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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때인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이며, 당시 실세는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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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
재위기간 |
간단 정리 |
1대왕 태조 |
918~943 |
왕건 아시죠? |
2대왕 혜종 |
943~945 |
재위하자마자 왕권이 위태로웠..; |
3대왕 정종 |
945~949 |
폭군임!! |
4대왕 광종 |
949~975 |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실시 |
5대왕 경종 |
975~981 |
;ㅁ;... |
6대왕 성종 |
981~997 |
시무 28조, 노비환천법, 거란의 1차 침입 |
7대왕 목종 |
997~1009 |
몸이 안좋아 폐위 (핑계 좋군..;) |
8대왕 현종 |
1009~1031 |
거란의 2차&3차 침입, 초조대장경판 |
9대왕 덕종 |
1031~1034 |
천리장성 축조 |
10대왕 정종 |
1034~1046 |
응? 고려 3대왕도 정종 아냐? |
11대왕 문종 |
1046~1083 |
정치/사회/학문면 고려의 황금기 |
12대왕 순종 |
1083 |
재위기간이 안습이다 |
13대왕 선종 |
1083~1094 |
요, 송과의 활발한 외교 |
14대왕 헌종 |
1094~1095 |
삼촌 숙종에 의해 폐위됨 |
15대왕 숙종 |
1095~1105 |
해동통보 만듦, 별무반 |
16대왕 예종 |
1105~1122 |
여진정벌, 동북9성 반환 |
17대왕 인종 |
1122~1146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
18대왕 의종 |
1146~1170 |
보현원 사건, 무신정변으로 의종 폐위 |
19대왕 명종 |
1170~1197 |
망이.망소이의 봉기, 최씨 무신정권 시작 |
20대왕 신종 |
1197~1204 |
만적의 봉기 |
21대왕 희종 |
1204~1211 |
최충헌 살해 실패 |
22대왕 강종 |
1211~1213 |
;ㅁ;??? |
23대왕 고종 |
1213~1259 |
거란 퇴치, 몽골의 1~7차 침입, 강화 천도 |
24대왕 원종 (충경왕) |
1259~1274 |
강화 환도, 무신정권 끝남, 삼별초 대몽항쟁 |
25대왕 충렬왕 |
1274~1308 |
친원 반자주 정책 |
26대왕 충선왕 |
1차: 1298/2차: 1298~1313 |
반원 자주화 정책을 했던 최초의 왕! |
27대왕 충숙왕 |
1차: 1313~1330/2차: 1332~1339 |
두번 왕위에 오름 |
28대왕 충혜왕 |
1차: 1330~1332/2차: 1339~1344 |
사치, 항락, 사냥을 일삼음 |
29대왕 충목왕 |
1344~1348 |
;ㅅ;.. |
30대왕 충정왕 |
1348~1351 |
어리다는 이유로 폐위 |
31대왕 공민왕 |
1351~1374 |
반원자주화 정책, 신하에 의해 살해 |
32대왕 우왕 (굳) |
1374~1388 |
요동정벌, 위화도 회군으로 폐위 |
33대왕 창왕 |
1388~1389 |
이성계에 의해 폐위 |
34대왕 공양왕 |
1389~1392 |
조선 건국으로 인해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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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 보현원에서의 난을 계기로 집권하여 출발한 무신정권은 그후 1270년(원종 11)까지 꼭 100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꽤 여럿의 집권자들이 교체되었고, 그에 따라 정치적 성숙도도 달라지고 있어서 보통 이를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난을 발생시킨 이의방(李義方)·정중부(鄭仲夫)로부터 이의민(李義旼)의 집권시기를 성립기, 최충헌(崔忠獻) 등 최씨 4대의 집권기를 확립기, 그후를 붕괴기라고 할 수 있다.
1170년의 정변에서 정중부는 비교적 온건세력이었던 데 비해 이의방과 이고(李高)는 하위직이었음에 불구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난의 성공 후 관직의 승진도 훨씬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이의방과 이고가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곧 양자간에 다툼이 벌어져 1171년(명종 1)에 이고가 제거되고, 이의방은 온건무장세력과의 타협하에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친다. 그러나 그도 1174년(명종 4) 12월에 제거되어 결국 3인의 주동자 중 최후의 승리는 정중부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정중부 마저 복고의 뜻을 가진 젊은 무장인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1179년(명종 9) 9월에 제거되었다.
