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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을 집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서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어디야?>
“왜요?”
<집으로 와.>
“싫어요.”
<뭐가 싫어? 엄마가 오라면 와야지. 저녁에 할아버지 댁에서 다 모이기로 했어.>
은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엄마.. 싫어요. 안 갑니다.”
<아린이 왔대.>
“더 싫어요. 걔가 왔으면 온거지.. 왜 식구들이 죄다 가야 하냐고.”
<가족인 걸 어떻게 해. 집으로 와. 아니면 7시까지 할아버지 댁으로 모이던지. 할아버지가 너랑 바둑 두고 싶으시대.>
“하아.. 알았어요. 저녁만 먹고, 할아버지랑 바둑만 딱 두고 나올 거예요. 걔랑 이야기를 하라는 둥.. 하시면 다시는 안 가요.”
<알았어.>
전화를 끊은 은서가 한 숨을 내쉬었다.
7시 거의 다 되어 집에서 출발한 은서가 할아버지 댁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소화제부터 먹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세 번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벨을 누르자 안에서 아주머니 목소리가 나왔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은서가 커다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잔디가 잘 깔려진 넓은 마당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현관문을 만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주머니가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네. 잘 지내셨어요?”
“네. 들어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네. 그 녀석은요?”
그녀가 아주머니에게 속삭이듯 말하자 아주머니가 조그맣게 “계세요.” 라고 대답해 주었다. 은서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주머
니가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그녀가 식사를 하고 계신 곳으로 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앉아라.”
“네. 큰아버지, 큰어머니. 안녕하셨어요?”
“그래.”
“너도 잘 지냈니?”
“네.”
은서가 앉으며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이 그녀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 다녀왔어?”
“응. 넌 여전하구나?”
“그렇지 뭐.”
엄마가 그녀를 흘기듯 바라보셨다. 은서가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생겼어?”
아린이 묻자 은서가 바라보지 않고 “아니.” 라고 대답하고 국물을 입에 넣었다.
“왜 없어? 남자들이 사귀자고 안 해?”
할아버지가 은서를 바라보며 물으셨다.
“일하느라 바빠서요. 시간이 없어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어.. 할애비가 사람 좀 알아봐 줘?”
“아니에요. 진짜에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할아버지. 저한테 소개시켜 주시면 안 돼요?”
아린이가 예쁜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너도 없어?”
“없어요~. 괜찮은 남자 있으면 만나 보려고요. 이탈리아에서 공부만 하다가 왔더니 조금 외로워요.”
“풉!”
은서가 국물을 뿜자 다들 은서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냅킨을 은서에게 건네고 주변을 치워주셨다.
“죄송합니다.”
은서가 냅킨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갑자기 재치기가 나서요.. 죄송합니다.”
아린이 눈을 흘기듯 그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 없이 한 숨을 내쉬었다. 입가를 닦은 은서가 다시 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은서는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었다.
“진짜 없어? 왜 없을꼬.. 우리 은서가 얼마나 예쁜데..”
“할아버지 손녀딸이니까 그렇죠. 밖에 나가면 그냥 그래요.”
할아버지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아린이는 너무 만나서 걱정이고, 너는 너무 안 만나서 걱정이고.. 둘이 반씩 섞었으면 좋겠구만..”
은서가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밖으로 나온 은서가 나갈 준비를 했다.
“벌써 가려고? 아린이랑 얘기 좀 하다가 가지.”
큰어머니가 은서에게 말씀하셨다. 뒤에서 엄마가 눈짓을 하셨다. 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큰어머니에게 대답했다.
“그럼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그래. 다과 올려보낼게.”
“네..”
은서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아린의 방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아린이 문을 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올려 보냈어?”
“응. 그럼 간다.”
은서가 몸을 돌리자 아린이 잡았다.
“야. 궁금한 거 있어.”
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서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향수냄새와 화장품 냄새에 은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앉아.”
은서가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사는 집은 괜찮아?”
