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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천리길
이 이야기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미금역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김 교수가 한 이야기다. 사실인지 픽션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전원에 대한 꿈이 스며있어 재미는 있었다.
그는 신문 기자 은퇴한 후, 근래엔 고향 진주의 모 대학에 강의를 얻어 겸임교수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강의 차 일주일에 한 번 진주로 내려가는데, 갈 적마다 번번이 친척이나 친구 신세 지기 미안하더라고 한다. 그래 점심은 대개 학교 교수들과 먹고, 저녁은 혼자 먹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날은 늦은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마침 달이 밝더라고 한다. 그래 모처럼 드라이브라도 한번 해볼까 싶어 서장대 밑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강 건너 절벽에 달이 뜨고 강물은 안개에 덮혀 있었다. 그가 들판을 건너 진주시에서 만든 ‘습지원’ 근처에 가니, 초등학생 시절 동요 부르며 선생님 따라 소풍을 왔던 강 건너 약수암 아래 기암절벽은 잔잔한 강물에 그림자 던지고 있는 무성한 수목으로 매우 운치 있었다고 한다. 아마 산책용인 모양이었다. 발 아래엔 징검다리로 만든 것인지 사방 2 미터 넘은 커다란 화감암 원석이 놓여있고, 물 속에 하얀 해오라비 몇 마리가 졸고 있다. 그 모습에서 얼핏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두보의 시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다’는 구절이 생각나더라고 한다. 정수는 문득 고향은 이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데, 자기는 무얼 하러 그동안 낯선 타향을 헤매고 살았던가 하는 후회가 솟더라고 한다.
정수는 고향 떠난 지 50 년 넘는다. 더 이상 객지를 헤매지 말고 강변 대밭 속에 초막 하나 지어놓고, 차나 끓이며 한가히 살고 싶더라고 한다. 그런 감회에 젖으며 산책하는데 문득 대밭 속으로 구부러진 오솔길 끝에 한옥 한 채가 보이더라고 했다. 그래 그 옆으로 가보니, 사립문은 대나무 가지를 엮어 만들 것인데, 오래된 한옥 골기와 지붕은 이끼가 파란 비단처럼 곱더라고 한다. 마당엔 배꽃이 활짝 핀 고목 배나무가 있고, 그 아래 몇 개 분재가 있는데, 오죽(烏竹)을 돌과 함께 올린 분재도 운치 있고, 용틀임한 소나무 분재도 뿌리 뻗음으로 보아 주인이 안목 높은 사람 같아 보였다.
막 솟은 달이 정원을 비치고 있었다. 정수는 도대체 누가 이렇게 사는가 싶어 호기심이 부쩍 일더라고 한다. 그래 울타리 옆에 몸을 바짝 닦아가서 안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누구세요?’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라 한다. 문이 열리고 갸름한 얼굴의 삼십 초반 여인이 나타나는데, 정수가 ‘분재가 하도 훌륭해서....’ 변명삼아 그런 소릴 하다가 보니 그 여인이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어머나! 교수님이 어떻게 여길!’ 그런데 그때 여인이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정수가 자세히 보니, 칠암동 다도회에서 본 여인이다. 다도회 그 여인은 한복 차림이 인상적이었고, 차분한 말씨와 섬세한 눈섶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윽하던 여인이다. ‘교수님이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여인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고, ‘저녁 먹을 겸 우연히 나왔다가....' 정수가 대답하자 마치 횡재나 만난 듯 반가워했다.
‘잠시 올라가셨다 가시지요.’ 권하여 실내에 들어섰는데, 창가엔 깔끔한 난초 화분이 보이고, 밖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또렷히 들렸다. 여인은 정수 신발을 가지런히 해놓고 뒤따라오는데, 어디선가 가날프게 창부 타령이 들려왔다. ‘한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 진다고 서러워 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은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 손으로 꺾었~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긴들 아니 슬플쏜가.'
‘식사 전이시면 추어탕 끓인 것이 있는데요?’ 여인이 권하길래 정수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하고 사양했지만 상을 차려왔다. ‘시장하시지요?’ 하고 물으며 여인이 앞에 살포시 앉더니 두 손으로 얌전히 수저를 건네준다. 정수는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가슴이 뜨끔하더라고 했다. 그런 음식 수발하는 법은 사라진 지 오래된 양반집 법도다. 식기는 고태 나는 놋제품이고, 추어탕은 따끈하고, 탕에 들어간 산초는 향기로웠다.
