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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는 너무 설레고, 행복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아 늦게 잠들었다. 핸드폰 벨소리에 잠이 깼다. 엎드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자고 있었니?>
“아..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은서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오전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자고 있는 것을 깨운 게야?>
“아니에요. 일어났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언제 쉬어?>
“다음 주 화요일에 쉬어요.”
<그럼 그 날은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갈래? 바둑 한 판 둘 사람이 없구나.>
은서가 피식 웃었다.
“네. 갈게요.”
<그래. 그럼 오늘도 수고해라.>
“네. 할아버지.”
전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밤새 아주 즐겁고 행복한 꿈을 꾼 것같았다.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아주 설레는 꿈...
은서는 옆에 널부러져 있던 베개를 들어 얼굴위에 올려놓고 팔로 베개를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베개를 치우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커피 한 잔 타서 테라스로 향했다. 비는 그치고 공기는 맑고, 기분 좋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어? 저게 뭐지?”
위층으로부터 연결된 줄 끝에는 바구니가 있었다. 머그컵을 내려놓고 바구니 안을 보았다.
3개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은서는 목을 빼고 그가 있을 위를 바라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유리병에 들어있는 더치커피, 그리고 모닝샌드위치가 들어있고,
윗부분은 은색이고 아랫부분은 검은색인 녹음기였다. 윗부분에는 조그만 창이 있고,
중간에 버튼들이 있고, 아랫부분은 스피커가 있었다. 앙증맞은 크기의 녹음기였다.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잘 잤어? 난 일이 있어서 오늘 나갔다 올 거야. 아직 안 일어난 것 같아서.. 난 핸드폰은 없어.
귀찮기도 하고, 뭐 잘 다루지도 못하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집에 있으니까.
하루의 일과를 이렇게 알려 줄게. 이따 밤에 보자.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혹시 일이 생겨서 못 나올 경우, 여기에 녹음 해 줘.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
샌드위치 때문에 너무 늦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냄새 맡아보고
쉰 것 같으면 샌드위치는 버려. 그냥 먹지 말고.. 더치커피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돼.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저녁에 보자.”>
그녀는 녹음기를 들고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잘 잤어?...”>
그는 참.. 로맨틱하고 멋지다..
한 참 후 그녀는 녹음기를 바구니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식어버린 커피가 들어 있는
머그잔을 들고 집으로 들어와 싱크대에 커피를 버리고 긴 유리컵을 꺼내 더치커피를 조금 따른 후에
생수를 붓고 얼음을 몇 개 넣었다. 샌드위치도 뜯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다행히 쉰 것 같지 않았다.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셨다.
“아... 맛있다..”
그녀는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행복한 브런치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마친 은서가 집을 나섰다.
인호는 어떤 사람들과 준혁과 만남을 가진 후 준혁은 가게로, 그는 부모님과 형님네 가족이
들어오셨다고 해서 누님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에 들어가자 아주머니가 그가 서 있는 앞에 슬리퍼를 놓아주셨다.
“오랜만이세요, 도련님.”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가 슬리퍼를 신고 가만히 서 있자 조카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삼촌..”
“응. 우리 예쁜이.. 잘 지냈어?”
손을 들어 조카의 머리에 손을 올린 인호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한 쪽 무릎을 꿇고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컸네~. 이제 숙녀인데?”
“헤~. 삼촌. 안 보고 싶었어? 난 삼촌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었지.. 우리 꼬마 숙녀 주려고 선물도 준비했는데?”
“진짜?”
그가 쇼핑백을 조카에게 건네자 조카가 선물을 풀었다. 그리고 마음에 들었는지 비명을 질렀다. 인호가 눈을 감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카가 다다다 뛰어 가더니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삼촌이 이거 사줬어~. 갖고 놀아도 돼?”
“응. 그런데 감사 인사는 했어?”
“아.”
조카가 다시 다다다 뛰어와 그의 손을 잡았다.
“삼촌~. 고맙습니다~.”
“그래.”
조카가 방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누나가 그의 손을 잡아 소파로 안내했다.
“미안. 구조가 조금 바뀌었거든.”
“응. 괜찮아. 부모님이랑 형님네는?”
“곧 도착 하실거야. 할머님도 오실 거야. 매형이 모시러 갔거든.”
“응.. 수고가 많네.”
