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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이어 보존되는 한국 ‘맛의 씨’… ‘K소스’ 간장, 세계가 탐낸다
[토요기획]세계인 밥상 노리는 K푸드 씨간장-김치
새로 담근 간장에 씨간장 첨가… 한국만의 독창적 ‘겹장’ 문화
“집안 음식맛 책임지는 한식 정수”… ‘장 담그기문화’ 유네스코유산 신청
콩 발효때 미생물이 효소 분비
전남 담양의 기순도 전통장 명인이 직점 담근 간장.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 맛이 가장 좋은 간장을 엄선해 오래 유지해온 간장이다. 부드럽고 강한 풍미를 내는 씨간장은 진한 흑색을 띠며 ‘맛의 씨’가 되는 역할을 한다. 담양=박영철 기자
#1.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윤서울’의 김도윤 셰프는 종갓집에서 직접 씨간장을 받아 와 자신의 요리에 쓴다. 씨간장이 입맛을 돋워주고 때로는 초콜릿 향이 나고 단맛 쓴맛 신맛 등 오묘한 맛이 나면서 오감을 만족시켜 준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씨간장을 죽 무침 조림류 등에 두루 쓴다”며 “씨간장은 오래될수록 특유의 향이 있는데, 보관만 잘하면 쾨쾨한 냄새 없이 오래 쓸 수 있다”고 했다.
#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방한했을 당시 청와대 국빈만찬에 ‘360년 된 씨간장으로 구운 한우갈비구이’가 등장했다.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에서 맛이 가장 좋은 간장을 엄선해 오랫동안 묵힌 간장을 뜻한다. 부드럽고 강한 풍미와 단맛, 감칠맛을 동시에 내는 씨간장은 진한 흑색을 띠며 깊고 풍미 있는 요리의 ‘맛의 씨’ 역할을 한다. 외신들은 기순도 명인이 담근 이 씨간장에 대해 “미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간장이다”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간장은 동양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돼 온 장류이지만 씨간장은 한국만이 가진 고유한 전통간장이다. 종갓집 등에서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씨간장에는 발효 등 과학적 원리를 활용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녹아 있다. 올해 3월 정부가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를 신청하면서 씨간장 등 한국 장문화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 K푸드 세계화 속 주목받는 한국 간장
K콘텐츠의 후광을 입은 한국 음식의 세계화 바람을 타고 한국 장류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간장 된장 고추장 등 3개 품목의 수출액은 8237만 달러(약 1072억4000만 원)로 2018년(6043만9000달러)에 비해 약 36% 증가했다. 한식이 해외에서 저변을 넓혀가면서 장류 소비도 자연스레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장류는 해외 시장에서 이른바 ‘K소스’로 통칭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한식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간장 수출액도 성장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간장 수출액은 2018년보다 28.8% 증가했다. 발효로 만들어지는 간장은 단순한 짠맛과는 다른 특유의 감칠맛을 비롯해 단맛, 신맛 등 복합적인 맛을 낸다. 깊은 풍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발효 기간에 따라 햇간장부터 청간장(1∼2년), 중간장(3∼4년), 진간장(5년 이상)으로 분류된다.
간장 특성상 발효 시간이 길어질수록 색이 짙어지고 풍미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맑은 국물 요리에는 햇간장을, 나물이나 찌개에는 중간장을 잘 달여서 맑게 거른 후 사용한다. 진한 진간장은 갈비찜, 불고기, 조림류 등에 사용된다. 우춘홍 간장협회 이사장은 “된장은 발효를 시키고 보존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적인 것에 비해 간장은 몇백 년간 이어질 수 있는 힘이 있다”며 “간장은 집안의 음식 맛을 책임지는 한식의 정수”라고 말했다.
○ 수백 년 내려온 씨간장의 비밀 ‘겹장’
간장 중에서도 씨간장은 종갓집 등을 통해 대대로 전수돼 내려오면서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문화가 반영돼 온 음식이다. 한 집안이 소비해도 남을 정도의 간장을 담그는 집은 주로 종갓집 정도뿐이었다. 씨간장 전통 속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많이 숨어 있다.
