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유럽에 속해 있는 연방 국가 스위스의 국토 면적은 4만 1293km2 이며 총인구는 690만 명이다.
스위스의 공식적인 국가명은 라틴어로 콘페더라치오 헬베티카(Confederatio Helvetica)이고 줄여서 CH라 표기한다(스위스의 모든 차량에서 국가 표시 CH를 볼 수 있다).
스위스의 기원은 4C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때 스위스 원주민인 헬베티아 족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면서 현재의 원형을 이루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3C에 이르러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벗어나 1648년 빈 회의를 거쳐 영세 중립국으로 승인되었다. 23개 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으로 수도 베른에연방정부가있다.
스위스 정치의 특색이라면 법률안에대한 국민들의 최종심사를 거치는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부시도록 푸른 호수와 만년설의 알프스를 가진 아름다운 나라 스위스는 평온하고 장대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역사
■ 스위스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민족은 게르만족 갈래의 켈트족 가운데 헬베티족으로 B.C. 107년 로마에 대항한 기록과 B.C. 58년 알프스 지역을 지나 프랑스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후 로마에 정복당하여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부 지역은 레에티아(Raetia) 주에, 서쪽은 벨기카(Belgica) 주에 속하였다.
5세기에 론 강 계곡에 부르군트 왕국을 포함해서 서부 스위스의 대부분이 성립되었다. 동쪽으로는 알라만 공국이 위치해 있었고, 동남부의 산악 지대는 그 당시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게르만 색이 강하여 언어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부르군트족과 알라만족(라인 강을 거슬러와 현재의 바젤 근방에 진출하게 되는데, 기존의 헬베티족 가운데서 이들을 피해 산악 지대로 들어간 일파가 레에트족이다)은 게르만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알라만족의 지배 지역에서는 독일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부르군트 제국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으며,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지역이었다. 산악 지대에서는 레토로망스어(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혼합된 것으로 인구의 1% 정도가 사용함)를 사용하는 레에트족이 살고 있었다.
알라만족과 부르군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알프스의 다른 지역에 랑고바르드족이 기초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어,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카를 대제의 손자가 왕국을 분할할 때 앞에서의 경계선이 다시 통용되었다. 알라만족은 독일 제국에 속했고, 동쪽 지역은 부르군트에, 티치노 주는 이탈리아에 속해 있었다.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왕 콘라트 4세가 죽은 다음 신성 로마 제국은 왕이 없는 대공위 시대(1254~1273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될 때까지의 기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의 왕들은 작센의 황제나 호엔슈타우펜 왕국과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고 왕권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의 결과로 매우 약화되어서 점차 명칭뿐이고 형식적이 되었다. 일부 지역의 독자적인 지배는 점점 영주들의 손에 넘어갔으며――공작, 백작, 주교, 수도원장, 많은 기사와 도시들의 지역 공동체――이런 상황에서 스위스의 주(칸톤)들이 성립되었다.
13세기에 스위스는 다양하고 정치적으로 얼룩진 양탄자와 같았다. 바젤과 콘스탄츠는 자치를 얻은 제국 도시였고 그 외에 몇 개의 자치 공동체, 작은 백작령, 수도원령의 다수가 공동체 내에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황제의 특권을 받았다.――그것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요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지역 공동체에서는 일요일마다 병역 복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이 광장에 모여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회의를 하였다(이런 민주주의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웃 영주들의 팽창욕을 막기 위해서 지역 공동체 여러 개가 동맹을 맺었다. 1291년 우리(Uri), 운터발덴, 슈비츠가 연방으로 결성되었다. 이 연방은 합스부르크가와 갈등 관계에 빠지는데, 프리드리히 쉴러의 `빌헬름 텔'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는 1332~1536년 사이에 계속 확장되었고 당시의 영토 경계는 미미한 변화를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고수된다. 당시의 알프스 주 지역 공동체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은 역사적으로 스위스의 형성에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스위스는 그들 스스로 창안해 낸 고유한 공화적 헌법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구별되었고, 16세기 초의 종교 개혁은 스위스의 특성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종교 개혁은 취리히(츠빙글리)와 제네바(캘빈)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주로 중부 평지 지방에서는 신교(프로테스탄트)를 믿었으며, 산악 지방의 스위스 동맹 주들은 카톨릭을 믿었다. 츠빙글리가 이끄는 신교파와 산악 지방의 카톨릭 동맹 주들은 카펠에서 두 번의 전투를 벌이게 되어 신교 동맹 군대는 패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한다. 그러나 이후 제네바에서 캘빈은 신교 교회를 설립하고 신교가 전 유럽에 퍼지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다. 캘빈은 신교의 포교뿐 아니라 정치·경제 문제에도 관여하여 많은 공장을 세우고, 지금까지도 유명한 시계와 섬유 공업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정작 유럽을 강타한 30년 전쟁에서는 중립을 선언하고 전쟁의 피해를 벗어났다.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위스 연방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이 유럽의 강국들에 의해 인정되어 스위스는 네덜란드와 함께 독립하게 된다.
