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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플초플초플초2
우리는 조선시대의 양반들 (어떤 의미에선 지식인계층)에 대해 여러가지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505년동안이나 이어진 이 시대의 엘리트층에 대해 어떤 굳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검을 소지하지 않고 책만 500년간 판 존재들이다라든가 양반은 고려시대의 귀족같이 세습되는 존재들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 중 하나가 엄격한 유교적질서하에 남녀차별이 심해서 양반이나 선비들은 아들만 귀하게 여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비교적 최근에 점차 알려지고 있듯 조선 중기인 16세기까지는 남녀구분없이 재산을 상속하고 있었습니다 (제 블로그를 계속 봐온 분들은 조금 공감하실듯 한데, 참 여러방면에서 16세기전후로 조선이라는 사회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이 부분은 글 후반에 좀 더 상세히 알려드리겠지만, 오늘은 그런 상속이라든가, 시스템의 이야기가 아닌 당대 일부 지식인들의 문헌을 통해, 특히 '딸자식'에 대한 느낌을 볼 수 있는 몇 기록을 통해 그 온도차를 조금 느껴보고자 합니다.
즉, '감성적'으로 당시 양반들의 딸에 대한 사랑을 한번 느껴보시면 합니다. 지금부터 기록은 연대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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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딸자식에 대한 글
우선 고려시대의 기록입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
동국이상국전집
고율시(古律詩) 44수
딸아이를 슬퍼하다
딸아이의 얼굴 눈송이와 같고 / 小女面如雪
총명함도 말할 수 없었네 / 聰慧難具說
두 살에 말할 줄을 알아 / 二齡已能言
앵무새의 혀보다 원활하였고 / 圓於鸚鵡舌
세 살에 수줍음을 알아 / 三歲似恥人
문 밖에 나가 놀지 않았으며 / 遊不越門闑
올해에 막 네 살박이로 / 今年方四齡
여공(女工)도 제법 배워가더니 / 頗能學組綴
어쩌다가 이런 참변을 만났는지 / 胡爲遭奪歸
너무도 갑작스러워 꿈만 같구나 / 焂若駭電滅
마치 새새끼를 땅에 떨어뜨린 것 같으니 / 春雛墮未成
비둘기의 둥우리 옹졸했음을 알겠네 / 始覺鳩巢拙
도를 배운 나는 그런대로 참겠지만 / 學道我稍寬
아내의 울음이야 언제 그치려나 / 婦哭何時輟
내가 보니 저 밭에 / 吾觀野田中
작물도 막 자랄 때 / 有穀苗初茁
바람이나 우박이 불시에 덮치면 / 風雹或不時
여지없이 모두 결단나더군 / 撲地皆摧沒
조물주가 이미 내어놓고 / 造物旣生之
조물주가 다시 갑자기 빼앗아가니 / 造物又暴奪
영과 고가 어찌 그리 덧없는가 / 枯榮本何常
변과 화가 속임수만 같구나 / 變化還似譎
오고 가는 것 다 허깨비이니 / 去來皆幻爾
이제는 그만이야 영원한 이별이구나 / 已矣從此訣
이 시는 12-3세기 이규보가 어린 딸을 잃고 쓴 시로, 그 절절한 비통함이 900년이 지난 지금도 전해집니다. 어느 시대건 자식잃은 심정이야 남녀구분이 없겠지만, 고려시대 대표문인인 이규보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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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딸자식에 대한 글
이제 시대를 건너뛰어 조선전기의 끝무렵인 변혁기인 16~17세기초로 가보겠습니다.
