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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막
깨어나기 싫은 꿈
#3-3.(47)
부디 명복을. 호린의 위패 앞에 마음속으로 인사를 올리며 여운은 익현을 부탁했다. 이승에서 엉킨 운명으로 고운 인연을 맺지 못하였으니 저승에서만이라도 가없는 애정으로 그를 돌봐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 제가 진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부디 그 때까지 편안히 영면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예를 올리고 물러서려는 찰나, 속삭이던 군중의 목소리마저 바람처럼 사라지고 무서운 정적이 시작되었다. 뒤를 돌아보고서야 여운은 그 이유를 알았다. 익현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상복을 입고도 전과 다름없이 말끔했다. 진중한 얼굴과 점잖은 걸음걸음에서 그녀를 잃은 비통함이 드러나진 않았어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가지고 찾아왔음을 여운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마음을 나누었던 오랜 친구와의 작별을 할 수 있도록 여운은 곧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조심스러운 마음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와 교차된 여운의 걸음이 빈소를 빠져나가는 문 앞으로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시선에 날이 서고 눈빛이 차가워졌다. 기어이 누군가의 입에서 발현된 못된 마음이 여운에게 닿았다.
“살인자.”
많은 이들이 보내오는 소리 없는 비수들을 묵묵히 맞으며 여운은 꿋꿋이 그곳에서 나왔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제 탓이 아니라고는 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했기에 그 원망들에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황제가 또다시 죽고, 뜻밖의 경황을 당한 나라 역시 혼란에 휩싸였다. 승상과의 모략을 통해 황태후와 황자를 희생시킨 태경공의 야심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진정한 황족 살해범은 그들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승상은 스스로 자리를 내어놓고 저택에 틀어박혔다. 자취를 감춰 사라지고 싶었을 테지만 차마 딸의 장례마저 외면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며칠간의 황제 없는 무치(無治)기간이 계속되고 있던 차였다. 황제는 대장군의 저택에서 최후를 맞았고, 그 자리를 이어받을 줄 알았던 대장군은 사람들의 기대완 다르게 그 최고 권력의 자리에 관심조차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차마 그에게 대항할 수 없는 군중은 갈 곳을 잃은 당황과 분노를 입힐 대상으로 여운이라는 재물을 찾아냈다. 황제가 죽기 전 입바른 말로 염려하고 간 그것, 여운이 패망한 수오국에서 온 이름 모를 촌락의 하인이었다는 소문은 황제의 죽음과 함께 날개를 단 듯 퍼져나갔다. 더 멀리, 더 크게, 매일매일 몸을 부풀려가며 확산되었다. 대장군을 꼬여내 입지를 흔들리게 만든 것도, 그의 정혼을 파기시킨 것에 더불어 호린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대장군과 부장군의 막역했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것도, 결국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혼란 속에 빠트린 것 역시도 전부 근본도 모를 보잘 것 없는 계집 하나가 미꾸라지 물 흐리듯 저질러 놓은 일이라고 매도하고 원망했다.
“뻔뻔스럽기도 하지.”
몇몇 아낙들이 지나치는 여운을 향해 입을 가릴 필요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운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보다 아파보였다. 알 수 있었다. 울고 있다는 것을.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는 태주에게는 전부가 그리 보였다. 나리의 검에 베인 왼손의 상처를 헐겁게 아무렇게나 동여맨 손수건마저 애처로웠다. 쉬이 다가갈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얼굴로 조용히 빈소를 등지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태주는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상처, 그대로 두면 분명히 덧날 거라고. 그것이 손의 상처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부장, 그만 돌아가시죠.”
빈소를 찾았던 발걸음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적화부대 병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먼저 돌아가라, 너희는.”
아직 익현이 나오지 않은 빈소 안을 바라보며 태주가 무거운 얼굴로 답했다.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한 채 병사들이 발걸음을 돌렸고, 태주는 그곳에서 내내 익현을 기다렸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익현은 여운과 같은 표정 없는 얼굴로 빈소를 나왔고, 태주가 그런 그를 향해 다가갔다.
“훈련장으로 와.”
병사들의 활기찬 소음으로 채워져야 할 훈련장의 적막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생경했다. 자박자박, 훈련장의 흙을 밟아나가던 태주가 걸음을 멈춰 세우고 느린 걸음으로 뒤쫓아 온 익현을 기다렸다.