장독대에 보관된 씨간장은 매년 요리에 쓰이는 데다 점점 자연 증발해도 수백 년간 동나지 않는다. 여기엔 ‘겹장’이란 비밀이 숨어 있다. 겹장이란 새로 담근 간장에 일정량의 씨간장을 첨가해 햇간장의 풍미를 깊게 하거나 기존 씨간장이 줄어들면 새로 담근 햇간장을 섞어 씨간장 양을 보존하는 행위다. 겹장은 콩으로 간장을 빚는 두장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다.
겹장에는 과학적 원리도 숨어 있다. 콩을 발효시키면 자연의 미생물들이 콩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효소를 분비한다. 우리 전통 간장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맛이나 향 역시 미생물이 분비하는 여러 효소 때문이다. 효소는 뜨거운 열을 가해 달이면 사멸하지만 적절한 환경이 되면 발효 미생물이 다시 효소를 분비한다. 씨간장 맛과 향이 풍부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의 달임 과정이나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에도 끄떡없이 깊은 맛이 유지된다.
메주로 장을 담그면 그 집안의 고유한 균이 간장에 들어간다. 맛이 균일한 공장식 간장과 직접 담근 간장 맛이 다르고 집안별로 간장 맛이 다른 이유다. 겹장을 하면 간장별로 있는 균 중 가장 강하고 건강한 균이 살아남는다.
○ 부르는 게 값, 모든 요리 풍미·감칠맛 더해
오랜 세월 깊은 풍미를 이어가게 해주는 씨간장은 옹기째 훔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부터 높게 평가돼 왔다. 우리 선조들은 장맛이 변했다고 느끼면 손맛이 좋은 집의 씨간장을 조금 얻어다가 섞어 먹었다. 씨간장은 마을 전체의 장맛을 책임져 왔다. 씨간장은 종갓집에서도 한 항아리 정도씩만 보관할 정도로 소량 보관돼 왔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다.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씨간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간장의 종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맛있어야 한다. 몇 대를 걸쳐 내려온 수백 년 된 씨간장도 있지만 맛있는 진간장을 골라 옹기에 5년만 숙성시켜도 훌륭한 씨간장이 될 수 있다.
깊은 풍미를 자랑하는 씨간장은 건강에도 유익하다. 숙성될수록 짠맛은 줄어들고 단맛을 비롯해 풍부한 맛을 자아낸다. 특히 양질의 단백질과 풍부한 지방을 함유해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를 보완해준다. 스님들은 천연 소화제처럼 간장을 물에 섞은 간장차를 마신다. 씨간장은 다양한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씨간장에 들기름을 섞어 먹으면 양식에서의 발사믹 소스와 올리브오일을 섞은 것 같은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차경희 전주대 한식조리학과 교수는 “씨간장은 짠맛이 덜하고 아미노산과 당이 비교적 많아 감칠맛이 나는 등 풍부한 맛을 자아내는 천연 조미료”라고 강조했다.
오승준 기자
“김치 원더풀”… 맛집부터 대형마트까지 美 입맛 유혹
[토요기획]美서 커지는 김치시장
LA 번화가서 김치볶음밥 인기… 현지 코스트코-월마트 등에도 입점
작년 美수출 2825만달러… 23%↑, 현지에 김치공장 세우고 인지도 높여
대상 등 국내 식품업체들 공략 나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런스에 위치한 코스트코 매장을 찾은 고객이 종가집 김치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K컬처 열풍이 불면서 과거 미국 시장에서 한인 위주로만 소비되던 김치가 현지인들에게도 주목받고 있다. 대상 제공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라 브레아’ 거리. 이국적이고 아기자기한 가게가 많아 현지인부터 관광객까지 밤낮없이 모여드는 힙한 번화가다. 이곳의 유명 브런치 가게 ‘리퍼블리크’는 평일 오전 11시를 갓 넘긴 시간에도 구불구불한 대기 줄로 붐볐다. 샌디에이고 출신 현지인 셰프가 개발한 각종 식사 메뉴와 빵을 판매하는데 이날 오픈과 함께 품절된 빵은 단 2가지였다. 딸기 우유크림케이크와 김치 포트파이(potpie·고기와 채소를 넣어 만든 파이). 헐렁한 티셔츠에 슬리퍼를 신고 온 중년의 백인 남성이 “남은 김치 포트파이 전부요”라며 재고를 쓸어갔다.
