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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부군성15 원문보기 글쓴이: 愚 谷
개념, 원리, 본질, 존재, 범주, 인식
어떤 학문이든 이론에 들어가기 위해선 우선 그에 관한 기초적인 용어나 소개가 필요한다. 그래서 모든 학문에는 개론과 원론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1피트는 12인치이고, 1인치는 2.54센티미터라는 단위에 대한 정의定義와, 1그램은 밀도가 가장 높은 순수한 물 1㎤의 질량과 거의 같다는 기초 개념도필수적인 지식이다.
물리학을 공부하려면 우선 질량이라든가 입자, 파장, 중력과 가속도, 에너지 등의 용어에 대한 정의定義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갈릴레오의 실험을 통하여 모든 물체의 낙하속도는 일정하지만 공기저항으로 차이가 난다는 중력과 가속도 등의 근대물리학의 기초개념을 습득해야 한다.
화학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 영국의 화학자 John Dalton은 보이지 않는 원자들의 관계를 화학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앙투아 라부아지에(산소 발명)에 의하여 화학용어가 정리되었고, 러시아의 드미트리 엔델에예프가 주기율표를 만들었는 바, 이들 기초 개념을 모르면 화학공부를 할 수가 없다.
철학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철학 용어에 가로막힌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귀찮아도 먼저 개념이라든가 단어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아야 본론에 접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 용어에 대한 가장 기본적 설명을 해 보려고 하는데, 솔직히 철학이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용어의 설명이라는 게 또한 쉬운 것이아니라니.
1. 개념槪念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개념들을 전제하지 않고 만날 때, 이 세계는 다양한 질적 차이들로 다가온다. 무수한 형태, 무수한 색깔, 무수한 해설과 주장에 무수한 차원次元까지 포함할 경우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개념을 서구어로 ‘concept’이라 하는데, 이때 ‘cept’라는 말에는 ‘잡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독일어로 개념이 ‘Begriff’인데 역시 동사 ‘greifen’은 ‘잡다’라는 말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개념이란 극히 미묘하고 유동적이고 모호한 우리의 경험의 내용들을 일반화해서 잡아주는 것이며, 그 내용들의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미세하게 보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측면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주체가 이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붙잡기 위해 사용하는 게 바로 개념이란 것이다. 경험들은 어떤 인상이나 희미한 기억이나 순간적인 느낌 같은 것들로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들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개념은 구체적인 사물들이나 경험들을 일반화하고 추상화하고 평균화하여 개별적인 존재들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개념에는 무수한 종류가 있다. 질량, 힘, 에너지 같은 물리학적 개념들도 있고, 수요와 공급, 한계효용 같은 경제학적 개념들도 있고, 책상, 연필, 건물 등의 형체의 개념도 있다. 달리다, 파랗다…라는 물체와 운동의 개념들도 있다.
그러나 일상어는 그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나 철학적 개념들은 상당히 특이하고 다의적이어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컨대 ‘기질지성氣質之性’,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 칸트의 ‘오성’ 등은 저자의 책을 정독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개념들을 명료화하고 종합하는 행위이다. 물론 그 종합은 단순한 합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머금는다. 철학이란 근본 개념들의 명료화 및 창조적 종합 의 행위라 규정할 수 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세계가 본문이라면 개념은 목차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 원리原理
철학적 개념 중 처음 얘기할 것은 원리原理이다. 그리스어의 ‘archê’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왜 사유思惟를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가짜’라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나무막대기를 물에 넣으면 구부러져 보인다. 일상생활에서, 정치에서, 문화에서 언제나 우리는 이런 ‘가짜’를 만난다.
사람들은 가짜를 당연히 싫어하고, 진짜를 갈구한다.
사람들이 왜 사유하는가? 우리 경험이 그 자체로서는 참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사물의 심층深層, 진짜가 아니고 그거의 표층表層, 결과라는 사실이다.
배가 아프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의 경험이다. 나는 왜 배가 아픈지 모른다. 그래서 아픈 원인을 찾는다.
만약에 우리가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다 실재고 다 진짜라면 이 세상에 학문이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사유할 까닭도 없다. 인식의 예를 들었지만, 윤리적인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기만당하고 속고 농락당한다. 그래서 진짜, 참, 진실, 실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원리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나올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것이 원리原理=archê이다.
어떤 점이 있으면 이 점으로부터 선이 나온다. 어떤 출발점이 있으면 이 출발점에서 길이 나온다. 이 출발점이 원리의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리는 ‘시원始元’이라고 함이 어울린다.
또, 원리는 한 사물이 만들어짐, 한 사물이 존재에 있어 그 가장 일차적이고 내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근원根源’으로서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세 번째 의미에서의 원리는 인식론적 맥락에서의 원리이다.
어떤 전제가 있고 그 전제로부터 증명이 이루어졌을 때, 그 전제가 바로 원리이다.
