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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늦게 일어난 은서가 재인이 누웠던 침대가 비어있었다. 잠시 후 재인이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응. 선생님이 너랑 먹으라고 도시락 주고 가셨어.”
“아침부터 얼굴 봐서 좋았겠네.”
“응..”
재인이 볼을 붉히자 은서가 일어나 이불을 개켰다. 두 사람이 작은 상을 펴고 마주 앉았다. 도시락을 본 은서는 어디에서 가져온 도시락인지 알아차렸다.
“아.. 거기구나?”
“응.”
“맛있겠다. 먹자.”
“응.”
두 사람은 돈까스 우동 정식을 맛있게 먹었다. 은서가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와 양치질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붕대와 복대를 다시 할까 하다가 집이어서
그냥 풀고 있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을 본 은서가 흠칫 놀랐다.
‘어차피 아저씨는 안 보이시니까..’
그녀는 문을 열고 그가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조금 붉히며 팔짱을 끼운 채 오른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지며 인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네. 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집에 있네?”
“아.. 친구가 조금 아파서요.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자고 조금 전에 들어왔어요.”
“쉬는 날이었구나..”
“네.”
“커피 마실래?”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들어 보이자 은서가 미소를 지었다.
“아.. 금방 올라갈 테니까 먼저 가 계세요.”
“응. 천천히 와.”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가 티셔츠를 벗었다. 그가 그녀의 차림새를 알아차리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붕대를 가슴에 둘렀다. 복대로 가슴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루즈핏 원피스에 가디건을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녀가 옥상 문에 카드를 대고 문을 열자 그가 뒷짐을 지고 서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햇살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응.”
그가 돌아서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자 은서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내밀자 그녀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저씨는요?”
“마셨어. 앉을래?”
“네.”
은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벤치로 갔다. 그가 그녀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그녀 옆에 살며시 앉았다. 은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발을 동돌 굴렀다.
“잘 지냈어?”
“네. 아저씨는요?”
“나야 뭐.. 늘 같지.”
은서가 미소를 지었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이야기를 했다.
“네. 형제가 없어요. 아저씨는요?”
“나는 누나도 있고, 형도 있고, 조카들은 많이 있고..”
“아.. 다 서울에 사세요?”
“아니. 부모님이랑 형네 가족은 호주에 있고, 할머니랑 누나 가족만 서울에 있지.”
“응.. 그렇구나..”
“사촌이 있다고 했었지?”
아린이에 대한 이야기에 그녀가 한 숨을 내쉬며 “네..” 라고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하지는 않은가보다.”
“큰 아버지 딸인데요. 나이가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비교를 많이 당했어요. 그 집에서도 외동딸, 저도 외동딸. 나이도 같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녀석이랑 저랑은 전혀 다르거든요.”
“그래? 어디가 달라?”
“아린이는 애교도 많고, 얼굴도 예뻐서 어렸을 때는 인형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키도 좀 큰 편이고, 늘씬하고요.”
“너는?”
“저는..”
은서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키도 작고, 몸매로 별로고, 애교는커녕 낯가림도 심해서 엄마 치마 뒤로 숨는 아이였대요. 그래서 어쩜 저렇게 다르냐는 소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엄마는 아린이 절반만 닮으면 좋을텐데.. 라는 말씀을 지금도 하세요.”
“그 말을 듣는 게 싫겠다.”
“뭐.. 제가 부모님이 원하시는 딸의 모습은 아니니까요. 이해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님한테 맞춰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잔소리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거예요.”
“반대 안 하셨어?”
“하셨죠~. 아무것도 안 도와주신다고 하셔서 작은 월세로 구하고 친구 어머니가 하시는 미용실에 가서 일 하게 해 달라고 부
탁 드렸죠. 제대로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셔서 바로 일하게 됐어요. 그 후로는 돈을 조금 모아서 조금 더 큰 곳으로 옮
기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예요.”
“다행이다.”
“네?”
“은서를 만날 수 있게 돼서.”
은서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들 사이로 불자 은서의 머리가 날렸다. 은서가 손을 들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늦었네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그만 갈까요?”
“응.”
두 사람이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
“응?”