테이블 2개 건너 하나가 먹는 이곳의 인기 메뉴 역시 ‘김치볶음밥’이다. 국내 식품업체 대상에서 납품받은 김치로 만든 볶음밥 위에 수란 2개와 무순, 얇게 썬 래디시를 올려 내준다. 다양한 인종의 손님들이 포크로 볶음밥을 떠먹으며 와인도 곁들였다. 독일에서 이주한 리타 씨(31)는 “지난해 처음 먹었는데 새로우면서도 친숙한 맛이라 종종 생각난다”며 “프렌치토스트와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직원 A 씨는 “우리 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은 기본 중의 기본(Always a Classic)”이라고 했다.
만두, 불고기 등과 달리 액젓 냄새와 매운맛 때문에 외국인에게 진입장벽이 높다고 여겨졌던 김치가 세계인의 밥상에 오르는 시대가 됐다. 소득수준이 높고 인종이 다양해 소비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불리는 미국 시장에서 김치가 현지 맛집부터 대규모 유통채널까지 침투하며 입지를 빠르게 넓히는 추세다.
○ 입점 까다로운 미국 대형마트까지 침투하는 김치
캘리포니아주 남부 해안가 지역 토런스의 코스트코 매장. 회원제로 운영되는 마트인 데다 LA 중심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만큼 여행객보다는 현지인 고객 비중이 높은 점포다. 최근 방문한 이곳의 냉장식품 매대에서 김치는 코스트코 인기 자체상품(PB) ‘에그바이츠’와 나란히 판매되고 있었다. 프리미엄 유기농 브랜드를 선별해 판매하는 ‘트레이더조’ LA 시내 매장에서도 3.99달러(약 5200원)에 판매되는 300g 크기 김치가 이미 절반 가까이 팔린 상태였다.
김치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입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대형 유통채널들도 김치를 적극 선보이고 있다. 대상 ‘종가집 김치’의 경우 코스트코가 관리하는 총 8개 지역관할 중 2018년까지만 해도 LA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만 입점했지만 4년간 시카고, 텍사스 등 8개 지역 전체로 확대했다. 지난해엔 월마트도 진출했다. 홀푸드마켓에서는 김치 PB상품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상 관계자는 “과거에는 한인이 미국 김치 90% 이상을 소비했지만 최근 현지인 비중이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라며 “콧대 높은 대형 체인들이 김치 시장 공략에 뛰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 커지는 미국 김치시장 선점 나선 국내 식품업계
실제 미국 시장 내 김치 수요는 3, 4년 전부터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방탄소년단(BTS), ‘오징어게임’ 등 K콘텐츠 열풍을 바탕으로 한국 식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김치 수출액은 1억5991만 달러로 전년(1억4451만 달러)보다 10.6%, 2017년(8139만 달러)과 비교하면 약 2배로 늘었다. 그중에서도 미국 수출액은 지난해 2825만 달러로 전년(2305만 달러)보다 22.5%, 2017년(724만 달러)의 3.9배로 급증하며 전 세계 수출액보다 가파르게 커졌다.
국내 식품업체들도 김치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 시점을 적극 공략 중이다. 대상은 올해 3월 국내 식품업계에서 처음으로 미국 현지에 대규모(1만 m²) 김치공장을 완공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다. 연간 김치 2000t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갖춰 종가집 오리지널 김치부터 비건 김치, 비트 김치 등 현지 입맛에 맞춘 제품 10종을 생산한다. 원재료는 미 서부나 멕시코 등 현지에서 대부분 조달한다. CJ제일제당은 비비고 만두, 조리냉동식품 등 인기 제품을 앞세워 비비고 김치에 대한 인지도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올해 상반기(1∼6월) 비비고 김치의 미국 수출량은 전년 동기보다 40% 증가했으며 대형 아시안 식품유통업체 입점 역시 추진 중이다. 풀무원은 2019년 비건 김치로 미국 시장에 진출해 올해 5월부터는 전북 익산에서 젓갈을 넣어 만든 전통 김치를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