조선중기의 문신 최립(崔岦, 1539~ 1612년)
간이집 제6권
계사행록(癸巳行錄)
죽은 딸아이를 꿈에 보고 짓다. 2수(二首)
세밑 전의 새벽 꿈에 딸아이가 보였나니 / 歲除前曉夢殤兒
다섯 살에 죽은 뒤로 지금 어언 이 년 세월 / 五歲生今二歲離
말 배우며 재롱 떨 때 이 아비 얼마나 기뻤던가 / 學語嬉遊惟悅孝
가르치지 않았어도 책갈피 뒤지며 옹알댔네 / 尋書念說不勤師
선악은 선천적인 것을 이를 통해 알았는데 / 從知善惡由天得
현(賢) 불초(不肖) 구분 없이 누가 또 생명을 앗아 갔나 / 孰管賢愚入地爲
귀엽고 예쁜 모습 이윽고 사라졌는지라 / 眉目分明俄已去
늙은 아비 침상에서 눈물이 마를 날 없었네라 / 龍鐘枕上淚乾遲
늦게 낳은 자식이라 더더욱 애착이 갔었는지 / 人情鐘愛晩生兒
배 타고 피난하면서도 늘상 껴안고 지냈어라 / 避寇舟中膝不離
부윤(府尹)으로 부임할 때 데리고 갈까 생각하며 / 提挈擬將隨尹府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무양(巫陽)이 그만 내려왔네 / 語言翻已下巫師
참혹해라 너의 향골(香骨) 타향에 묻고 말았는데 / 埋香慘絶他鄕寄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꿈속에 찾아와 주었구나 / 入夢依然昔日爲
이 아비 강변에 머물면서 너의 뜻을 알았나니 / 及我江干知汝意
강 건너 서쪽 천 리 길엔 안부 물을 수 없을까 봐 / 江西千里得通遲
이 글은 16세기중반 문인인 최립이 역시 5세에 잃은 딸아이를 꿈에서 보고 지은 애절한 시입니다. "늙은 아비 침상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배를 타면서도 항상 껴안고 지냈다" 등 굵은 체만 보셔도 21세기의 딸바보 아빠와 다름없는 느낌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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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년 후 거의 동시대의 문인 장현광의 다음의 글을 보면 당시 딸자식에 대한 느낌을 알 수 있습니다.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
여헌선생문집
영모록서(永慕錄序)
무릇 천지의 사이에 몸을 두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구인들 자식이 되어 양친부모(兩親父母)가 남겨주신 몸을 계승한 자가 아니겠는가. 다만 기맥(氣脈)을 곧바로 전하여 종통(宗統)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姓)을 따르고 어머니의 성은 따르지 않으며,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기 때문에 상복(喪服)에 참최복(斬衰服)과 자최복(齊衰服)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생성(生成)하고 사랑하여 길러준 은혜에 있어서는 실로 어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식이 어머니에 있어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일찍이 한결같지 않은 것이 아니며, 부모가 아들자식과 딸자식을 사랑하고 예쁘게 여기는 정이 일찍이 차이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성인(聖人)이 외가(外家)의 선대(先代)에 아울러 극진히 하고 외당(外黨)의 여러 친족에 그 후대(厚待)함을 모두 미루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다만 의리에 똑같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형편상 미치지 못함이 있을 뿐이다.
중략.
또 미루어 올라가 백대의 무궁한 조상에 이르고 또 미루어 넓혀서 외종(外宗)의 외종에 이른다면 그 또한 무궁한 선조에 이를 것이니, 이는 나에게 모두 부모의 도리가 있고 나 역시 모두 후손의 이치가 있다. 만일 미쳐 듣고 알지 못하는 분은 어쩔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듣고 또 앎이 있다면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는 혹시라도 선대의 묘소가 있는 산을 안다면 반드시 이것을 기록하였으니, 혹 그 후손이 된 자들은 내외손(內外孫)을 막론하고 그 곳을 지날 경우 한번 바라보고 절을 올린다면 이 또한 큰 다행일 것이다.