“뭐.. 집이 그렇지. 왜 묻는건데?”
“그냥.. 조금 작은 곳에서 산다고 들었거든.. 안전하기는 한 거니?”
“뭐.. 나쁘지 않아. 돌려서 말하지 말고 그냥 말 해.”
“정말 애인 없어?”
은서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 이탈리아에서 공부만 했어?”
“아닌 거 알아서 아까 그랬던 거 아니야?”
은서가 피식 웃었다.
“별로 할 말 없는 것 같으니까 간다.”
“너희 미용실에 가면 잘 해주니?”
은서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아린이에게 말했다.
“오지 마.”
“어머.. 너는 왜 오지 말라고 해? 설마 남자친구라도 숨겨 놓은 거야?”
은서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너의 뇌도 분명 세포 분열을 할 때는 꽤 쓸모 있게 살려고 만들어졌을 텐데 그 뇌를 전부 남자를 위해 사용하다 죽으니 슬프겠다.”
“야~!”
“그럼 쉬어. 내일도 바쁠 것 같으니까.”
은서가 방을 나서자 아린이 입술을 내밀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은서가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왔다. 함께 나온 아빠가 은서
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가고.”
“네.”
“너는 좀 일찍 오지..”
“왔잖아요. 밥도 먹었고, 할아버지랑 바둑도 뒀고, 아린이랑 짧지만 알찬 대화도 했으면 됐지, 뭘.”
“아린이 반만 닮으면 좋겠구만..”
은서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가 오른 쪽 입가를 올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진짜? 그럼 엄마 딸은 이미 처녀가 아닌데?”
“이 녀석이..”
엄마가 손을 들어 은서의 팔을 때리시려고 하자 아빠가 말리셨다.
“피곤하겠다. 얼른 가.”
“네. 조심해서 가세요.”
은서가 차를 타고 출발하는 부모님 차를 바라보다 은서도 차에 올라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면서 투덜거렸다.
“그 기지배는 나한테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물어보고 XX이야.. 누굴 소개시켜 줘? 창문이나 좀 열고 살지. 냄새에 질식해 죽을 것 같더구만.”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집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추었다.
집 앞에 누가 문에 기대어 있었다. 귓가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녀는 다시 내려가야 하나 아니면 위층 남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살짝 고개를 들어주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가 바로 위층에 사는 남자였다.
‘위층 남자가 내 현관 앞에서 뭘 하고 있고, 왜, 무슨 일로 와 있는 걸까?’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그에게 가까이 가자 술 냄새가 났다. 재인은 머뭇거리다가 검지 손가락으로 그 남자의 팔을 살짝 톡톡 건들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저기.. 아저씨 집은 위층인데요.. 착각하셨나봐요. 한 층 더 올라가셔야 해요. 여긴.. 제 집이거든요..”
그러자 그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은서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다. 그는 오늘 선글라스를 안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서 그의 눈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싸웠는지 왼쪽 광대뼈 부분이 멍들었고, 입술은 터져있었다.
“괜찮으세요?”
은서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흠칫 놀라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리고 그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미세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그의 눈 주위에 나 있었다.
그것도 많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잡혀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눈가 상처를 살짝 만져 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움찔했다. 마치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은서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온몸에서 경고의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위험해.. 위험해.. 도망가야 해..’
하지만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그의 눈길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 때 그가 고통스런 얼굴로 나직이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보고 싶어..”
너무나도 슬픈 목소리였다. 너무 슬퍼서 왠지 은서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 그런 깊이가 느껴지는 목소리.. 약간 눈에 눈물이 고여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는 은서의 어깨에 기대어 쓰러지기 전에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보고 싶다구..”
그녀는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은서는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위로 쓰러진 남자를 들어올리기란 쉽지가 않았다. 간신히 버둥거려서 그의 아래에서
탈출을 하기는 했는데 이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그가 문제였다.
“이 건물에 아는 남자라고는 이 남자랑 친구 양아치뿐이고.. 양아치는 아직 퇴근을 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한다..”