그러나 경대승의 이런 행동은 무신 전체를 적대세력으로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 때문에 그는 호위세력인 도방(都房)을 설치하지만 1183년(명종 13) 7월에 병사함으로써 그의 정권은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후 정권을 잡은 것은 천계출신인 이의민이었다. 경대승의 정권때는 집권자의 위협으로 경주로 낙향했던 그는 경대승의 병사 후 명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집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세도를 믿고 횡포하여 크게 인심을 잃고 사소한 다툼으로 최충헌 형제와의 싸움 끝에 제거되었다(1196, 명종 26). 이처럼 성립기 약 26년 간의 무신정권은 연속적인 또 다른 난으로 인하여 집권자가 제거되는 등 안정적이지 못하였고, 정권의 유지 또한 중방이라는 장군들의 회의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립기의 무신정권은 1196년(명종 26) 4월에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큰 전기를 맞는다. 최충헌은 아버지의 음서를 통해 관도에 진출할 정도로 비교적 좋은 집안 출신이다. 특히 문반출신이던 그는 공명에 뜻을 두고 있어 무신난 직후 무반직으로 사로를 바꾸어 성공해 나갔다. 결국 난의 성공으로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최충헌은 교정도감(敎定都監)과 도방 등을 통해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먼저 그는 부족한 사병조직을 보충하고자 경대승의 도방을 본따서 사적 무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기구로서 교정도감을 설치했다. 이미 집권한 후 상장군직 이외에 지주사(知奏事)·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거쳐 단계적으로 승진, 1205년(희종 원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데, 정치 요직인 재추의 기본관직에다 인사권을 가진 이부(吏部)·병부(兵部)와 관리 감찰권을 지닌 어사대,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원직인 상장군 등 5개의 권력직을 겸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런 국가의 공식적인 관직을 통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는 1206년(희종 2)에는 진강후(晋康侯)에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뒤에 진강부로 개칭)를 세움으로써 권력 기반을 공고히했다. 그러나 1209년(희종 5)의 암살시도를 겪은 직후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이후부터는 그것을 통해 정령을 폈던 것이다. 이처럼 최충헌은 이전 집정들과는 달리 1인 독재권력을 확립하고 사병조직 및 독자적인 집정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더욱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최충헌이 1219년(고종 6)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우(瑀-후에 이(怡)로 개명)가 권력을 이었다. 최우는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대편성하고, 삼별초를 조직하여 무력기반을 크게 확충했다. 또 교정도감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두어 사저에서 백관의 인사를 처리하는 기구를 공식화하며, 유학자들을 모아 직숙(直宿)하면서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케한 서방(書房)도 설치하였다. 최우 집권시에는 몽고군의 침입이 개시되는 어려움을 겪지만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져 사망하는 1249년(고종36)까지 30년간 집권하였다.
그 이후 권력은 그의 첩자(妾子)인 항(沆)이 세습한다. 그도 기존의 정치를 답습하였지만 불과 8년 만에 병사하고 다시 최항의 첩자인 의(竩)가 4대 집정이 되었다. 하지만 천계출생으로 조정의 신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가 여러차례의 실정으로 결국 자신의 가노(家奴) 출신으로 당시 별장(別將)이던 김인준(金仁俊)에 의해 1258년(고종 45)에 살해되었다. 이로써 최씨집권기는 막을 내리 되었다.
이후 김인준에 의해서 새로운 무신정권이 성립되지만 권력은 최씨집권기보다는 약해졌다. 더욱이 1268년(원종 9)에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던 임연(林衍)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다시 권력은 임연을 통해서 그 아들인 임유무(林惟茂)에게 이어지지만 결국 원(元)나라라는 외부세력의 압력까지 겹쳐 결국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붕괴기의 무신정권은 확립기의 최씨집권기를 따라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권력기반을 공고히하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확히 100년간을 이어진 무신정권에 대하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씨집권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면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인사권을 함부로 한다든가, 몽고군 침입시에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육지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사실, 이때 육지의 백성들은 내버려 둔 채 강화에서 향락을 일삼은 사실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