“넌 결혼 언제 할 거야?”
소파에 앉은 인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결혼이야.. 누구 인생 망치려고.”
“네가 어디가 어때서?”
인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누나.. 왜 그러냐?”
누나가 속상한 듯 숨을 내쉬자 인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각오하고 있어. 할머니나 엄마는 나처럼 여기에서 안 끝날테니까.”
“뭐?”
인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미용실에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고 있는데 미용실 문이 열리고 아린이 들어왔다. 은서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장님이 가려고 하자 은서가 두 손으로 잡았다.
“제 사촌이에요. 제가 갈게요.”
“그래.”
은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린은 팔짱을 끼우고 미용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왜 오지 말라고 했어?”
“왜 왔어?”
“어머. 누가 들으면 네가 나 엄청 싫어하는 줄 알겠다, 얘. 우리는 핏줄이잖아.”
“맞아. 그 핏줄 때문에 참고 있는 거야. 왜 왔냐고.”
“미용실에 왜 왔겠니? 머리 하러 왔지.”
“다른 데로 가. 네가 가는 샵 있잖아. 케어만 몇 십 만원씩 하는 곳.”
“너랑 할 얘기 있어서 온 거야.”
“그럼 나가서 해. 요 앞에 커피숍 있어. 네가 좋아하는 별다방. 거기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알았어.”
그녀가 선글라스를 쓰며 미용실을 나서자 남자직원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에요? 엄청난 미인인데?”
은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해 할 것도 없어. 그대는 그녀의 승에 안 차는 레벨이니까. 원장님께 나 10분만 나갔다 온다고 말씀 드려 줘.”
그녀가 직원 앞치마를 벗고 미용실을 나가 커피숍으로 갔다. 아린이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은서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넌 뭐 안 마셔?”
“뭔지 빨리 말해. 나 일하는 중이야.”
아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는 집에 돈도 있으면서 왜 이 궁상을 떨며 사는 거야? 미용실이 뭐니? 차라리 네가 샵을 차리고 원장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은서가 그녀를 바라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라.”
“할 말 있다고 했잖아.”
“그럼 본론만 말해. 나 일하는 중이야.”
“알았어.”
은서가 다시 앉았다.
“뭐야.”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 너랑 나랑 집 바꿀 거야.”
“뭐? 그게 무슨 거지같은 말이야~.”
“얘는.. 교양도 없이. 말을 왜 그렇게 하니?”
“죽을래? 내가 왜 네 아파트에 가서 살아?”
“할아버지한테 전화 못 받았어?”
은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 단단히 먹고 와. 너한테 폭탄 2개 떨어뜨리실 테니까.”
아린이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 여우처럼 예쁜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은서가 일어나 커피숍을 나왔다.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인호는 가족들과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가 함께 오신 이유를 그도 알고 있었다. 마음 약한 어머니 대신 그에게 강하게 밀어붙이시기 위해서였다.
“그래.. 다들 별고 없고?”
할머니의 물음에 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일 없습니다.”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눈짓을 하자 어머니가 인호에게 물으셨다.
“새로 이사 온 아가씨는 어떻니?”
어머니의 질문에 인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왼손에 쥐고 있는 자신만을 위한 과일접시에서 사과를 들어 입에 넣었다.
“뭐가 궁금하셔서 물어보시는지 저는 그게 더 궁금한데요, 어머니?”
“어머, 얘는.. 내가 뭐가 궁금하겠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나.. 뭐 그런 거지.”
“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형수가 입을 가리며 조용히 웃음을 참았다.
“형수님.. 귀는 멀쩡합니다.”
“죄송해요, 도련님.”
인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윤아린도 만났다면서?”
형 민호가 그에게 물었다.
“누구?”
“윤아린.. 아래층에 사는 아가씨 사촌.”
인호는 순간 코끝에 그 여자의 냄새가 스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만났지. 대뜸 첫 눈에 반했네, 만나자고 하길래..”
“그러길래?”
할머니와 어머니의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
“난 앞이 안 보인다고 했지.”
어머니의 한 숨소리가 들리고 할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인호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렇게 들이대서 거부감이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엄청 미인이던데?”
“그래.. 말 좀 해 봐. 어떤 것 같아?”
“뭐가 어떤 것 같아?”
“여자로서 어떻냐고.”