원래 정수는 복고풍 인물이라, 눈 오는 날 서재 청소하고 향 피우고 묵향에 잠기기 좋아하고, 한시 읊기 좋아한다. 그런 정수의 이상적 여인상은, 산창(山窓)에 앉아 차 마시며 달빛 감상하기 좋아하고, 철 따라 향기로운 과일주 담을 줄 알고, 산새소리 들을 줄 아는 여인이다. 그런데 서울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부인은 TV 채널 맘대로 돌리고, 마트 심부름 맘대로 시키고, 설거지 맘대로 시킨다. 섬기기 힘든 공주님이요 상전이다. 아들 딸도 마찬가지다. 나이 50 되도록 둘 다 아비에게 여행 다녀오라고 봉투 한번 준 적 없다. 돈 벌어 오던 기계는 이제 폐품이 되었고, 그들 관심 밖이다. 그래 정수는 가끔 혼자 지리산에 들어가 사는 꿈을 꾸곤 했다. 토굴 하나 파놓고 바위와 나무, 물과 구름 친구하며 사는 꿈이었다. 그 외로운 정수에게 여인은 하얗고 섬세한 손으로 머루주를 권하고, 존경하는 눈빛으로 ‘교수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해준 것이다. 이런 경우에 목석인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일더라고 한다. 정수는 거기서 머루주를 석 잔이나 마셨다고 한다. 잔을 건네는 여인의 하얀 손과 진홍빛 머루주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더라고 한다.
‘술은 많이 마신다고 유쾌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단 한 잔을 마셔도 운치가 있어야 해!’ 정수는 그 장면에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하기사 대밭 속에서 새소리 들려오는 곳에서 섬섬옥수 여인이 마주 앉아 따라주는 술이 오죽했겠는가. 그날 여인은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진주에 오시면 꼭 저희 집에 들려주셔요.’ 하고 부탁했는데, 정수는 '꼭 오시라'는 그 말이 사무칠 정도로 반갑더라고 했다.
‘좋은 인연은 기다릴 땐 오지 않고, 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터지는 법이더라고.’ 정수가 시원히 잔을 넘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뒤 진주엘 갈 때마다 그 집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여인은 목이 빠지라고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탱자꽃이 하얀 향기 풍기던 어느 초여름 날 여인은 마당의 대평상에다 상을 채렸다. 상 위에는 따끈따끈한 쌀밥과 노릇노릇한 갈치구이, 사근사근 씹히는 묵은지가 올라있었다. 서울에선 보기 힘든 고향 음식이다. 손잡이를 대나무 뿌리로 만든 백자 주전자에 붉은 머루주가 담겨있었다. 여인이 산에서 따온 머루로 담은 술이라 했다. 정수는 모든 게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래 ‘주인도 한잔 받으시요’ 하고 여인에게 술을 권했고, 여인은 꽃잎이 불시에 바람을 만난듯 했다. 잠시 홍조를 띄면서 흔들리더니 잔을 받더라고 한다. 강 건너 나동면에서 뻐꾹새가 뻐꾹뻐꾹 울던 날이다. 잔을 비우자 여인은 정수에게, ‘선생님 명함 한 장 주실 수 있습니까?’ 하고 부탁하더라고 한다. 정수는 '직장 은퇴한 사람이라 명함이 없다'고 말하고, 메모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여인은 ‘저는 밝을 소(昭), 계집 희(姬), 소희라고 불러주세요’ 하고 말하는데, 아마 작심하고 정식으로 통성명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고 한다.
정수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원래 수곡인데 어려서 아버님이 쌍계사에 계셔서 그 근처에서 자랐다'고 대답했다. 그래 정수가 '내가 지리산에서 가장 좋아한 곳이 화개동'이라고 밝히고, '항상 화개동 어디쯤 전원주택에 작은 차밭 가꾸며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희가 기다렸단 듯이, ‘그러셔요? 시간 내시면, 제가 쌍계사 쪽에 있는 땅을 소개해드릴 수 있는데요’ 하고 말하더란 것이다. 소희는 정수가 원하는 땅을 귀신같이 알고 말하는듯 했다. '거긴 가재가 헤엄치는 맑은 계곡이 있고 야생 차나무와 석창포가 많다'고 했다.
