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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족관 세 곳에 먹이를 주는 일이다. 엔젤은 오늘도 활처럼 휜 우아한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며 수족관 안을 여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가끔 모스 볼을 쪼다가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기도 했다. 모스 볼을 처음 사 왔을 때는 작은 뭉치였는데 물살에 굴러다니다 보니 몸집이 제법 커진 것 같다. 물속의 말똥구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모스 볼은 마치 초록 풍선을 빵빵하게 불어놓은 것도 같았다. 엔젤도 그 색깔이 싱싱해 보였는지 마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쪼아대곤 했다. 수족관 안은 잘 꾸려져 있다. 흑색의 현무암과 갖가지 모양의 해초들, 그 외 은가루 모래가 비대칭으로 깔려 있는 풍경은 마치 이국의 해변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떼를 지은 색색의 구피들도 화살촉처럼 날렵하게 유영하는가 하면 수족관 유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 이내 놀란 듯 달아나기도 했다. 새끼 새우들도 산호초 사이로 무언가 쪼아대며 물풀이 살랑댈 때마다 포르르 떠오르다 이내 내려앉는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사장이 매우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수족관을 들여다볼 때마다 쟤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매일 똑같은 수족관 이곳 저곳을 헤 메이고 다닐까. 평균 이틀 간격으로 넣어주는 먹이와 가끔 물을 갈아준다던지 수족관 속에 빈소라나 산호초 같은 액세서리를 넣어줄 뿐인데도 그들은 그들만의 천국처럼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다. 쉼 없이 움직여도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했다. 그래서인지 소리가 나지 않다 보니 사무실은 늘 조용했다. 만약에 물고기들도 강아지처럼 소리를 내는 동물이라면 상당히 시끄러울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수족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오면서 신호음이 울렸다. ''응... . 왜?"
"전화받는 말투가 그게 뭐야?"
"내 말투가 어때서?"
" 아니 그냥 다른 때와는 달라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무슨 일은 자기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 할 수 있어?" "아...... , 좀 바빴을 뿐이야 사실 준태 씨 전화는 오랜만에 왔다. 그 전에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해서 밥은 먹었는지 무슨 반찬에 먹었는데 맛이 괜찮더라. 다음에 여기 데려와서 같이 먹고 싶다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든지 지난 주말에는 어디를 갔는데 어떻다 던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서로가 뜸해지면서 자연적으로 전화 하는 회수도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내 쪽에서도 먼저 전화할 수 있었지만 왜 그런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냥, 이었다. "오늘 한 잔 어때 우리가 자주 만나던 종로 그 술집에서?"
"오늘?...... , 글쎄 예약 손님이 있긴 한데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상황 봐서 조금 있다 전화 할게." " 알았어.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사무실 뒤편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 안은 흡사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테면, 석고상이긴 하지만 끊어진 팔과 손, 절단된 다리, 손가락, 그 외에도 정육점에서만 보았던 절단기, 날카로운 톱날, 커다란 온풍기,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제작기계들이 공장 작업대에 한 가득 차지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 이곳은 보조기 제작회사다. 공산품도 판매하지만 직접 제작하는 공장도 딸린 전국에서 알아주는 몇 안 되는 보조기 회사인 것이다. 사장은 자수성가한 마흔 중반의 미혼의 남자다. 말수가 적고 무엇이든 직원들이 알아서 다 해주길 바라는 타입이다. 간혹 못마땅한 일처리에 가차 없이 꾸짖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잘대해주는 편이다. 무엇보다 지작기술이 내놓으라 할 정도로 베테랑이라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은 편이다. 