참 더운 여름이었으므로 더욱 힘이 들었다. 3백배도 하지 않았는데 웃옷이 몸에 붙었고, 천번 정도 하니 아랫도리까지 흠뻑 젖어 버렸다. 2천배 정도 하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3천배가 가까워지자 엎드리면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판사 부인은 이를 악물고 할 수 있는 한 정성껏 3천배를 올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서 자고 있는데, 퇴근한 남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어디가 아픈가?"
대답은 않고 끙끙 앓기만 하는 아내가 애처로워 남편은 의사의 왕진을 청하였다.
"사모님이 요즘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병은 없는데요."
의사가 가고 난 후에도 그녀가 끙끙 앓자 남편은 밤새도록 얼음찜질도 해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튿날 남편이 출근하자 그녀는 또 관음사를 찾아가서 3천배를 하였고, 그 다음날도 그렇게 하였다.
남편 몰래 사흘 동안의 도둑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막 자리에 누우려는데 법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부장판사 님께서 방금 졸도를 하여 대학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그녀는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과로로 인한 졸도입니다. 입원하여 사흘 정도만 푹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밤에는 끙끙 앓는 아내를 돌보랴, 낮에는 또 법원에서 격무에 시달렸으니 과로하여 쓰러질 만도 하였던 것이다.
그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병문안을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 같으면 꽃을 들고 오거나 과일, 통조림 등을 가지고 올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원 비에 보태어 쓰라'며 부조금을 주고 가는 것이었다. 남편이 퇴원한 다음 그녀가 그 돈들을 세어 보았더니, 묘하게도 한 푼이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5백만 원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불호령을 내릴 줄 알았던 남편은 의외로 순순히 허락을 하였다.
"부처님께서 가피를 내리신 것이 틀림없구먼, 그 돈으로 빚을 갚도록 하구려."
그녀는 동생 때문에 진 모든 빚을 갚았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행하는 철저한 불자가 되었다.
이 부장판사 부인이 입은 가피가 바로 현증가피로서,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 많다. 만약 다급한 일이 있다면 어찌 용맹스런 기도 없이 해결을 보려고 할 것인가? 마땅히 다급한 일이 닥치면 힘있는 기도, 간절한 기도, 믿음이 깃든 기도로써 불보살의 품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리라.
2) 몽중가피
꿈은 우리 생활의 그림자요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불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낮에 먹은 마음이 그대로 연장되어 밤의 꿈 가운데 나타난다. 이것이 몽중가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소망이 꼭 이룩되게 해주십사' 하고 지극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소망에 부응하는 편지 한 장을 주거나, 약을 주거나, 차를 한 잔 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와 같은 꿈을 꾸면 자기의 소망은 그대로 성취되는데, 이를 일러 관세음보살의 몽중가피라고 한다.
곧 꿈속에서 받는 통지서는 합격 통지서요, 차를 한 잔 받아 마시거나 청심환 한 알을 얻어먹으면 몸이 좋아진다는 징조이다. 꿈 가운데 열쇠를 하나 받으면 이튿날 생각지도 않던 돈이 들어오게 된다.
불가(佛家)에 전해지고 있는 기도 영험담 중에는 삼종가피 중 이 몽중가피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약 1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서울 미아리에 40대의 보살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 닦은 복이 많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고,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잘 돌보는 남편을 만났으며, 아이들도 착실하게 공부를 잘하여 근심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입안이 허는 병이 생겼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온 입안이 헐어서 음식은커녕 물조차 먹기 힘든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한의원을 찾아가니 '입안이 허는 병은 위장에서 온다'고 하며 위장약을 지어 주었으나 역시 효험이 없었다.
설상가상이라 더니, 마침내는 혀를 움직일 때마다 입안이 아파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몰골은 여위어만 갔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신경만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남편의 자상한 보살핌, 아이들의 재롱도 귀찮게 느껴질 뿐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 가까이에 있는 절을 찾아갔다.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살려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으나, 엎드리면 이빨이 다 쏟아지는 것 같아 절도 할 수 없었다. 입안이 퉁퉁 붓고 헐어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가만히 앉아 부처님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빌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제 입병 좀 낫게 해주십시오."
온 종일 부처님만 쳐다보면서 이렇게 한마음으로 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열심히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불단을 내려 오셨다. 그리고는 다기(茶器)에 담겨 있는 물을 찻잔에 가득 따라 주셨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마시려는데 부처님께서 일러주셨다.
"그냥 삼키지 말고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넘겨라."
그녀는 시키는 대로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거짓 말처럼 입병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매운 음식, 짠 음식, 그 어떠한 것을 먹어도 입안이 아프지 않았다.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기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감격하여 불교 신문에 이 사실을 투고하였다. 글솜씨는 서툴지만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가피력을 알리고자 투고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다급한 일을 당한 불자라면 몽중가피를 입을 때까지 일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꼭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 念'자 염불(念佛). 꼭 입으로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열심히 생각하면 그것이 참된 염불이요, 생각하고 매달리는 마음이 간절하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3) 명훈가피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외우는 예불문 끝 부분에는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唯願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勳加被力)....."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 뜻은 "오직 원하옵건대 다함없는 삼보께서는 대자대비로써 저의 정성스런 절을 받아들여 은근히 가피력을 내려 주옵소서" 하는 것이다.
옛 말씀에 '노는 입에 염불하랬다'고, 가거나 오거나 빨래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관세음보살을 불러서 염염관세음(念念觀世音), 생각 생각에 관세음보살이 함께 하게 되면 가는 곳마다 머무르는 곳마다 편안한 세상, 곧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으로 바뀌어 버린다.
바로 이것이 명훈가피이다. 언제나 불보살의 보호를 받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난이 저절로 피해 가고 항상 기쁘고 편안하고 즐거움이 가득하게 되며, 입가에는 미소를, 가슴에는 태양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명훈가피에 대해서는 나의 큰 제자인 혜인(慧印)스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혜인스님이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5.16 직후라서 군대가 요즘처럼 편안하지 못하고 아주 고될 때였다. 기합도 심하여 걸핏하면 '군기가 빠졌다'고 하면서 방망이나 곡괭이로 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엉덩이를 맞았다. 사소한 실수라도 용납하지 않고 인정 사정없이 두들겨 팼던 것이다.
혜인 스님은 군복무를 하면서 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훈련을 받을 때에도 '하나-둘-셋-넷' 할 때에 '관-세음-보-살' 하면서 구령을 붙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곧바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한 번씩 외웠다.
어느 날 혜인스님은 그 당시의 군대에서 볼 때 크게 군기가 빠진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연탄불을 갈기 위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연탄을 내무반밖에 둔 채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그만 잊어버리고 갖다 넣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중대장이 발견한 것이다.
"어떤 놈이 불붙은 연탄을 이곳에 두었어?"
'나 때문에 우리 소대원 전체가 기합을 받겠구나.'
