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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1917)
- 사회화는 자기실현의 길이 아니라 강요된 적응
1917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편은 E. T. A 호프만의 『개 베르간차의 최근 운명에 관한 보고』와 빌헬름 하우프의 『젊은 영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연극으로도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장기 흥행에 성공한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은 바로 이것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변신』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동물의 인간화가 다루어지고 있다.
<줄거리>
인간화된 원숭이 빨간 피터는 학자들의 모임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원숭이로서의 전생(前生)과 자신의 인간화에 대해 강연을 한다. 그는 인습적인 아카데미의 정중한 어법을 노련하게 구사하며 대단한 능변으로 이 과제를 완주한다. 그는 자기도취로 가득 차 있고 힘겹게 도달한 신분에 대단한 긍지를 보인다.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여기서는 카프카와 주인공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원숭이 빨간 피터는 교양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고, 일종의 벼락 출세를 한 입장에서 과잉 적응을 한 시각으로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요컨대 그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과거를 회고하면서 동물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를 과대평가하는데 사실 그의 기억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사냥꾼들에게 포획되어 배에 실린 시점이다.
현재의 피터의 지위는 무대 위에서의 쇼 공연가인데 이것 역시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상태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에 갇힌 고통스러운 삶이 그에게 이런 상태를 '출구'로서 강요한 결과이다. 그가 포획되어 실려온 배는 그에게 '생애 처음으로 출구 없는' 상황을 안겨 주었고, 그는 '출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원숭이로 남기를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출구'라는 것은 자기실현의 길이 아니라 강요된 적응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귀향』이나 『시골의사 Ein Landarzt』, 『성 Das Schloß』 등에 나타나듯, 카프카의 많은 주인공들이 부닥치는 잘못된 도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지만 진정한 인간도 아니다. 대용품으로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잡종일 뿐이다. 그것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낮에는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지만 밤에는 침팬지와 동침함으로써 동물의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어설픈 인간화는 이 작품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조롱이라는 유력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시에 문명이라는 애매한 표현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나 불안전성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 피터가 인간세계로 진입했다는 증거들은 대체로 외형적인 것들이다. 침뱉기라든가 악수, 소주 마시기 등의 인간적인 관습들은 그가 인간세계의 일원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화의 표피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즉 이것은 자기를 과시하는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인간의 자유는 철봉곡예사의 운동의 자유로 야유되기도 한다. 즉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단조로운 반복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 이른바 인간의 자유가 지닌 한계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빨간 피터가 인간화 과정의 교육을 위해 많은 선생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인습을 풍자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작가와 주인공의 동일성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본서의 테마인 내외세계의 분열로 접근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연구된 해석 중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만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1. 정신분석학적인 연구에서는 술을 마신다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원숭이가 인간세계로 수용되는 것을 작가가 성인 남자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에 비유한다. 빨간 피터는 포획시에 총 두 방을 맞는데, 한 방은 음부 부위에 상처를 주고 이것은 카프카의 거세공포로 풀이된다. 우리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은 카프카의 성적궁핍으로 여겨진다. 카프카는 아동기 체험의 여파로 성적억압의 고통을 당한 바 있는데 원숭이가 완전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은 정상적인 욕구 분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2. 이 단편은 개종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유대인의 동화 노력에 대한 풍자이다.
3. 인간과는 별개의 종(種)에 소속된 것처럼 보는 카프카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성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묘사된 것이다.
4. 인간의 사회화를 풍자한 것이다. 성공적인 순화과정은 빨간 피터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공연예술가로 부상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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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Die Verwandlung, 1912)
이 작품은 『선고』와 달리 여러 차례 개작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것이고, 작가 자신도 "읽어줄 수 없는" 결말이라는 말로 은연중 불만을 내비치고 있기도 하지만 유언에서 폐기 제외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착을 느낀 것도 같다.
<줄거리>
젊은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한 것을 발견했다. 출근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가족 들은 문을 두드리고 회사의 지배인은 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온다. 불쾌해진 그는 그레고르의 수상쩍은 행동을 회사문제와 연관시켜 의심하고는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레고르는 안으로 잠긴 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의 목소 리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후 힘들여 문을 열고 나간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부모는 충격을 받고 당황해 한다. 아버지는 위협적인 동 작으로 벌레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때 그레고르는 큰 충격으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린다.
주인공은 문틈으로 가족들을 관찰한다. 그의 모습에 질린 누이동생은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지만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주일 후 어머니가 그의 방 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벌레의 형상에 놀라 실신하고 만다. 한번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가자 아버지는 분노한 나머지 벌레에게 사과를 던져 심한 상처를 입힌다. 그레고르가 더 이 상 부양의 능력이 없자 가족들은 스스로 생활대책을 강구한다. 아버지는 은행에 일자리를 마련하고 방을 하나 비워 하숙인을 받아들인다.
