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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묵상글 (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덧셈 인생, 뺄셈 인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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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덧셈 인생, 뺄셈 인생
뺄셈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정파를 배제하는 정치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덧셈 정치도 있겠고 그것은 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의 한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여기서 포도밭 밖이란 공동체 밖이란 뜻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것은 공동체서 축출했다는 뜻이며
머릿돌이어야 할 주님을 사람들이 버려버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저와 가까운 공동체들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척 슬프고,
그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척 아프고 그 사람들이 무척 가엽습니다.
왜 덧셈은 할 줄 모르고 뺄셈만 하는가?
그런데 자기가 그런 줄은 알고 있을까?
자기가 그런 줄 안다면 무척 슬플 테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럽니까?
그것은 그것이 그의 능력이고 한계이기 때문이고,
달리 말하면 그에게 있어야 할 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이란 선덕의 줄임말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반대로 악덕이란 선은 행할 수 없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덕이 있어야 선을 행할 수 있는데 덕은 없고 악덕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덕이 있고 어떻게 덕을 지닐 수 있을까요?
보통은 덕을 쌓는 사람에게 덕이 있고 오늘 베드로 서간도 이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실 믿는다면서 덕이 없는 사람이 있어 욕을 먹습니다.
능력은 많은데 덕이 없는 지도자들이 욕을 먹는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의 덕에 다른 덕들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6-7)
우리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뺄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덧셈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덕에 다른 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 덕들 덕분에 모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덧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선덕을 쌓지 않아 악덕에 악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적으로 만들어 배제하는 뺄셈 인생이 있을 겁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고 나는 어떤 인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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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닭을 키우려고 닭장을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 닭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닭장 밑에서 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군다나 닭장을 만드느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서 수리할 비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닭을 키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모두 팔아 버려야 할까요?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 역시 올바른 판단은 아닙니다. 닭장 만드는 데 들었던 비용을 모두 날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최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닭을 팔고, 그 판 값으로 오리를 사서 닭장에서 키우면 어떨까요? 오리는 물이 필요하니 이렇게 물이 올라오는 것이 최적의 환경일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도 사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비로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뜻만을 주장하고 그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주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원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해 고민 속에 있을 때, 나의 뜻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뜻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최선의 상황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쁠 수 있는 또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마음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일을 주인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또한 포도밭 소출의 전부를 가져오라는 것도 아닌 얼마만을 내라고 합니다. 아마 주인은 자기의 배려와 사랑을 알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작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배려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사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늘 나의 입장에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어렵고 힘든 것이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용기 있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충실한 주님의 소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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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도, 다른 누구도 당신의 길을 대신 가줄 수 없다. 그 길은 당신 스스로 가야할 길이기에(윌트 휘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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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르 12,11)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계속되는 인내와 관용과 자비가 배신으로 돌아와도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애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동시에 이 사랑의 이야기는 그 애절한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외 아드님의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사랑의 노래입니다. 또한 이는 그 큰 사랑을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 ‘포도밭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실까요? 그것은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정화를 하시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라고 따졌기 때문에, 당신의 권한과 신원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리석은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 구원의 새로운 백성을 세우실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된다는 유대인들의 선민의 특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르 12,11)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감사와 순명의 열매, 자비와 믿음의 열매를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11)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꽁꽁 묶으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당신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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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 나고 돈 났다
살아가면서 많은 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위축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뿐더러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 없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합니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존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재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재물을 담보 삼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이재에 밝아 자기의 몸을 망쳐 재물을 일으킨다”(대학).는 옛말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 세상은 끝장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밭을 일구어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어떤 종은 죽이고 결국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상속자가 죽었으니 그 포도밭이 자기들 것이 되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 그 주인은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총의 신이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 분노에 더디시고 항구하게 사랑하시며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종을 몇 차례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며 기다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며 변덕스러운 우리들을 참아주고 계십니다.
