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7: 20-27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행하시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배려하십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자신의 언약 곧 영생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정하심과 자신의 의지 아래 두십니다. 이런 사실을 알리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브라함을 자신의 보좌로 끌어올려 놓으시듯이 말씀해 주십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하심 입니다. 이런 은혜에 힘입어서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가속들과 함께 순종합니다. 여기서 진리로 말미암은 일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건실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견고히 세워짐이 있습니다. 흩어질 것 같으나 한 진리와 한 신앙으로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와 성공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본문 20-21절은
“(20)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입니다.
1)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사이에 더 분명하게 분별을 하십니다.
한 아들에게는 부와 존엄성과 기타 현재 생활에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약속하시는 가운데서 그가 육신을 따라서 난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특별한 언약을 맺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파란 많은 현재의 생활을 초월한 언약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마엘을 영생에 대한 소망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이삭의 종족에서만 찾을 수가 있으며 바로 그 종족에게만 구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추론하게 되는 것은 거룩한 조상들이 그 약속으로 이 지상에 묶여 있었던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속으로 하늘나라로 향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이 지상생활에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관대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아낌없이 약속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주신 이 모든 선물은 이삭에게 실현될 언약과 비교해 보면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나 권세나 기타 덧없이 사라질 일시적인 선물들을 성령의 아들들에게는 전혀 약속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소망으로만 소유하게 되는 영원한 복을 약속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 아무리 기쁨에 넘쳐 있고 모든 좋은 것들이나 행복에 넘쳐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천국에 침투해 들어가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그보다 더 엄청나게 많고 훨씬 더 고귀한 것들이 우리를 위하여 쌓여져 있는 곳입니다.
2)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단지 이 세상 생활만을 염두에 두고 하였는가 하는 질문이 대두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암시하고 계신 듯합니다.그분이 아브라함의 기도대로 허락하셨다고 선언하실 때 단지 우리가 언급했던 것들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하여 아브라함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간청했던 이스마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시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받아주셔서 그를 보시고 그의 모든 종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 종족에게 특이한 복을 내려 존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2. 본문 22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입니다.
이 표현은 유익한 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던 점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런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여기저기 방황하지 않고 오직 하늘나라에만 의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임하는 말씀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분이 지금 우리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으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 신앙의 확실성을 전혀 감소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완전한 현현이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우리는 당연히 만족해야 될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날마다 가시적인 형상으로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우리를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킴으로 우리를 위로 올리워 가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은 성령으로 그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찍어 주실 때 그 말씀에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시고 계십니다.
3. 본문 23-27절은
“(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 이었고
(25)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 세이었더라
(26)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입니다.
1)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라는 말씀에서 모세는 지금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합니다.
그가 명령대로 전 가족에게 할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자신에게 심한 고통과 심지어는 생명의 위험도 없지 않은 고통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할례를 베푼 시기가 “이 날에” 라는 말로 첨가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날로 미루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당황하게 하는 생각들과 투쟁을 해야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수많은 다른 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실이 그의 마음속에서 대두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많은 반대되는 일들로 괴롬을 당했으며 여러 가지의 말할 수 없는 추방을 받으며 이리저리 전전해 왔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전혀 빗나가 본 적이 없다.
만약 상징에서 그분이 나 자신을 그분에게 완전히 성별시키려고 하신다면 왜 하필이면 다 늙어버린 시기까지 나를 미루어 오셨을까? 이와 같이 마치 한 발은 무덤에 들여놓은 것과 같이 위험한 일로 나 자신을 절단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들을 극복한 그는 재빨리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따라갔던 것은 그의 순종하는 자세를 잘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가 가장 월등한 인물인 것처럼 신앙의 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재빨리 그분의 명령을 절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에서 그의 놀라운 신속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을 방해할 수도 있으며 완전히 반대로 유도해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대적하고 하나님 말씀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2) 또한 여기서 두 가지 일들이 우리가 관찰해야 될 가치가 있습니다.
곧 첫째는 아브라함이 그런 일들을 수 많은 백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고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의 집에는 수많은 권속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거의 한 백성과 맞먹을 수효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관적으로 보기에는 한갖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그런 고통을 자신들에게 자초하여 감수했다는 사실은 거의 믿어질 수가 없는 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소란을 야기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충동으로 틀림없이 그의 종들이 그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고 꾸준하게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다음으로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교훈을 받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 뿐 만 아니라 외국인들이나 돈으로 사온 사람들이 모두가 온화하게 그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문제 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면에서는 수치의 원인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는 데에 부지런히 돌봐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든 사람들을 거룩한 훈련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이 그처럼 가장 분투적인 일에 잘 들어 주는 것을 보는 가운데서 그 자신의 부지런함의 대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여 세상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시키라고 요구하고 계실 때 하나님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부과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옹고집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대항하는 면이 얼마나 수없이 많고 능력 있는 방법들을 채용하고 있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원리들에 접근하는 모든 길들이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당위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런 방해들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은 것도 각자에게 의무로 부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노력과 분발은 겉으로 보기는 실패한 것 같지만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