“대신들 사이에서 벌써 누군가 황위의 재목(材木)으로 거론되는 이름이 있다던데.”
“그거 다행이군.”
말하며 훈련장을 그리운 듯이 한 바퀴 휘 둘러보는 익현이었다. 상복을 입은 낯선 분위기의 그가, 마치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난 뒤 찾아오는 허무한 소회를 되새겨보는 것처럼 보여 태주는 잠시 동안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여운일 데리고 얼마간 저택을 비우는 건 어때.”
태주의 말에 당치않은 농이라도 들었다는 듯, 익현이 돌아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데.”
“왜인지 알잖아.”
“그건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어처구니없는 소문들 한 가운데로 여운일 더 밀어 넣는 꼴이 돼. 도망치는 게 소문을 잠식시켜주진 않아.”
“사람들의 비수를 가만히 맞고만 있는 그 애의 등을 보기는 했어?”
“보기만 했겠어?”
되묻는 익현의 말에서 처음으로 그의 상처를 읽었다. 여운을 향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들을 막아줄 수 없는 답답함과 분노, 후회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태주에게 밀려왔다가는 사라졌다.
“너야말로 왜 그렇게 몰라. 그렇게 잠시 사람들에게서 피해있자고 하면, 그 애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할 리가 없잖아.”
“.......”
“필요이상 잘 해주고 있어. 그 애의 의연함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을 만큼.”
여운이 아파하고 괴로워했다면 제 가슴이 찢겨나갔을 것이고, 여운이 울며 매달렸다면 저 역시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서 여운이 며칠간은 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력을 다 하고 있는 거야. 여운이로서는.”
“.......”
“너도, 나도, 그 애가 안고 있는 무게를 다 몰라. 하지만 곁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건 너 뿐이겠지.”
“알고 있어.”
태주는 그 말이 익현에게 커다란 부담을 덧씌우는 일임을 알면서도 한 번 더 당부했다. 그리고 그 부담에 지칠지 모르는 그를 염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택을 비우라고 했던 건, 여운이 때문만은 아니었어.”
태주가 익현을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 말속에 저를 향한 걱정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의미에, 쓸데없는 소리- 라는 짧은 답으로 일축한 익현은 먼저 걸음을 돌렸다. 태주는 돌아가는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다가 괴로운 듯이 눈을 질끈 감으며 돌아섰다. 제가 아는,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의 등이 오늘처럼 아련해 보인 적이 없었다.
* * *
“이제 오십니까, 도련님.”
익현이 대문을 넘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황 집사가 그에게 따라붙었다. 목욕물을 받아놓았고, 식사 준비도 모두 되었노라고, 그를 염려하여 준비한 이런저런 것들을 고했지만 익현은 모든 것을 거절하고 여운부터 찾았다.
“아가씨께서는 방에 계십니다.”
“방이라니.”
“예, 그것이.. 여종들이 하면 될 일이라고 수차례 만류를 했는데도 굳이 손수 그 방을 치우시겠다고-”
황 집사를 거기 세워두고 익현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죽어 나간 그 방에 여운이 가까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건만, 또 다들 아무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척도 없이 익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걸레를 들고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는 여운이 보였다. 방 안은 티끌 하나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 이제 와요?”
여운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모습에 익현은 잠시 다른 시간 안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어때요, 깨끗하죠.”
제가 닦아 놓은 바닥을 향해 시선을 주며 여운이 자랑스러운 양 물었다. 황제가 쓰러져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있던 바닥이 전과 다름없이 말끔해져 있었다. 깨끗해진 것은 바닥만이 아니었다. 온 방 안이, 이제 막 새 가구들을 들여놓기라도 한 듯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것은 마치 더렵혀진 것들을 말끔히 치우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있었던 흔적들을 모조리 지워놓으려던 노력같이 느껴져 익현은 조금도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듣고 있던 익현은 여운의 손목을 낚아채서는 벽 한 쪽 옷을 넣어두는 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열어봐.”
그의 무거운 명령에 여운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웃으며 답했다.
“이건 아직, 청소가 덜 돼서-”
“열어봐.”