할머니의 물음에 인호는 혀로 입 안을 쓸며 잠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형까지 이러는 거 보니까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뭡니까? 뭐예요, 할머니?”
“그 쪽에서 널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야. 한번 만나볼래?”
그가 접시를 무릎에서 내리려고 하자 형수가 얼른 접시를 받았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전 결혼 안 합니다. 포기가.. 그렇게 안 되세요? 아니 한 번 거절했는데도 포기가 안 되는 건 그 아가씨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을 왜 안 해?”
“할머니..”
“네가 어디가 어때서. 결혼을 왜 안 하려고 하는 건데?”
그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쩐 일로 오시나 했습니다..”
“인호야..”
“집안도 괜찮고, 얼굴도 예쁘고, 이탈리아에서 패션 공부도 하고 온 모양이야. **그룹 큰 아드님 외동딸이고..”
“모두 선자리에 나오는 사람들을 그렇게 말하죠, 어머니.. 누가 집안은 괜찮은데 철이 없어요. 얼굴은 예쁜데 뇌가 없어요.. 라고 말합니까?”
“풉..”
큰조카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인호를 흘기듯 바라보셨다.
“변하지 않아요. 결혼.. 안 합니다. 서울 구경 천천히 하시고 가십시오. 우리 꼬마 공주님.. 삼촌을 현관까지 배웅해 주실래요?”
“응~.”
조카가 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현관에서 멈추자 아주머니가 그 앞에 그의 구두를 신기 좋게 내려놓으셨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도련님.”
“네. 아주머니.”
그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머니..”
인호의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셨다.
“너무 성급했나봐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다독이셨다. 할머니가 한 숨을 내쉬었다.
은서는 원장님께 말씀드리고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할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놀라셨다.
“어쩐 일이야? 다음 주 화요일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들어 오거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 방으로 은서가 따라 들어갔다.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할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보셨다.
“아린이가 갔었니?”
“네, 할아버지.”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아린이가 사는 곳도 안전하고 좋은 곳이야.”
“지금 집도 좋아요. 제 분에 넘칠 정도로요. 물론 돈을 조금 더 모으면 할아버지께 빌린 돈을 갚고 조금 아담한 곳으로 이사를 할 생각이지만.. 아린이와 바꾸고 싶진 않아요, 할아버지.”
“아린이가.. 그 건물 주인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은서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선도 보고 싶다고 해서 그 댁에 연락을 넣은 상태이기도 하고..”
두 손을 모은 은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댁에서도 아린이를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다. 적당한 날짜를 잡아 선을 봬 줄 생각이다만.. 네 생각은 어떻니?”
“할아버지..”
“응?”
은서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아린이가 알면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될 것이었다. 하
지만 그가 잘 거절하면 아린이 모르게 잘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아린이 선은 할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집은 안 바꾸고 싶어요.”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럼 쉬세요.”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부른 이유는 그것 말고 하나가 더 있다.”
“네?”
은서가 다시 앉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선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한 번 볼래?”
은서가 놀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선.. 이요? 저요?”
“응. 괜찮은 집안인 것 같다만.. 그 쪽에서 너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구나.”
“할아버지..”
“만나 봐.”
“네?”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결혼 시킬 생각은 없어. 하지만 여러 사람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은서는 결국 할아버지께는 그에 대해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린이 들어와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그래. 아린이 왔니?”
“네.”
“나가 있어. 은서랑 이야기 중이었어.”
“무슨 얘기요?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에요? 뭔데?”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만나 볼래?”
“누굴요? 할아버지 은서가 누굴 만나는데요?”
“너는 나가 있으래두..”
“볼게요.”
은서가 대답했다.
“누굴?”
아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은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저 여우같은 기지배..’
“은서한테 선이 들어왔어.”
“너한테? 훗..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
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너한테 아저씨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저녁 식사 후 다과를 들고 있는데 아린이가 은서가 집으려던 딸기를 쏙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너는 이쪽 거 먹어. 은서는 하나도 못 먹고 있잖아.”
“이쪽 딸기가 더 달아.”
“같은 상자에서 나온 딸기거든?”
아린이 자신의 엄마를 흘기듯 바라보았다. 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많이 먹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많이 먹었대잖아.”
아린이 다시 은서 앞에 놓인 접시에서 딸기를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집에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아린의 엄마가 상자를 내미셨다.
“이게 뭐예요?”