보조기라는 것이 잘 맞지 않으면 그 고통이야말로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걸 보면 환자의 마음을 그만큼 잘 인지한다는 뜻이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만독도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리라. 자존심이 대단한 사장이었다. 사장은 지방에 있는 거래처 병원으로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이었는데 그 외는 낚시나 가끔 가곤 했다. 그 외 대부분은 공장 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은 어항 안의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무엇을 더해 주면 더 좋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는 듯 했다.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 볼 때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게 사는 일상처럼 보였다. 오늘 예약된 손임은 지방에서 오는 손님이라고 했다. 대학교수인데 어릴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대퇴부부터 없다고 했다. 사장은 다른 때보다 더 긴장되어 보였다. 오후 3시 반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지금 시간은 4시를 5분 남겨두고 있다. 늦은 가을 볕은 짧고 을씨년스러웠다. 공장 안 기계들도 더 무섭고 험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어둠은 그 실루엣을 진하게 색칠해 가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어둠들 사이에도 명암은 있듯이 그들의 형체나 그림자에도 농도가 다른 어둠들이 깊은 숨들을 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어울러 사는 우리들 세상처럼. 어항에서는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었고 온풍기도 따뜻하게 돌아가고 있다. 멀리서 오는 손님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다. 4시 10분에야 손님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척 초췌한 모습으로...... . 하지만 누가 장애인이라 하겠는가. 잘 다려진 바지는 무릎에만 잔주름이 몇 줄 잡혀있을 뿐 말끔했다. 위에 잿빛슈트도, 느슨하게 감겨진 연한 다크 핑크색 목도리도 세련되고 고상했다. 차트를 미리 봤기 때문에 그가 오십 대 중반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다소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나이에 비해 준수한 편이었다. 사장은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아늑한 소파로 그를 안내했다.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그가 고개를 반쯤 숙이며 감사하다고 했다. 자재실로 돌아온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제작할 자재들을 다시 챙기며 사장의 지휘를 기다리기도 했다. 자재실로 들어가는 통로에 어항이 있었으므로 스쳐 지나 가면서 언뜻 흰 물체를 보았다. 귀지 솜처럼 아주 작은 솜뭉치 같은 것이 어항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궁금했지만 일단은 손님에게 집중해야 했으므로 그냥 지나쳤다. 이내 사장은 준비 해 둔 자재를 가져오라 하면서 정식으로 인사를 시켰다. 광주 K대 국문학 교수인데 어릴 때 교통사고로...... , 교수는 고개를 반쯤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먼 길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겠어요?" "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요즘은 교통이 너무 좋아져서 서울 구경한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왔습니다. 하하." "네에...... . " 4B 연필로 그린 듯 한 눈가에 서너 줄 주름살이 일순간 잡혔다 사라졌다. 긍정의 마인드란 저런 것일까. 아니면 자격 지심에서 나오는 말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사장의 손놀림에 따라 그가 필요한 자재를 그때그때 준비해서 작업하기 좋게 나열해주는 역할을 했다. 조금 미지근한 물에 본을 뜨기 위한 석고를 개는 일부터 세심하게 진행되어 갔다. 그리고 사장은 잠시 나가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내가 사무실로 나오자 안쪽 의자로 안내된 교수가 바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공장 안에서 사무실이 보이는 위치에 반사 거울을 걸어놨으므로 역으로 사무실에서도 공장 안을 볼 수 있었다. 교수의 오른쪽 다리는 쇠뭉치로 장착되어 있었다. 차가운 금속성 다리...... , 무릎에 달린 둥근 쇠뭉치 돌림막이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보조기를 떼어낸 자리를 헐렁한 바지가 대신하고 있었다. 