받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는 것입니다. 잃어 놓고는 하느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작인이라면 포도밭을 맡겨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 주시고 계신 데 전혀,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고 말하면서도 ‘돈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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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청년들과 만났을 때입니다. 청년 레지오에 함께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남편이 피아노를 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레지오 회합이 있는 목요일 저녁에 미사 반주를 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 열심히 연습한 형제는 부활 2주부터 평일미사 반주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레지오 단원들에게 저녁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주임 신부님 포함해서 청년 레지오 단원들이 모였습니다. 단장은 며칠 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있어서 못 올 뻔했는데 다행히 운전이 가능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단원들에게 아팠던 경험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이, 나무에 옹이가 있듯이 다들 아팠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도 3년 전에 뉴욕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때로 시련과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모두 그런 시련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6명의 단원이지만 10명이 되면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5명이 되면 분단하기 전에 성지순례를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연례행사처럼 저도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가 되면 ‘목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조용히 약을 먹고 쉬면 좋아졌습니다. 본당에 있으니 한 가지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 목소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목감기는 고맙게도 4일 정도 머물다가 떠났습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왔고, 적응하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목감기는 제가 건강을 확인하는 친구 같습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저는 더 무리하게 일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무리하게 지내다가 더 큰 건강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왔다는 것은 저의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건강을 믿고 무리하게 행동하면 건강한 몸도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감기가 오지 않으면 제가 건강관리를 잘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오면 제가 건강관리를 더 잘하라는 뜻으로 알고 면역력을 키울 수 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건강관리를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의 말들 잘 듣는다면 지금 격고 있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가 터널을 지나면 곧 밝은 세상으로 나오듯이, 그런 시련과 고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강한 신앙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를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언자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건강을 확인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면역력을 키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감기를 원망하고, 감기를 욕하는 것은 나의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 더 나쁜 길로 가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아들의 말을 들었다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흔들릴지라도, 비에 젖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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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의 소작인들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어떻게 밭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을까요? 참으로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그렇게 아들을 죽인다고 해서 그 밭이 소작인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소작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를 그 시대의 스승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소작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수많은 예언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말씀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해석해 버렸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말씀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아있는 말씀인 주님을 죽입니다.
오늘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만행을 꼬집고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따르지 않는 죽은 말씀. 하느님 따르는 길이 어디인 줄 알지만 내 욕심을 위해 나를 따르는 모습은 소작인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 숨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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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는 왜 터질까요?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는 말 들어보셨을까요?
저는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몇 차례 들었습니다.
디스크 수술을 앞둔 환자들에게서요.
디스크는 왜 타질까요?
정확한 경위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못 견뎌서 터지는 것입니다.
견디다가 견디다가 못 견뎌서 터지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디다가, 견디다가 못 견디면 터지고 맙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 힘든 느낌이 든다면 마음이 주는 경고입니다. 터질지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터지고 나면 늦습니다. 터지기 전에 잘 관리해 줘야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터지면 늦습니다. 터지기 전에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잠시 바람 쐬는 것도 한 방법이고, 삶의 터전을 떠나 고요함 속에 지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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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과 삶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삽시다>
오늘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르왕가와 21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앎과 삶이 하나였던 순교성인들입니다. 무지한 우간다의 무왕가왕은 1885-1887년 사이에 참으로 터무니 없이 무죄한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1964년 이 순교자들의 시성식때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일부를 인용합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은 재생의 표지입니다. 이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순교록에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더해 줍니다. 새시대의 첫 열매인 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아프리카 대륙은 자유를 얻어 독립한 아프리카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도 참혹하고 너무도 보배로웠던 이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되게 해 주십사 기원합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순교자들이 끊임없는 감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님 향한 사랑과 앎과 삶의 일치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바르게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알아야 살 수 있고 알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앎중에 앎이, 공부중의 공부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보다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이렇게 평생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제발 평생공부에 지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평생공부에 앞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참으로 한결같고 열렬한 사랑이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어디서 공부합니까? 혼자만의 공부는 부족합니다. 함께와 홀로가 함께 하는 공부여야 합니다. 이래서 공동체 학교에 몸담아야 합니다. 내 몸담아 살아가는 공동체는 말그대로 사랑의 학교, 섬김의 학교가 됩니다.
졸업이 없는 공동체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학인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고 너와 나를 아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평생공부 제대로 못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사랑하여 바르게 알아 갈수록 나와 너를 바르게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래야 무지의 편견이나 선입견의 오해나 착각함이 없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있는 그대로 편견이나 오해없이 제대로 보고 아는 경우는 얼마나 힘든지요. 하나하나는 참으로 좋은 분들인데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으로 굳어지면 거의 광적인 광신이나 맹신이 되어 도저히 바꾸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편견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비극적 폭력과 살인입니다.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한 인간에 의해 부단히 반복되고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여기 나오는 불의와 탐욕의 소작인들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과 소작인들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몰랐고 그럼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은 물론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고, 종들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 파견한 무수한 예언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바로 여기서 소작인들은 당대 예수님을 배격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수한 무지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무지한 소작인들은 비단 잘못된 지도자들뿐 아니라 편견에 물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시편 말씀은 당대의 예수님께 대적했던 무지한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라기만 하네.”