“뭐긴.. 딸기 좋아하는 녀석이.. 너 먹으라고 큰아버지가 사 오신 거야.”
“아니에요.”
“아니긴.. 집에 가서 먹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자주 놀러 와.”
은서는 웃으며 딸기 상자를 받아들었다.
아린이가 할아버지 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은서가 누구랑 선 봐요?”
“그게 왜 궁금한데? 훼방 놓으려고?”
“훼방은요.. 궁금해서 그렇죠.”
“그러지 마. 은서가 좋다고 찾아와서 계획을 말하는 녀석이 특별히 너한테도 비밀로 하라고 했어.”
아린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주원이 들어왔어요?”
“하여간 눈치는 빨라서.. 그래. 영국에서 들어왔다더라. 수재라 기대를 했더니 생각보다 빨리 졸업해서 들어왔더라.”
“주원이가.. 은서 소개시켜 달래요?”
“그래.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었다고..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할아버지가 쯧.. 혀를 차셨다. 아린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할아버지.. 그건 그렇고요. 집은요? 은서가 뭐래요?”
“집은 싫대. 아래층으로 간다고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지 않으니까 선이나 봐. 그것도 그 쪽에서 좋다고해야 보는 거지만.”
“치.. 좀 바꾸지..”
“좀 불편하다는 건 알고 있는게야?”
“네. 처음에는 당황했었는데, 친구한테 들으니까 수술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던데요?”
할아버지가 “흠..” 하시며 고개를 조금 기울이셨다.
“선 볼 거예요. 정인호씨랑.”
아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셨다. 아린이 나가자 할아버지는 인상을 찡그리시며 생각에
잠기셨다. 그러다 입가에 미소를 띠셨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테라스로 향했다.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바구니가 올라왔다. 바구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녹음기가 만져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재생버튼을 눌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잘 다녀오셨어요? 저는 일이 끝나는 대로 올게요. 아침부터 아저씨 때문에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이따 봐요.”>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녹음기를 가슴위에 올려놓고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몸을 쭉 펴며 기지
개를 펴고는 손가락을 깍지껴서 뒷머리에 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은서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구니를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품에 안고 있는 바구니에서
딸기향이 올라왔다. 하지만 마음이 심난해서 별로 딸기향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갔다가 갈까 하다가 그녀는 그대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카드를 대고 문을 열자
옥상 정원이 나타났다. 등 뒤로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린 은서가 벤치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벤치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왔어?”
“네.. 오늘 잘 지내셨어요?”
“응. 너는?”
“저도.. 잘 지냈어요.”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어쩌면 그를 아린이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의 앞에 선 은서가 손을 들어 그의 재킷의 깃을 만졌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딸기네?”
“아~. 딸기 좋아해요?”
“응. 좋아해. 먹기 편해서..”
“저도 좋아해요. 사실은 할아버지가 부르셔서 일찍 퇴근해서 할아버지 댁에 갔다 왔거든요. 큰아버지가 들어오시면서 사주신 건데 큰어머니가 주셔서 가져왔어요.”
그러다 은서는 입을 다물었다. 딸기 냄새를 맡을 정도면 오늘 저녁에 먹은 회랑, 고추장이랑 고추냉이 냄새에 매운탕냄새까지 맡을 것 아닌가..
조용히 있는 은서를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회랑 매운탕 먹었네? 창피해? 음식 먹으면 누구나 냄새 나는 거야.”
“....”
“그래서 말 안할 거야?”
“.....”
은서는 입술을 깨물어 더 이상 냄새가 가지 않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 진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위에 올려놓고 다시 끄덕였다. 그는 쿡쿡 웃었다.
“입에서만 냄새 나는 거 아닌데.. 머리카락이랑, 옷에서도 냄새나.. 원래 그런 건데.. 그냥 말 하지?”
은서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간 후 옥상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오지 마세요. 씻고, 딸기도 씻어서 가져갈 테니까 여기에 계세요..” 라고 말하고는 얼른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들어갔다.
“우~ 심한가?”
은서는 옷에서 냄새가 나는지 킁킁거렸지만 입안에서도 같은 냄새가 나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고 양치질도 했다.
머리는 대충 말리고, 검은색레깅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작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손을 깨끗이 씻고, 딸기를 손질해서 투명유리그릇에 2개로 남아서 담았다.