은서는 일단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방은 소파에 던지듯 놓고 다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바닥에 있던 그가 없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그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은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말했다.
“다행이다. 저기요.. 아저씨 집은 위층이에요..”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비틀비틀 걸어서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제 집인데.. 오. 오... 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앞으로 몸을 기우뚱하더니 푹 꼬꾸라졌다. 신발도 신은 채.. 은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프..겠다..”
그녀는 고민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무언가 다짐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힘겹게 뒤집어서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그를 질질 끌어
소파근처까지 옮기는 데는 성공했다. 이마는 과도한 운동으로 땀이 비 오듯 했다.
은서는 긴 숨을 내 쉬며 손등으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근데.. 소파에는 어떻게 올리지? 아니 그보다 이 소파에 누울 수는 있나? 기럭지가.. 안 되겠는데..”
자신이 누우면 딱인 그 소파가 그의 옆에 있으니 아주 작은 아이들용 가구처럼 보였다.
은서는 고민 끝에 그냥 그를 소파 바로 옆 바닥에서 재우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베개와 이불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들고 베개를 머리아래에 넣어 주었다.
코트와 정장 재킷을 벗기고, 타이도 풀어 주었다. 단추도 하나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발을 바라보았다.
“양말은... 패스..”
이불을 그의 가슴께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약상자를 가져와서 면봉에 약을 찍어서
그의 상처에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그는 소독할 때 약간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기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덮고 있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옆으로 넘겨주었다. 선글라스에 숨겨져 있던
눈은 크고 긴 눈이었다. 코도 더 오똑해 보였다. 입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정말 왕자님처럼 잘생긴 남자였다.
“진짜 잘 생겼구나..”
넋을 놓고 그를 보고 있다가 자신의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머리를 탁 쳤다.
“잘한다.. 집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잠까지 재우고..”
그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서는 깜짝 놀라 몸을 날려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왜 속삭여?>
엄마였다. 혹시나 남자가 깨어났나 싶어서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움직임이 없었다.
“속삭이기는 뭘.. 왜요?”
<집이야?>
“네. 조금 전에 왔어요.”
<잘 도착했으면 전화를 줘야지.>
“죄송해요. 잘 도착했어요.”
<응. 알았어. 문 단속 잘 하고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를 끊은 은서가 바닥에 누워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문단속을 하면 뭐해.. 집 안에 남자가 있는데..”
그녀는 명함을 꺼내 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래층에 사는 윤은서에요. 다름이 아니라..”
잠시 후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전화를 끊었다.
“아저씨.. 친구분은 오늘 데이트가 있으시다네요. 내일 아침에 오신대요.. 죄송하다고.. 아저씨 잘 부탁한다는데.. 전 모르겠네요.. 이게 잘하는 건지.. 나 지금 뭐하니..”
은서는 한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차마 샤워는 못하겠어서 얼굴과 손과 발만 씻고
자신의 방에 들어와 이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방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밖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생각하니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다.
천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근데.. 누가 보고 싶다는 거지? 실연..당했나? 검은 옷을 입은 걸 보니 상갓집에 다녀왔나? 설마..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나?
누가.. 보고 싶다는 거지?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하지만 곧 하루 종일 서서 일하기도 했고, 좀처럼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을 겪어 마음이 피곤한데다 무거운 그를 옮기느라 몸도 피곤해진 그녀의 눈꺼풀은 쉽게 내려왔다.
다음 날 아침, 핸드폰 알람에 깨어난 은서는 긴 머리를 재인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해준
보라색 나비가 달려 있는 젓가락 나무비녀로 돌돌 말아 뒷통수에 고정시키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약을 발라 놓아서 그런지 얼굴의 상처는 어제보다는 좀 나아 보였다.