그래 두 사람은 다음 날 정수 차를 타고 당장 갔는데, 거긴 쌍계사 의신마을에서 벽소령 가는 길 중간 이었다. 땅은 천 평쯤 되는데, 바위 사이로 푸른 옥류가 층층폭포를 이루며 흐르고, 군데군데 늙은 차나무가 보이고, 석창포와 산수국이 보였다. 고산지대의 오래된 야생 차나무는 보물급으로 친다. 그건 밭에서 키우는 차나무와 비교가 안될만치 귀한 것이다. 석창포는 옛여인이 단오 때 창포물로 머리를 감았던 향기로운 약초다. 늙은 야생 차나무와 싱싱한 파란 석창포만 봐도 마음이 흡족한데, 처음에는 무었인지 몰랐는데 어디에 야생 국화 덤불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람결에 날라온 국화향이 계곡을 온통 채우고 있다. 국화는 동의보감에 보면 그 효능이 설명되어 있다. 중국에 장수촌(長壽村)이란 동네가 있는데, 야생 국화가 무성하여 산에서 흘러온 약수를 마시고 사람들이 모두 장수했다고 한다.
정수가 맑은 쏘에서 힘차게 헤엄치는 피라미와 산천어를 보면서 '여긴 신선의 땅 같아요? 내가 찾던 무릉도원입니다' 하는 감상을 토하자, 소희는 '여기는 예전부터 제가 좋아하던 땅인데, 오늘에사 선생님이 오셨군요' 하고 대답했다. 정수는 '오늘 우리 두 사람이 원하던 이 땅에서 만났으니, 혹시 소희 씨는 내가 꿈에서 그리워하던 선녀가 아닐까요?' 하고 물었고, 소희는, '저는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리운 분이란 걸 알았어요'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때 소희가 비단 누비보를 풀었다. 네 귀를 정성스럽게 난초로 수놓은 누비보 속에 야생 복숭아술이 있었다. 두 사람이 우선 비단 같은 푸른 이끼 덮인 널찍한 바위 위에 자리 잡자, 소희가 그 선도주(仙桃酒)를 잔에 따랐다. 정수가 검붉은 선도주를 마시자, 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때 정수가 한시를 읊었다.
<비 맞으며 솔 모종 옮기고 구름에 싸인 대사립문 닫네. 산에 핀 꽃은 수놓은 장막보다 좋고, 뜰 앞의 잣나무는 비단휘장이 되네>
그러자 뜻밖에 일이 일어났다. 소희가 시의 뒷구절을 읊었다.
<고요한 향료에서 피는 연기 마주하고, 한가한 돌다리 위 살찐 이끼 바라보네. 아무도 와서 내게 무엇을 묻지 마라, 나는 일찍이 세상과 맞지 않네>
그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나오는 원감국사(園鑑國師)의 시다. 아마 선비인 아버님한테서 배운 모양이다. 어쨌든 원감스님의 시를 아는 여인을 만나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내게 와서 묻지를 말라. 나는 일찍이 세상과 맞지 않았으니'라니! 평생을 기다려도 그런 여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소희가 그 여인이었다. 그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넘쳐 오른 정수가 ‘여기서 소희 씨와 둘이 야생 차나무 가꾸며 살면 어떻겠소?’ 하고 물었고, 소희는, ‘선생님이 여기서 차나무 키우시면, 저도 곁에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했다.
노을은 물 위에 황금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옆에 들리는 건 물소리 바람소리 뿐이다. 천지에 인적이 없다. 정수는 가만히 가늘고 하얀 소희의 손을 잡아당겼다.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 포개었다. 원래 손바닥은 몸의 경혈이 집중된 민감한 곳이다.
'아이! 그렇게 누르시면 어떡해요? 기분이 이상해요’ 당황한 소희가 손을 빼려 했고, ‘싫어요?’ 정수가 묻자, ‘아니’ 하고 대답했다. 그 후는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정수는 소희를 끌어안았고, 소희는 하는 듯 마는 듯한 가벼운 저항 끝에 눈을 감은채 입술을 열어주었다. 떨리는 입술의 촉감은 하얀 배꽃처럼 차갑고 향기로왔다.