이 기록에는 특히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데 정이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이 '당연한 인지상정'이고, 특히 장현광 본인의 '외손자'들까지 '친손자'와 똑같이 내 후손이며 자신의 묘소에 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확실히 18세기정도의 남녀구분이 명확해진 제사방식과 다른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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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유명한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의 기록입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년)
백사집 제1권
시(詩)
한식(寒食)에 선묘(先墓)를 생각하면서 자미(子美)의 칠가(七歌)에 차운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난리를 만나서, 형은 적(賊)을 만나 물에 빠져 죽고, 그 해 12월에는 딸아이가 역질(疫疾)에 걸려 강도(江都)에서 죽었는데, 딸아이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오히려 억지로 괴로움을 참고 눈을 떠서 아비를 부르면서 보고 싶다는 말을 세 차례나 하고 죽었다 하니, 아, 아비가 된 사람으로서 차마 이 말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
딸아이여 딸아이여 생이별을 하였노니 / 有女有女生別離
때는 막 젖먹이라서 약하고 철없었지 / 時當乳下弱而癡
아비가 어미 손 잡고 딸아이 만지며 이르길 / 父執母手撫女語
죽기 전에 거듭 만날 때가 있으리라 했는데 / 未死重逢會有時
남이 전하길 죽을 적에도 아비를 불렀다 하니 / 人傳將死尙呼爺
늙은 눈물 묵묵히 뿌려 병기를 적시누나 / 老淚默洒中兵旗
아 네 번 노래하매 차마 연주를 못하겠네 / 嗚呼四歌兮不忍奏
지금도 외로운 넋은 조주에 통곡을 하리 / 至今孤魂哭朝晝
이항복 역시 임진왜란 중 딸을 잃었던 비통한 심정을 말하고 있는데, 딸이 죽으면서도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 사이가 돈독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같은 저서인 [백사집]에는 이런 기록도 나옵니다.
백사집
행장(行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박공(朴公)의 행장(行狀)중 일부:
처음에 공이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장차 수감(收監)에 대비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하게 나가므로, 가인(家人)은 무슨 일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랬다가 관직만 파면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자 공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마터면 너를 다시 보지 못할 뻔하였구나.”하였다.
이항복보다 약 30년전의 인물인 박순(朴淳, 1523~ 1589년)의 추모기중 일부입니다. 이 기록에도 박순의 딸에 대한 사랑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화'는 1561년의 '사림운동'을 말합니다. 이 정치적 난리중에 관직에서 파면되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한 첫 마디가 딸의 손을 잡고 '너를 하마터면 보지 못할 뻔 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스킨쉽'입니다. 앞서 최립의 기록도 그렇고 박순의 기록도 그렇고 딸을 껴안고 지내고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등,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부 사극에서의 '어허, 어찌...'식의 아버지상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록은 대체로 '어린 딸'에 대한 글이 많았습니다. 그럼 장성한 딸에 대해서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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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7세기초인 1625년, 동시대 '시집간 딸'에 대한 애정과 걱정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위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우복집 서(書)
노(盧) 사위에게 보낸 편지 일부:
무더위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학리(學履)가 아주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바, 보고 싶은 마음을 잊을 수가 없네. 딸아이가 다음 달 초에 시부모를 뵈올 것이라고 들은 듯한데, 평소에 사랑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못하여 섬기는 일을 대부분 익히지 못하였으며, 또한 기백(氣魄)이 아주 약하네. 이제 출가하는 날을 당하였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네. 딸아이는 집에 있으면서 나를 하늘로 삼았는데, 이제는 자네를 하늘로 삼게 되었네. 그러니 모든 일에 있어서 잘못된 점은 감싸 주고, 가르쳐 주었는데도 제대로 못할 경우에는 꾸짖어 주게.
즉, 정경세선생은 딸이 시부모를 만나는 일이 걱정이 되어, 사위에게 너무 다그치지 말고 감싸주고 잘 케어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지요. 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사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도 보냅니다.
정경세(鄭經世,1563~1633년)
우복집 서(書)
송경보에게 보낸 편지 을축년(1625, 인조3) 일부:
신정(新正)에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모두 경사스러우며 학문 공부가 점점 나아질 것으로 생각되는바, 멀리서나마 칭찬하고 기뻐하는 바이네. 나는 이제 예순세 살이나 먹은 늙은이가 되었으니 기혈과 정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이처럼 서성거리고 있으면서 편하게 쉬지를 못하네. 중략.
천리나 먼 객지에서 부자간에 서로 의지하고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한 번 병이 들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운수 탓으로 돌려서 사리가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지만, 끝내 그럴 수 없는 점이 있네. 그러나 어쩌겠는가. 편지에서 말한 바는 실로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더욱더 슬픈 심정이 불어나게 하네.