3. 존재 存在
‘존재‘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매우 기본적인 개념이고, 철학적으로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존재라는 말은 1) ’존재하다‘라는 동사적인 뜻, 2) 어떤 존재, 어떤 것이라는 명사적인 뜻, 그리고 3) 본질이라고 하는 뜻, 이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떤 의미건 "존재"는 고대부터 매우 수수께끼 같은 주제이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탐구하는 분야가 형이상학 가운데 존재론이다. 유사 이래 수없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의 하나가 “헛되다”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만물은 유전하고 인생은 헛되다.
성경의 전도서 1장 2절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도 있다. 물질계가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서양 철학은 이런 문제를 변화와 생성의 문제로 규정했다. 즉, 삶이 죽음이 되고 또 죽음에서 삶이 발생하는 문제를 단순히 변화의 문제로 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헛된 세상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가상假想이고 환상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의 형성 근거가 된 것은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존재” 개념이다. 서양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존재 개념이다.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도 존재存在혹은 실존實存의 개념으로 자신의 철학의 탑을 쌓았다.
존재와 실존은 서로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서양 철학의 기본은 존재론 ontology 혹은 형이상학 metaphysics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는 “존재는 존재한다(Being ist)."이다. “있음은 있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없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있는 것은 없어질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다. 혹은 존재자의 속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달리 말해서 '있음' 혹은 '있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 혹은 유(有)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드디어 “있음은 있다.”라는 철학 최대, 최고의 간결한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단 한 문장으로 그는 신선하고 진실된 토대위에 서양 철학 혹은 모든 철학의 출발을 닦은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변화와 생성 그리고 소멸 등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자연계와 인간계는 모두 변하고 생성, 발전, 소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경험적인 사실을 단호히 부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 생성, 소멸, 발전 등은 모두 그 논리 구조 상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되고 혹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참다운 존재(being)는 감각, 지각되는(perceive) 것이 아니라 사유되는, 생각되어지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눈에 보이는 것, 경험되어지는 것은 참다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가상이고 환상이라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사상이 정립된다. 즉, '감성으로 아는 것은 신뢰할 수 없고 이성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이다.'라는 사상이다.
플라톤 및 후대 철학의 발전에서 본 ’존재‘에 대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참다운 존재는 불변적이다.
참다운 존재는 감성이 아니라 이성과 사유를 통해서 파악된다.
이 참다운 존재는 나중에 개념, 법칙,정의(definition)혹은 원리(principle)로 불리어진다.
4. 실재, 실체, 본질
실재reality,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같은 말들은, 단적으로 말해서, 존재는 존재인데 그 앞에 ’참된‘이란 형용사가 붙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본질 또는 원형(原形)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험적인 감각의 세계는 생성,변화,운동,소멸하는 유동의 세계로서 단지 진리의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인 현상現象에 불과하지만, 이데아는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참된 존재이다.
5. 범주 範疇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이란 은殷이 주周에 의해 멸망했을 때, 기자箕子가 은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고조선古朝鮮을 건국했다는 주장이다.
이때 기자箕子가 함께 떠날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의 전체 목록을 정리해 준다. 그 목록 이름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이다. 카테고리 category는 이 말을 따서 ’범주‘範疇라고 번역된 것이다.
1) 플라톤-최상위 유(有)들
’가장 커다란 보편자들‘이라는 이 말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범주‘가 된다.
그는 최상위 유들로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존재/실재, 운동과 정지, 그리고 동일자와 타자(동일성의 차이)이다.
‘있다’라는 것이 최상위 유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플라톤은 그다음 유가 운동하고 있느냐 정지하고 있느냐가 가장 기본적이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은 같음(同)과 다름(異)이다. 이 최상위 유들이 가장 보편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범주란 개별적인 존재들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인 존재들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더 이상은 환원되지 않는 최상위 유들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하나는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에 붙어서 존재하는 것들’이며. 전자가 실체이고, 후자가 우유偶有, 즉 우연한(우발적인) 존재들이다.
언어에서 주어를 ‘substantive’라고 한다. 바로 존재론에서 ‘substance’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언어학에서 주어이다.
술어 predicate는 존재론적으로 성질(형용사), 동작(동사)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할 때, 소크라테스라는 주어를, (실체가 현명하다.)라는 술어가 그 성질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실제 범주와 우유들의 범주가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해서 10개의 범주를 얻어낸다.
라틴어 | 영어 | 한글 |
substantia | substance | 실체 |
qualitas | quality | (성)질 |
quantitas | quantity | 양 |
relatio | relation | 관계 |
actio | action | 능동(행위/행동) |
passio | passion | 수동(겪음) |
habitus | state | 상태/습관 |
quando | time | 시간 |
ubi | palce | 장소 |
situs | position | 위치 |
3) 칸트의 범주론
칸트가 고민한 것은 경험에 기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과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보편성과 필연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인간 의식의 구조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오감五感이 이 세계와 접촉해서 인식 질료를 만들어 낸다. 즉 ‘데이타’를 얻어낸 것이다. 이 단계에선 그냥 산만한 경험의 덩어리들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칸트의 표현으로 하면 ‘잡다雜多’를 얻은 것이다.