“아저씨.. 꽃이 피었어요.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었어요. 성격이 급한 녀석인가봐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옥상이어서 햇살을 잘 보니까 조금 빨리 나오나보다.”
“금방 다 필 것 같아요.”
“혹시.. 불편하면 나는 올라오지 않을 테니까 자주 와서 봐도 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서가 걸음을 옮겼다. 옥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던 은서가 그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내려가 볼게요.”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바로 아래인데요, 뭘.”
“조심해서 내려가.”
“네. 오늘 커피 잘 마셨어요.”
“응.”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다 멈추고 몸을 돌렸다.
“아저씨는 주스 뭘 좋아하세요?”
“난 아무거나 다 좋아.”
“그럼 내일은 제가 주스 사 올게요. 퇴근 하고 봬요.”
“그래.”
은서가 몸을 돌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
며칠 후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내려온 인호와 은서가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추웠지..”
“아니요.”
그가 조심스럽게 검지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내려와 코끝에 댔다. 단번에 코끝을 찾아내지 못하는 그의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왠지 손끝이 저릿하고 기분도 묘하고 긴장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떼어 내며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네.”
“아저씨 손도 차갑네요. 얼른 가세요.”
“그래.”
은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포트에 다시 물을 올려놓고 끓은 물을 머그컵에 부었다.
머그컵을 들고 걸음을 옮겨 소파로 가서 앉았다. 싫은 모습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할수록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가는 걸 느꼈다. 그와 있었던 시간들은 그녀를 설레게 했고,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한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이 조금 두렵고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붉어진 볼에 손을 대고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입을
손끝으로 막아보았지만 웃음은 계속 나왔다.
집으로 들어간 인호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선글라스를 벗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참으려고해도 자꾸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은서가 쉬는 날이었다. 전날 그에게 말하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었다.
“왜요?”
“나는 내일 가게에 가야 하거든.”
“아~. 다녀오세요.”
“다른 약속 있어?”
“없어요. 쉬는 날이라고 해도 만날 남자도 없고, 친구는 있는데 연애하시느라 바쁘시고.. 귀찮아서 혼자 나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나도 그래. 편하게 쉬면 돼는 거지. 여기 있으면 심심해?”
“아니요. 좋아요.”
“그럼 다녀올게. 여기에서 편하게 쉬고 있어.”
“네.”
그녀는 책과 오디오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테이블 위에 오디오를 내려놓고 콘센트에 연결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자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잔디밭 위를 걸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은서는 벚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활짝 핀 복숭아꽃이 설레는 분홍색을 뽐내며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를 들으며 옥상을 산책하고, 꽃들을 바라보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 벤치에 누워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나 그냥 가면 안 돼?”
준혁이 자꾸 가려고 하는 인호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왜.. 아래층 아가씨 만나게?”
인호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10살이나 어리다면서..”
“혼자 있으니까.. 그냥.. 여기에서 내가 할 일도 별로 없고.. 벌써 새 메뉴 시식도 끝났잖아.”
“연애도 해 볼만큼 해 본 녀석이 사춘기인 것처럼 왜 그렇게 안절부절이야. 그냥 있어. 어디 안 가고 옥상에 있는다고 했다면서.”
인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자 준혁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나 혼자 좋다고 하는 가게 아니잖아. 그냥 앉아 있어. 한.. 30분 후에는 보내 줄 테니까.”
“알았어.”
웃고 있는 인호를 보며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문이 열리고 아가씨들 몇 명이 들어왔다. 그가 카운터로 향하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신 분 성함 말씀해 주세요.”
“윤아린이요.”
인호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준혁이 인호를 지나쳐 안쪽 자리로 안내하자 그녀들이 걸음을 옮겼다.
아린이 인호 옆을 지나며 눈으로 그를 살피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준혁이 메뉴판을 건네고 카운터로 가자 친구 중에 한 명이 아린에게 물었다.
“이 가게를 어떻게 알고 예약을 한 거야?”
“그냥..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서.”
아린이 눈짓을 하자 친구들이 인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우현씨가 예약해서 왔었는데 저 남자를 처음 봤거든. 첫눈에 반했달까?”
“저 남자는 누구인지 알아?”
“아.. 정인호라고 여기 주인.”
“진짜?”