평소 남녀는 별처럼 머나먼 존재이다. 수천수만 광년 거리에 떨어진 별과 같다. 그러나 한번 입술이 닿으면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가 된다. 정수는 그 뒤 진주에 가면 소희의 집에 머물렀다. 강돌로 낮은 꽃담을 두르고, 작은 연못과 매화나무가 있는 별채는 소희 아버지가 서재로 쓰던 곳이다. 정수는 별채에 머물곤 했는데, 이야기 들어보니 소희 부친은 해인대 학장 최범술 스님과 비봉루 정명수 선생과 교류하던 분이라 했다. 최범술 스님은 <한국의 차도>란 저술을 남긴 고승이고, 정명수 선생은 진주에 추사체를 처음 알린 분이다. 소희는 어려서 그분들께 다도와 서예를 배웠는데, 부친 돌아가신 후 혼자 빈 집에 살았다고 한다.
그 소희가 새벽에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붓글씨 쓰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성긴 대밭 사이로 보이는 반송(盤松) 키우는 묘판과 배나무 과수원 배경도 운치 있었다. 한 폭의 풍죽도(風竹圖)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원래 풍죽도는 바람에 날리는 댓잎을 그려서, 세파에 흔들리면서도 격조를 잃지않는 선비 모습을 그리는 것인데, 소희가 밝아오는 남강의 여명을 배경으로 이슬 젖은 대밭에서 들리는 새소리 들으며 묵향에 잠긴 모습은 풍죽도 이상이었다. 선녀가 하강한 듯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그래 어느 날 정수가 ‘대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인지 아침에 어떤 선녀가 차 마시는 풍경을 보고 알았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대나무의 멋과 저를 비교하면 안 돼요. 그러면 대나무가 화내요. 저는 대나무의 멋 반도 못 미쳐요' 하고 소희가 말했다. 소희는 대나무가 얼마나 청초한지 잘 아는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소희는 촉석 공원 아래 골동 가게에 가서 커다란 백자 화분을 구해왔다. 연꽃을 거기 키웠는데 7월이 오자 넖은 잎 속에서 붉은 연꽃이 피워올라 집 전체가 청정해졌다. 두 사람은 밤에 연꽃 봉오리 속에 차봉지를 넣어두었다가 이른 아침 그 차를 꺼내 연꽃차를 즐기곤 했다. 소희는 작은 텃밭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소출되는 딸기를 백자 접시에 담아내면 음식이 예술품처럼 품위와 격조가 있다. 여름 비 그치면 두 사람은 대밭에 죽순을 따러 다녔다. 남강은 죽순철이면 은어가 올라온다. '요즘 남강에 은어가 귀해요!' 소희는 은어 값 올랐다고 푸념을 하곤 했다.
소희는 대개 아침 상에는 검은깨 뿌린 잣죽을 간단히 내놓고, 저녁 상에는 곰취 산마늘 오가피잎 튀김이나, 다진 조갯살 넣은 전을 내놓았다. 계절에 민감한 여인이라, 소쿠리에 딸기 담아내오면 봄이고, 자두나 무화과나 복숭아가 나오면 여름이고, 감이나 배가 나오면 가을이었다. 진주는 남해와 지리산을 양옆에 끼고 있어 항상 싱싱한 조개와 생선, 참외와 수박이 많다. 진주 여인은 음식 만들기 좋아해, 외식 즐기면서 남편이 출장을 가도 밥이나 먹고 가는지 마는지 모르는 서울 여인과 다르다. 소희는 정수가 어쩌다 부엌에 들어가면 ‘남자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오면 안 돼요’ 하면서 몰아낸다. 그때 정수는 소희를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 속에서 걸어나온 여인이라 생각했다.
간혹 두 사람은 배를 타고 강 건너 약수암으로 가곤 했다. 불경 외우는 취미를 가진 정수는 배가 물살을 가르며 안개 낀 강을 건너가면 피안으로 가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부처님 전에 ‘우리 사랑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게 하여 주세요’ 하고 기도했고, 자라를 사서 진양호에 방생하면서 용왕님 전에도 빌었다.