혜인스님이 조바심에 떨며 자백을 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대대장이 그 중대장을 찾았다. 정말 뜻하지 않게 기합을 모면한 것이다.
또 한 번은 난폭하기로 이름난 하사에게 소대 전체가 기합을 받게 되었다. 그 하사는 '손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하더니, 야구 방망이를 들고 한 명씩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백정같이 생긴 하사가 힘을 다해 때리니 맞은 사람들은 모두 쓰러지고 뒹굴고 난리가 났다. 쭉 차례대로 맞아 오다가 혜인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혜인스님의 눈에는 그가 염라대왕의 사자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내무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장교가 나타났다.
"너 이 자식! 또 아이들 패는구나." 하더니만 그 하사를 혼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쓰러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면서 '안 맞았다'고 우물우물 넘어가는 바람에 기합이 중단되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혜인스님 앞까지 와서 기합이 중단되는 일이 생기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관세음보살과 화엄성중을 부르다가 잠이 든 혜인스님은 꿈을 꾸었다. 자기가 수백 명의 병사와 함께 연병장에 서 있었고, 주위에서는 총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장교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를 불러내더니 어디론가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 부대 전체가 연병장에 모여 서 있는데, 어디서 지프차가 하나 오더니 혜인스님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어쩐 일인가'하여 가 보았더니, 육군본부에 가서 상장 쓰는 일을 맡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오십 장씩, 백 장씩 글씨 쓰는 연습을 하였다. 사실 그전까지는 붓글씨를 잘 쓰지 못했는데, 그때 붓글씨 연습을 실컷 하여 한글 글씨가 크게 향상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혜인스님은 그 힘든 시절에 붓글씨를 쓰면서 편안하게 군복무를 마쳤으니, 항상 기도하면 불보살의 은근한 가피가 언제나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명훈가피를 입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종일 기도하지 않아도 좋다. 하루에 108배 또는 10분 동안의 관세음보살 염불 기도라도 꾸준히 해보라. 틀림없이 명훈가피를 입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평화로움이 깃들게 된다. 하물며 언제나 불보살을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어찌 마음이 태양처럼 밝아지지 않으리.
거듭 강조하건대 기도성취의 비결은 '간절 (切)'에 있고, '간절 切'은 삼매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 잠깐이라도 삼매를 이루게 되면 불보살의 가피는 저절로 찾아 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형편 따라 능력 따라 내 마음을 내가 모으는 기도를 하자. 흩어진 정신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서 불보살과 한 몸을 이루는 기도를 하자.
이렇게만 하면 불보살께서 은근히, 그리고 현실 속에서 우리를 보호함은 물론,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영원 생명, 무한 능력이 개발되고, '내'가 서 있는 이곳 또한 사바세계가 아닌 불국토로 바뀌게 된다.
부디 올바른 기도법에 의해 참된 기도를 하는 불자가 되기를 당부 드린다.
제 2장 생활속의 기도법
제 1장 <기도 성취의 지름길>에서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간절 절(切)'로 기도할 것과 기도를 하여 얻게 되는 불보살의 삼종가피(삼종가피)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도법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잠자기 전에 기도를
1) 임종 전과 잠들기 직전이 중요하다
사람의 한 평생 가운데 제일 중요한 순간이 언제인가? 죽기 직전이 가장 중요하다. 죽기 직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죽느냐에 따라 내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임종에 다다랐을 때 "내생에는 참선 정진하며 살아야지!"하는 원력을 강하게 세우면, 그 다음 생까지 그 힘이 그대로 전달되어 일평생 도를 닦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무량한 빛, 무량한 수명의 아미타불과 함께 하여 극락왕생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강한 원한을 품고 죽으면 한을 품은 떠돌이 귀신이 되거나, 다음 생 전체를 복수를 위하여 소모해 버리는 허망한 일생을 보내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면 자기가 지나온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내생의 행복을 위해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부족했던 점이나 못 다한 것이 있으면 원을 세우고 기도하면서 다음 생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원을 세우면 영혼이 몸을 떠날 때 그 원의 싹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택하여 태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원력이 새로운 삶의 기둥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럼 하루 중에는 언제가 가장 중요한 시간인가? 잠들기 직전의 5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왜 잠들기 직전의 3분이 가장 중요한가?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식의 세계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잠이 들면 잠재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지극히 고요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의식적 활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조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세계를 보다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잘 개발해야 한다.
만약 잠자기 5분전부터 아주 나쁜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면, 그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깨어나서도 매우 좋지 않은 기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잠들기 5분전에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부르고 자면 편안한 수면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깨어나서도 곧바로 '관세음보살'을 찾는 맑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참선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잠들기 전에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또렷이 잡고 잠들면 깨어날 때까지 화두가 그대로 살아있게 된다.
곧 관세음보살이나 화두가 수면과 함께 의식에서 잠재의식-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잠이 깰 때 무의식-잠재의식-의식의 세계로 다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잠자기 전의 5분 집중은 3시간, 5시간, 7시간의 집중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원리를 기도 법에 적용시키면 매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므로, 나는 이 기도 법을 우리 불자들에게 즐겨 권하고 있다.
2) 수험생과의 대화
그럼 잠들기 전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인가? 그 비결은 집중과 간절함에 있다.
나는 종종 대학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과 기도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요즘 시험 공부하느라고 힘들지? 공부는 잘 되느냐?"
"스트레스만 쌓일 뿐 공부가 잘되지 않습니다."
"내가 공부 잘되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예!"
"잠들기 전에 '내일 새벽 몇 시에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하고 잠들어서 그 시간에 눈이 번쩍 떠지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
"예, 자주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방법을 쓰면 된다. 잠들기 직전에 '관세음보살'을 부르되, 먼저 허리를 쭉 펴고 심호흡을 세 번 이상해라.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킨 다음 침을 꿀꺽 삼켜, 그래서 숨을 막아. 그럼 당연히 숨이 꽉 찼지? 꽉 찬 숨을 아껴서 한 번의 숨을 다 내쉬는 동안 관세음보살을 108번 부른다.
왜 한 숨에 108번을 부르라는 것인가? 천천히 부르면 잡념이 많이 생기지만, 한 숨에 아주 빨리 108번을 부르면 집중이 잘되고, 간절한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처음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서 천천히 시작하여 서너번 지나면 점점 빨리 불러. 그래서 마침내는 한 번 한 번 부르는 '관세음보살'소리가 앞 뒤 간격이 없을 만큼 빠르게 불러야 한다. 너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지만, 옆에서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빨리!
이렇게 빨리 부르면 능히 한 숨에 108번을 부를 수 있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30번, 40번밖에 부를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능력껏 부르고 숨을 깊이 들이키면서 속으로 기원해라.