교수는 반쯤 돌린 상체로 창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창밖은 예술회관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느티나무가 벌써 그 잎을 거의 다 털어내고 나목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 교수가 뭐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사장이 허허, 하고 웃는 것 같았다. 사장은 떼어낸 보조기를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고개를 숙일 대로 숙인 채 몰입해가고 있었고 무심한 창밖은 금방이라도 어둠으로 밀려들 것만 같았다. 언젠가 사장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고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혼자 있기가 무료했다. 나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예술회관이 떠 올랐다. 곧바로 예술회관 계단을 한 걸음에 올라갔다. 예술회관 취미반은 3층에 위치해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벽면마다 수채화나 물감의 농도를 겨우 익힌 듯한 그림들이었다. 화실은 조용했다. 삐꼼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회원 수가 많았다. 이제 막 뎃상 기초 작업을 하는 부류와 비너스나 쥴리앙울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부류, 그리고 수채화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부류로 나눠져 있었다. 갑자기 들어온 낯선 이에게 잔뜩 호감이 가는 눈빛을 던지면서도 4B 연필은 연신 손끝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미술실 벽으로 여러 회원들의 작품이 마치 도배지처럼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비너스 전신 석고상을 그린 뎃상 작품이었다. 아마 지도 선생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너스의 오른팔이 좀 더 길게 그려진 비대칭 양팔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녀의 팔이 잘리지 않고 정상이었다면 그녀의 팔은 지금 무엇을 들고 있었으며 무엇을 들려고 했을까 생각하다가 아차 했다. 그래 분명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반 나신의 젖 가슴을 가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차라리 먼 곳에 눈길을 둔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낯선 손님으로 돌아와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뾰족한 느티나무 잎들이 일제히 반짝이던 초여름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 액정화면이 환해지면서 전화벨이 또 울렸다. " 바빠?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야?" " 아차! 깜빡했네. 손님이 늦게 도착해서...... . 미안한데 다음에 만나면 안 될까?" "안될 것까지는 없지만 아무래도 요즘 수상해 도대체 왜 그러는데?"
"미안...... . 나 지금 재작 중이라 보조해야 해서...... . 더 통화하기 곤란한데...... ." "알았어. 조금 있다가 다시 통화하자." 작업실 안으로 조용하고 침착한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아까 전에 보았던 어항 안을 다시 들여다봤다. 귀지 같은 작고 하얀 숨뭉치, 그것은 새우의 꼬리 부분이었다. 며칠째 물에 부풀려 단백질을 비롯 모든 영양분이 빠져나가 버린 백골 상태의 새우 꼬리 부분이, 그 새우가 궁금했다. 나무젓가락을 넣어 해초를 저어보았다. 돌 사이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두 배로 커진 모스 볼을 굴러 보았다. 몇 마리 새우들이 포르르 떠올랐다. 그때 꼬리부분이 짧은 새우가 보였다. 꼬리부분을 떼어내고도 잽싸게 유영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가웠다. 잘 아물었을까 하는 염려도 동시에 일어났다. 학창시절 우리 집 아래채로 이사 온 미스 오의 꽃무늬 치마가 펄럭이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심하게 절뚝이는 미스 오의 다리는 걸을 때마다 치마가 유난히 펄럭거렸다. 가느다랗게 휘어진 다리를 감추기 위해 늘 긴치마를 입었다. 그것도 화려한 꽃무늬 치마였다. 그 모습은 마치 시들어버린 꽃들이 왼쪽 다리를 휘휘 내디딜 때 오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갸름하면서도 분위기가 있었고 차분하고 창백한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우수적이면서도 묘한 매력으로 다가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동네 오빠들은 미스 오에게 관심이 많은 듯 했다. 