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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말 한마디....외 ♬♩
양영자 선교사 의 서재는 ‘창조적 발전소’ 이다.
저는 서재를 창조적 발전소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희 남편은 몽골에서 성경번역 사역을 하고 있는데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계시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해할 수 있잖아요. 이처럼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이 축적되고 생각이나 관점이 변화되면서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책의 가치를 알고선 세계 명작동화 애니메이션을 몽골어로 번역한 책 1만권을 가져가 몽골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어요.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몽골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열악하고 고되지만 결코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해요. 환경은 열악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에서 구원을 보는 일이 보람되고 기쁘고 정말 행복한 것 같아요.
‘탁구보다 그림’이 좋았던 유년시절
탁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건 10살때였어요. 한 번은 초등학교 시절 산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이 보니까 다른 친구들은 풍경화 같은 걸 그리고 있는데 저는 친구들이 어떻게 그리고 있나 막 왔다갔다 하고 있더래요. 활동적인 저를 보신 선생님이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셔서 추천해주신 운동이 탁구였어요. 제가 원래 화실을 다니면서 미술 공부를 했었거든요. 제 고향이 전북 익산인데 제가 그린 그림이 서울시민회관에서 특상을 받을 정도로 잘 그렸던 모양이예요. 지금 그리라고 하면 하나도 못 그리는데(웃음). 어느날 저랑 라이벌이었던 옆집 친구는 상을 받았는데 저는 못 받게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탁구를 안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저희 어머니에게 졸라서 다시 저를 탁구부에 끌고 가셨어요. 그렇다고 억지로 탁구를 치거나 그런 건 아니였고요.
‘녹색 테이블의 여왕’으로 불리다
강한 체력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에 비해선 괜찮았던 거 같아요. 일단은 승부근성이 강해서 지면 막 못 견디는 그런 스타일이었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탁구를 치다보니 중학교 때쯤 꿈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 국가대표가 되어서 훌륭한 탁구선수가 되보고 싶다.’ 매일 탁구 일기를 썼는데 일기를 보면 ‘도에서 1등, 전국대회 1등’ 목표가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중학생 시절 당시 전국 탁구 중등부 경기, 중, 고등부 경기가 있었는데 중등부 경기에서도 1등하고, 중, 고등부 경기에서도 1등을 해서 2관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드문데 그 시합을 계기로 중학생 때부터 국가 대표로 선발이 되었죠. 하지만 ‘테니스엘보우’라는 팔꿈치의 심한 통증으로 진통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요. 팔을 들지도, 내리지도 못할 정도 였거든요. 의사 선생님이 탁구 그만두면 괜찮아질거라고 하시는데 차마 국가대표의 꿈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쉬운거예요. 어린 나이에 진통주사를 맞으면서 경기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그렇게 진통제를 맞으면서 국가대표도 되고 세계선수권 대회도 출전하게 되었고요. 그러기를 6년, 진통주사의 효과는 계속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약효가 듣질 않더라고요. 첫번째 세계선수권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87년 당시 세계 랭킹 50위 안에도 못 들었던 제가 세계 랭킹 1위를 이기고 결승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긴 했지만 세계 랭킹2위를 차지하게 된 거예요. 당시 탁구로는 중국을 이기는 나라가 없었으니까 매스컴에서는 ‘중국킬러가 나타났다’라고 띄워주기도 했죠.
고통 중에 기도로 붙잡은 하나님
근데 문제는 팔이었어요. 너무 아픈데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아는 분께서 저한테 기도원을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기도원에 가면 안수를 해주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 아픈 선수들 몇 명 데리고 같이 갔어요.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도원에 가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어요.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피흘려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분을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내가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구원의 복음을 듣는데 회개의 눈물이 어찌나 나던지… 그 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을 하게 되었어요. 그 분이 안수기도 할 때 제가 6년동안 주사를 맞으면서 고통을 견뎌왔던 팔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아프지가 않은 거예요. 그 때부터 다시 운동을 할 수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기적적으로 고쳐주셨구나’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오게 하셨죠.
구원의 은혜만 생각해도 너무 감격스러워 평생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서 살수 있을까 할 정도인데 팔 고침까지 표적으로 보여주시니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신앙이 어리다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신학교에 들어간 전도사, 목사만 하는 줄 알았어요. 당시 옥한흠 목사님과 다른 부목사님들도 탁구 자주 치시고 그랬었는데 전 이제 탁구를 그만두고 전도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목사님께 상담을 받았죠.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신학교만 들어간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영광을 돌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 일로 저의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했어요. 훌륭한 탁구선수로 정말 명예로운 국가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이제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지게 된거죠.