당대나 오늘이나 무지한 이들의 편견을 깨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집짓는 무지한 이들이 내버린 돌, 바로 죽임당한 예수님을 부활시켜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자 아무도 없습니다. 당대의 무지한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 알고 그분을 붙잡으로 했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합니다.
무지한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이나 이렇다 해도 군중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주님의 은총에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는 평생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제1독서에서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게 하시고 생명과 신심과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앎의 완성을 촉구합니다. 앎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아는 앎에는 얼마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성-믿음-덕-앎-절제-인내-신심-형제애-사랑’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적 실체입니다. 이런 앎의 은총은 영지주의자의 머리로만의 깨달음의 앎이 아니라 생활실천과 관련된 사랑과 삶이 하나로 녹아있는, 참으로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씀이 더욱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다산과 삼국지에 나오는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힘껏 노력한 후에야, 운을 탓할 수 있다.”<다산>
“먼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삼국지>
참으로 잘 익은 가을 열매들처럼, 사랑과 지혜의 삶중에 익어가야할 우리의 앎의 열매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사랑으로 잘 익어가는 앎의 열매들이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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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선하라>
선은
살림이라
영원히 살고
악은
죽임이라
마침내 죽으리니
그대
살고픈 사람아
오직 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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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고자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맞게 배치하셨습니다.
믿음이 나 혼자의 선택과 결정인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의 이끄심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우리 안에 당신 없이는 채워지지 않을 갈망도 주셨습니다.
복음은 악한 소작인들을 몇 번이고 참아 주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몇 번이고 기회를 줍니다.
자신의 종을 여러 차례 보냈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면서 그들의 회개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갖은 애를 다 쓰고 계십니다.
당신 사람을 통해서, 특별한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하셨고, 부족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고 기다리시는 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배려가 우리의 위로와 희망의 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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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내는 사람들을 거부합니다.
거부를 넘어 죽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게 됩니다.
상속 재산에 눈이 멀어
이같은 일을 합니다.
오늘 비유에서 이 소작인들은
앞선 내용에 나오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백성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이 세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려는 마음이
없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고
우리 것이라고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힘을 통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것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들 안에서 분열이 나타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 공동체는
자기들끼리도 함께하는 것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들 안에서도 상하관계가 생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다른 힘이 작용합니다.
힘의 관계로 유지되는 공동체는 불안하고
그것을 우리는 평화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내 것으로 소유했지만
그러한 삶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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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3.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부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과 세금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세금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세금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표현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라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금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유대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최초로 세금을 냈습니다. (탈30,11~16) 사무엘이 왕을 내세우는 것을 반대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1사8,14~18)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이유도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종교세를 매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열왕12,4)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소득의 28%를 세금을 바쳤기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내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2,14)라고 묻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물었던 의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꼬투리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는 불순한 의도이자 속셈이었지만, 당대 현실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는 그만큼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일본의 식민지 통치 시대를 거쳤기에 로마의 식민지 유다의 미묘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금 납부 여부는 로마 식민지 법에 복종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법을 따르느냐는 문제와 결부된 사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일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했지만,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다, 는 입장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세금 납부 여부는 양날의 칼처럼 미묘한 실제적인 문제였기에 예수님 또한 이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이제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질문의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빼도 박도 못한 난처한 상황에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난처한 상황은 한 마디로 진퇴양난의 기로였던 것입니다. 즉, ‘세금을 내라’고 하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12)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 후에 기지를 발휘하여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순간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서 의기양양한 그들은 이렇게 지시한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한 대로 동전 한 닢을 가져오자,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12,16)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2,17)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돌려주라, 돌려드려라, 는 말은 결국 땅에 발붙여 사는 동안 화폐를 발행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하늘나라 시민은 하느님께 속한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또 다른 차원이라고 봅니다.
마태오 복음 17장에 보면, “당신네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17,24)하고 묻자, 베드로 사도는 엉겁결에 물론 스승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기에, “내십니다.”(17,25)하고 답변하였습니다. 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하거든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17, 27)하고 말씀하심을 통해 베드로를 위로하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십니다. 더 큰 일,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은 의연함과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진리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로 당당하게 세상 집권자들 앞에 살아야 합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편’이지만,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소유이며 하느님께 속한 자녀입니다.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우리네 삶이 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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