동네 오빠들과 같이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어느덧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미스 오가 남자를 흘린다느니, 병신이 육갑한다느니 소리 없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오빠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교 길에 오빠가 자전거 뒷자리에 미스 오를 태우고 즐거운 얼굴로 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우리 오빠만 아니면 된다고 했는데 오빠까지 미스 오에게라는 생각이 들자 미스 오가 죽도록 미웠다. 당장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고 엄마는 즉시 오빠를 불러 다그쳤고 급기야는 방을 빼라고 통보했다. 미스 오와 늙은 노모는 빌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듯 멀리서 관망할 뿐이었다. 엄마의 극성으로 오빠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했고 훌쩍 떠나야 했다. 속으로 안심을 하면서도 왠지 미스 오가 불쌍하기도 했다. 그 뒤로 미스 오의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사실은 미스 오의 늙은 노모는 신기가 있었는데 그 신을 받아들이지 않아 미스 오가 소아마비를 앓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점집을 이어받았는데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얼굴이 반반해서 남자 손님들도 꽤나 많다는 소문까지 들려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 갔다. 왠지 미스 오의 얼굴과 교수의 얼굴이 또 한 번 오버랩 되었다. 어항 안으로 종이배를 띄었다. 종이배가 물결을 따라 출렁거렸다. 새우에게 보내는 내 마음의 메시지였다. 작업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창밖은 더 어두워졌다. 아까보다 더 짙은 먹물이 스며든 듯 어두워졌다. 사장은 교수 다리에 의족을 신겨보고 싶었다.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씀하라는 말은 매우 친절했다. 상처뿐이 아닌 마음까지 치료를 해야 한다는 평소 사장의 사명감에서일까. 유난히 자상하고 친절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바지까지 다 입은 교수의 자태는 처음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극히 차분하면서도 세련되고 지적인 모습으로. 그때 사무실 전화기가 다급하게 울렸다. 을지로에 위치한 M정형외과였다. 전화기를 전해 받은 사장의 목소리도 다급했다. 조용한 사무실에 금방이라도 폭풍이 볼 듯 했다. 전화기를 끊은 사장은 급히 가방을 챙기며 지금 바로 M정형외과에 가봐야 한다면 서둘렀다. 그러다가 아차 교수님을 전철역까지 모셔드려야 하는 생각이 미친 듯 나를 쳐다보며 총알처럼 부탁을 했다. " 미스 서 내가 지금 급한 환자 때문에 나가봐야 해서 그러는데 미스 서가 교수님 좀 전철역까지 모셔다 드리고 바로 퇴근하면 어떨까?" '어떨까 '는 묻는 게 아니라 부탁이면서 명령이었다. 종종 있어온 일이었기에 나는 알았노라고 했다. 교수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교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했다. 본인이 직접 못 모셔다 드린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큰데 무슨 말이나며 나에게 어서 준비하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사무실 불을 끄자 어둠 속의 명암들도 일순간 사라졌다. 한 덩어리로 으깨어 뭉쳐 놓은 검은 모스 볼 같았다. 그 검은 모스 볼은 내일 출근해서 다시 사무실 불을 켜기 전까지 사무실 이곳저곳을 온몸으로 굴러다닐 것이다. 어항 속 불빛만 속삭이듯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는 동안 가만히 서 있던 교수가 어항 속 물고기들이 유난히 자유로워 보인다고 했다. 보조기 회사라 그런 건지 더 대칭이 되어 보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때 교수의 무릎에 박한 쇠뭉치 돌림막이 빙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필 사장이 차를 가져가야 했으므로 택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앞에서 바라보는 예술관은 나무들 사이로 저녁 불빛이 새어 나와 더 분위기 있었다. 그때 새털 같은 무언가가 훝날리고 있었다. "어머 첫눈인가 봐요?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어둠이 내 목소리에 움찔했다. 교수는 그 음울하고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전철역까지 걸어갑시다. 뭐 바쁠 것도 없고 이런 날은 걷는 게 낭만도 있을 것 같지 않나요. 하하." "하지만 불편하지 않을까요?" " 몇십 년을 이러고 살아왔는데 끄덕없어요." 저녁 풍경은 온통 불빛의 나들이었다. 휘황하면서도 뭔가 쓸쓸한 저녁 풍경을 타고 첫눈이 내렸다. 분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의 얼굴처럼 네온 빛은 다른 빛들에 반사되어 서로를 화려하게 불사르고 있었다. " 아까 사무실 어항에 종이배는 왜 넣었어요?"