발인(發靷)이 19일에 있을 테니, 그대가 길을 떠나더라도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네. 딸아이가 임신하였다고 들었는데, 몹시 놀라 애통해하다가 혹 몸이 손상될 수도 있으니, 모름지기 이치를 들어 잘 타일러서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말도록 하게. 그리고 소식(素食)을 하는 것도 여러 날 동안 해서 원기(元氣)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네. 모든 일을 오로지 자네만을 믿고 자네만을 믿네.
즉, 처갓댁에 상을 당했는데 임신한 딸에게는 극히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서 놀라지 않도록 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입니다. 요즘 장인들도 이런 세심한 배려는 하는 분이 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장모님들이 담당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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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인물인 이응희 역시 딸바보. 혼례를 치른 조선중기의 선비아버지가 눈물을 흘립니다. '집에는 언제 올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
옥담사집
아내를 귀녕(歸寧) 보내준 사위 여온에게 주다 여온은 윤진이다 [贈壻郞汝溫眷歸其妻 汝溫卽尹璡也]
딸아이를 얼마나 늦게 낳았던가 / 寢地生何晩
늙은 아비가 유달리 사랑했었네 / 偏憐老父情
혼례를 치른 뒤 석별할 때 / 持醮今惜別
눈물 머금고 언제 올지 물었지 / 含淚問歸寧
적경은 군자로 말미암는 법 / 積慶由君子
영특한 외손자를 안게 되었구나 / 孩兒抱俊英
의가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 宜家雖不逮
채봉의 진실한 마음 변치 말거라 / 無替採葑誠
이런 모습은 '한번 출가인 딸자식은 남의 집 자식'이라는 조선후기식 엄격한 아버지상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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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 17세기초 동시대인물인 김상헌의 [청음집]에는 딸을 잃고 '정신이 나간' 선비도 등장합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의 문집
청음집 제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집의(執義) 이형원(李馨遠)을 곡하다
소탈하며 맑은 흉금 천진스런 모습이나 / 淸踈襟抱自天眞
강개하여 논병할 땐 전혀 딴판이었다네 / 慷慨論兵若二人
중승 벼슬 올라서야 이름 처음 알려졌고 / 宦到中丞名始達
외척 집안 되고서도 대를 이어 가난했네 / 家承外戚世猶貧
관산에서 이별한 뒤 병이 더욱 많아졌고 / 關山別後增多病
딸아이가 죽은 뒤로 정신 더욱 손상됐네 / 兒女亡來益損神
괴원의 옛 동료들은 이젠 백발 되었거니 / 槐院舊寮今白髮
바닷가의 어느 곳서 새 무덤에 곡을 할꼬 / 海濱何處哭新墳
글의 주인공은 이형원(李馨遠,1576∼1632년). 그는 병을 앓다가 딸의 사망후 말 그대로 정신을 놔버린 듯 합니다.
문자 그대로지요.
兒女亡來益損神 딸아이를 잃고, 정신이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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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끝무렵에 태어난 [미수기언]의 저자 허목은 딸의 사망후, 곡을 하고 자신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딸의 관속에 넣습니다. 1645년의 일입니다.
허목(許穆, 1595~1682년)
기언 제42권
허씨 선묘 비문(許氏先墓碑文) 자손의 비갈(碑碣)을 부기함
어린 나이로 죽은 딸아이의 빈표(殯表)
어린 나이로 죽은 딸아이는 양천(陽川) 허목 화보(許穆和父)의 막내딸이다. 태어나 8세에 죽었다. 숭정 연간에 아비가 난을 피해 영남으로 갔을 때 의춘(宜春)에서 이 아이를 낳았다. 타고난 자품이 맑고 유순하여 놀고 장난할 때에도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뜻을 잘 받들어 항상 부모의 환심을 얻으니, 친척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칠원(漆原)에 우거한 이듬해에 아비는 마침 천 리 길을 가게 되어 기전(圻甸)에 들어가 성묘하고 몇 개월 동안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홀연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아이가 초췌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다. 꿈을 깨고는 너무도 놀라 아이가 병이 든 것인가 근심하였다. 급기야 돌아와서 보니, 아이가 학질에 걸린 지 보름이 되었고, 끝내 천연두로 죽어 이미 하루가 지났다.