“저기 있는 남자랑 같이 동업하는 친구인데.. **그룹 막내래.”
“진짜? 애인은..”
“없는 것 같아. 파티같은 데에서도 본 적이 없어. 거의 집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고.”
“집이 어딘데?”
“**동에 있는 빌라. 그 건물도 저 사람거고, 그 주변이 저 사람 소유라서 차츰 건물 정리하고 커다란 공원을 만들 생각이라고 들었어.”
친구들이 아린이의 발빠른 정보력에 감탄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빌라에 은서가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내가 사는 곳이랑 바꿀까.. 생각 중이야.”
“진짜?”
“은서가 그렇게 할까?”
“으이그~. 아린이 몰라? 아린이는 원하는 건 꼭 차지하잖아.”
“은서가 먼저 저 남자를 만났지 않았을까? 같은 건물 산다면서.”
“주인 만난 적 없댔어. 그리고.. 좋아하는 남자 없는 것 같았고. 그러니까.. 은서보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지.”
“나이는? 조금 들어보이는데?”
“35살. 뭐 그 정도는 요즘 많은 편도 아니니까.”
“타깃으로 확실하게 잡은 거네~. 이유는.. 잘생겨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호에게 다가가자 친구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호는 지독한 냄새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가까이 와서 서는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안녕하세요. 윤아린이에요. 앉아도 되죠?”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선글라스에 그녀의 예쁜 얼굴이 비쳤다. 그녀가 여우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저에 대해 들으신 적 있으세요?”
“글세요.”
“우리 만날래요?”
인호는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우리가 왜 만나야 합니까?”
“첫눈에 반했어요. 처음 본 순간 딱 이.. 사람이다.. 느낌이 왔거든요.”
“감사합니다만..”
“애인 있으세요?”
“없다는 걸 알고 물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애교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기업 둘째 아드님이시고, 지금 살고 계신 빌라, 여기 레스토랑. 전국에 있는 10개 분점까지 인호씨 거라고 들었어요.”
“여기 레스토랑과 전국 10개 분점은 제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그럼 대체로 맞네요. 그쵸?”
“그렇네요.”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인호가 싸늘한 표정이지만 예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건 조사 안 하셨나봅니다.”
“네?”
“예를 들면 10년 전에는 배우였다더라..”
아린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배우하셨어도 어울리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고 계시는 구나.. 사람들이 알아봐서.”
“틀려요.”
“네?”
인호가 선글라스에 손을 댔다.
“8년 전에 교통사고로 앞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봅니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정확히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준혁은 턱에 힘을 주고 달려가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린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저.. 정말이에요? 앞이.. 안 보여요?”
“네. 지금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전혀 몰라요. 관심도 없고.. 단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얼른 여길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거..?”
“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향수는 조금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들이붓는 게 아니라.. 그리고 담배는 끊으세요. 건강에 해롭습니다.”
아린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한테 이러고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20대 어설픈 꼬맹이가 무서울 나이도 아닌데.”
“두고 봐요.”
“그럽시다.”
그녀가 화가 난 듯 친구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가게를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인호가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찾았다. 준혁이 그의 손 끝에 물컵을 밀어주었다. 그가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미안하다. 손님을 내쫓아서.”
“누군지 알아?”
“확실히는 몰라.”
“술.. 주랴?”
“아니. 그냥 갈래.”
“그래. 택시 불러줄게.”
“응.”
준혁이 음식을 취소하고 인호와 가게 밖으로 나가 택시를 기다렸다.
“집으로 가서 혼자 있을 거야?”
“아니..”
“지금 이 기분으로 옥상에 갔다가.. 뭔 짓을 하려고..”
“그냥.. 보고 싶어.. 어떤 여자인지 점점 더 궁금해. 시력 잃고.. 처음으로 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 젠장.. 볼 수가.. 없네..”
“인호야..”
택시가 앞에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인호가 준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따가 보자.”
“그래.”
준혁이 택시운전기사에게 말하고 나자 택시가 출발했다.
옥상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서가 잠에서 깨어났다. 벤치에서 일어나 앉으며 두리번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은서..? 은서야..”