조용히 아침을 준비했다. 원래 혼자 살아도 아침은 꼭 챙겨먹자는 주의지만 혼자 살다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밥, 국, 반찬 놓고 먹었지만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커피 한잔 마시고, 미용실에 가서 브런치로 나가는 모닝 빵 하나 먹거나,
근처 커피숍에서 과일주스하나 사서 먹는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를 위해
콩나물북엇국을 끓였다. 간을 보고 있는데 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국자와 접시를
손에 들고 있던 은서는 그의 신음소리에 놀라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나다가 소파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선반에서
꿀병을 꺼내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다시 돌아보니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주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을 바라보던 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은서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기울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그녀는 잔뜩 취해 쓰러진
다음날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잘은 몰랐지만 그처럼 주위를 더듬거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이젠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재인 역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가 흠칫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은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쳐 다른 곳에 닿았다.
“누구..”
“안녕하세요. 아래층 사는.. 윤은서예요..”
“아..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어제 술 취하셔서요. 저희 집에 들어오셔서 쓰러지셨어요. 그래서 옮길 수가 없어서 저희 집 거실에서 주무셨어요.”
“아...”
그는 눈을 감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로 오른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짚었다. 은서는 꿀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티스푼으로 저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이거.. 꿀물..”
“아.. 혹시 뜨거운 건가요?”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컵을 바라보았다.
‘이게.. 안 보이나?’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곧 대답해 주었다.
“네. 뜨거운 거예요. 뜨거운 거 싫으시면 시원하게 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는 눈을 다시 뜨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녀가 내미는 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한 번에 컵을 잡지 못하고 컵에 손끝이 스치고 컵 옆의 허공을 잡았다.
그는 한 번에 컵을 못 잡자 눈을 감으며 인상을 쓰며 이를 물었는지 턱의 근육이 긴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 숨을 내쉬며 손을 그의 다리위로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발을 떼지 못하고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은서는 멍 하니 바라보았다.
이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그는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었다. 충격에 빠졌다.
‘그가 앞이 안 보인다.. 안 보이는 사람이야..’
그러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은서도 일어나 그 옆에 섰다.
“아침 준비 다되었는데.. 드시고 가세요.”
“아니.. 아닙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 바닥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인상을 쓰는지 그의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는 곧 어렵게 자신의 신발을 찾아 신고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그럼..”
그는 이번에는 현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서는 얼른 자물쇠들을 열어주었다.
“저희 집 문이 좀 복잡해서요.”
“네..”
문이 열리자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닫힌 문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야..’
전혀 알지 못했다. 눈치 채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더듬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지팡이 같은 것도 없이 다니던데.. 문득 어제 그의 눈 주위에서 본 상처들이 생각났다.
몸을 돌려 그가 잠들었던 소파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해서 자신의 옷도 챙기지 못하고 갔다.
은서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옷들을 잘 개어 쇼핑백에 넣었다. 주방으로 돌아가서
선반에서 유리용기들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가 먹을 수 있도록 국이랑 밥이랑 반찬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어떻게 해.. 보고 싶다던 게..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앞이 보고 싶다는 뜻이었나 봐..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훌쩍거리며 다른 쇼핑백에 담은 음식들을 넣었다. 쇼핑백들을 손에 들었다. 계단으로 위층에 올라갔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조금 진정을 하고 그의 집 현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흠.. 저예요.”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여전히 그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은서를 비켜 뒤쪽 어딘가 다른 곳에 닿았다.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코트랑 재킷이랑 넥타이에요.. 죄송해요. 어제 불편해 하셔서 제가.. 그리고 이건 아침이에요. 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서요. 그릇은 나중에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울음을 참느라 약간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바구니와 쇼핑백을 건네고는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다.
그는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일단 샤워부터 해야 했다. 그것도 찬물로.. 그리고 나서 어제 일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해내야 한다. 반드시...
미용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재인의 어깨를 원장님이 부드럽게 감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모르고.”
“아.. 죄송해요. 부르셨어요?”
“그냥.. 기운이 없어 보여서. 무슨 일 있었어?”
“원장님.”