봄엔 매화 여행을 떠나곤 했다. 산청에는 ‘산청 삼매(三梅)’가 있다. 단속사(斷俗寺) 정당매(政堂梅), 남사 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 산천재 남명매(南冥梅)가 그것이다. 정당매는 폐허인 단속사지(趾)에 있는데, 단속사에서 공부한 강희백이 나중에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헌이 되었다고 정당매라 부른다. 소희는 강희백의 손자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의 그림 배경이 자기 집 앞 약수암 절벽 밑이라 했다. 부친한테 그런 이야길 들은 듯한데, 과연 그후 둘이서 강변에 가보니 그 말이 옳았다. 원정매는 고려말 하즙(河楫)이 한옥촌 남사마을에 살면서 심은 매화다. 용틀임한 7백 년 된 고매(古梅)는 고사한 상태라 조금 아쉬웠지만, 고가는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강이 뒤에 흐르고,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소희는 그 중 남명매를 제일 좋아했는데, 아마 소희 부친이 산천재(山天齋) 선비들과 교류했던 때문일 것이다. 소희는 남명매(南冥梅) 꽃을 따와서 매화차를 즐겼고, 손자뻘 묘목을 얻어와 자기 집 뜰에 키웠다.
만추가 되면 진주에는 예술제가 열린다. 그때 진주는 삼바 축제 열리는 리오데자네이로가 된다. 성곽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거리는 온통 국화꽃으로 덮인다. 수백 대 포장마차는 등불을 밝히고, 물 위의 유등은 은은한 불빛으로 남강을 수놓는다. 정수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이형기의 <낙화>를 읊고, 소희는 ‘그것은 먼 벌판에 눈이 오는 소리다. 차라리 그것은 먼 벌판에 비가 오는 소리다. 강물처럼 나직이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최계락의 <낙엽>을 읊었다. 진주는 이형기 최계락 같은 걸출한 시인을 내놓았지만, 진주 학생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밤에 남강에 유등을 띄울 때, 등에다 사랑하는 여학생 이름을 적어서 흘려보내곤 했다.
두 사람이 촉석루 다녀온 그날 밤 대숲의 달빛은 더욱 고왔다. 별채에서 차를 마시면서 정수는 소희를 남강변에 핀 희귀한 춘란이라 생각했다. 춘난의 향기를 안 이상 정수는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다고 생각했다. 소희 부친은 해인대학 학장 최범술 스님과 비봉루 은초(隱櫵) 정명수 선생과 교류한 분이다. 소희는 차맛을 알고 서화의 멋을 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절세가인과 보낸 밤은 너무 아름다워서 차라리 슬픈 것인지 모른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풍로에서 꼬불꼬불 허공에 전서(篆書)를 그리며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죽림에 비치는 달빛은 더 아름답고, 풍로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더 신비로왔다. 둘은 최범술 스님의 반야로(般若露) 차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최범술 스님은 해인사 최고 학승으로 동경 유학하던 시절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상해에서 폭탄을 운반해 재일거류민 초대 단장 박열 의사한테 전달한 분이다. 효당은 차도를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잡한 이론을 내세우지 않고, 화로에 불 피우고, 물 끓이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솔바람 소리 듣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며, 다기(茶器)나 서화나 정원의 멋을 감상하면서, 달과 흰구름을 벗 삼는 생활이 바로 선(禪)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분의 반야차 사상이다. 아마 근세 한국의 걸출한 차인을 꼽으라면 전라도 광주 무등산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과 경상도 봉명산(鳳鳴山) 다솔사(多率寺) 효당(曉堂) 최범술 스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희는 차를 마실 때 아버님이 쓰시던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차반(茶盤)을 쓰곤 했다. 그 차반은 오래 동안 땅 속에 묻혀있어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이 나는 차반이다. 차반은 그런 보물급 차반을 쓰고, 찻잔은 진교 백련리(白蓮里) 것을 썼다. 백련리는 일본 국보 찻잔 '이또다완'(井戶茶碗)이 출토된 곳이다. 백련리에서 16세기 전통 막사발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었고, 백련리란 동네 이름은 우리말로 새미골인데, 이또다완의 우물 정(井) 자는 우리말 새미(샘)를 의미한다. 효당은 다솔사에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을 모셔와서 소설가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金凡父) 선생과 담론할 때 이 반야차를 마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진주를 천년 고도라 부른다. 진주는 원래 가야와 백제 신라 세 나라가 국경을 접한 요충지다. 성곽은 박정희 대통령 때 중수했지만 근처 마을엔 골동품이 흔하다. 합천에선 개에게 밥 주던 그릇이 가야 때 토기로 밝혀졌고, 사랑방 문짝 한지를 뜯어내자 배접 속에서 대원군 난초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박물관도 진주와 합천 두 군데 있고, 안의는 강 굽이마다 고가와 정자가 있다.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는 고령에서 하동까지 무진장한 광맥이 뻗어있다. 소희는 어쩌면 천년 고도가 피운 마지막 꽃인지 몰랐다.