'관세음보살님!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잘 됩니다. 이번 시험은 틀림없이 붙었습니다(3번)'
그리고 다시 앞의 요령대로 관세음보살을 108번 부르고 기원, 또 108번 부르고 기원..... 이와같이 세 차례 또는 일곱 차례 반복하면 자기 암시가 되어 공부도 잘되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능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시간은 5분 또는 10분 정도 걸리지. 한 번 해 보겠느냐?"
"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매일 잠자기 전에 꼭 하고 자야 한다. 혹 여행 또는 다른 집에 가거나 하여 할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도 있을거야. 그럴 때는 변소나 목욕탕에 들어가서 해도 괜찮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해도 괜찮아.
방에서 할 때는 바닥에 또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하고 잠자리에 들어가도 속으로 기원을 해라. 그래야 잠드는 순간과 접속이 되어 잠재의식 속으로 짝 붙게 되니까....
나는 아직까지 이 기도 법을 실천한 학생들 중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하루 5분, 10분의 잠자기 전 기도가 예상 밖의 좋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3) 가족과 중생을 위한 기도
나는 학생들에게 권하는 이 기도 법을 재자불자들에게 즐겨 일러주고 있다. 곧 가족을 위한 기도를 집에서 매일 하라는 것이다. 그때도 요령은 마찬가지이다. 잠자기 직전, 한숨에 108번의 염불과 기원....
다른 점이라면, 앞의 수험생 경우는 자기 기도를 자기가 하는 것이지만, 가족을 위한 기도는 남의 기도를 대신해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신해 주는 기도라 하여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해 주는 기도의 원리는 햇빛을 거울로 받아 어두운 방을 비춰 줌으로써 그 방을 환하게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가족 중 한 사람을 생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의 밝은 가피가 그에게로 향한다. 남편이나 자식이 직접 기도를 하지는 않지만, 내가 기도하는 힘으로 모두 잘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가족끼리는 뇌파작용, 뇌전파작용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다. 기도하면서 이 텔레파시를 보내면 불보살의 밝은 광명이 그 가족에게 전달되고, 그 가족이 밝은 광명을 받게 되면 어둡던 장애가 사라져서 뜻과 같이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대상으로는 가족을 중심에 두되, 친가 사람, 시가 사람, 외가 사람을 막론하고 마음이 가는 사람 모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좋다. 결코 편협한 마음으로 기도 대상에서 제외한다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한 번은 지족암에서 법문을 하면서 "식구들마다 기도해주라"고 했더니만, 법회가 끝난 뒤 노보살 한 분이 따로 찾아왔다.
"스님, 우리 큰사위는 기도를 안해줄랍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큰사위가 부산에서 판사 노릇을 하는데, 하루는 딸네 집에 찾아갔더니 참외를 깎아 줍디다. 그런데 깎은 참외를 칼로 푹 찍어서 '어머니, 잡수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부랑 무식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꼴도 보기 싫은데, 어찌 기도가 되겠습니까?"
"해주고 안 해주고는 보살 마음이지만, '미운 사람일수록 극락왕생토록 기도해주라'는 옛 스님 말씀도 있지요."
이렇게 대화를 마친 뒤 잊고 있었는데, 그 노보살이 다음 달 법회에 참석하여 말하였다.
"지날 달 법회한 날부터 스님 말씀대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기도를 하였는데, 미운 큰사위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일 뒤 큰사위가 교통사고를 만났지 뭡니까? 차는 많이 부서졌지만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디다. '저 사위 죽으면 내 딸은 어떻게 될꼬?' 그래서 그날부터 큰사위를 위한 기도도 해주고 있습니다."
약간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좋고 싫은 것이 많은 우리로서는 한 번쯤 되새겨 봄직한 이야기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가족을 위한 기도에 대해 조금 더 구체화시켜 보자.
예를 들어 '나'의 가족이 아이들의 할아버니, 할머니, 아버지와 큰아들, 작은아들, 딸로 구성되어 있고, 어머니인 '나'가 기도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할아버지, 할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시작으로 가장인 남편(아버지)을 위해 축원하고, 그 다음으로 큰아들, 작은아들, 딸, 친정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위한 기원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사자인 '나(어머니)'에 대한 기원을 하면 된다.
기원문은 사람의 형편에 따라 적절히 정하되, 한 사람에 대하여 108번 '관세음보살'과 세 번의 축원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외운 다음, "잘 되게 해주십시오. 잘 되게 해주십시오.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세 번 기원을 하면 된다.
만약 가족 구성원 중 특별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더 많이 기원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작은아들이 큰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그 아들을 위해서는 108염불을 세 차례 정도하고 "꼭 시험에 붙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기원하는 것이 좋다. 내가 기도를 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잘된다면 얼마나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만약 우리 불자들 중에서 아직까지 이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낸 분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30분 정도 줄이고, 꼭 기도를 하고 자는 습관을 들이기를 간곡히 당부 드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를 할 때 꼭 권하고 싶은 것은, '한번의 108염불'을 더하여 중생을 위해 축원하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가족과 나의 이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중생을 위한 기도! 이것이 세상을 밝히고 아름답게 만든다. 이것이 나의 불성(佛性)을 깨어나게 만든다. 남을 이롭게 하는 한마디의 축원이 '나'를 참된 보살(菩薩)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꼭 중생 축원의 기도를 곁들이기 바란다.
108배 기도
1) 왜 절을 하라고 하는가?
잠자기 전의 기도 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훌륭한 기도 법으로는 절을 하는 방법이 있다.
왜 우리 불교에서는 절할 것을 권하는 것일까?
첫째는 절을 통하여 아상(我相)을 꺾고 복밭(福田)을 이루기 위함이다.
인간의 모든 그릇된 업은 아상에서 비롯된다. '나다', '내가 제일이다.'하는 교만심을 일으켜 제 잘난 맛으로 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하면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만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 나라 전체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이러한 생각에 빠져 출마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대통령 감이 될 수 없다. 나만이 대통령 감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이 나라가 바로 서리!"
이렇게 망자 존대(妄自尊大)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다면 그 나라의 꼴은 어떻게 되겠는가? 실로 우리 주위에는 자신을 높이고 '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먼저 '나'의 육체를 관찰해보라. 이 몸뚱이는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이 차츰 낡아서 부서지듯이, 몸뚱이가 아무리 잘생기고 튼튼하더라도 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도 한줌 흙으로 바뀌었고, 그 잘났던 김일성도 마침내 죽어 염라대왕 앞으로 가 버렸다. 오래되면 물질은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나'의 정신 또한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천하는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는 잠시 머물다가 달라지고 사라져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흐름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나'! 그 '나'는 끊임없이 변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무상한 '나'를 대단한 것인 양 내세우고 있으면 고통만 따를 뿐, 멋있고 자유로운 삶이나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잘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상부터 없애야 한다.
아상을 없애는 공부! 그것이 바로 절이다.
"저의 가장 높은 머리를 불보살님의 가장 낮은 발아래 바치고 절하옵니다."