“응?”
“만약에요. 앞이 안 보인다면 어떨까요?”
“앞이 안 보인다면.. 무섭기도 할 테고, 불편하기도 할 테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요.. 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섭겠다..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어질까 싶어서.”
“누가?”
“네?”
“누가 안 보이는데? 그런 사람 알아?”
“네.. TV에서요..”
원장님이 피식 웃으시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기운 내. 그런 일로 우울해 하다보면 끝도 없어.”
“네.”
은서가 숨을 내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 위층 남자를 걱정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려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어디 아픈가.. 그렇다고 올라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코코아가루를 머그컵에 붓고 리모컨을 들어 막 TV전원을 켰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은서는 TV를 다시 끄고 현관 옆에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위층 남자가 보였다.
은서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매만지며 팔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다가
“너 뭐하니?”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그 날 밤의 모습은 찾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고, 선글라스는 쓰고 있었고, 흰 셔츠에 다이아몬드무늬 실버타이에
검은색 줄무늬 카디건에 황토색 면바지, 검은색 모직코트를 입고 있었다.
깔끔하면서도 멋들어진 스타일이었다. 손에는 지난번 아침에 건네 준 반찬그릇들이 깨끗하게 씻겨
말려진 채로 들어 있는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잘 먹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녀는 그가 내미는 쇼핑백을 잡았다.
“괜찮다면.. 저랑 정원에 가실래요?”
“네?.. 아.. 네.. 잠시만요.”
재인은 주방에 쇼핑백을 올려놓고, 아직 쌀쌀한 밤공기를 떠올리며 소파에 걸쳐있던
도톰한 흰색 롱 카디건과 분홍색 롱머플러를 들고 신발을 신고 그 옆에 섰다.
그는 그녀가 나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고, 밖으로 나온 은서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은서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가 몸을 돌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자
그녀가 “응?” 이라고 조그맣게 소리를 냈다.
“아.. 위로..”
“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위로 올라가자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려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집 앞을 지나쳐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카드를
문에 있는 도어록에 대자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가 문고리를 잡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은서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은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옥상으로 나갔다. 고개를 돌린 은서의 입이 벌어졌다.
“우와..”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옥상으로 나와 걸었다. 은서는 넓은 옥상에 깔린 잔디와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벤치도 있고 티 테이블도 있었다.
“설마 저건 벚나무에요?”
“아, 복숭아.”
“아.. 복숭아나무예요?”
“곧 필 것 같으니까 확인해 봐요.”
은서가 피식 웃으며 옥상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다 보이는 사람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흔들림 없이 걸음을 걸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그 모습도 우아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고이려고 하고 있었다. 은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분들에게도 공개를 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는데.. 순전히 제 욕심으로 저만 사용하고 있어요.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조용히 있고 싶을 때 혼자 올라오거든요.”
“괜찮아요. 저도 그럴 때 있거든요.”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재인은 차가운 밤 공기에 머플러를 목에 돌돌 말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었다.
“이런.. 춥네요.”
“그러네요...”
“여자 혼자 사시는 집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시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서 여기로 데려 온 건데..”
“네.. 여기 정원은 정말 근사한 것 같아요.”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그 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근데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서..”
“괜찮아요. 정말요. 특별히 기억하실 만한 것도 없었구요.”
“그래요?”
“상처는 조금 더 좋아지셨네요. 어쩌시다 상처가 나신 거예요?”
그의 표정이 조금 밝아 졌다. 그리고는 피가 났던 입술부분을 만졌다.
“아.. 어디에 부딪쳐서.. 참, 약도 발라 주셨더라구요..”
“죄송해요. 제 멋대로 손을.. 아니 면봉으로 했어요.”
“고마웠어요.”
“네..”
은서는 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차가워진 코를 머플러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알아 차리셨겠지만 말씀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제가 교통사고로 시력을 좀 잃었어요. 완전히는 아니고 어렴풋이 윤곽만 파악하는 정도..”