그런데 1년 후 84년(당시 20세)에 또다시 간염으로 쓰러지고 말았어요. 운동을 하루 이틀 무리해서 하면 2-3일 쉬어야 할 정도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간염은 잘 쉬어주어야 하는데 운동선수가 잘 쉴수가 있나요. 그러다 보니 성적도 떨어지고 국제대회 나가서 지고 오니까, 옛날에 잘하고 왔을 땐 매스컴에서 막 띄워주더니 이제는 노장이 됐다는 둥 이러면서 언론이 확 바뀌더라고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간염 때문에 운동을 내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혼란스러웠죠. 아프고 탁구도 잘 못하니까 매스컴에서도 비난하고 스스로도 사기가 뚝 떨어지더라고요. 그 당시 믿음이 없었다면 정말 포기했을거 같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켓을 움켜쥐다
잠언 24장 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하나님께선 제가 주저 앉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어요. 다시 내가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으로 일어서긴 했는데 여전히 간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렵게 시작을 했죠. 그러던 중 떠오르는 신인 탁구 유망주가 있었어요. 바로 현정화 였죠. 저보다 5살 어린데 그 선수가 주목받는 신인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저는 서서히 밀려나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던 중 둘이 최강전을 붙게 된 거예요. 다들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현정화가 100% 이길 것이라고 했는데 예상외로 제가 이기고 최강의 자리를 다시 지키게 됐어요. 정말 모든 사람이 예상치 못했고 저 또한 진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치뤘던 경기였어요. 그렇게 현정화 선수와 제가 국가대표의 조를 이루어서 그 뒤부터 단짝으로 시합을 하게 됐죠. 아시안게임 같은 경우는 남, 녀가 중국을 이기고 모두 우승을 했는데 여전히 간염 때문에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병원에 50일을 입원해 있었어요. 그런 연약함 속에서도 저는 은퇴를 할 때까지 매시간 마다 하나님을 붙들고 시합을 해야만 했던거예요. 만약 제가 정말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남들처럼 준비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애썼기 때문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 맨날 비실비실 남들보다 연습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딴 금메달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할 말이 없도록 만드신 선수시절이었어요.
15년의 선수시절 중 8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을 끝내고 89년에 은퇴를 하게 되었죠. 제가 늘 생각했던 건 명예로운 은퇴를 하자는 거였어요. 사실 금메달 땄기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라 몸이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88년 올림픽을 마치고 은퇴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명예로운 은퇴, 그 후
은퇴를 하고 제일모직 팀에서 트레이너 생활하면서 후배양성의 길에 들어섰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족감이 없고 기쁨이 없었어요.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고, 이 일의 목표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또 은퇴하고서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바쁘게 살다 보니 교회에서 간증 요청이나 봉사에 대한 부분을 많이 등한시 하게 되었어요. 점점 내 영혼이 곤고하고 메말라져 가는데 그 땐 왜 그런지 몰랐어요. 저희 청년 시절은 서로 교제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없었어요. 대학부, 청년부에 있기도 했지만 거의 예배 끝나면 집에 돌아오고 그랬어요. 그 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십자가의 세로 막대기만 있고 가로 막대기는 없었던 거죠. 그런데 세로만 있고 가로가 없다보니 어느 순간 넘어지게 되더라고요.
은퇴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우환이 겹치면서 우울증까지 찾아왔어요. 이게 한달 두달만에 나을 증상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심한 우울증이었어요. 땅 깊은 곳이 어디인가를 체험할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거 같고, 마치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 같았어요. 한 번은 집사님들이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강화도에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보러가자고 억지로 끌고 가셨어요. 차 안에서도 누가 나를 본다고 외투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 강화도까지 가기도 했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회복이 잘 안되니까 주변에서 절 돌봐주시던 분들도 지치시는 거예요. 제 자신도 저를 포기할 정도 였으니 주변분들은 오죽 하셨겠어요. 그렇게 허무한 2년을 보냈어요.