"저의 가장 귀중한 목숨을 바쳐 절하옵니다(歸命頂禮)."
만약 '나'를 높이는 아상을 버리고 절을 하여 하심(下心)을 할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고, 참된 봉사를 하면 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며,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질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일체 사람을 편안한 세계로 인도하면 대복전(大福田), 곧 큰 복밭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업장소멸(業障消滅), 곧 절을 많이 하여 속에 쌓은 업을 비워 내고자 함이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돌아다니는 변소요, 구정 물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그러하다. 아무리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화장을 했다고 해도 알고 보면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몸뚱아리이다. 가죽피대 속에는 피와 고름과 때와 똥오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뿐인가? 제 마음에 맞으면 탐욕심을 내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성을 내며, 탐하고 성내다 보니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여 시기, 질투, 아만, 방일 등 수많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나아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이러다 보니 우리의 마음 그릇은 완전히 구정 물통이 되고 말았다. 본래 깨끗하고 천진했던 항아리에 쓰레기 찌꺼기도 담고 쉰 밥도 담고 고기 뼈다귀도 담고.... 온갖 찌꺼기들을 자꾸 담다 보니 구정 물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북적북적 속이 끓는 탁하디 탁한 구정 물통! 흉칙한 망상이 항상 출렁이는 구정 물통! 그 구정 물통이 꽉 차서 콸콸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마음 그릇 구정 물통을 맑혀야 한다.
그러나 넘치는 구정 물통에 맑은 물 한 사발을 붓는다 하여도 별 소용이 없다. 맑히려면 구정 물통을 넘어뜨려 쏟아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배가 크고 모가지가 작아 넘어뜨려 쏟아 봐도 속의 것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제 별 도리가 없다. 오직 한 바가지 맑은 물을 붓고 흔들면서 냅다 쏟고, 한 바가지 물을 붓고 냅다 쏟고...... 오로지 거듭거듭 반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반복 작업이 절이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맑은 물을 붓는 것이고, 절하며 엎어지는 것은 구정 물통을 흔들면서 찌꺼기는 쏟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몇 번의 절로써는 속의 묵은 찌꺼기를 다 비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거듭 절할 것을 옛 스님들은 강조하셨다. 적어도 108배, 1천배, 3천배, 5천배, 1만배의 절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거듭거듭 절하다 보면 업장이 소멸될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릇이 청정해지고 내 몸뚱이 그릇이 청정해지면서 몽중가피(夢中加被)도 나타나고 현증가피(顯證加被)도 나타나고 명훈가피(冥熏加被)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곧, '중생심의 물이 청정해지면 보살의 달 그림자가 거기에 나타난다(衆生心水淨 菩薩月影顯).'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맑히고 우리를 큰 복밭으로 만들어 주는 절. 이제 우리가 성의만 있으면 평소 능히 할 수 있는 108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 108번뇌와 108배
불교의 절하는 숫자에 대한 근거는 뚜렷하다.
3배를 드리는 것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탐심, 진심, 치심의 삼독심(三毒心)을 끊고 삼학(三學, 戒, 定, 慧)을 닦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고, 53배는 참회 53불(佛)에 대한 경배, 1천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겁(賢劫)의 1천 부처님께 1배씩 절을 올리는 것이며, 3천배는 과거, 현재, 미래의 3대겁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1배씩의 절을 올리는 예법이다.
그렇다면 108배는 무엇인가? 바로 이 절이 108번뇌의 소멸과 관련되어 있음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가 108번뇌를 뜻한다는 것은 쉽게 파악하면서도, 어떻게 해서 중생의 번뇌를 108이라는 숫자로 분류하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108번뇌는 중생의 근본 번뇌이다. 이 108번뇌는 육근(六根)과 육진(六塵: 六境이라고도 함)이 서로 만날 때 생겨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육근이 색깔[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감촉[觸], 법[法]의 6진을 상대할 때 먼저 좋다[好], 나쁘다[惡], 좋지도 싫지도 않다[平等]는 세 가지 인식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좋은 것은 즐겁게 받아들이고[樂受], 나쁜 것은 괴롭게 받아들이며[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방치하는[捨受] 것이다.
곧 6근과 6진의 하나 하나가 부딪칠 때 좋고[好], 나쁘고[惡], 평등하고[平等], 괴롭고[苦], 즐겁고[樂], 버리는[捨] 여섯 가지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6*6=36, 즉 서른여섯가지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이 36번뇌를 중생은 과거에도 했었고, 현재에도 하고 있고 미래에도 할 것이기 때문에, 6*6=36에 과거, 현재, 미래의 3을 곱하여 108번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六 根 六 塵
눈[眼] 색깔[色]
귀[耳] 소리[聲]
코[鼻] 향기[香]
혀[舌] 맛[味]
몸[身] 감촉[觸]
뜻[意] 법[法]
好, 惡, 平等, 苦, 樂, 捨 (6 X 6 = 36)
X
과거, 현재, 미래 (36 X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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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번뇌
이와 같은 108번뇌가 벌어지고 또 벌어져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을 이루게 되고, 그 번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히 왔다갔다하면서 마음을 흐트려놓기 때문에 중생은 번뇌로 인해 시달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8번뇌! 이것은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뜻한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이 아니라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 근원을 돌아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내려가는 유전(流轉)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108번뇌와 깊이 결속되어 있는 삶이 중생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8번뇌는 108번의 절을 하는 동안 스스로 순화되어 삼매의 힘으로 변화된다.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멸(還滅)의 시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무한한 능력,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번뇌를 따라 밖으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는 무능에 빠지고 끝없는 생사의 유전 속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번뇌 속으로 끊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삼매의 힘은 다시 되살아나고, 원래의 무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08배로써 108번뇌를 끊는다."
이 108배속에는 번뇌를 쫓아 흘러 내려가는 삶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유전이 아니라 환멸의 삶, 번뇌 이전의 영원 생명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삶, 곧 성불(成佛)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108배의 절은 번뇌를 끊는 의식이 아니라 깊은 삼매(三昧)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편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108배의 정진을 통하여 삼매 속으로 몰입할 때 우리의 모든 번뇌는 차츰 사라지게 된다.
삼매와 환멸과 성불! 이것이 우리가 108배를 하는 까닭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침에는 108배, 자기 전엔 염불
이제 108번뇌와 108배의 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8염주를 지니는 까닭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108염주를 매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이 108염주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108번의 염불과 108배를 통하여 108번뇌로써 지은 죄업들을 참회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부처님 앞에 한 번 절하고 한 개 돌리기를 108번하면서 108번뇌를 끊어 나가라고 108염주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108번뇌가 완전히 소멸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인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매일 108배를 생활화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108배, 저녁에 자기 전에는 108염불! 이것을 생활화하면 마음이 점차 모이고 맑아져서 언젠가는 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불보살의 은근한 가피, 곧 명훈가피를 얻어 재난은 스스로 피해 가고 가정은 두루 편안해지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집에서 108배를 할 여건이 되지 않은 경우라면 절을 찾을 때만이라도 꼭 108배를 하도록 하자. "절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찰을 절이라고 부른다."는 속설이 있듯이, 좋은 도량을 찾았을 때만이라도 법당의 부처님께 지극 정성 108배를 올리는 신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 아침 108배, 저녁 잠들기 전의 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룬 세 고시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 2장의 '생활 속의 기도법'에 대한 글은 매듭짓고자 한다.