“네..”
재인은 주책맞게 또 눈물이 고이려고 하고 있었다.
‘미쳤지.. 왜 울고 난리야..’
“몰랐어요.”
“이렇게 되기 전에도 여기에서 살고 있었고, 뭐.. 워낙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몸에 익숙해서요.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걸 알면 주위에 동정하는 사람들로 넘쳐나서.. 모르셨다니 열심히 노력한 게 보람 있네요.”
은서는 아주 조그만 소리로 코를 훌쩍거렸다. 그는 고개를 약간 그녀 쪽으로 돌리며 바라보았다.
“왜.. 울어요?”
그의 말에 재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앞이 잘 안 보이면 다른 감각들이 더 민감해 지거든요.”
“죄송해요..”
“그렇게 따뜻한 밥.. 오랜 만에 먹어봤어요. 은서양은 참.. 따뜻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가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서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서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뭐... 물어 봐도 돼요?”
“뭐가 궁금해요?”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친구분 명함만 받아서요. 어차피 그 분 성함은 경찰서에서 이미 봐서 알고 있었어요.”
“아.. 그렇다면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정인호입니다.”
“저는 윤은서예요.”
“나이는 이제 35살 되었습니다.”
“전 이제 25살이에요.”
“10살이나 어리면.. 꼬마아가씨네..”
“그러네요.. 말씀 놓으셔도 돼요.”
“그럼... 그럴까? 오늘은 일 안 했나봐.”
“아.. 쉬는 날이었어요. 아저씨는요?”
“아.. 쉬는 날이었어. 나는 은서보다는 조금 더 쉬는 날이 많은 편이지만.. 덕분에 준혁이가 바쁘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알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멋진 표정으로 웃고 있는지.. 그 미소가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참,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술 취한 남자를 집에서 재우는 거..”
“원래 안 그래요. 근데.. 아저씨는 어떻게.. 옮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위험한 행동이었어.”
“저요.. 뭐랄까.. 감이 좋은 편이라고 할까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분이 잘 되요. 뭐.. 대충 맞기도 하고요. 제 느낌으로는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라고 하네요.”
“나쁜 사람이 뭐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써 있나?”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눈이.. 참 맑아요. 아저씨처럼 맑고 투명한 눈을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은서는 고백같은 말을 하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보다 조금 앞서 걸었다. 그러다가 코가 간질간질해서 얼른 입과 코를 양손으로 가렸다.
“이쵸! 이쵸! 이쵸!”
은서는 재채기를 했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재채기 한 거야? 하하하”
“많이 이상해요?”
은서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들어가야겠다.”
둘은 대화를 하며 어느 새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그래. 그럼 잘 자요.”
“아저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은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닫았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물며 피식 웃었다.
다음 날 은서는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문 앞에 붙여진 봉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준혁이 대필했다는 메시자와 작은 카드가 들어있었다.
<특별히 내 작은 공간을 은서와 공유해도 좋을 것 같아서.. 오늘도 힘내요.. 인호(대필 준혁.. 인호.. 잘 보살펴줘서 고맙고, 미안했어요.)>
은서가 피식 웃으며 봉투에 메모지와 카드를 넣어 가방에 넣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좋아?”
준혁이 간단한 아침을 만들며 인호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인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와 줄까? 여전히 조금 무서울까?”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거겠지~. 너야 오면 좋겠지만 그 여자는 남자 문제가 좀 있으니까. 아침 먹자.”
“응.”
준혁과 인호가 식사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웃으며 일하는 은서를 직원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언니.”
“응?”
“남자 생겼죠?”
은서가 표정을 굳히며 여자직원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랑에 빠진 여자같거든요.”
“내가?”
은서가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디가.. 전혀 모르겠는데?”
“풉..”
“왜?”
은서가 직원을 바라보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없거든? 그러실 텐데 정말 연애하시나 봐요.”
“아니야. 연애는 무슨..”
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직원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달라?”