인간은 인식 질료를 인간 의식이 가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틀을 가지고 구성한다고 그는 보았다.
인식이란 감성(의 틀)을 통해 받아들여 진 인식 질료를 인간의 오성(의 틀)이 구성해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인 현상들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틀을 가지고서 잡다雜多를 구성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그 틀이 뭐냐? 바로 범주이다.
정당한 인식은 오성悟性에 의해 이루어지며, 오성은 판단을 통해 기능한다. 칸트는 이성을 세 가지로, 즉 감성感性, 오성悟性, 사변이성思辨理性으로 나눈다.
감성은 인식 질료를 만들어내는 기능이다. 쉽게 말해 보고 듣고 만지고…해서 감각 자료를 만들어낸다. 감성의 ‘아프리오리 a priori 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오성은 이렇게 생겨난 감각 질료들(인식 질료들)을 종합해서 구성한다. 잡다에 통일성을 부여해서 종합하는 것이 오성의 역할이다. 바로 이 오성의 틀이 범주이다.
오성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판단을 통해서 잡다를 종합하는 것이 오성이다.
칸트도 범주표 구성의 실마리를 판단들의 분류에서 찾으며, 판단들은 다음과 같이 (논리학에 기반하여) 분류된다.
판단의 양(量) | 전칭(全稱)판단 | 모든 s는 p이다. |
특칭(特稱)판단 | 어떤 s는 p이다. | |
단칭(單稱)판단 | 이 s는 p이다. | |
판단의 질(質) | 긍정(肯定)판단 | s는 p이다. |
부정(否定)판단 | s는 p가 아니다. | |
미정(未定)판단 | s는 비(非) p이다. | |
판단의 관계(關係) | 정언(定言)판단 | p는 q이다. |
가언(假言)판단 | 만약 p이면 q이다. | |
선언(選言)판단 | p이거나 q이다. | |
판단의 양상(樣相) | 개연(蓋然)판단 | s는 p일 수 있다. |
실연(實然)판단 | s는 p이다. | |
필연(必然)판단 | s는 p이어야 한다. |
6. 인식, 진리
인식론이란 담론談論은 기본적으로 meta적(어떤 것의 범위나 경계를 초월하거나 아우르는) 성격을 띤다.
인식론이란 1+2이 2인가, 3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수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1+2=3이 ‘맞다’라고 할 때, 그 ’맞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는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이 인식/진리라고 할 수도 있다.
아울러, 인식과 진리에 도달하려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도 있다. 어떤 길을 따라가야 인식/진리에 도달할 것인가를 다루는 이 학문이 바로 방법론方法論이다.
인간이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감각/지각, 상상력, 기억, 오성/이성 등을 들 수 있다.
이 우주 안에 의미와 가치, 마음과 정情, 기쁨과 슬픔 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감感’이라는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생물들에게는 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동물들은 추위를 느끼고, 적의 살기를 느끼고, 새끼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나아가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음악 선율의 감동을 느낀다.
‘감‘이라는 것이 존재함으로써 모든 고차원적인 존재들과 작용들이 가능해진다. ‘감’이 없다면 우주는 우리에게 죽은 물질 덩어리일 뿐이다.
아울러 감각에서의 ’각覺‘의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각覺‘은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각(깨달음)‘이라는 작용이 없다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냄새, 맛도 없을 것이다.
감각과 지각의 차이는 미묘하다. 지각은 감각들의 종합적 작용을 뜻하며 그 종합적 작용을 통하여 하나의 대상이 포착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이 점에서 지각은 감각보다 고차원적인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이성 理性
인식론적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은 도구를 제작한다는 것과 이성적 사유를 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분된다.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를 지각하고 또 도구를 통해 신체적 자각의 차원 이상을 지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렇게 얻어낸 자료들을 분석하고 개념화하고 법칙화해야 인식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식의 주안점은 이성의 개념화에 있고, 지각은 그 개념화의 근거로서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성을 통해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간의 대단한 능력이라고 해야 한다.
이성은 그리스어 ’logos’의 번역어다. 로고스는 매우 다의적인 말로서, 한자의 말씀 언言변이 들어가야 하며(理), 로고스의 가장 일차적인 특성은 역시 말하는 것, 언어능력에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것은 로고스가 ‘말하다’를 뜻하는 ‘legein’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의 의미를 1) 상위의 인식(능력), 2)추론, 3) 개념으로 정의했다.
동양에서, ‘理’는 세계에 내재한 이법理法이며, 그 이법이 개별 존재들에게 내재화될 경우 ‘性’이랄 할 수 있다.
2009.11.16
첫댓글 길고 어려운 글 끝까지 읽는데 힘들었다.
어느 학자가 학문에도 위 아래가 있는데, 제일 꼭대기에 철학이 있고
그 다음에 수학, 그리고 물리학이 있다더군.
그러나 자기가 공부하는 전공하는 학문이 가장 중요하다(critical,crutial)고 여기니
의학은 어디에 쯤 그 class가 와 있나 ?
귀한 글 잘 읽었네.
계속 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