가을이 깊어지자 정수는 감나무에 올라가 까치밥으로 홍시 서너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따서 곶감용으로 처마에 걸었다. 소희는 약수암에서 따온 머루로 머루주 담고, 집 근처 뽕나무 오디로 오디주 담았다. 두 사람이 배추와 무까지 수확해서 김장독에 담아 움에 묻으니 맘이 그리 흡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물처럼 빠른 게 세월이다. 배꽃 피는 봄에 소희를 만났는데, 어느덧 가을이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느 날 정수는 촉석공원 밑 골동상가에서 오래된 청옥 가락지를 발견했다. 옥 중에 초록빛 푸른 옥을 비취라 한다. 정수는 비취옥 초록빛이 월궁항아 같은 소희에게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큰마음먹고 거금을 주고 그 쌍가락지를 샀는데, 그게 사단의 원인이었다. 원래 비취는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보석이다. 하나는 소희 손가락에 끼워주고, 하나는 본인이 낄려던 그 비취를 소희에게 보여주자, 소희가 갑자기 뭔가 마음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한숨을 쉬며 먼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슬픈 눈빛으로 정수를 응시하더니 느닷없이 달려들어 정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희의 몸은 온통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난초처럼 깨끗한 머리칼이 정수의 뺨을 간지럽혔다. '저는 꽃 피는 봄, 잎 지는 가을의 서럽고 야속한 시간 속에 산목련처럼 혼자 살았어요. 그러다가 늦게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래 정수가 소희를 달래며, '이렇게 만났으니 되지 않았소' 하고 묻자, 소희는 '어젯밤 꿈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제가 부얶에 나갔다가 방에 들어오려니 문이 열리지 않더라고요. 교수님은 창 너머로 환히 보이는데, 아무리 두드리고 소리를 쳐도 모르시고요. 그래 은쟁반 달이 서쪽으로 기운 새벽까지 혼자 울었어요.' 그 말을 듣고 정수가 '바보! 그래서 오늘 아침 눈이 그렇게 부어올랐군요. 그냥 무심한 꿈에' 하고 소희를 위로하면서 마음이 너무 섬세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소희는 ‘교수님을 영원히 사랑해도 되지요?’ 목멘 음성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뇌었다. '오늘은 왜 이럴까?' 정수가 묻자, 소희가 공문 하나를 보여줬다. 시청에서 보낸 것이었다. 소희네 집 옆으로 도로를 개설한다는 평범한 통보였다. '아무리 인생이 풀잎에 맺힌 이슬 같다고 해도...' 소희는 그 공문을 무척 원망하는듯 했다. 정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은 다음 주 정수가 진주 내려갔을 때 일어났다. 차를 몰아 약수암 건너편에 갔을 때다. 대밭 속 오솔길 입구에 전에 못 보던 통행금지 팻말이 서있고, 거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여기 도로 개설 중에 나온 분묘의 연고자는 시청 도로과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와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차반(茶盤)과 한쌍의 비취옥 가락지는 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니 그쪽으로 연락 바랍니다.'
정수가 소희를 만났던 그 한옥은 바로 소희 무덤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러자 친구 A가 이렇게 말했다. '김교수가 한 오늘 이야기는 완전 픽션이구먼. 도연명이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읊은 귀거래사 같은.' 그러자 B가 말했다. '귀거래사에서 고향 처녀와 맺은 로맨스를 서울 부인이 보면 그대로 무사할까?' 그래 정수가 대답했다. '그 점은 문제야. 그러나 엄처시하에 살아도 작가의 작품 구상은 자신의 선택 사항이지. 태생이 시골이라 무대가 시골인 것은 할 수 없어.‘ 그때 A가, '그건 그렇고 소설 제목 <진주는 천리길>은 뭐야?'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수가 '이제 우리에겐 고향 진주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천리 밖에 존재한다는 의미지' 그렇게 해명하고 결론 맺었다. '우리가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건 70년 전인데, 이젠 동기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있어. 그래 소설 속에서나마 고향으로 가보는 셈이지.' 그러고 그날 세 사람은 헤어졌다.
첫댓글 진주는 천리길 감명깊게 잘 끝까지 보았습니다.그렇게 섬세할수가 있을까요?.....
나는 실화라고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