그가 그녀를 찾으며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턱에 힘을 주고 허리를 조금 숙인 채 깊은 한숨을 내쉬자 은서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맨발로 달려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그가 허리를 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녀의 향기를 빨아들일 듯 숨을 들이마셨다.
“아저씨..”
그가 포옹을 풀고 조금 뒤로 물러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미안해..”
“무슨 일 있으셨어요?”
“조금..”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광이네..”
“그럼 영광이죠~. 아무나 저를 만질 수 없거든요.”
그가 입가를 조금 떨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바람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인호가 아래층에서 가져온 과일을 먹고 있었다.
“아~. 아린이 맞아요. 그런데 담배도 피워요? 그건 몰랐는데..”
“담배 냄새를 숨기려고 향수를 뿌리는 것 같았는데.. 두 냄새가 섞여서 머리가 아팠어.”
“네.. 수고하셨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친구는 아무 남자한테나 그렇게 해?”
“어느 정도 레벨이 되어야 해요.”
“레벨? 어느 그룹 아들이라던지, 재력.. 뭐 그런 거?”
“그런 것도.. 물론 포함되지만요. 아직은 어려서 그런가 그런 조건들 보다는.. 인물을 제일 많이 보는 편이죠.”
“인물?”
“네. 아저씨가 아린이 타깃 범위에 들어가나봐요.”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키도 크시고, 미남이시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은서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과일을 입에 넣고 씹자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타입은 아니야?”
“컥..”
은서가 과일에 사래에 들려 기침을 했다. 그녀가 물병을 들어 물을 마시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멋지세요. 자상하시고, 다정하시고..”
“그 말은..”
“네.. 제 타입이시네요.”
“하아~. 다행이다.”
“네?”
“미움받고 싶지 않았거든.”
“아저씨..”
복숭아꽃잎이 하늘하늘 내려와 그의 눈썹과 선글라스 위에 떨어졌다. 은서는 팔을 쭉 뻗고 뒤꿈치를 들어 그 꽃잎을 손으로 집었다. 그가 움찔했다.
“꽃잎이요..”
“응.. 꽃잎은 작아서 잘 안보여. 나무 윤곽은 보이지만..”
그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은서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벤치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거기 그냥 있어요.”
“응? 뭐하게?”
그녀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벌떡 일어났다.
“어? 뭐하는 거야? 이 소리는... 혹시 나무 올라가게? 위험해.. 어서 내려와. 은서야.. 어서 내려와..”
“괜찮아요.. 그대로 있어요.”
그리고는 벤치를 밟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나무에 걸터앉아 큰 줄기를 잡고
양 손으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꽃잎이 눈처럼 흩날려 그의 주위를 감싸듯 흩날렸다.
그는 손을 벌리고 얼굴에,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수많은 꽃잎들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은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저씨.. 아저씨가 좋아요.. 특히.. 아저씨의 미소가.. 참 가슴 아프게 좋아요..’
잠시 후 꽃잎비가 잦아들자 그가 고개를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돌렸다.
“겁도 없이.. 다치면 어떻게 하려구 올라갔어?”
“헤헤.. 저요.. 원래 나무 잘 타요. 초등학생이었을 때요. 시골 외할머니 댁에 방학이 되면 놀러갔었거든요. 그 동네에서 저보다 잘 타는 얘는 아마.. 없었을 걸요?”
“알았으니까 이제 내려와.”
“잠깐만요.. 문제가 좀 있는데요.. 나무는 제가 제일 빨리 올라가는데요.. 내려갈 때는 제일 늦게 내려왔다죠..”
은서는 천천히 안전한 부분을 밟고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잘 닿을 수 있도록 그가 내민 손을 그녀가 잡고 안전하게 그의 옆에 섰다.
“고마워요.”
그의 커다란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보고는 은서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아 빼려는데 그가 다시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아니.. 내가 고마워.”
그는 잡은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은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심장이 귀에서 뛰는 듯 시끄러웠다.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어 마치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듯
얼굴을 마주했다. 순간 그녀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보여요?”
“음.. 아주 흐릿하게 윤곽만? 은서는 참.. 작구나..”
바람에 꽃잎이 조금씩 떨어져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머리에, 어깨에 내려앉았다.