약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재가 불자의 참선 수련 도량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해인사 원당암은 고시생들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원당암에서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년 동안 50명도 넘었기 때문이다. 자연 방을 얻으려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돈을 2배, 3배 주겠으니 있게 해 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원당암 스님들이 누구인가? 오히려 네 가지 규칙을 정하여 그 규칙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만 받아들였다.
첫째, 새벽 예불에 참석해야 한다.
둘째, 술과 담배를 먹지 못한다.
셋째, 여자 친구의 방문은 사절한다.
넷째, 주지 스님 허락 없이는 바깥출입을 금한다.
처음 이렇게 다짐하고 원당암에 있게 된 고시생 중, 3명의 학생이 몰래 해인사 관광촌으로 내려가서 한잔 먹다가 주지 스님께 들키고 말았다.
"이놈들! 당장 원당암에서 나가거라."
책보따리를 절 마당에 들어내 놓고 몽둥이를 잡은 채 호령하는 주지 스님의 서슬에 놀라 그들은 암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 사람은 궁리 끝에 나를 찾아왔다.
"저 위의 지족암 큰스님께 찾아가 보자. 혹시 거지 있으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방이 없는 지족암에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들, 사법고시에 꼭 합격하고 싶지?"
"예!"
"그런데 공부는 잘 되지 않고?"
"예, 공부하기가 통 싫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싶도록 해줄까? 공부 잘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어떻게요?"
"너희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법 아닌가! 내가 시키는 방법대로 해볼테냐?"
"예, 공부만 잘 된다면 하지요."
"첫째, 너희들이 절에 와 있으니까 부처님께 절을 해야 한다. 새벽 예불 목탁 소리가 나거든 무조건 법당으로 달려가서 절 108배를 해라. 108배를 하면 아침에 국민 체조를 하는 것보다 더 좋다. 몸이 아주 건강해진다. 손가락 발가락까지도 운동이 다 되고 목운동 허리 운동 발목 운동 온 전신운동이 다 되는 것이니까. 운동 가운데 절하는 운동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이렇게 부처님께 108배를 드리면서 '부처님, 공부 재미있게 해주십시오. 공부 재미있게 해주십시오. 시험에 꼭 붙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간절히 기원해야 한다."
"두 번째 잠들기 직전에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자는 것이다. 먼저 코로 심호흡을 세 번 또는 일곱 번하고,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108번을 불러라. 처음에는 3-40번밖에 못 부를 것이지만 일단 한숨 동안 부르고 나서 '관세음보살님! 꼭 시험에 되게 해주십시오. 공부 잘 됩니다.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3번 기원을 해라. 그렇게 한숨에 염불을 세 번 또는 일곱 번 정도 하여야 한다."
"스님, 왜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빨리 불러야 합니까?"
"관세음보살을 천천히 부르면 생각이 서울 갔다가 대전 갔다가 부산 갔다가, 왔다갔다하게 된다. 그럼 효과가 없어.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부르면, 부르기 급한데 어디 갈 여가가 있나? 생각이 도망칠 틈이 없게 되고 마음이 하나로 모이니까 틀림없이 힘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 흐릿해지거나 마음이 풀어질 때에도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아라.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였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원당암으로 가서 주지 스님에게 부탁하였다.
"학생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니 한 번만 용서하시오."
그날부터 시험 치기 전까지 약 100일 동안 세 학생은 기도와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고, 마침내 세 사람 모두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기쁨에 넘친 그들은 법관 교육을 받기 위해 사법연수원으로 가기 직전, 커다란 케익을 사 들고 나에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시험장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스님, 시험장에 앉아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가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저희들뿐인 듯했습니다. 저희들은 시험지가 나오기까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막상 시험문제를 받고 보니 거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원당암 앞길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아차! 그 문제 한 번 더 보아야겠다.'고하여 꼼꼼히 살펴본 문제, 부처님께 절하다가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찾아본 문제 등, 일부러 기억하고 거듭거듭 따져 봤던 문제들만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스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스님 덕입니다."
"나도 너희들 덕에 법문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생겼구나. 나도 너희들에게 감사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웃음꽃을 피웠다.
이 산승은 간곡히 당부 드린다. 지금 현재 앞에서 이야기한 일상의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불자라면 이 기회에 꼭 실천해 보라는 것을!
기한은 스스로의 형편에 맞게 정하라. 백일을 하나의 기한으로 삼아도 좋고, 40일을 기한으로 삼아도 좋다. 그것도 어렵다면 삼칠일[21일], 21일도 어렵다면 일주일, 아니 단 3일이라도 좋다. 꼭 한 번 해보자. 틀림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며, 소원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뒷날로 미루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마음으로 염불하며, 신심(信心)을 이루고 뜻을 성취하기 바란다.
특별기도 성취법
앞 의 장에서는 <생활 속의 기도법>이라는 제목으로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잠들기 전의 기도법, 108배 기도법 등에 대해 기본 원리와 방법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여기에서는 아주 다급하고 특별한 상황에 처하였거나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기도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속성가피를 이루려면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한다. 불보살님께 마음속의 소원을 기원하면서 기도를 한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하고, 마침내는 '소원 성취'라는 결과를 이룩하게 된다.
간절한 기도에 소원 성취.
그러나 이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세계적인 종교나 각국의 민간 종교에서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루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심지어는 집단 최면의 효과가 있는 타종교의 '광(狂)'에 가까운 기도가 더 빠른 성취를 안겨 주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불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는 같은 것인가? 불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종교의 기도라도 똑같은 영험에 똑같은 결과가 있기 마련인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기도 성취의 근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도는 불성(佛性),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 자리의 영원 생명, 무한 능력을 의지하고 개발하는 것인데 비해, 타종교의 기도는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바깥의 절대적인 존재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기도를 하여 가피를 입은 사람은 자기의 참 마음 자리 개발을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경우가 많고, 타종교의 사람들은 자기 개발보다는 절대자를 위한 헌신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바탕에 깔고, 불교의 기도 성취 원리와 옛 스님들이 수없이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도록 한 까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절하는 사람과 절 받는 부처님
불교의 절은 능례(能禮)와 소례(所禮)로 이루어진다. 곧 능(能)은 주체요 소(所)는 대상으로, 능례는 절하는 '나'를 소례는 그 절을 받는 불보살을 가리키는 것이다.