아이가 병을 앓을 때에 제 어미가 울부짖는 한편으로 기도하며 대신 아프기를 원하니, 아이가 말하기를,
“어머니가 병들면 아이는 누굴 믿고 살겠습니까.”
하였다. 온 고을을 뒤져도 아이를 살릴 의원도 약도 없게 되자 반드시 죽을 것을 스스로 알았지만 아이의 마음에 ‘아버지가 돌아오면 약을 얻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겨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날로 깊어졌으며, 또 살아서 얼굴 보기를 기대하여 며칠을 울다가 그예 죽었다.
아비는 도착하여 곡하고 입관하는 것을 보았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 관속에 넣으며 말하기를,
“이승과 저승으로 영원히 멀어졌으니, 이것으로 나의 얼굴을 대신한다.”
하고, 이어 아이의 빈소에 제하기를,
“아, 죽은 자는 모르는가, 아는가? 한갓 부모로 하여금 살아서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끝없게 하는구나.” 하였다.
숭정 18년(1645, 인조23) 6월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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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와 후기의 남녀차별의 변화
신기한 것은, 우연인지 1700년대 이후로는 '딸의 사망'이후 이를 이토록 비통해 하는 글이나 이를 시로 승화한 작품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물론 필자가 못찾았을 수도 있겠지만, 혹 있어도 숫자가 확실히 줄어들 것 같습니다).
주로 16세기에서 멀리는 17세기초까지의 이런 분위기는 부부간의 호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일단 16세기까지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자네'라는 공통 호칭을 씁니다. 남편이 여성에게 '자네(자내)'라고 쓰는 것뿐 아니라 아내도 남편에게 '자네'라고 합니다.
16세기 부부는 서로 '자네'
종결형도 ‘하소체’로 이 당시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 ‘자내-하소체’ 어투와 같다. 황 교수는 이를 토대로 “16세기에는 부부간에 대등한 호칭과 화계(화자 사이 위계)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 ‘자내’는 17세기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소체’ 종결형 이외에 ‘하옵소체’와도 함께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옵소’체는 화자를 낮춰 상대를 더욱 높이는 종결형이다.
그럼 서두에서 밝혔던 조선전기까지의 아들딸 구별없는 상속시스템을 조금 들여다 볼까요? 이에 대해서는 최근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필자가 따로 정리하는 대신 여러 글의 부분을 취합 소개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우선 중앙일보와 문화일보의 다음 기사를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조선 전기엔 아들·딸 고루 유산 상속
또한 朝鮮時代 相續制度의 變化와 意味 라는 논문에는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와 조선전기까지의 재산 상속은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는 균분 상속의 형태로 행해졌다. 철저하게 부계적 사회구조라고 생각되는 조선시대 초기에 행해진 출가한 딸이나 사망한 자녀들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재산을 분배하는 균분상속 관행 오히려 현재의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1990년 현행 재산 상속법이 개정되기 전까지의 상속조항이 결혼하지 않은 딸에게만 아들과 똑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며, 결혼한 딸에게는 아들 몫의 1/4을 분배한다고 규정하였던 것을 고려할 때 오히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상속이 보다 현대적 가치체계에 근접한 상속관행이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재산 상속에 관한 법규는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1485년(성종 16년)에 반포된 경국대전에 기록된 상속규범의 기본 골격이 조선후기까지 변함이 없었음에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의 상속관행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경국대전에 의거한 초기의 均分 相續의 형태에서 16세기 후반과 17세기를 지날수록 딸들은 점차 상속대상에서 제외되어 갔고 18세기가 되면 嫡長子優待相續인 差等相續으로 고착화되었다. 경국대전 상의 규정과는 별도로 조선 전ㆍ후기의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상속관행의 변화요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17세기를 지나 18세기가 되어서야 '맏아들'위주의 20세기를 지배한 프레임이 정착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조선사 500년중 일부라면 일부인 200년정도의 기간이지요. 다만, 그 시스템이 현재를 사는 우리와 맞닿은 시대에 정착했기에 그전의 문화에 대해서는 우린 남의 나라처럼 느낄 정도의 생경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로, 사실 이러한 경제시스템뿐 아니라 '문화전반'에 대한 토픽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분재기(分財記)], 즉 재산분할문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들과 딸간에 어떻게 상속되고 있는가 하는 토지상속 형태를 정리한 표입니다 (글 출처- 우리역사넷).