은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볼썽사나운 얼굴을 그가 자세히 볼 수 없는 상황이
아주 조금.. 마음에 들었다. 손을 슬그머니 빼고는 책이랑 오디오를 챙겼다.
“늦었어요. 그만 가요..”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앉아 있는 은서의 얼굴은 아직도 홍시 같았다.
그리고 복숭아꽃잎에 둘러싸여 있던 그의 모습이, 그의 미소가, 자신의 손등에 닿았던
그의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자꾸만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되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은서는 물속으로 쏘옥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눈의 물기를 닦아내고 눈을 떴다.
그리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 너무 오래 했다..”
너무 오랫동안 욕조 안에 있어서 그런지 얼굴의 홍조가 사라지지 않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양 볼이 마치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아로아처럼 빨개진 나는 침대까지 기어 올라와 누웠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쏟아지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인호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손에, 얼굴에 느껴지는 꽃잎들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작고 섬세한 손가락의 느낌도 떠올랐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가 한 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은서는 현관 벨소리에 잠이 깼다. 이불을 안 덮고 자서 몸이 찌뿌둥했다.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종종걸음으로 현관에 갔다. 그였다. 은서는 눈을 비볐다.
눈을 뜨고 다시 봐도 그였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멀끔한 모습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잘 안보인다고는 하지만 이런 차림으로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인터폰을 눌렀다.
“어.. 아저씨.. 아침 일찍 무슨 일이에요?”
<출근 몇 시에 해?>
“오늘은 1시까지 가면 돼요. 왜요?”
<같이 점심 먹고 데려다 줄까하는데..>
“네?”
<같이 밥 먹자구.>
“나가서요?”
<응. 얼마나 걸려? 택시 불러야 해서..>
“음..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하는 곳이에요?”
그 말에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아니.. 우리 가게로 갈 거야.>
“그럼 30분이요.”
<알았어. 30분 후에 내려올게.>
“네..”
은서는 이불을 거실 소파에 집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데이튼가? 아저씨랑 데이트?”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이 벌어졌다. 치약을 들어 전동칫솔에 묻히고 입에 물고 양치질을 하다가 거울을 본 은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여전히 그녀는 아로아였다.
10분 후에 재인은 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긴 머리는 풀어 내렸고, 위는 빨간색이고 챙은 검정색인
야구모자를 최대한 푹 눌러썼다.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로 아로아에서 벗어나보려 했지만 오히려
얼굴만 동동 뜬 귀신처럼 돼서 다시 세수하고 머리카락과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누구세요?>
“아저씨.. 저에요..”
그가 문을 열었다. 그는 푸른 V넥 니트티에 핏이 살아있는 검은색 캐주얼정장차림이었다.
스타일은 더욱 멋들어지게 만드는 선글라스까지 그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와 외출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더 아쉬워 소리 없는 한 숨을 내쉬었다.
“벌써 왔어? 택시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는데..”
“저, 못 가요.”
“왜?”
“밖에 못나가는 상황이 생겼어요. 죄송해요. 식사 초대해 주셨는데..”
“그래? 혹시 어디 아파?”
“그런 건 아닌데요..”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위에 올렸다.
“모자 썼네?”
손을 미끄러지듯 내려 그녀의 머리를 만졌다.
“머리는 풀고.. 미안..”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안쪽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볼을 살짝 만졌다. 은서의 상태를 확인하는 그의 손길은 여전히 감당이 안 되도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움찔했다. 심장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어제 욕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아로아 됐어요.”
“아로아?”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아로아 있잖아요. 양 볼에 연지 찍고 돌아다니는 여자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대로잖아요. 화장으로도 안 가려지고..”
그가 설명을 들으며 웃음을 참으려고 얼굴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을 막고 있다가 간신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했다.
“흠흠.. 어제 욕조에 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그게...”
‘아저씨 생각하느라 그랬죠..’
“깜박 욕조에서 잠이 들었지 뭐에요..”
“큰일 날 뻔 했네..”
“하하하...그러게요..”
은서는 어색한 웃음으로 웃었다.
“조심해.”
은서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 져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지금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구요.. 여하튼 그래서 밖에는 못 나가요. 다음에 다시 초대해 주시면.. 안돼요?”
“음.... 그래.”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던 그는 상당히 쿨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그녀는 서운했다.