그리고 집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옥상에 가자 그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종종 뛰어가 그 앞에 섰다. 그의 앉은키와 그녀의 선 키가 비슷했다.
“미안해요. 오래 걸렸죠.”
“음.. 샤워하고, 머리까지 감고, 딸기까지 가지고 온 거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에 왔는데?”
“음.. 그런가요?”
그가 손을 들어 풀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단지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것 뿐이데도 은서는 기분이 이상해 졌다. 설레고, 가슴 한쪽 언저리가 묵직해지고, 손끝까지 저릿했다.
“다 안 말리고 밖에 나오면 감기 걸려.”
“괜찮아요. 날씨가 많이 따뜻해 져서..”
은서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릇 하나를 열어 그에게 건네고 자신도 남은 하나를 무릎위에 놓았다.
“아저씨, 딸기 여기 있어요.”
“응..”
그는 손으로 딸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은서도 손가락으로 딸기를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한 입 물자마자 딸기의 향긋한 향과 달콤, 새콤한 맛이 입안으로 펴졌다.
“음... 맛있다..”
“진짜 좋아하나봐?”
“네.. 왜 겨울에도 백화점마트나 대형마트에 가면 하우스딸기가 나오잖아요. 어렸을 때도 그거 냄새 맡고 오고 그랬어요.”
그가 딸기를 입에 넣고 씹다가 웃으며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사서 먹으면 되지, 냄새만 맡았어?”
“예~? 그게 얼마나 비싼데요.. 겨울에 나오는 딸기는 관상용, 냄새용이죠. 그래도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딸기만 좋아해?”
“아니요.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배, 겨울에는 귤이요.”
“계절별로 있네?”
“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 하며 딸기를 먹었다.
“저녁은 잘 먹었어?”
은서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가슴 아래부근이 뻐근한 것 같아 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어디 갔다 왔어요?”
그는 할머니까지 가세한 선보는 일에 대한 것이 떠오르자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응.. 부모님이랑 형네 가족이 들어와서 누님댁에 다녀왔어.”
“아.. 좋으셨겠어요.”
“뭐.. 자주 보는 편이라서. 할머니도 오셨더라고.”
“네..”
은서는 할아버지와 한 약속에 대해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는 밝게 말했다.
“아! 다 먹었다.”
“아쉬워? 미안하네.. 나도 맛있어서 열심히 먹었지..”
“아니요. 같이 먹으니까.. 좋아요.”
은서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으.. 닭살..’
인호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언제 일어났어?”
“한.. 10시?”
“샌드위치 안 상했어? 그거 아침 7시부터 매 달아 놓은 건데?”
“그렇게 일찍 나갔어요? 샌드위치.. 괜찮던데?”
“그래? 혹시 이상하면 약 먹고, 더 이상하면 병원 가.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겠다. 잘 안 상하는 걸로....”
“탈이 날려면 벌써 낫겠죠.. 괜찮아요.”
“알았어..감기 걸리겠다. 들어가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가 손을 그녀의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 은서는 시선을 돌려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거 다 먹어서 이제 안 무거워요. 제가 들면 되요.”
그가 조금 쑥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 잡자구..”
“아.. 그럼 너무 높이 올렸어요..”
은서는 그의 손을 내려 그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감쌌다. 손이 얼마나 큰지 그의 손 안에 쏙 들어갔다.
“참 작다..”
“아저씨 손은 참 크네요.. 남자손이 어떻게 여자보다 더 예뻐요? 희고, 가늘고 길고.. 난 손가락이 컴플렉슨데..”
“왜?”
“작고, 통통해서 친구들이 떡볶이 손가락이라고 놀렸었어요.”
“그래?”
그는 그의 손을 펼쳐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만져 보았다. 간지럽기도 하고, 손끝이 찌릿거리기도 했다.
“그러네.. 작은 떡볶이네.. 맛있겠네?”
그의 말에 은서는 손을 뿌리쳤다. 종종 걸음으로 조금 빨리 걸어 그보다 조금 앞섰다.
“치... 아저씨까지 놀릴 필요는 없잖아요..”
“나 떡볶이 좋아해..”
그가 겅중겅중 걸어 왔다. 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다. 은서는 못이기는 척 하며 그의 손에 잡혔다.
“나도 좋아해요.. 하지만 내 손가락은 놀림감이 아니라구요..”