중생의 분별 세계에서는 이 능과 소가 언제나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나'도 '너'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너'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선악(善惡)도 마찬가지요, 사랑과 미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이 결코 두 몸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곧 예배를 하는 이와 예배를 받는 분이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不二)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분은 무엇에 의지하여 손의 앞, 뒷면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참된 마음 자리이다. 절을 받는 부처님은 참 마음 자리를 회복해 가진 분이요, 절을 하는 우리는 참 마음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발현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 자리 능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일이다. 만약 이렇게만 하면, 절을 받는 부처님과 절을 하는 우리의 마음 자리가 하나로 계합하여 어떠한 소원도 능히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참 마음 자리! 모든 것은 이 마음 자리로부터 생겨난다. 비록 이 마음 자리는 특별한 모습이나 실체가 없지만, 인연이 화합하면 갖가지 묘한 모습과 작용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좋고 궂은 모든 일도 바로 이 마음 자리에서 일어나고, 기도 성취의 근원적인 힘도 이 마음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곧 기도를 제대로 하면 참된 마음 자리에서 묘한 힘이 흘러나와 기도를 이루게 하는 것일 뿐, 다른 특별한 존재가 있어서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사력십증배(死力十增培)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할 때 이 마음 자리로부터 성취의 능력이 분출되는 것인가?
가장 빠른 방법은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다. 사력을 다할 때 참 마음 자리의 힘은 가장 힘차게 뻗어 나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연려심(緣慮心), 육단심(肉團心), 진여심(眞如心)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중 연려심은 다가온 인연 속에서 일어나는 평소의 마음상태를 가리키고, 육단심은 만용을 부려 억지로 하는 것으로 보통 때는 일어나지 않다가 큰 욕심이 일면 생겨나게 된다. 진여심은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 자리로서, 아주 특별한 때만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집에 불이 나자 자기 키보다 더 큰 장 단지를 번쩍 들고 나왔는데,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육단심이다.
옛말에 "욕심으로 하는 일은 보통 때보다 다섯 배의 힘이 생긴다(欲九五增培)."라고 하였는데, 이 마음으로 기도하여도 보통과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여심의 힘은 평소에는 느낄 수 없지만, 특별한 경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이를 세속에서는 '사력(死力)'이라고들 한다. "죽을힘을 다하면 열 배의 힘이 생긴다(死力十增培)."는 말은 바로 이 진여심과 관련되어 있다.
옛날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밤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호랑이를 대하자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섰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일념 속에 빠져들었다.
'죽어서는 안된다. 저놈에게 잡아먹힐 수는 없다.'
찰나 지간에 그는 화살을 활에 메겨 활시위를 당겼다. '팍'하고 꽂히는 소리가 들려 정통으로 맞힌 줄 알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화살을 맞은 호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화살을 날려 정통으로 맞혔지만 이번에도 쓰러져야 할 호랑이는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활시위를 당겨 모두 세 방을 정통으로 맞혔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 참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걸음아, 나 살려라'하면서 집으로 뛰었다. 그 다음날 손에 손에 무기를 든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보니, 마땅히 죽어 있어야 할 호랑이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호랑이를 꼭 닮은 바윗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자기가 쏜 화살 세 개가 거기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야, 그것 참 이상하다. 어제 저녁 바위를 호랑이로 본 것은 내가 잘못 보았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화살이 저기에 박혔을까? 내 힘이 저렇게 세단 말인가?"
그리고는 어제처럼 다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살이 바위에 박히기는커녕,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화살촉만 부러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 마음 자리에서 나오는 '사력십증배'의 힘이다.
이를 기도에 적용시켜 생각해보라. 목숨이 달린 다급한 일이 있다면, 목숨처럼 소중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 기도를 할 것인가? 참 마음 자리의 영원한 생명력, 무한한 능력이 필요하다면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사력을 다한 기도! 바로 사력을 다한 기도를 하면 된다. '죽으면 산다.'는 말이 있듯이, 사력을 다하여 기도할 때 참 마음 자리의 무한 능력이 분출되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응용하여 옛 스님들은 불전 3천배(佛前三千拜)를 수십 일 또는 수백 일 동안 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력을 다한 기도..... 이와 관련된 기도 이야기 한 편을 함께 음미해 보도록 하자.
3) 매일 3천배를 삼칠일 동안
제 1공화국 시절 말기에 치안 국장을 지낸 이강학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였던 그는 초창기 경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띄어 30대의 나이에 치안 국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대덕화(大德華)보살은 불심이 지극히 돈독한 분으로 열심히 팔공산 파계사를 다녔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먹물 옷을 입은 스님만 보면 얼른 뛰어내려 큰절을 하고, 주머니를 털어서 얼마라도 보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아들이 높은 권력을 쥔 치안 국장이 되자 더더욱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사(佛事)를 많이 도왔고, 사찰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 해결해 주었다.
특히 당시는 자유당 말기 시절인지라, 아부하기를 좋아했던 지방의 경찰 국장들은 치안 국장의 어머니인 대덕화보살이 움직일 때마다 친히 길 안내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팔공산의 사찰을 찾아갔더니, 경찰이 와서 주지 스님을 잡아가려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스님이 큰 나무 하나를 베어 절 앞의 개울에 외나무다리를 놓았는데, 그것이 산림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길 안내를 맡은 경찰 국장에게 말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나 같은 노인이 개울을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소? 외나무다리를 놓아야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지 스님 일도 잘 해결되겠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덕화 보살은 어려운 일의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 사찰 입구의 길을 닦는 일, 법당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는 일, 불상을 모시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일 등 당시 어렵던 절 집안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부정 부패를 보다 못한 학생들이 봉기하여 4,19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군중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죄로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함께 아들 이강학이 사형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된다더니, 기정 사실화된 아들의 죽음과 함께 대덕화 보살의 집안에는 온통 차압을 하겠다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72세의 대덕화 보살은 울고 또 울면서 팔공산 파계사까지 50리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종수스님 앞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스님, 아들이 사형을 당하게 되면 저는 이 세상에 단 1분도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 목숨이라도 바칠 테니 제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보살님, 아들을 꼭 살리고자 하면 부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면 부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기도로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드님을 30년 동안 키웠으니, 30년 키운 공만큼 부처님께 공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기도해 보십시오. 부처님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할까요?"
"아들의 사형 집행은 언제쯤 있을 것 같습니까?"
"한 달 정도 있으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럼 삼칠일[21일] 동안 매일 3천배씩 절을 하십시오."
"예,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아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3천배씩 삼칠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유난히 뚱뚱한 체구의 늙은 대덕화 보살로서는 하루 3천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젊고 날렵한 사람들보다는 절 한 번 하는데 2-3배의 시간이 걸렸던 대덕화 보살. 첫날 1천배를 했을 때 그녀는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아이구 죽겠다. 그놈이 죽을 팔자라면 죽고, 살 팔자라면 살겠지. 나는 못하겠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그녀는 10여 분을 누워 있다가 '내 아들이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일어나서 절하고 또 절하고..