“반짝거리세요. 눈빛이나 피부가.”
“진짜?”
은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제 푹 잤거든. 그래서 그래.”
“네~.”
“진짜라니까?”
직원이 웃으며 다른 곳으로 가자 은서가 미소를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날 퇴근하고 은서는 집에서 머리를 말리며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아린이한테 들키는 날엔 진짜.. 끔찍한 일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로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얼굴이 붉어졌다.
“에잇!”
그녀는 헤어드라이기를 찬바람으로 바꾸며 눈을 감고 얼굴에 마구 바람을 보냈다.
인호는 뒷짐을 지고 옥상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자 그의 손에 싸늘하게 식은 커피가 들려 있었다.
은서가 미용실에서 손님의 손톱에 영양을 주고 있는데 김우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만요.. 손을 이렇게 하고 계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님을 슬쩍 보고는 미용실을 나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저기.. 내일 쉬나?>
“아니요. 왜요?”
<재인이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아파요? 원장님께 말씀 드려야 할 정도에요?”
<아! 아니야~.>
은서가 당황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로 무슨 일 때문인지 간파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해 주셨길래 아프대요?”
<하아~. 너한테 그런 말 안 들어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중이야..>
“알았어요. 잘 말씀드리고 재인이네로 갈게요.”
<고맙다.>
“재인이한테 집중해 주세요.”
<그러고 있다. 너무 집중해서 탈이지..>
“많이 아파요?”
<몸도.. 그렇겠지만 병원에 다녀와서..>
잠시 후 은서가 인상을 찡그리며 선생님에게 해서는 안 될 욕을 하고는 말을 이어서 했다.
“미쳤어요? 제 정신이야? 재인이를 아껴주기는 하는 건가? 뭐하는 짓이래?”
등등.. 다수의 욕을 섞어서 그에게 화를 냈다.
<적당히 해라. 이 녀석아. 안 그래도 땅 파고 있는 중이니까..>
“알았어요. 대신 당분간은 안 돼요.”
은서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왜?”
“내일 쉬면 좋겠는데요.”
“왜?”
“재인이랑 있으려고요. 어떻게 지내나 제가 잘 보고 올게요. 대신 다음 주는 안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자 은서는 재인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재인의 집에 벨을 누르자 한참 후에 재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비틀거리며 침대에 누운 재인을 내려다보며 은서가 말했다.
“웬일이니.. 이게 웬일이야.. 재인이가 드디어..?”
“야..”
은서가 피식 웃으며 시트를 끌어 재인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약은 먹었다면서. 아픈 건..”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내일 쉰다고 말씀드리고 왔어. 그러니까 일단은.. 자자. 나도 피곤하니까.”
“선생님이 전화하셨어?”
“그럼 누구겠니? 내가 욕을 욕을.. 아주 쌍욕을 날려드렸지.”
재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이나 적어? 37, 25이나 먹어서 콘돔도 모르면 어떻게 하냐?”
“둘 다 정신이 없었어.”
“그러셨어요~?”
재인이 쿡쿡 웃으며 지난번의 일과 전 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자 은서의 입이 놀람으로 커졌다.
“선생님 대단하다~. 그런 남자가 있었네? 신기하다..”
“그런거야?”
“야. 대부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 참아. 다시 보이는데? 쌍욕은 조금 너무했나?”
“잘 했어..”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손을 잡았다.
“좋아?”
“응. 그런데 매번 이렇게 아파?”
“내가 아냐? 점점 나아진다더라. 뭐.. 선생님이 하시기 나름이겠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응.”
“결혼을 생각해 보긴 해야겠다. 소문이상하게 나기 전에.”
“응. 엄마한테 다시 말씀드려야지.”
“이번엔 너도 맞을 수 있어.”
“응. 각오는 했어.”
“에휴.. 힘 내~.”
“응.”
재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서가 침대 옆에 이불을 펴고 눕자 고개를 돌려 은서를 바라보았다.
“어째 달라 보인다?”
