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증오가 미덕처럼 느껴질 때
미국에서 증오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2024년 증오 범죄 건수는 사상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으며, 미국 최대 도시의 예비 데이터에 따르면 이러한 추세는 계속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증오 범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증오는 명백히 편견에 기인한 폭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부산물인 사람들 간의 소원함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2026년 한 연구에서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정당 소속과 관계없이 일관되게 상대 정당 소속자들을 더 나쁘게 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양극화 연구실(Polarization Research Lab)’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비유적인 ‘의회 의석’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나쁘게 대하는 원인이 반드시 의견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반대편에 앉아 있다는 이유 때문일 뿐입니다.
분열은 소외로 변모하고 있으며,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크고 적대적인 집단은 우리가 서로를 이웃이나 동료 시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위협, 적, 장애물, 혹은 사회의 모든 문제의 상징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한때 다양한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해 주었던 레크리에이션 리그, 봉사 클럽, 종교 단체와 같은 시민 사회 기관의 약화와 경제적 불안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요인 아래에는 더 깊은 심리적 충동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증오를 도덕적 분노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도덕적 분노(Moral indignation)란 증오를 미덕으로 바꾸어 버리는 독선적인 감정(self-righteous feeling)입니다. 이는 증오를 기분 좋은 것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 악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일단 타인을 악하다고 낙인찍고 나면, 그렇지 않았다면 비도덕적으로 보였을 행동들이 허용될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고귀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도덕적 분개심(의로운 분노)은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은 오직 근거 없는 증오(שִׂנְאַת חִנָּם: 시나트 히남)일 뿐이며, 악을 미워하는 것은 세상을 바로잡는 행위(תִּיקּוּן עוֹלָם: 티쿤 올람)이다!”라고 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성경 구절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미워한다”(시편 97:10)를 인용하거나,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전도서 3:8)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잘못을 외면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 실패라고 주장하며, 타인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악을 미워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가르치지만, 유대교 전통은 악한 잘못에 반대하는 것과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구분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탈무드에는 지역 불량배들에게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들이 죽기를 기도했던 랍비 메이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베라코트 10a).
그는 다윗 왕의 말씀인 “죄인들이 땅에서 사라지고, 악인들이 더 이상 없게 하소서”(시편 104:35)를 따르는 것이 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은 메이어 랍비의 아내 베루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비록 그가 당대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더라도, 그 구절을 잘못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구절에는 ‘죄인들’(חוֹטְאִים. 호타이임)이라고 되어 있지 않아요,” 그녀가 말합니다. “‘죄’(חֲטָאִים, 하타이임)이라고 되어 있죠!” 이 구절은 죄인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들이 제거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소외를 통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나 소속된 집단(사실 우리는 그렇지 않지만)으로만 정의하게 되면, ‘우리’와 ‘그들’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토라가 단순히 이방인을 억압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출애굽기 23:9), “너는 이방인을 사랑할지니라”(신명기 10:19)라고 명령하는 이유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신명기 6:5)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레위기 19:18)조차도, 사랑이 어떻게 의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물며 낯선 이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와 아무런 유대감이나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마르틴 부버조차 『나와 너』에서 낯선 이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어려움을 느꼈는데, 그는 사랑의 계명을 전혀 의무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무와 책임은 오직 낯선 이에게만 다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친밀한 사람에게 끌리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썼습니다.
다른 사랑의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외적인 요구라기보다는 관계를 맺으라는 초대일 수 있습니다.
부버의 견해에는 지혜가 담겨 있지만, 나는 유대교 전통이 그보다 훨씬 더 엄격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심, 책임, 헌신을 실천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입니다.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이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소홀함으로 인해 관계를 소원하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서로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낯선 이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와 다릅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소원해지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저항할 것을 요구합니다. 낯선 이는 아직 친구가 아니지만, 토라는 우리가 공감 능력을 기르고 이미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떤 선행적 유대감을 인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토라는 이 계명을 우리 자신의 소외 경험을 기억하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느니라”(신명기 10:19).
우리는 이방인처럼 느껴지거나, 오해받거나, 취약하거나, 배제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단순한 고정관념 이상의 존재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토라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하기를 바라는 방식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낯선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상대방이 주장하거나 행하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거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 척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신념을 내세워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목표가 타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Rabbi Dr. Ira Bedzow (an associate professor in the practice of organization and management at Goizueta Business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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