이렇게 3천배를 거의 하루종일 걸려서 끝마쳤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그녀는 첫날과 같이 고달픈 몸과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의 싸움을 하며 정말 지루하게 절을 하였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날, 대덕화 보살은 마음을 굳혔다.
"죽을 목숨 살리기가 어찌 쉬운 일이랴. 나는 지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살리고자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일념으로 빌고 또 빌어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인데, 몸 고달픈 것을 핑계삼아 절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불평 불만까지 하다니.... 내 목숨을 걸어 놓고 정성껏 절을 해보자.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길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한 그녀는 3일째부터 이를 악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가락이 부르트더니 짓물러 터졌고, 무릎은 다 벗겨져 피멍이 들었으며, 나중에는 손톱 밑에까지 멍이 들어 한 배 한 배 절을 드릴 때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덕화 보살은 절을 멈추지 않았다. 삼칠일이 거의 다 되었을 때는 기운조차 탈진되어 한 번 엎드리면 머리가 무거워서 일어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 번 엎드리면 한참을 쉬었다 일어나고, 한 번 엎드리면 또 한참을 쉬고..... 이렇게 하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깜빡 졸게 되었다.
순간, 불단 위에 앉아 계시던 부처님께서 일어나시더니, 탁자를 밟고 내려와 앞에 서시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이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까지 분명히 서 계셨던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웬 스님 한 분이 동냥 그릇을 든 채 손을 내밀고 계셨다. 본래부터 보시 정신이 강했던 대덕화 보살은 평소의 버릇대로 주머니를 뒤졌다.
"돈이 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이자 돈 한 뭉치가 잡히는 것이었다. 꺼내어 보니 돈은 돈인데 빨간 색의 돈이었고, 감촉이 쥐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물컹한 것이 아주 기분이 나빴다. 액수를 세어 볼 것도 없이 몽땅 드렸더니, 스님이 그것을 받고는 품속에서 하얀 카드 한 장을 꺼내 주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받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절을 계속하였는데, 마지막 3천배가 끝나 갈 무렵 법당 밖에서 스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보살님! 살았습니다. 아드님이 살게 되었어요."
"예? 살았다구요?"
"방금 내무부장관을 지낸 최인규는 사형이 확정되고, 아드님은 15년 징역으로 감해졌다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습니다."
그 뒤 이강학은 몇 년형을 살다가 특별사면이 되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만약 대덕화 보살의 이러한 기도가 없었다면 이강학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곧 사력을 다한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살렸던 것이다. 이처럼 지극한 기도는 나의 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업까지도 능히 녹일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살인 등의 큰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불보살님 전에 지극히 기도를 하여 서상(瑞相)을 입으면 죄가 다 소멸된다.'고 하셨다. 기도를 지극히 하면 어떠한 업장도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일이란 낮과 밤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오고,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오게 되어 있다. 이를 기도에 적용시켜 보면 어둠은 업장이요, 밝음은 가피이다. 업장이 두터워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 일월과 같은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보라. 틀림없이 어두운 것이 사라지고 밝음이 오게 되어 있다.
문제는 오직 나의 정성이니, 만약 업장이 두텁다면 사력을 다해 목숨을 걸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의 방법인 3천배 기도법은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1천 부처님, 현재 현겁(賢劫)의 부처님, 미래 성숙겁(星宿劫)의 1천 부처님, 이렇게 3대겁(三大劫) 동안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각각 한 번씩의 절을 올리는 참회 법이다.
만약 지금 우리에게 비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비상한 기도, 비상한 참회가 뒤따라야 한다. 참으로 큰일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3천배를 3일 또는 7일, 나아가 21일 정도는 하여야 한다.
지금, 큰일이 눈앞에 이르렀다면 크게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께 매달려 보라. 이것만은 꼭 소원 성취하게 해 달라고, 잘못했으니 살려 달라고 하라. 부처님께 매달려 온 힘을 다해 기도하면 부처님의 밝은 가피는 나에게 이르기 마련이고, 가피력이 나에게 이르면 어두운 업장이 녹아들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수행자의 기도
사람들은 기도를 현실적인 소원 성취 또는 현재 처한 고난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기도의 결실은 그 정도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오도(吾道)의 한 방법으로서, 수행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특별한 수행의 경지를 이루게 됨은 물론이요, 도를 깨닫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 있었던 일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신심을 가다듬어 보자.
1) 기도로써 수행의 기틀을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처음은 언제나 중요하다.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시작하는 마음, 그 첫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고 완전히 비어 있으며,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 수행의 기틀을 올바로 정립하면,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 출가한 사람들에게 신심을 다 바쳐 기도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업장을 녹이고 수행의 기틀을 잡을 것을 간곡히 권하곤 한다. 나 또한 수행 초기에 네 차례의 기도를 통하여 대발심(大發心) 용맹 정진한 일이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용성(白龍城)스님도 그러한 고승들 중의 한 분이다.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 스님은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외워 수행의 기틀을 바로잡은 고승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했고, 남원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6세 때 해인사로 찾아가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하였으며, 17세 때 의성 고운사의 수월(水月)스님을 찾아가서 소년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당대의 대고승인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를 외울 것을 권하였다.
"지금 숙업(宿業)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見性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비주(大悲呪)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 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대비주를 10만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웠다.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산하 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 지 엿새가 되었을 때,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듯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無)'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으며, 일제의 대처 불교에 대응하여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하고 역경 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스님의 깨달음과 모든 활동에 10만 독(讀)의 대비주가 힘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만 한다. '대비주'도 좋고 '관세음보살'도 좋다. '나무아미타불'도 좋고 '마하반야바라밀'도 좋다. 무엇이든 한 가지를 택하여 부지런히 염하여 보라. 특히 지금 불법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이면 꼭 한 차례 깊이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교리나 의심도 나지 않는 화두를 들고 마구잡이로 씨름하기보다는, 스스로 마음을 정하여 업장을 녹이고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기도를 한바탕 열심히 하는 것이 장래의 수행에 훨씬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불보살의 가피를 입을 때까지, 아니면 7일 또는 삼칠일의 용맹스런 기도나 백일기도를 올리게 되면, 처음 출가했을 때의 순수한 그 마음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어 해탈의 세계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수행 중에 장애가 있을 때
그리고 수행을 하다 보면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번뇌가 치성할 때도 있고 세속일에 대한 미련이 솟구칠 때도 있으며, 몸이 공연히 아프거나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릴 때도 있다. 수행자는 이러한 일을 당했을 때 포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해보라. 새로운 힘이 샘솟게 된다. 진정 참된 수행자라면 시련의 시기를 기도로써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선사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이 젊었을 때인 1920년대 초기,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水月)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선 땅과 만주 땅과 러시아 땅이 합해지는 회령 지방을 조금 지나 막 러시아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적 떼들이 어느 부잣집을 털다가 반항하는 주인을 죽인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잣집 안 주인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러시아 경찰들은 불심검문을 하다가 장비처럼 생긴 금오스님을 체포하여 그 부인에게 보였다.