“미안해..”
“다리는 길어가지구.. 금방 잡혔네..”
“내가 좀 길지.. 정확히 키가 어떻게 돼? 160? 150? 설마... 150도 안 되는 건 아니지?”
“150은 넘거든요?”
“음~. 정확히 말 안해주네? 대충... 나랑 30cm 차이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잘 걸어 다녀? 너무 작아서 굴러다니나?”
“아저씨가 이런 성격인 줄 몰랐어요.”
은서는 자꾸만 놀리는 그에게서 삐진 척하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들어 올려 천천히 옆에 있는 높은 화단 턱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제대로 앉았어?”
“네..”
은서는 그릇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저씨.. 떨어질 것 같아요. 여기 생각보다 높다구요..”
“이 정도면 27cm가 극복이 되나?”
“치.. 자꾸 놀리기나 하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 볼을 잡았다.
‘서.. 설마.. 키스를 하려나? 그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
은서는 두근대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인상을 조금 찡그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크게 들리는데?”
“그랬...네요..”
“나도.. 떨려... 잠시만 가만히 있어 줄래? 잠시만..”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와 이마를 만지고, 눈썹을 양 손 엄지로 쓸었다.
그리고 눈을 만지고, 검지로 코를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마치 그가 입을 맞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운 그의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귀불도 만졌다.
은서는 간지러워 몸을 약간 움찔했다. 목선을 타고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그가 길게 숨을 내 쉬었다.
그녀는 온통 빨개진 얼굴과 이젠 귀에서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활처럼 완벽하게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은서는 숨을 들이마신 채로 멈추었다.
“은서는.. 이렇게 생겼구나. 너무 귀여워서.. 안 되겠는데?”
그의 말에 얼굴의 홍조가 더욱 짙어지는 걸 느끼며 목이 잠겨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하게 나왔다.
“난.. 귀엽지 않아요.”
“아니야. 귀여워. 눈도 예쁘고, 코랑 입은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가 은서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의 머리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 숨소리에 왠지 가슴이 저릿했다. 그는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화단에서 내려 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도착한 현관 앞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왜?”
“지난 3일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겁이 나요.. 너무 행복해서.. 그게 사라질까봐.. 무서워요.”
그가 잡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그녀를 안았다.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을게.”
은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도 팔을 올려 그를 안았다.
“저도요.. 저도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해요.. 거절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잠시 후 그는 포용을 풀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려 손을 올렸던 그 부분에 입술을 눌렀다. 은서는 눈을 꼭 감았다.
“잘 자.”
“아저씨도.. 잘 자요.”
은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몸을 돌려 계단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고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 다리를 가슴으로 끌어 당겨 안았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가 만지던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어제는 행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겁도 났다.
그는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환상같은..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귀엽거나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왠지 그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성급하게 다가오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가 입을 맞출 것 같아 잠시 불안했지만 그는 그저 그녀의 얼굴의
생김새를 마음속에 새기려고 더듬거리며 만진 것 뿐이었다. 그것도 살짝 떨리는 손으로..
오히려 그 떨림이 그를 향한 마음이 더 커지게 했다. 마치 처음 사랑을 해 보는
소년처럼 수줍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던 그의 손길을.. 잊을 수 있을까?
요즘처럼 만나면 바로 사랑하는 세상에서 그는 자신 만큼이나 느리고 더디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행복했다. 역시 사람을 잘 못 본 게 아니라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그는 저렇게 멋지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고, 거기에다가 좋은 사람인데..
그에 비해 자신의 수준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 불안했다. 마음이 심난해졌다.
아린이가 목표를 정하면 그가 누가 되었든 넘어갔다.
‘아저씨도 넘어갈까?’
그녀는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힘들 것 같다. 잠을 자보려고 뒤척이다
새벽 3시에 조용히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두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 무릎위에
턱을 올리고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더욱 빠져드는 자신이 겁이 났다.
“후우~~. 너무 멋있잖아.. 겁나게..”
고개를 돌려 오른쪽 관자놀이를 무릎위에 대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를 너무 깊게 생각하면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박시한 흰 T에 검은 쫄반바지 차림의 은서는 부스스한 머리에 간신히 눈을 뜨고 주방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간밤에도 역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눈 아래 다크서클이 판다처럼 내려왔다.
