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 군수공장에 동원됐던 한국인 노동자 4명이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이 합병한 새 제철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파기환송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은 징용 노동자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해 원고가 청구한 대로 1명당 1억 원을 지급하라고 신닛테쓰스미킨에 명했다. 이것으로 청구권을 둘러싼 문제가 앞으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이 될 가능성도 있는 듯하다.
원고 중 일부는 일본에서도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대법원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돼 행사할 수 없게 됐다는 판단을 확정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제기된 소송에서는 대법원이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원고 패소 판결을 파기하고 심리(審理)를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 판결 이후 한국에서는 신닛테쓰스미킨과 미쓰비시(三菱)중공업, 후지코시(不二越) 등 전쟁 중에 한국인을 동원한 일본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이 연이어 4건 제기됐다. 이날 서울고법이 처음으로 배상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잇따라 제기될 수도 있을 듯하다.
판결에서 윤성근 부장판사는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일본 측 판결에 대해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며 총동원체제를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도 유효하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침략전쟁은 국제질서와 대한민국 헌법, 일본 헌법에도 어긋나는 행위”라고 밝혔다.
이날 판결에 대해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판결의 의미와 정부의 대응은 관련 부서와 함께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10일 회견에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존 입장”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신닛테쓰스미킨은 상고할 방침이지만, 원고 측 변호사는 판단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이번 판결은 신닛테쓰스미킨이 전개하는 일본 국내사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테지만, 배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변호단은 한국에서의 자산압류 등 강제집행의 절차를 밟을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 “국가 간 합의, 부정하는 판결”
신닛테쓰스미킨은 “징용 노동자 등의 문제를,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한 한일청구권협정, 즉 국가 사이에 이루어진 정식합의를 부정하는 등 부당한 판결이며, 매우 유감스럽다. 신속히 대법원에 상고해 당사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청구권 문제 다시 불거질 우려도
강제동원 실태를 조사하는 한국정부위원회는 작년 ‘일본의 강제동원 기업’ 299개사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구 재벌계 이외에도 종합건설사, 전기회사 등의 대기업이 포함됐으며 지금도 한국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회사도 많다. 이번 판결로 인해, 이 리스트를 근거로 징용노동자와 유족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정부의 민관합동위원회는 2005년에 국교정상화와 함께 이루어진 일본으로부터의 3억 달러 무상 경제협력에 대해 “강제동원의 피해보상을 해결한다는 성격을 띤 자금이 포괄적으로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내며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10일, 서울고법 판결은 이 견해에 대해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협정에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판결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질 듯하다. 2015년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한국에서는 청구권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도 있다.
◇키워드
‘한일청구권협정’
일∙한 국교정상화와 함께 체결됐다.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두 나라 및 국민들 사이에서 상대방에 대한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확인한다”고 했다. 그러나 청구권의 구체적 대상이 명시돼 있지 않아, 한국정부는 ‘해결된’ 대상에 일본군 위안부와 한국 내에 있는 원폭 피폭자 등의 문제는 포함돼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