은서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재인을 인상을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
“나 오늘 그 소리 직원한테도 들었어. 뭐가 달라 보이는 거냐? 나는 똑같은 것 같은데..”
“뭐랄까.. 밝아보인달까.. 생기가 있어 보인달까..”
은서가 고개와 어깨를 축 내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은서가 무릎을 세우고 끌어안은 채로 몸을 조금 움직여 재인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것 같아.”
“뭐? 아!”
재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몸에 찾아온 고통에 다시 뒤로 누웠다.
“젠장..”
은서가 피식 웃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냥 들어. 뭘 그렇게 놀라냐?”
“그럼 안 놀라냐? 내가 너랑 친구로 몇 년인데.. 처음있는 일이거든?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위층 아저씨..”
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재인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아저씨가 너 좋아한대? 사귀자고 했어?”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좋아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에? 왜?”
“그냥.. 눈이 맑아..”
“미쳤어.. 눈이 맑아? 야.. 그럼 살인자, 강간범들은 눈동자가 썩었냐? 나도 수학 그 놈이 그런 놈인지 전~혀 몰랐었어~. 정신 차려.. 제대로 알아보고 좋아하라고.”
“알았어. 제대로 알아보고 좋아할게.”
“벌써 좋아하는 건 아니고?”
“뭐..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좋아할 수도 있잖아.”
재인이 피식 웃었다.
“키는 커?”
“응. 한.. 180정도?”
“얼굴은..”
“완전 잘생겼지.”
재인이 웃었다.
“선생님보다 더?”
“야.. 솔직히 선생님은 어딘지 불량한 냄새가 났었잖아. 하지만 아저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고, 부드럽고..”
“벌써 푹 빠져놓고 뭘 알아본대.. 내가 몸 좀 나아지면 직접 봐야겠다.”
은서가 시선을 내렸다.
“응. 그렇게 해 주라.. 그 동안은 나도 아저씨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살펴볼게.”
“그래..”
은서가 다시 누워 이불을 끌어 올렸다.
“축하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면 금방 식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네가 행복해 하니까 좋아..”
“하아.. 너무 표시나면 안 되는데..”
“왜?”
“아린이 들어왔거든.”
재인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 것이 왜 들어왔대?”
“이탈리아에서 마피아랑 사귀다가 죽을 뻔 했었나봐. 큰아버지가 불러들이셨지.”
“뭔 짓이래~.”
“내 말이. 한 동안 내 인생에 평화로웠는데.. 내가 아저씨한테 마음 있다는 것을 알면 가만 안 있겠지?”
“그렇겠지~. 그 것이 어딜 가겠냐? 하지만 사랑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힘들겠다.”
“안 보면 돼. 그럼 들킬 일도 없어.”
“그래. 어차피 그것이 나타나는 곳이랑 네 생활 반경은 다르니까.”
“응.”
“자자. 너 피곤하겠다.”
“응.”
은서가 눈을 감았는데 재인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좋아?”
“안 잘 거야?”
“어차피 내일 쉰다면서.. 나도 쉬거든..”
은서가 키득거리며 웃고는 고개를 돌려 재인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좋아. 미소 짓는 모습은 더 좋고.. 배우해도 될 것 같이 생겼어.”
“진짜?”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그녀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고,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첫댓글 순수한걸의 복병은 아무래도 아린이라는 아이인가봅니다.... 인호 많이 기다리는데... 은서야 옥상 좀 가지??ㅋㅋㅋ
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담편빨리요 너무궁금해요
오늘 올린 글도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6.26 16:0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6.27 08:48
우와우와~~~
작가님 방갑습니다~~^^
왜 이제사 이글을 보게되었는지....
이케 감칠맛나는글을...
첫화보고 와~~
감사하게 읽었네요
반갑습니다요~. 저야말로 감사해요. 오늘 올린 글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아... 이 아저씨.. 끌리네.. 쩝..;; ㅋㅋ
잘 읽었습니당~~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