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작업 제작 시간 기다리며 조금 무료해서요." "말 못 하는 미물이지만 무척 고마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고 느끼고는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행동으로 교감하는 이는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몸으로 살아오다 보니 그런 풍경들에 매우 민감하게 되더라구요. 뭐 지금은 이 나이가 되어서인지 많이 편해졌지만요. 만약 내 몸이 이러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해보곤 했죠. 하지만 이제는 내 감성에 충실해서 내 직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곧 행복인 것 같아요." "...... " "사무실 어항은 조용하다 못해 적요로운 세상이죠. 우리 같은 사람들의 세상처럼요. 하지만 그 속은 폭풍이 일고 늘 거센 바람이 불죠. 누가 들어주지도 않는 벙어리 같은 말들이 온 정신과 몸으로 가득 차서 고열로 쓰러지는 밤들의 연속이었죠." "...... " "내가 말이 많았네요." "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주시고...... . 사장님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 나는 정중하고 진심어린 인사를 건넸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전철역까지 닿았다. 교수는 나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하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것은 더 오래 잡고 있을 손님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준태 씨에게서 전화가 또 올지도 몰라서였다. 교수는 한남동에 살고 있는 여동생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려간다면서 오늘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돌아선 뒷모습도 정상인보다 더 정상인처럼 덧보였고 멋스러웠다. 첫눈치고 제법 흩날린다고 생각하면서 막 돌아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준태 씨 전화였다. 한 번 보자고 전화 한 날에는 물불안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 지금 네 사무실 앞인데 넌 어디야?" " 뭐 사무실 앞이라고?"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놀라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어떻게 온 거야?" "택시 타고 왔지."
불 꺼진 사무실 앞에 준태 씨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무거운 서류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 눈도 오는데 미끄럽지 않았어?" "쇠가 맞닿은 느낌이 싫을 뿐이야." 사무실 문을 열고 준태 씨와 들어갔다. 난로에 불을 켜고 뜨거운 커피를 내왔다. 나는 준태 씨의 왼쪽 바지를 걷어보았다. 무릎을 만져보다가 가만히 두들겨 보았다. "아, 아파하지 마, "
"물이 차서 부은 것 같은데." 준태 씨는 커피를 마시며 연신 무릎을 만졌다. 나는 어항 앞으로 준태 씨를 데리고 갔다. "여기 종아리가 없는 새우가 있어." "그래? 왜 그런 거야?" "구피들이 물어뜯은 것 같아." 준태 씨는 구피들이 귀여운 반면 사나운 것 같다면서 몹시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넣어준 종이배는 다 젖어서 어항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폐선처럼 버려져 있었다. "준태 씨 저 가라앉은 종이배 꼭 폐선 같지 않아?" "응 너처럼, 우리 저 종이배 건져주자." 준태 씨가 어디선가 꼬챙이를 들고 와서 종이배를 건졌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물방울을 털어내듯. 을왕리 해변에 일 년 내내 묶여 있는 폐선이 생각났다. 폐인트칠은 다 벗겨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채 옛날 바다를 가르며 내달렸던 기억만을 간신히 간직하고 있는 모습, 우리는 그 폐션을 본 순간 낮게 한숨까지 지었던 것 같다.
준태 씨의 다리는 오래전에 폐선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나 때문이었다. 달려오는 트럭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건널목을 건너가고 있는 나를 향해 몸을 날렸던 그때부터 준태 씨는 지금까지 폐선이었다. 노를 저어도 나갈 수 없는 폐선, 나는 그 폐선에게 묶여 또 다른 폐선이 되었다. 사무실 한쪽 그 조그만 공간이 내 유일한 바다가 되었다. 파도도 일지 않고 오가는 배들도 없는 바다. 대신 어항 속에는 물고기도 있고 해초도 있다. 꿈마다 그 어항 속 바다로 간다. 준태 씨 배와 내 배는 출렁거리며 그 바다로 간다. 종아리를 잃어버린 새우를 품에 안고 바닷속을 유영한다. 갯벌에 묻혀 있는 배 밑 부분이 밀물에 뒤뚱거리며 배웅을 하는 듯 일렁인다. 너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