위의<표 6>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토지의 상속은 대체로 노비의 분급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즉 조선 초기로부터 1600년대 중엽까지는 철저하게 아들과 딸의 구별이 없고 장남과 차남이하의 차별이 없이 균등하게 토지를 상속하였으나 1600년대 중엽 이후부터는 이러한 균분상속 형태의 비율이 줄어들고 자녀의 성별·출생순위에 따른 차등상속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고 18세기 중기 이후는 이와 같은 차등상속이 일반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통계에서도 잘 드러나듯 16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17세기중반이후 사회의 변화가 잘 보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분은 아빠늑대님의 [조선시대 여자의 권위]라는 글을 더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http://idealist.egloos.com/5216024
경제적으로 이랬다면, 유학의 사회교조화를 잘 살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책중 하나가 18세기후반 [상변통고(常變通攷)]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조선후기 유장원이 60세 때(1783년)에 22권으로 완성한 예서인데, 이 저작에는 남녀의 아주 엄격한 예법과 제사에서의 행동가짐등이 수없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강조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구별은 있었지만, [상변통고]에서는 아주 세밀한 행동하나하나가 모두 제시되고 구분되어 행동강령으로 내려진 느낌이지요.
이 그림은 엄밀히 말해 타이틀이 '조선전기, 후기'가 더 정확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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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딸아이에 대한 글
이러한 딸에 대한 느낌은 여러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때문인지, 적어도 조선전기까지 보기 힘든 류의 문맥을 발견케 합니다.
위백규(魏伯珪,1727~1798년)
존재집 제22권
제문(祭文)
나랑 찬복 제문〔祭羅郞 纘復 文〕아버지를 대신하여 지었다
경인년(1770, 영조46) 그해 10월 내가 자네 집에 갈 적에 큰아들이 도보로 따라왔지. 겨울철 저물녘에 대나무 울타리 밖에서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자네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때 바깥 행랑채에서 딸아이와 자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또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네. 안뜰에 이르러 기침소리를 내니, 자네와 딸아이가 신발을 허겁지겁 신고 함께 나왔지. 자네 두 형님도 이어서 나와 읍을 하고 맞이하여 방 안으로 들어가니, 춘부형(春府兄)께서는 먼저 방에 계셨지. 이 일을 통해 손에 잡힐 것 같은 단란하고 화목한 온 집안의 기운을 생각하며 불현듯 자네 집안의 가풍이 참으로 좋음을 느꼈네.
자네의 어린 딸은 내 딸이 우리 집에 있을 때 해산해서 금혜(錦惠)라고 이름을 지었던 아이였지. 2년 동안 보지 못해 병이 날 정도로 애를 태웠는데 내 집에 있을 때의 웃는 아이 모습을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네. 얼굴과 눈이 사랑스러워 품에 안고 있으니, 내 딸이 웃으면서 “아범은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길래 내가 말하기를 “딸 낳은 사람이 또한 어찌 아들을 낳지 못하겠느냐. 사내아이를 낳으면 이 딸도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자네의 부친과 형님도 모두 웃으면서 그렇다고 하였네. 아, 지금에 와서 홀연 앞서 한 말을 믿을 수 없는 비통함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단 말인가.