‘아저씨와 외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아쉽다...’
“그럼.. 저 가 볼께요.”
“조심해서 가.”
은서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냉동실에 넣어둔 젖은 손수건을 꺼내 소파에 누워 양 볼에 올렸다.
“혼자 천국갔다 지옥갔다.. 힘드네..”
입맛도 떨어진 은서는 점심도 대충 빵이랑 커피한 잔으로 때웠다. 밖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를 미용실 주차장에 세운 후 우산을 쓰고 미용실로 향했다. 거리에는 벚꽃잎이 떨어져
바닥 위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우산밖으로 한 손을 내밀어 비를 만져 보았다.
차가운 빗물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건, 역시 겁이 나고 무서웠다.
은서는 눈을 감은 채로 다른 감각에 집중을 해 보았다. 빗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바닥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느끼고 있었다.
차갑기도 하고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저씨 목소리에는 마법에 걸리게 만드는 힘이 있나봐.. 심장이 이상해..”
그녀는 미용실 앞에서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얼굴이 왜 그래요?”
“조금 열이 나서.. 심해?”
“조금요.”
“오늘은 쉴래?”
원장님이 그녀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어제 쉬었는데요.. 괜찮아요. 보기에만 이렇지 정말 몸은 건강하거든요.”
“힘들면 말 해.”
“네.”
은서는 그와 데이트를 못한 서운함을 감추고 일에 집중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라가는데
3층에서부터 계단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은서가 눈을 깜박였다. 촛불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옥상문을 열고 나가자 티 테이블이 식탁으로 변해 있었다.
“아저씨..”
“저녁 같이 먹을래?”
은서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네..”
준혁이 테이블 세팅을 하려고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원래는 가게에 가서 먹으려고 했지만, 여러 사정상? 음식이 집으로 왔지..”
그 여러 사정이 다 그녀 때문이라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조용하게 그에게 말했다.
“아... 죄송해요. 친구 분을 너무 번거롭게 한 거 아니에요?”
“괜찮아.”
그는 웃어 보이며 살짝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다 들려. 그리고 난 바쁘다구.. 나머진 내가 알려준 대로 하면 되고.. 이따 밤에 내가 와서 정리할게. 알았지? 그럼, 같이 하고 싶지만 가게에도 제가 있어야 해서요. 다음엔 부디 가게로 와요.”
“네. 잘 먹을께요.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에 앉아 있어.”
그는 준혁과 옥상에서 내려갔고, 은서는 식탁 가까이로 걸어 왔다. 식탁 위는 음식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코스요리가 한
상에 올라와 있었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가 곁들여진 전채요리, 빵과 양송이버섯스프, 스테이크와 샐러드까지, 와인까
지..
“우와..”
어느새 그가 들어와 그녀가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 섰다. 저럴때보면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그저 멋지고 멋진 남자로 밖에 안 보인다.
“어때? 괜찮아 보여?”
“네.. 근사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맛있게 먹을께요.”
“응, 맛있게 먹어 줘..”
은서는 자리에 앉아 전채요리부터 먹었다.
“음...”
“어때? 시간 맞춰 나와야 하는데 다 식어서.. 맛 없지?”
“맛있어요. 지난 번에도 친구랑 맛있게 먹었었거든요.”
“실력 좋은 요리사를 두고 있지.”
그는 와인잔을 들었다. 은서는 자신의 와인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마시지 않고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은서에게 말했다.
“왜 안 마셔?”
“술을 잘 못 마셔서요. 지금 마시면 나머지는 무슨 맛인 줄도 모를꺼에요. 마지막에 마시려구요.”
“그래?”
그가 웃었다. 정말 맛있는 음식들을 차례차례 비우고 나니 너무 배가 불렀다.
“너무 잘 먹었어요.”
“후식이 있는데?”
“못 먹을 것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가더니 다시 와서는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원래는 샤벳을 먹게 해 주고 싶었지만, 젤리로 바뀌었어.”
“유자에요?”
“응, 어제 네 덕분에 기분이 너무 좋았어. 그래서 기분 좋아지는 음식 먹게 해 주고 싶었지.”
“음~ 맛있어요.”
