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0]‘칠선사유상’ '심산어록' '김남주 시' 단상
# 친구의 최신작, 이름하여 <칠선사유상七線思惟像>을 감상한다. 바라볼수록 나로 하여금 뭔가 생각하도록 하고, 뭔가 아무 생각이 없게 한다. 작가가 직접 쓴 짧은 해설을 보면, 관객의 이런 심리상태를 꿰뚫는 혜안慧眼 비슷한 게 있는 듯하다. 작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들여다보면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고/더 들여다보면 저절로 (우리의) 생각을 멈추게 해주는, 돌과 칼의 합작으로 빚은 놀라운 마력>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가로세로 29cm 두께 1cm의 검은 벼루돌판에 예리한 돌칼로 일곱 번. 여섯 번도 아니고 여덟 번도 아니고, 딱 일곱 번 그었다. 저절로 선이 몇 개인지 세어보게 만든다. 그 선으로 만들어진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얼굴이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통통한 볼도 보이는 듯, 은은한 미소가 배어나온다.
초록별(지구)에서 최고의 미소로 불린다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어찌 일곱 번의 칼질로 묻어나오는 이 ‘백제의 미소’를 능가할 것인가? 나는 단연코 ‘노 땡큐’라고 말하고 싶다. 미소微笑는 본래 이렇게 은은해야 하는 것이거늘. 이것이 미소의 제 맛인 것을,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캐치를 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그은(새긴) 선線 속의 금빛이 진짜 금金인지 궁금했다. 실제 금은 아니고 금빛이 나는 천연안료라 한다. 눈이 휘둥그래질만큼 멋지다. 21세기에 정사각형 돌판에 칼 일곱 번 휘둘러 새겨 ‘신라(백제?)의 미소’를 복원하다니, 놀라운 솜씨일진저! 그렇게 일개 돌에 온 마음을 다바쳐 새겨 ‘돌꽃’을 피웠다해 ‘심각心刻’이라는 조어를 만들었을 듯하다. 나무관세음보살.
불교 조각의 최고봉이라는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라. 반가半跏의 ‘가’는 책상다리.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세에, 왼손은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의 사유상. 조화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체, 선명한 이목구비,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게다가 은은하게 퍼지는 고졸古拙한 미소는 종교적 숭고미까지 느끼게 하지 않은가. 오죽하면 최순우 선생이 이 미소를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딱히)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라고 표현했을까? *위 표현의 글은 매일경제 배한철기자 기사에서 부분인용함.
일본의 국보 1호 고류사廣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또 어떠한가. 독일철학자 야스퍼스는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며,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 있는 예술미의 극치”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 불상이 금동반가사유상을 만든 장인의 또다른 작품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져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넘어간 것이 확실하다. 누천년 동안 자기네 나라 '문화종주국'인 우리나라를 깔보는 저 오만불손한 저팬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어쨌든 한국과 일본의 두 작품에서 ‘슬며시’ 배어나오는 ‘천년의 미소’를 21세기 한 장인은 돌칼로 사각의 돌에 일곱 번 지이직 그으면서 일체의 번잡스러움을 걷어냈다. 200만원이면 큰 돈인가. 책상 위에 모셔놓고 시도때도 없이 감상을 해보는 것은 ‘고급 취미’인가?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만한 호사豪奢는 누려야 하지 않을까.
# 지하철 3호선 안국형 스크린 도어에는 애국지사들의 어록語錄이 제법 여러 개 쓰여 있다.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며 내가 존경하는 심산 김창숙(1879-1962)의 ‘처절한 어록’을 발견해 기뻤다. <먼저 일제 총독하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다음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고, 그리하여 민심을 고무시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시 불붙게 하라>. 어느 해에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처럼 단호하고 명확하게 독립의 의지를 밝힌 어록은 쉽지 않다. 감옥에 갇혀 “나는 포로”라며 일갈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평생 서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앉은뱅이 벽躄’ ‘늙은이 옹翁’ . 스스로 호를 '벽옹'이라고 짓고 <벽옹 70년일대기>를 남겼다. 그 책을 한 친구의 실수로 분실한 게 아깝다.
이런 기막힌 어록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글들이 어찌 안국역에만 있어야 하는가. 서울시내 어느 지하철역에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활동상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시덥잖은 시들은 거두고 말이다. 요즘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보면 더욱 씁쓸한 것이, 세상에 판칠 일이 없어 ‘토착왜구’들이 여기저기에서 본색을 드러내고 있고, 소위 ‘밀정’들의 암약상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어쩌다 나라꼴이 이렇게까지, 그야말로 한심지경이다. 심산 선생의 어록이 죽비처럼 우리를 쭈빗쭈빗하게 만드는데, 버젓이 활개치는 저들은 할래비 국적이 ‘일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 그야말로 ‘전사戰士 시인’ <김남주평전>(김형수 지음)을 읽다가 몸에 전율이 올 정도의 <종과 주인>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전문이다. <낫 노코 ㄱ자도 모른다고/주인이 종을 깔보자/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불더라/바로 그 낫으로>. 무섭다. 자신을 무식하다고 깔보는 주인을 ‘바로 그 낫으로’ 목을 베어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이런 일이? 그런데 그 상황이 십분 수긍이 간다. 아무리 종이래도 ‘사람’인데, 사람인 이상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거늘. ‘그래, 네가 배운 놈이고 그렇게 잘 났냐? 어디 이 조선낫의 맛을 한번 보라’며 목을 나뭇가지 베듯 꿔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역시 김남주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머슴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입은 몸을 베는 칼이거늘. 말조심할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