물을 올려놓고 커피믹스와 더치커피를 놓고 잠깐 고민을 했다. 하지만 더치커피는
카페인 성분이 조금 덜 들어갔는지 잠을 깨워주진 않았다.
“너를 마시고 싶지만.. 살려주라.. 너무 피곤해..”
그가 준 더치커피를 냉장고에 다시 넣고 커피믹스를 2개 꺼내 봉지를 뜯고 머그컵에 쏟았다. 끓은 물을 부어 옆에 있는 젓가락을 하나 들어 슥슥 저어서 한 입 마셨다. 몸을 돌려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어? 바구니다..”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바구니 안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100% 딸기주스와 메이플 시럽과 미니팬케이크가 포장되어 들어있고, 녹음기도 함께였다. 은서는 딸기주스와 팬케이크를 꺼내고 녹음기를 틀었다.
<“잘 잤어?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못 잤을 거라고 생각해. 음... 내가 술에 취해 너의 집에서 자던 날..
기억 안 난다는 거 거짓말이야. 그 기억이라는 것이 너의 집 앞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뿐이지만..
생각이 났어. 너에게 보고 싶다고 말한 거.. 그게 뭐였을 거라고 생각해? 사실은.. 나도 좀 불안해.
지켜보기만 하다가 사귀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네가 보고싶어 질 것 같아서..
영영 시력이 안 돌아와서 너를 못 보면 어쩌나..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이런 나를
좋아해주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후~ 사랑해.. 은서야... 사랑해..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너를.. 사랑합니다.. 힘내요.. 음..
아침부터 커피마시지 말고 이거 먹고 오늘 하루도 잘 하고 와. 기다릴께.”>
은서는 녹음기를 가슴에 안았다.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쓱쓱 닦았다.
“아저씨.. 지금 거기 있죠?”
“울리려고 한건 아닌데..”
바로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리퍼를 신고 위층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가 문을 열고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했다.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나도.. 아저씨.. 사랑해요..”
그가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은서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은서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녀의 등을 살짝 쓸어 보더니 포옹을 풀지 않고 그가 말했다.
“아침부터 이렇게 얇은 차림으로 오면 안 돼.”
순간 은서는 자신이 브래지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하게 그의 품에서 떨어져 가슴 앞에서 X자로 팔을 교차했다. 그가 못 본다고는 하지만 이런 차림은 곤란했다.
“아.. 죄송해요.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아침 같이 먹어요.”
은서가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와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슴에 붕대를 감고 복대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 티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고 바구니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그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저 다시 왔어요.”
“어서 와.”
그를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컵을 꺼내 딸기 주스를 2개로 나누어 따랐다. 그리고 접시를 꺼내 미니 팬케이크를 담았다. 메이플 시럽도 뿌렸다. 식탁에 올려놓으니 그가 자리에 앉았다.
“난 괜찮아. 어서 먹어. 원래 아침 안 먹거든.”
“혼자 먹기 좀 그래요. 같이 먹어요.”
이제 보니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팬케이크를 포크로 먹기 좋게 자른 다음 들고 그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입에 넣어주자니 너무 닭살스럽고, 그의 손에 포크를 잡혀 주자니 그에게 상처를 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조용히 있는 그녀의 상태를 인지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저기.. 아~.. 하세요..”
은서는 닭살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도 쑥스러운지 약간 미소를 짓더니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향해 쓰다듬으며 손을 옮겼다.
단순한 그의 행동에는 언제까지고 면역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은서는 손끝까지 저릿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감싸듯 잡고는 자신의 입을 향해 포크를 가져가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고마워..”
은서도 포크로 팬케이크를 찍어 입에 넣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팬케이크는
자신이 접시를 찾아내어 손으로 집어 먹었다. 시럽이 뭍은 손가락 끝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입안에 팬케이크는 없어졌지만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그의 눈가의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옅어진 상처였지만 정말 많이 아팠을 것 같았다. 그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시선이 너무 뜨거운데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너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고.. 그러니 하나밖에 없지..”
“많이.. 아팠어요?”
“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통제도 맞고 있었고, 제 정신이 아니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래도 아팠지. 그리고 붕대를 풀었는데 마치 어두운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게 보였을 때는.. 무서웠고..”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볼을 타고 흐를 것 같아 얼른 딸기 주스를 마시며 눈물을 함께 삼켰다.