당시 자네 방을 보니, 오래된 집은 기울고 방 크기는 달팽이 같으며 옷농, 면보자기, 쌀독, 벼 섬으로 상인방을 버티고 문설주를 눌러, 앉거나 누울 적에 비좁아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욱 사랑스러움을 느꼈네. 딸아이가 내게만 말하기를, 시부모와 동서, 작은아가씨가 사랑해 주어 집안 안에 딴말이 없다고 매번 말하였네. 내가 이 말을 넌지시 물어보고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네. 내 마음이 딸아이가 받는 사랑으로 자네 집안에 미루어 가는데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이것은 18세기, 1770년의 글입니다. 보시다시피 처음으로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글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비로소) 딸도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는 20세기식 멘트가 등장하죠. 18세기 후반의 분위기전환이 느껴집니다.
이 글을 지은 위백규 선생은 그래도 당시문인으로써는 열린 분이라 어찌 딸이라고 예쁘지 않겠는가 식의 생각을 합니다만, 이미 사회의 분위기가 다릅니다. 다른 권에서는 이런 이야기조차 나오지요.
존재집 제 12권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낳을 경우에 더욱 심하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가 둘째 자식을 낳게 되면 곧바로 “이 애가 형보다 낫다.”라고 말하면서 더 심하게 사랑하고 가까이한다. 또 셋째 자식을 낳으면 “이 애가 두 형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하고 놀아 준다. 그래서 ‘승(勝)’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랑을 표시한다. 정말 낫더라도 편애해서는 안 되는데, 꼭 나은 것도 아님에 있어서겠는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딸자식이 아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들만 있다가 딸이 생기다 보니 그 새로 난 딸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지, 그가 언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진정한 사랑을 알았겠는가. 더러 딸만 많았다가 아들을 낳으면 또 “아들자식이나 자식이지, 딸은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심한 경우에는 그 딸들을 미워하기도 한다. 아들과 딸 사이에 경중을 따진다면 경중이 있기야 하겠지만, 천륜의 지극한 정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이 모두 천륜을 잃은 것이니, 끝내 어그러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즉, 딸을 낳은 후 '아들보다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경우는 반드시 아들'만' 있다가 딸이 새로 생겼을 경우의 멘트일 뿐이고, 반대로 딸'만'있다가 아들을 낳는 경우에는 '딸은 자식도 아니다'라는 20세기 막장드라마식 멘트도 나옵니다.
바로 위에 소개한 16세기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선생의 글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부모가 아들자식과 딸자식을 사랑하고 예쁘게 여기는 정이 일찍이 차이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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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년후대의 인물인 윤기의 [무명자집]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윤기(尹愭, 1741~1826년)
무명자집
도잠(陶潛)처럼 슬하에 어린 딸 두고 / 女弱同元亮
풍연(馮衍)보다 운 좋게 아내 어진데 / 妻賢勝敬通
가련할사 생계에 졸렬한 이 몸 / 自憐生計拙
처자식을 양강(楊江) 동쪽 버려두었네 / 棄置楊江東
첫구절인 '도잠처럼 슬하에 어린 딸을 두고'라는 말은 4세기 진(晉)나라의 시인 도잠(陶潛)의 멘트인 “딸아이가 아들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위로가 되네.〔弱女雖非男 慰情良勝無〕”을 뜻합니다. 즉, 딸이 있어 없는 것보단 낫다는 식의 뉘앙스라는 것입니다. 이 시는 1758년 결혼한 작자가 5년차인 1763년 지은 것으로 자신의 어린 딸을 보며 지은 시입니다. 역시 조선전기의 '내내 껴안고 지내는' 아버지들과는 사뭇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이런 변화는 드디어 19세기말- 20세기초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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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긍섭 (曺兢燮,1873∼1933년)
암서집 제15권
서(書)
성일여 순영 에게 답함 병진년(1916)
지난달 말에 우편을 통해 부친 편지를 받고, 펴서 읽어 보니 재삼 위로가 되었습니다. 명수(明叟)가 돌아갈 때 마땅히 답장을 해야 했지만, 그때는 집의 아이가 다시 병으로 자리에 눕는 바람에, 약물로 치료하는데 골몰하였기 때문에 틈이 없었습니다. 조카 태(泰)가 찾아와 근간의 동정을 일괄 상세하게 말해 주니, 위로되는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그저께 딸아이를 얻었는데, 바라던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하늘의 뜻인걸 어찌하겠습니까.