재차 종용하는 그의 시선에 여운이 마지못해 장을 열어보였다. 깨끗이 비워진 장 안은 있어야 할 여운의 옷도, 장신구도,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은 채 공허한 입을 뻥 하고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허무한 광경에 이어 익현이 여운에게 시선을 주자, 여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일단 걸레부터 빨아놓고 올게요.”
여운이 제게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대답을 찾을 시간을 벌 수 없도록 익현이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지금.”
“내 방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것으로서의 의미가 더 큰 방이잖아요. 어질러 놓은 것들을 내 손으로 깨끗하게 치워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물건들까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아프게 쥔 손을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익현을 응시하던 긴 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더는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여운이 체념한 듯이 입을 열었다.
“놓아주세요, 이제.”
전에 없이 말을 높이기까지 하는 여운에게서 딱 그만큼의 거리감마저 느껴져 익현은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흔들림이 없는지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계획하고 연습이라도 한 듯 감정조차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그 짧은 말에 익현은 의미를 되묻는 것조차 잊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지 마세요.”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그 말이 이제는 제 곁을 떠나겠다는 뜻임을.
말하며 조심스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여운의 행동이, 익현에게는 마치 그 뒤에 낭떠러지라도 있어 영영 놓쳐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으로 비쳤다. 일순 익현의 눈빛이 화가 난 사람처럼 변하며, 놓았던 제 손으로 다시 여운을 붙들어 마치 물건처럼 거칠게 그녀를 침상 위로 던져놓았다. 제 몸과 제 손을 이용해 움직일 수 없도록 여운을 결박시켰다.
“갈 수 있으면 가 봐.”
“이해하잖아요. 여기서 어떻게 더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그랗게 뜬 두 눈은 익현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분명히 제 뜻을 말하고 있었다.
“산딸기 숲에서, 당신이 그랬었어요. 의지만 보인다면, 죽여 달라는 부탁만큼 쉬운 것도 없다고.”
“.......”
“하지만 난 예외인거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해..?”
“그걸 들어줄 수 없다면 당신이 들어줄 수 있는 내 부탁은 딱 하나예요.”
“.......”
“그만 나를 보내주는 거.”
그리도 감정적이고 잘 울던 눈은 이제 단호함만 남았다는 듯 어김없이 익현을 바라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외려 믿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익현이었다.
“보내주고, 행복해질 거라면 난 두말없이 그렇게 해. 하지만 허락하고 내가 이 방을 나가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할 거잖아, 넌.”
“그렇지만 여기 있어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여운이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익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온 몸에서 힘과 의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서 검을 들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버릴 수 없는 한, 권력으로부터, 누군가의 정치적인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여운의 손길은 험난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험난할 그의 운명을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그 곱지 못한 길에 앞장서야만 하는 익현은, 여운을 향해 억지로 제 손을 뻗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놓아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로운 배포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검을 든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무관의 길을 선택한 것을 이토록 처절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난 대하로 돌아갈 거예요. 내게 맞는 삶은, 처음부터 그곳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익현의 눈을 잊지 않기 위함인 양, 여운은 오래도록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말로 다 하지 못할 침묵이 이어졌다. 애처로운 두 사람의 소리 없는 대화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음을 알린 것은 황 집사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여기 계십니까?”
황 집사의 목소리는 자신을 다시 현실로 데려가려는 사자(使者)의 음성인 양 괴로웠다. 익현은 두 눈을 즈려 감았다.
“무슨 일이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대문 앞에 대신들이 찾아와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두 사람을 위한 시간은 거기서 끝임을 알리는 말이었다. 여운은 천천히 익현의 팔을 거둬내고 몸을 일으켜 말했다.
“나가봐요. 난 좀 더 있다가 태주에게 인사하러 다녀올게요.”
스르륵, 제 손아귀에서 여운의 옷자락이 빠져나갔다. 뒤늦게 손을 움켜보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자박자박 멀어지는 여운의 발소리가 아프게 와 박힌다. 열린 문틈 새로 황 집사가 들어와서는 다시 그를 종용하고 있었다.
“도련님.”
“...나가.”
“예...?”
마침내 그가 울음을 삼키듯 포효했다.
“내 앞에서 전부 꺼져버리라고 해..!”
첫댓글 여운... 그 선택 밖에 없는건가요?? 그럼 익현은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