은서는 크게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차갑고, 부드럽고, 말캉거리면서 상큼한 유자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거의 다 먹을 즈음 그는 더치커피를 유리잔에 담아 얼음물을 부어 가져왔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그를 보면 마치 그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잘 보이는 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약간씩 긴장해서 떨리는 손을 보면서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연습하고, 얼마나 다쳤을까.. 생각하면서 은서는 다시 마음 한 쪽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더치커피네요?”
“응. 가게에 더치커피를 잘 내리는 직원이 있거든. 따뜻한 차가 아니라서.. 미안.”
“음.. 아니에요. 향이 너무 좋은데요..? 고마워요. 너무.. 즐거운 식사였어요.”
“즐거웠다니 다행인데? 나도 즐거웠어.”
“다행이네요..”
은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도 따라 웃었다.
“여기 집세가 조금 비쌌을 텐데.. 어떻게 돈이 됐어?”
“전에 살던 집이 좀.. 허름했어요. 옥탑방이었거든요.”
“응.. 아가씨 혼자 옥탑방은 좀.. 위험해 보인다.”
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할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부모님 몰래 조금 도와주셨어요. 지금 매달 적금 들어가는 거랑 용돈 받는 것에서도 절약해서 모으
고 있어요. 꽤 모였는데요 조금 더 모으면 여기 계약이 끝날 즈음에는 깨끗한 적당한 원룸으로 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돈 많은 집 철없는 아가씨라 씀씀이도 헤플 줄 알았는데 착실한 아가씨네..”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남자들이 불편하지?”
그의 말에 은서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는 식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 아닌데요..”
그가 한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남이 꽤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그건..”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
“최근에는 정말 오랜만에 일어났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종종..”
“남자친구가 보호 안 해 줬어?”
“남자친구가 있던 적이 없었어요. 한 번.. 있었나.. 하지만 그것도 2주 만에 끝났지만요.”
“고백 받은 적은?”
“그건 가끔.. 전 남자가 저에게 갖는 관심이 별로.. 저를 알지도 못하는데 좋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외모가 마음에 들면 마음이 가기도 하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성격이 이상하거나 하면 헤어져야 하잖아요. 얼굴이 마음에 들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펴봐야 성격도,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습관.. 뭐.. 그런 걸 알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너는 네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
“별로요.. 저는 예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린이처럼 예쁘지 않아요. 몸매가 좋은 편도 아니고, 키도 안 크고요. 여성스러운 성격도 아니고..”
“아는 거랑 좀 다르네?”
“아저씨가 뭘 아는데요?”
“작고 아담한 체형에, 귀엽고 예쁘고, 마음도 착하고, 말도 예쁘게 하고..”
“귀엽고 예쁘지 않아요. 아.. 아저씨는 윤곽만 보이니까..”
그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져 애꿎은 찻잔만 만지며 고개를 내렸다.
“그건, 내 친구가 한 말인데?”
은서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분이요?”
“응, 귀엽고 예쁘다고 했어. 준혁이가..”
재인은 귀까지 빨개졌다.
“그 분이 눈이... 낮으신가 봐요. 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헛기침까지 나왔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가보구나.. 쑥쓰러워하기는..”
은서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저씨는 왜 만나는 분이 없으세요?”
“음.. 향기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더라구.”
“향기요?”
“응. 예전에는 나도 외모를 많이 봤지. 그런데 이젠 잘 안 보이니까.. 아무여자나 사귈 수는 없잖아. 어떤 여자는 향수냄새가
너무 진하고, 어떤 여자는 숨기려고 껌이랑 커피랑 섞여서 담배 냄새도 나고.. 의외로 향기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각 보다
많지 않더라구.. 이상해?”
“음.. 조금요.. 쿡쿡...”
“그런데.. 너는 참 좋았어.”
웃고 있던 그녀의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복숭아 향.. 은은한 꽃향기도 나고 만날때마다.. 기분 좋더라구..”
은서의 심장이 귀에서 뛰는 듯이 쿵쾅대고 있었다.
“그래서 무척.. 궁금했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 보면, 알고 나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 싶었는데 오히려 더 좋아졌어. 착하고, 마음도 따뜻하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은서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좋아해.”
그가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 머리꼭대기까지 열이 올라 어지러웠다.