필립 루소는 그의 계몽주의적 글을 스위스 공화국 제네바에서 썼다. 이렇듯 스위스 연방은 때때로 교회의 종교 재판이나 보수적인 빈 체제의 비밀 경찰을 피하려는 지도자들에게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와 비슷하게 스위스에서는 중앙 권력이 약하고 주들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위스도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스위스 동맹을 깨고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워 중앙 집권 제도로 제도를 바꿔, 개별 연방주에 비하여 중앙 권력이 강해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많은 주들이 불신에 찬 태도로 따랐다. 왜냐하면 주들은 크기와 인구뿐만 아니라 언어와 종교, 인구 구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1845년 카톨릭 주의 분리파가 형성되었고, 분리파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새 헌법이 통과되었고 이 헌법은 교회 정책을 각각의 주에 일임하고 그와 더불어 카톨릭 주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 다.
스위스는 1847년 이후로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래된 중립 정책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앙리 뒤낭(Henri Dunant)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중인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국제 적십자를 기초하였고 제네바에 설립하였다. 1901년 앙리 뒤낭은 첫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75년 독일의 우편 장관 슈테판(Heinrich von Stephan)은 만국 우편 연합(UPU)을 설립하였다. 스위스가 중립성을 보장했기 때문에 소재지로 베른이 뽑혔다. 1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지켰다. 스위스는 다른 민족 국가들보다 당시의 민족주의 해악에 덜 영향을 받았다. 독일어권 스위스인들은 독일, 프랑스어권 스위스인들은 프랑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공화국 전통이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스위스라는 국가 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은 1차 세계 대전의 어려운 시기 동안 스위스를 지탱시켜 주었다.
연합군의 승리 이후에 유럽의 새로운 형성 과정에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고 제네바가 그 소재지가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였다. 독일군 나치 친위대(SS)로부터 도망쳐 피난처를 찾는 피난민들로 스위스의 상황은 매우 격동적이었다. 당시에 “배가 꽉 찼다(Das Boot ist voll)”는 독일어가 유행하였을 정도로 스위스는 많은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프랑스 아틀란타 해변의 서쪽에, 우크라이나 동쪽에, 아프리카 남쪽에 주둔하여 유럽 요새를 형성하였다. 스위스는 하나의 섬이었고, 계속적인 존립은 히틀러의 호의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스위스는 외교 정책에서 독일에 자극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스위스 정부는 계속 중립 정책을 폈다. 국제 연맹은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UN(국제 연합)이 등장했는데, 제네바에서 그 소재기를 이양받았다. 스위스는 EC(유럽 공동체),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UN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 군인들은 2차 세계 대전의 말기에 종종 국제 평화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사회문화
■인구는 약 710만명으로 게르만 계가 전체의 65%를 차지하며, 그외에 프랑스계, 이탈리계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며 공용어로는 독일어(중부와 북동부 지역), 프랑스어(서부), 이태리어(남부), 레토로만어(남부)가 쓰인다. 종교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50%씩을 점하고 있다. 스위스의 정치적 중심은 취리히, 바젤, 베른, 제네바 였으며, 이 곳에서 스위스의 문화 생활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궁중의 사치스런 예술이 아니라 스위스인의 미덕, 신중, 검소를 높이 평사하는 예술이었다.
애국심이 강한 스위스인들은 작은 국가지만 영세 중립국을 유지해 오고 있다. 수도는 베른이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이 취리히, 제네바를 많이 찾고 있다.