구한말 유학자인 조긍섭의 글은 이렇게 아들딸 차별의 결정타를 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선은 20세기후반까지 그대로 강화됩니다.
물론 조선후기라도 딸아이에 대한 사랑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애정을 품은 글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기의 경우 저런 식의 문맥은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애정어린 시선의 글이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다시 느끼지만, 고정된 관념으로 어떤 문화적 실체를 바라보는 일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건축이건 도자기건 사람이건 기록들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런 느낌이 듭니다.
또한 '딸아이'에 대한 같은 조선선비들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 시대를 사는 개개인은 느끼지 못하며 일생을 사는 어떤 의미의 '구조주의'의 힘을 다시금 느끼기도 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출처 http://luckcrow.egloos.com/2588484#516027.02
허락짤
첫댓글 조팔 임진왜란땜에 여혐심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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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이 똑같이사랑했다는건데 뭐가그렇게 다르지 그리고 중기까지 여남차별없이 균등 상속했어 여자집에 남자가 들어가 살기도하고 여혐없었다는게 아니라 더심해졌다는거임 왜란이후로
@Blacklist 3살 여아에 대한 부분이랑 여혐부분들은 나도 별로라고 생각해. 조선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환기시키려고 스크랩한거고 댓단거지 강요하려던건 아니니 혹시라도 기분 안 나빠했으면 좋겠어 게녀 의견도 이해해
@Blacklist 나야말로 글 봐주고 의견줘서 고마워! 덕분에 더 생각해보게 된 거 같아. 좋은 하루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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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 없다는게 아닌데ㅠ 과거에 여혐없던 나라 있어? 지금도 있는데..조선이라고 무조건 딸은 사랑도 안한다 천하게본다 이런이미지가 큰데 그렇지 않았다는거임 딸이라도 차별없이 사랑했다고ㅠ
@01時30分 몇백년전인데 당연히 지금보다 의식이 없었겠지 그게 타당하다는건 아닌데..역사공부해보면 우리가 생각해온만큼의 차별은 왜란과 일제강점이후부터거든 그래서 난그런점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싶어서 올린건데..아무튼 게녀 의견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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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ㅠㅠㅠㅠ이게 내맘이야ㅠㅠ
ㅁㅈ 다들 잘 읽어보길....
내맘
임진왜란 이후로 정말 많이 바뀐듯 ㅠ 조선 전기때까지만 해도 자식도 외갓집에서 키우는 일도 빈번했다고.. 좋은 글 고마워 위에 시조 읽는 데 눈물난다 맘아파서
❤❤❤❤❤ ㅁㅈㅠㅠ 손자들 육아도 할아버지가 하는게 당연했대
고려, 조선 전기와 후기에 여성의 지위가 다른 건 이미 알고있었지만 "죽은" 자식에 대한 시를 예로 든 건 이 글의 허점같음 자식 죽었는데 누가 안 슬퍼해 이걸 갖고 딸에 대한 사랑도~ 할 건 아닌 듯.. 중간에도 아버지를 하늘로 여기고 시집가니 남편을 하늘 어쩌구 하는데... 딸에 대한 걱정으로 쓴 글인 건 알겠지만 여전히 자기집 딸자식이 남의 집 아들자식보다 하등한 존재였다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글쓴한테 머라하는 게 아니라 시조몇편에서는 딸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죽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와닿는다는 것,,
그부분은 좀 그렇긴 해 그냥 글을 괜히 올린듯ㅠ 에휴
흥미롭게 잘읽었어! 저시대 사람들에게 현재의 잣대를 갖다대는건 무리지.. 일본에서 들어와서 우리나라 망친 문화가 너무 많고 그게 조선시대 내내 전해내려온 전통인 것처럼 여겨져서 아쉬워 재산상속도 그렇고!
❤❤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딸에게도 재산 증여 해줬음 이것만 봐도 후퇴한거 알수있지
나는 글 진짜 흥미롭게 읽었어! 나는 조선 시작부터 남녀차별이 심해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부터러다니,,새롭게 알고간다!!
❤❤
글 너무 잘읽었고 북맠해야지 근ㄷ 미방 드라마야???? 아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