“8년 전 일이야. 왜 울고 그래.”
“안.. 울어요.. 8년 전에 사고 난거에요?”
“응. 일을 마치고 늦게 집으로 가는데 반대편에서 중앙선을 넘은 차랑 정면 충돌했지.
만취 차량이었고.. 뭐 흔한 케이스였어. 특별한 것도 없었고.. 유리파편이
눈에 가득 들어가 있었다고 했어. 그래도 나처럼 완전히 시력을 잃지 않은 것도
천운이었지. 대부분 완전히 잃어버리거든.”
“그 때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도 안 돼. 그럼 난 퇴원하자마자 구속이라구..”
“왜요?”
“내가 27살, 너는 17살. 겨우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애를..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범죄야.”
“아.. 그치만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해요.."
“17살일 때 너는 어떻게 지냈어?”
“저는 뭐.. 평범하게 지냈어요. 공부도 조금 하고, 친구들이랑 떡볶이도 먹고..”
“남자 친구는 안 사귀고?”
“네.. 안 사귀고요.”
그가 손을 내밀자 은서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가 양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래.. 17세에 교복을 입고 있는 네 모습이 궁금하기는 하다.”
“아마 안 쳐다보셨을 걸요?”
“왜?”
“말씀 드렸잖아요. 예쁘지 않다고...”
“뭐.. 그래도 그 모습 역시 궁금해. 어쩌면 나는 너의 모든 모습을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은서가 그의 말에 다시 짠한 감동을 느끼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얼굴만 안 예쁜 게 아니라 착한 편도 아니었어요.”
“그래?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착한데..”
“속으로 얼마나 나쁜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아린이한테 악담도 많이 했어요.”
“그 정도는 누구나 해. 하고도 잘 못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지. 은서는 주위 사람들 다~ 신경쓰느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이잖아.”
“부디 계속 그렇게 오해해 주세요.”
은서는 웃으며 말하고는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러 싱크대로 갔다. 간단히 끝낸 후 손의 물기를 털며 닦을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그냥 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이젠 정말 준비해서 출근해야겠어요. 아저씨랑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라서 큰일이네요.”
그가 그녀 뒤에 와서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은서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팔에 살짝 올렸다. 그리고는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금방 다녀 올께요. 아저씨는 오늘 뭐해요?”
“글쎄.. 쇼핑이나 다녀올까 하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요. 없어요.. 잘 다녀와요.”
“정말 없어?”
“음.. 아저씨요..”
그는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를 했다.
“정말 갈께요..”
은서는 그의 팔을 다시 한 번 토닥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닫힌 문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왔다.
“이렇게 숨을 제대로 못 쉬면.. 분명 건강에 문제가 생길 거야.. 후~”
그녀가 없는 그의 공간에 그녀의 향기로 가득했다. 소파에 누운 그가 이마 위에 팔을 올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가슴을 떠올렸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오늘은 티셔츠 안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배에 닿자 그는 당황해서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몸을 뗀 그녀만큼 충격을 받았다.
준혁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런 일이 또 있었나보다..”
“응. 그런 것 같았어. 뭐 얼굴도 그 정도면 예쁜 편이고, 작고 귀여운 스타일인 것 같은데.. 가슴은 뽕이었나봐. 처음 봤을 때는 엄청 글래머같더니 그 후로는 납작한 것 같거든.”
“변태냐?”
“보이는 걸 어떻게 하냐?”
“좋겠다고 인마..”
사실은 준혁의 말과 반대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 그의 턱에 근육이 긴장함으로 단단해졌다. 그가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첫댓글 이 커플 청정 무공해 커플이네요.... 온 세상에 이런 커플만 있으면 범죄 없는 세계가 돼겠어요~~
ㅋㅋ 그런가요..? 제 생각엔 우열+재인 커플보다 나중에 조금 더 야하답니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7.10 17:47
괜찮아요. 지금은 밖이라서요. . 이따 수정할께요. . ^^
작가님~~~ 제가 왜 은서를 더 좋아하는지
알았어요...........
저랑 좀 비슷해요.... ㅜㅡㅠㅋ
음..... 가슴은 안 크지만...
그리고 윗집에 저리 멋진 아저씨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만 빼면.... ㅋㅋ
잘 읽었어용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
서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 너무 좋아요~
아..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