정치
■ 스위스는 1848년부터 의회주의적 연방 국가를 이루었다. 의회(연방 의회)는 입법 의회(200명의 의원)와, 주 의회(46명의 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입법 의회의 의원들은 4년마다 주 단위 선거에서 선출되며, 주 의회 의원들은 각 주에서 직접 선출된다.
주 의회는 각 주의 의원들이(한 주에 1~2명) 그 주를 대표하게 되며, 소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들은 주민의 의견 대부분을 수용할 수 있으나, 많은 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은 주민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표출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각 주는 연방 탈퇴와 각 주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금지하고, 헌법에 규정된 것 외에는 완전한 주권을 행사한다. 또 몇몇 주에서는 란츠게마인데라는 직접 민주 정치가 행해지는데 4월 마지막 주나 5월 첫째 주 일요일날 주민들이 모여 거수로 주지사 등을 선출하고 주 법을 표결하기도 한다.
스위스는 20개의 완전한 주와 6개의 반주(半州:아펜젤이너호덴, 아펜젤아우서호덴, 바젤란트, 바젤슈타트, 니트발덴, 오프발덴)로 되어 있고, 각 주에는 주의 헌법과 주 의회 그리고 주 정부가 있다(아펜젤 주에서는 종교 개혁시 평야 지대에서 신교를, 산악 지방은 카톨릭을 믿어 나뉘고, 바젤 주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혁명 세력이 바젤 시를, 혁명 반대 세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어 나뉘었다).
스위스는 연방 대통령에 의해 대표되는데 대통령은 매년 12월에 연방 의회에서 새로 선출한다. 정부는 자유 민주당(FDP), 사회 민주당(SDP), 기독교 민주주의 국민당(CUP) 그리고 스위스 인민당(SPP)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밖에 녹색당 등 환경 보호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7명의 장관이 4년마다 각 주에서 선출되어 연방 의회에서 결정되고, 연방 대통령 아래에서 일한다.
경제
■ 1인당 국민 소득(3만 6500달러)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관세율이 세계 최저로 수입 제한이 없고 통화 외환 등에도 제한이 없는 스위스는 원자재와 식량을 수입하고 완성품을 수출하는 선진국형 무역 형태를 띠고 있다. 매혹적인 알프스 경관은 스위스를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의 하나로 만들어 체르마트, 다보스, 쟝크트모리츠 등의 산악 휴양지, 루체른 호, 루가노 호, 마조르 호 등의 호수와 루체른, 인터라켄, 로잔, 로카르노 등의 호반 도시에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아와 관광 수입으로 무역 수지의 적자를 메우고 스위스 경제를 윤택하게 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스위스에서는 이미 파리와 영국의 방문객들을 상대로 관광업이 성행하였으며 호텔이 생겨났다.
세계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호텔 경영학은 스위스 호텔의 뛰어난 명성과 본질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유래한 요리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 스위스의 많은 식당들이 높은 평판을 얻고 있다.
농업 또한 중요한 한몫을 차지한다. 스위스 치즈, 그루에레(Gruyere), 아펜첼러(Appenzeller), 에멘탈러(Emmentaler)가 유명하며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스위스의 식료품 콘체른인 네슬레(Nestle)는 세계적 규모의 회사이고 커피, 초콜릿, 유아식들을 생산하며 생산품 가운데 많은 양이 알프스 우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1인당 초콜릿 소비가 가장 많다.
시계 산업 또한 스위스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Made in Switzerland”라는 상표는 정확도로 명성을 얻었고 스위스의 군용 칼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주머니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스위스의 은행은 비밀 엄수로 유명하며, 스위스 프랑은 안정된 통화로 인정받아 외국 자본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여 세계 금융과 은행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지리
■ 면적은 약 41만1천㎢로 남한의 반정도로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프랑스 등의 국과와 접해 있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로 북서부에는 쥐라산맥, 그옆으로는 제네바, 루쩨른, 취리히를 잇는 평평한 대지가 펼쳐진다.
알프스 산맥에는 몬테로사, 마터호른 등의 험준한 고봉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라인, 론, 다뉴브강의 발원이 되고 있다
첫댓글 힝~~~ 저런데서 살구 싶당 ㅡ.ㅜ
스위스 보수적인거 죽여준다고 하던데... 어떤 주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한 주는 1990에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다고...
세게에서 젤 부자인나라 스위스 젤 이기적인 나라 스위스 그러면서도 부러운나라 스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