"이 사람이 그 마적 떼요?"
"그런 것 같아요, 마적 떼 대장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그 부인의 말 한마디에 금오스님은 완전히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다.
"나는 수도하는 승려이지 마적 떼가 아닙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믿지 않고 밤낮없이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자 고문을 중단하고 감옥에만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고문도 그만두고 감옥에만 가두어 두다니..'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인 한 명이 그 감방에 들어왔다. 학교 선생인 그는 산골짜기에 아편을 심었다가 발각되어 잡혀 온 것이라고 하면서 물었다.
"스님이 살인 강도의 누명을 쓰고 들어온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석방시켜 주지 않는 거요?"
"아마, 이 감옥에서 나가기가 어려울 걸요?"
"왜요?"
"우선 조선 사람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힘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설사 러시아 쪽에서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조선 사람이 러시아 감방에서 죄없이 갇혀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은 러시아에 보상을 요구합니다. 러시아로서는 공연한 말썽거리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차라리 감옥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보복을 두려워한 그 부잣집 안주인이 돈을 써서 스님을 풀어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큰일났구나. 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다니! 이토록 난감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필경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을 하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겠구나.'
금오스님은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참선도 화두도 그만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구원만을 갈구하며 부지런히 염불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바깥에 나타나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쇠창살 두 개를 잡고 쑥 뽑아 올리자, 쇠창살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뽑힌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스님을 향해 '씩 -' 웃고는, 다시 쇠창살을 꽂아 놓고 사라졌다.
비몽사몽간에 이 일을 접한 금오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쇠창살 두 개를 뽑아 보았다. 이상하게도 쇠창살이 쏙 뽑히는 것이었다. 스님은 감방을 빠져나와 형무소 문 쪽으로 다가갔고, 때마침 문지기들이 졸고 있어 몰래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형무소를 탈출하여 달려가다가 다리가 아파 수수밭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간수들이 나타나 탈옥수를 찾는 수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 가는데, 한 간수가 말을 몰아 쫓아오더니 잡으려고는 하지 않고 묻기만 하는 것이었다.
"탈옥수 한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는데요."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지?"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구나.'
스님은 불보살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면서, 만주 봉천의 깊은 산림 속 토굴에 계신 수월스님을 찾아가, 1년 동안 모시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금오스님은 훗일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그때의 일을 자주 들려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참선하는 수좌도 가끔은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 금오스님의 말씀처럼 참선 수행자도 장애가 있으면 한바탕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를 하면서 원(願)을 새롭게 가꾸고, 가피를 입을 일이 있으면 가피를 받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 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도심(道心)에 걸림이 없을 때까지 거듭거듭 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라.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하여 거듭거듭 발심하라.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이다.
3) 기도의 극치는 깨달음
나아가 기도가 삼매를 이루어 오랜 시간 계속되면 곧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도를하여 힘이 드는 것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묘력(妙力)을 얻게 되고, 참선을 하는 이라면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는 경지에 들어서야 득력(得力)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상대적인 경계와 생사(生死)마저도 초월하는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들면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선조 때 선하자(禪荷子)라는 스님이 계셨다. 이 스님은 벽송대사(碧松大師)의 제자요, 조선시대 제일의 고승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서산대사(西山大
師)의 사숙이 되는 분이다.
스님은 경상도 울산 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16세에 출가하여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다니며 수행하였지만, 도를 이루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24세가 되던 해, 스님은 크게 마음을 다져 잡고 많은 성현이 이적(異蹟)을 나타내 보였다는 묘향산 문수암(文殊庵)으로 가서 대오(大悟)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였다.
어느 날, 문수암 주위를 산책하던 스님은 건너편 선령대(仙靈臺)에서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거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범속한 인물이 아닌 듯하여 쫓아가 보았으나, 노인은 인홀불견(人忽不見), 간 곳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두 번 세 번 눈을 씻고 거듭거듭 살펴보았지만, 그 족적(足蹟)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성현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이렇게 확신한 선하자 스님은 기도를 하여 기필코 그 노인을 만나 보기로 결심을 하고, 백일기도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안주 땅으로 탁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히 필요한 양식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하루 일곱 집을 돌면서 정성껏 축원하며 탁발하였고, 탁발한 식량을 등에 지고 묘향산으로 돌아올 때는 한 걸음 옮기고 절을 한 번 하는 일보일배례(一步一拜禮 )를 행하였다.
비지땀을 흘리며 산 중턱쯤 올라왔을 때, 16명의 조그마한 아이들이 놀고 있다가 스님을 반겼다.
"스님, 힘드시지요? 저희들이 올려다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스님의 짐을 빼앗다시피 하여 문수암까지 들어다 주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들이 일반 세속인이 아니라 선하자 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나타난 문수암의 16나한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선하자 스님은 직접 마지(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지어 올리며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스님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을 염창(念唱)하였을 뿐 아니라, 마지를 올리는 시간, 밥을 먹는 시간, 화장실을 가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침내 1백일이 흘러 회향날이 되었다. 스님이 마지막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진 늙수그레한 포수가 나타나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 여러 날 동안 굶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그 밥을 저에게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 밥을 주고 싶었으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인지라 스님은 도리어 포수에게 사정을 했다.
"영감님 사정을 보아서는 마땅히 이 공양을 드려야 하겠지만, 오늘이 저의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기도를 마치고 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포수는 막무가내였다.
"스님께서 마지를 올리고 나면 저는 배가 고파 죽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는 것보다 불쌍한 중생 하나를 살리는 것이 더 뜻있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만 합니다만, 스스로 부처님께 깊이 맹세한 바가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총으로 스님을 죽이고 밥을 빼앗아 먹을 수밖에!"
포수가 총을 겨누었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태까지도 굶었는데 잠깐 사이를 참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나 또한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마지를 부처님께 먼저 올리지 않고는 당신에게 밥을 드릴 수 없습니다."
선하자 스님이 그를 떨치고 법당으로 올라가자, 포수는 스님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
총소리는 온 산중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마땅히 죽어야 할 선하자 스님은 쓰러지기는커녕 그순간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스님은 너무나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포수는 간 곳이 없었다. 바로 그분은 포수가 아니라 선하자 스님의 정성을 시험하고 깨달음의 연(緣)을 심어 주기 위해 나타난 문수보살님이었던것이다.
죽고 사는 것까지 넘어서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깨달음이 다가서기 마련이다. 꼭 참선을 하여야만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하자 스님의 경우처럼 기도가 꿈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젖어 들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첫댓글 조금 길지요^^ 책 한권을 다올려서 그렀습니다.도움 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