“아저씨.. 그렇게 말하면 나 오해해요. 아저씨가 날 좋아한다구..”
“맞아. 말했잖아. 좋아해.”
은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냥 어린 동생쯤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야기하기 좋은 친구쯤으로..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서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와인잔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친구로요? 아님.. 여자로요?”
“지금 나는 너에게 다른 남자들처럼 대쉬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바쁜 주말에 친구한테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해가며 집에 저녁 차렸겠어? 사실은 좀 더 분위기 있는데서 하고 싶었는데.. 뭐.. 이것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아..”
그의 고백을 듣자 그녀의 심장은 더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무언가 벅찬 감정이 차올라 눈에 눈물이 고였다.
“....”
“나는.. 안 되겠어? 안 되겠지.. 거절한대도 이해해.”
그의 말을 듣고 은서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였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은서는 그의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조금 울먹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너무 좋아하는 거 티 낼까봐 참고 있는 거예요.”
은서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위에 놓은 냅킨으로 꾹꾹 눌러 눈물을 닦았다.
“나도.. 아저씨가 좋아요.”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긴장했는데..”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했어요? 전혀 몰랐는데..”
“몰랐어? 나 연기 잘해.”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은서도 피식 웃었다.
“이런 나라도 괜찮겠어?”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저씨야 말로 이런 저라도 괜찮겠어요? 아직.. 아저씨가 모르는 게 많은데..”
“너도 나에 대해 아는 거 별로 없잖아.. 앞으로 알아가면 되겠네.. 쉽지 않을 거야. 난.. 잘 안 보이니까 보통 남자들이 해 줄 수 있는 걸 못해 줄 수도 있어. 힘들어 지면 혼자 참지 말고 말해.”
“네.. 아저씨도 말해주세요.”
“응.”
그 둘은 마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지고, 잘생기고, 매너도 좋고, 성격도 좋은..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드라마나 소설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재인이가 학창시절
그렇게 품에 안고 살았던 순정만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25년 동안 아무하고도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너무 꿈같은 일이 일어나면 너무 좋아 말을 막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저 휘몰아치는 감정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를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침묵의 시간만큼 행복한 기분이 넘쳐흘렀다.
“집에 데려다 줄게.”
“혼자 갈 수 있어요. 바로 아래층인데요.”
“원래 첫 데이트에는 애인이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는 거야.”
첫 데이트나 애인이라는 말에 은서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행복한 기분에 입도 양 옆으로 벌어졌다.
“네..”
그와 그녀는 일어났다. 은서는 그를 따라 몇 걸음 옮기다가 식탁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설거지는..”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괜찮아요?”
“응. 준혁이가 다시 오기로 했어.”
“아.. 다음번에는 그분께 맛있는 거 사드려야 겠네요.”
“아니야.. 내가 뭘.. 주기로 했어.”
“뭘요?”
“응. 그런 게 있어..”
계단을 내려와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섰다.
“들어가.”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잘 자.”
“네.. 아저씨도 잘자요.”
은서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은서는 문을 닫았다.
그는 인사하던 오른손을 주먹을 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샤워를 마친 은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아침과는 다른 이유로 아로아가 되어 있었다. 두 손을 들어 양 볼을 감쌌다. 여전히 심장이 두근.. 거렸다.
옥상에서 갖고 온 식기들을 정리를 마친 치운 준혁이 손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귄다고?”
“응.”
“힘들지 않겠어?”
“힘들겠지..”
“그래.. 많이 힘들겠지.. 이제 옆에 있을텐데 덮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을 거냐?”
인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게.. 나도 제일 걱정이다. 끊임없이 노력해야지. 은서의 페이스에 맞춰서..”
“큭큭..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
인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아이언 맨 액션 피규어는 내가 갖는다.”
인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끄응..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준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속으로 인호의 행복을 조용히 빌어주었다.
첫댓글 아... 오나전 달달함~~~~ +_+
은서양 스토리가 재인양꺼 보다 제 스퇄~~ ㅎㅎ
잘 읽었어용 :)
아란이에 대한 이야기에 그녀가 한 숨을 내쉬며 “네..” 라고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아린이
차를 미용실 주차장에 서운
-> 세운
수정해주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