어느날 저녁 누이동생이 저녁식사 후에 하숙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주인공은 거실로 기어 들어간다. 하숙인들은 벌레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누이동생은 벌레를 더 이상 오빠로 간주할 수 없다며 벌레를 없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하다. 주인공은 힘없이 자기 방 으로 돌아와 죽는다. 하녀가 벌레의 시체를 치우고 한결 가벼워진 가족은 행복한 기분으로 휴일에 소풍을 간다.
그레고르 잠자의 운명은 이 작품에 앞서 1970년에 완성된 『시골에서 결혼 준비』에 나오는 라반의 꿈을 기억나게 해 준다. 라반은 여기서 자신의 옷을 입은 육체를 보내 세상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신 자신은 벌레의 형상으로 남아 침대에서 쉬고자 하는데, 바로 순수자아의 의지와 달리 외부세계에 불과한 벌레 같은 존재라는 자의식이 두 작품에 공통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변신의 이유를 모른다. 다만, 육체와 달리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는 그레고르의 사고를 통해 전반적인 삶의 환경이 드러나는 가운데 어렴풋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고, 또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불만이 있음이 밝혀진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낯선 상황의 발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원인분석을 해보는데, 그의 일상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늘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세일즈맨이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직업을 택했을까?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다녀야 한다. 본점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업무상의 긴장감이 훨씬 심하다. 그 밖에도 여행의 괴로 움, 열차시간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조잡한 식사, 항상 바뀌어 결코 지속되지도 못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다.
그레고르의 하루하루가 늘 피곤하고 불안에 쫓기는 것임이 돌발적인 상황에 서의 숙고로 인해 밝혀진다. 게다가 그는 가족에 대한 부양자로서 가족은 선량한 그를 이용하는 생활구조이다. 이러한 일상에서 변신은 그레고르로 하여금 억눌러 온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계기라는 측면이 있다. 그는 사회 속에서의 온갖 인간관계에서 탈피함으로써 자신에게 늘 긴장된 업무를 강요하는 사회권력에 맞서고, 직장상사와 아버지에게 맞선다는 은밀한 소망을 간직해 왔는데, 이것은 변신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외부세계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도전적인 잠재의식으로서 변신은 그레고르에게 노예 같은 생활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할은 뒤바뀌어 가족은 생활전선에 나가야 하고 그는 기생적인 생존방식으로 쉬는 위치에 놓인다고 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가족은 그를 없어져야 할 무용지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가족의 입장은 사실상의 사형선고라고 볼 수도 있을 누이동생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대변되고 있다.
"내쫓아야 해요" 누이동생이 외쳤다. "그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누이동생은 지금까지 그레고르가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한 인물이고,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후원으로 음악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계획까지 갖고 있었는데 그녀로부터 가장 차갑게 따돌림 당하는 현실이 노출된다. 전반적인 상황을 검토해 본 그레고르는 자신의 기생적 존재방식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들을 원망함이 없이 화해의 감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과 공격으로 생긴 상처가 점차 확대된 외부적인 요인도 없지 않지만, 죽음은 그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인상이 강하다. 그 레고르가 죽는 대목에서는 평화적 분위기마저 감돈다.
또한 마음이 느긋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전신이 아팠지만 아픈 것이 점점 가라앉아 머지않아서 완전히 가라앉고 결국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등에 박혀 썩은 사과는 부드러운 먼지에 싸여 느끼지 않게 되었다. 수없는 동정과 애정을 갖고 그는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의견보다 훨씬 더 절실했을 것이다. 교회의 탑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그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수그러지고 콧구멍 으로부터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나왔다.
죽음에 대한 그레고르의 동의는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야기된 자신의 고립의 의지와 저항의 소망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카프카의 자아분열 이라는 공식에 대입해 보면, 외부사회에서 지치고 소외된 일상적 삶을 도피하는 방법으로서의 변신은 실패한 것이고, 죽음과 타협함으로써 순수영역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타나토스적 욕망이 발동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신이라는 가상의 전제 앞에서 가족도 유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속성 은 이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아들의 변신을 계기로 그 비천한 본질이 폭로되며, 벌레를 치운 후 딸의 젊은 육체에서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며 소풍을 떠나는 결말은 벌레의 비인간적인 육체에 못지 않게 비인간적인 존재방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변신이라는 환상적 설정을 놓고 이것이 외형의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의 심리묘사'라는 해석도 있고, 병든 주인공의 망상으로서 '꿈으로 왜곡된 고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꿈의 묘사이고, 내면의 심리나 망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카프카의 환상적 모티프를 두고 '반동화(反童話)'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마법의 주문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 반면, 동화와 달리 끝까지 이 마법에서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적된 주장이다.
문제는 불가사의 리얼리티를 찾아내기 위해 동원하는 카프카 고유의 묘사 수단, 즉 현실적 언어와 환상적 형상을 합성시켜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려는 형상화의 스타일이다. 변신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경쟁사회에서 쫓기고 소외된 생존방식이 각성되는 것이고, 인간 내면의 비인간적인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동시에 작품의 말미에서 더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 누이동생이 아니라 잠자씨, 잠자부인, 잠자양으로 표현되는 가족의 움직임은 외부세계의 생존방식으로서의 삶이 궁극적인 승리를 차지한다는 강한 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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