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한 상점가에서 중화소바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공 ‘고헤’는 함께 가게를 꾸려온 아내와 갑작스레 사별한 뒤 만사에 의욕을 잃은 채 가게도 장기 휴업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읽기를 미뤄둔 두꺼운 책을 뒤적이다 책갈피에서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30년 전 소인이 찍힌 엽서의 수신자는 그리운 아내 ‘란코’, 발신자는 ‘고사카 마사오’. 어느 해변인 듯 보이는 손그림과 등대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몇 줄의 인사가 적혀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당시 서른 살의 아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엽서가 왔어”라고 했던 일이 떠오른다. 아내는 어째서 이 엽서를 이토록 소중히 간직했을까? 어째서 고헤의 책 틈에 끼워두었을까? 미처 듣지 못한 아내의 어제의 시간을 찾아 고헤는 등대 여행을 나선다. 동남쪽 등대 마을로, 서북쪽 등대 마을로…… 나고야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아들과 모처럼 동행하기도 하고, 지기지우인 오랜 친구의 십대 아들과 여정을 같이하기도 한다. 아내와 등대, 막연하게 이 두 가지만 떠올린 채 시작한 여행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고헤에게 더없이 소박한 행복을 선사하며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아준다.
깜깜한 밤바다 위 고요히 빛을 내어주는 등대처럼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무엇이 된다
고헤는 여유 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나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한 명 한 명 모두 존귀한 인연이다. 한 명의 아이가 자라려면 온 마을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옛말처럼 여태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던가. 아버지 덕분에 맛있는 중화소바 만드는 비법을 알았고, 란코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가게를 꾸려왔으며, 간짱 덕분에 틈틈이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도시오 덕분에 매일의 식사를 챙길 수 있었고 신노스케 덕분에 스마트폰 조작법을 배워 여행이 수월해졌다. 우연히 만난 이발사 덕분에 등대가 가장 잘 보이는 최적의 장소를 찾고, 대학원을 진학해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막내의 말 덕분에 아버지로서 힘을 내게 된다. 이렇게 초로의 고헤는 시나브로 기력을 되찾게 된다. 한편 아내의 시간을 따라가볼수록 아내를 향한 사랑은 더욱 깊어지는데…….
노련한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많은 노고를 견디고 사는 모든 무명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지한다. 커다란 상실 후,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정하게 귀띔하는 듯하다. 마이니치 신문의 찬사처럼 읽는 내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은 선한 풍경이 펼쳐진다.
마키노 고헤 :
도쿄 이타바시 상점가의 중화소바집 ‘마키노’의 점주. 62세. 아버지에 이어 뚝심 있게 운영해온 가게이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에 기력을 잃고 휴업중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탓에 학력 콤플렉스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게 2층 공간에 책장을 두고 틈나는 대로 독서를 즐긴다.
마키노 란코 :
고헤의 아내. 이인삼각 경기를 치르듯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고헤와 ‘마키노’를 함께 꾸려오다 지주막하출혈로 갑자기 사망했다. 도쿄 다치가와에서 태어나 측량기사인 아버지를 따라 전학이 잦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결혼 전 성은 쓰시마.
아케미 :
고헤와 란코의 큰딸. 28세.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선수를 꿈꿨으나 현재는 증권 회사에 다닌다.
유타 :
아케미의 동생. 24세. 중장비 제조업체에 취직해 현재 나고야 지점에서 근무한다.
겐사쿠 :
마키노 부부의 막내아들. 22세. 재수해서 교토의 대학에 들어갔다.
고사카 마사오 :
1989년, 대학생 시절 란코에게 수수께끼 같은 엽서를 보낸 인물.
야마시타 도시오 :
고헤의 친구. 아내 후미와 함께 ‘마키노’와 같은 상점가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한다. 고교 연극부 출신으로 바리톤급 성량을 자랑한다.
구라키 간지 :
고헤의 친구. 애칭은 ‘간짱’. 초등학교 때부터 우등생이더니 유명 사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대형 제약회사에 다녔다. 퇴사 후 현재는 같은 상점가의 건물주.
다키가와 신노스케 :
간짱 모르게 태어난 아들. 18세. 동갑내기 아내 유이와 16세에 첫애를, 최근에 둘째를 낳았다.
아버지는 약한 불에도 세 단계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하룻밤 찬물에 우린 마른 멸치와 말린 고등어포를 ‘마키노’에서는 가장 약한 불로 조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바로 불을 끄고, 내용물을 헝겊 주머니째로 꺼낸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당시 창고로 쓰던 2층에서 커다란 종이를 가져왔다.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 셋째도 청결, 넷째도 청결, 다섯째가 맛과 영양,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수행이다. 밤에 가게 닫으면 주방 구석구석까지 번쩍번쩍하게 닦아. 스테인리스 선반, 벽, 조리대, 가스레인지, 육수냄비, 조리 도구, 환풍기 주변까지, 기름얼룩은 물론이고 먼지 한 톨 없게 씻고 닦아. 매일 밤이야. 하루도 거르지 말고. 영업중엔 설거지. 면기, 숟가락, 앞접시. 뭐든지 뽀드득뽀드득 씻어. 꾀부릴 생각은 말고. 손님 가시면 바로바로 카운터와 테이블을 깨끗한 행주로 닦아.” _24-25쪽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_206쪽
고헤는 어쩐지 아쉬워 선뜻 떠날 수 없었다. 조금 더 그곳에서 백아白牙의 시리야사키 등대를 바라보고 싶었다. 안개 속에 서 있는 자못 우아한 자태가 한 인간의 기나긴 과거에서 온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 _301-302쪽
“응. 그래도 얘기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왜요?”
“뭔가 소중한 것이 비눗방울처럼 터져 사라질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이 뭔데?”
고헤는 대답을 고민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는 왜 이리 많을까. _336-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