탁구여왕에서 몽골 선교사로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던 시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정리되고 나에겐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결론이 섰어요. 그리고 지금 남편을 만났는데 당시 구로공단에 있던 사랑의교회 센터에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어요. 형제를 처음 만난 건 자카르타였거든요. 남편은 취재차 왔고, 저는 우울증 때문에 아는 집사님이 자카르타에 한 번 오라고 하셔서 갔죠. 취재하러 갔던 무역회사 장로님이 인터뷰 끝나고 나서 남편이 사랑의교회 다니는 걸 알고, 우연히 저와 함께 점심약속한 자리에 데리고 나오신 거예요. 자세히 보니 청년부에서 안면이 있는 청년이었어요. 제가 되게 안 좋아하는 형제였어요. 물론 말도 안해봤지만(웃음). 그 당시에 찬양할 때 손을 들고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맨날 앞자리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손을 드는거예요. 왠지 ‘척’하는 신앙생활인 것 같아 보여서 별로 였거든요.(웃음) 이후 저를 초대한 집사님이 중매역할을 해주셔서 서울에 돌아가서도 연락하고 결국 교제하게 되었죠. 교제를 하면서도 제가 계속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가 새벽기도 다니면서, QT 하면서 묵상한 말씀을 나누는 것이 데이트였어요. 김양재 집사님(현 목사님)과 함께 QT, 말씀공부를 하면서 말씀이 제 속에 들어가니까 이제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결혼도 하게 되었고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말씀을 통해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죠. 제가 우울증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렸던 찬양이 있었는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었거든요. 다시 내가 우울증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서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어요.<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남편은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어요. 저도 QT를 하면 할수록, 말씀을 보면 볼수록 나가서 선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신학을 먼저 공부했죠. 이후 선교 훈련 받고 97년도에 선교지를 갔어요. 6년 동안 몽골에 있었고, 2004년에 내몽골로 옮겼어요. 몽골에서 남편은 성경번역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데 올해3월이면 신구약이 완성이 돼요. 4월 초쯤 출판을 하려고 해요. 남편은 성경번역을 하고, 저는 탁구 사역을 주로 하고 있어요. 아이들, 주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아요. 여기저기 가면 비자받기가 어려운데 탁구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비자를 받고 남편도 비자 받기가 수월해서 풀타임 사역으로 집중이 가능해요. 좋은 소식이 들려와요. 탁구를 가르친 아이들이 전도를 해서 교회로 데려오기도 하고, 조금씩 저희 사역에도 열매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커요.
추천하고픈 책
선교를 준비하면서 읽게 된 책이 있는데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평양 교수 김현식 씨가 예일대학의 초빙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편지를 담은 글이예요. 이 분은 20년간 김일성 처가 자녀들의 개인 과외교사로 활동하실만큼 탁월한 교육자이셨어요. 남과 북에서 50여년 세월을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오셨는데 이 책을 쓰시면서 얼마나 많이 우셨는지, 본인이 불러주는 원고를 타이핑하는 분도 자꾸 우는 바람에 타이핑을 제대로 하지 못하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아내, 자녀, 손자 등을 북한에 두고 남한으로 망명하게 된 이야기부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북한 사회와 교육 이야기까지 이 책을 읽고 저는 북한 선교에 눈을 뜨게 됐어요. 마지막에는 이 책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직접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글도 있어요. 참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라 한 번 꼭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추천 드려요.
그리고 ‘완전한 순종’이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도 정말 강추예요. 책의 주인공은 1924년 파리 올림픽의 전설적인 육상 영웅 에릭 리들이예요. 저도 스포츠인 출신 선교사여서인지 호감이 가더라고요. 이 분은 중국에서 스코트랜드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셨어요. 중국 선교사의 자녀로 먼 거리를 걷고 달리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육상 재능을 보이셨다고 해요. 대학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육상선수 활동을 시작했고, 전 영국 단거리 육상대회를 모조리 휩쓸었던 대단한 분이셨어요. 이 분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아마 ‘주일에는 안뜁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예요. 주일에 경기가 있었던 주종목인 100m 결승을 포기하고 400m에서 기적적인 우승을 하셨지요. 이후 올림픽 경기로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에릭 리들은 하나님과의 헌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광을 버리고 24세 젊은 나이에 중국 선교를 떠나요. 그는 주일은 자기를 위한 날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설교하신 위대한 신앙인이셨어요.
이 책을 읽으며 에릭 리들의 삶이 내 지난 삶의 영상과 겹쳐지는 듯했다. 서울 올림픽에서 중국을 힘겹게 이겼던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 후 내 인생길은 탄탄대로를 걸어가는 듯했으나 점점 고난과 시련의 깊은 골짜기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절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들어 올려 선교사의 길을 걷게 하셨다. 비바람 몰아치는 몽골 지역 선교를 통해 이제야 나는 하나님의 깊은 오묘하심과 섭리를 알 것만 같다. 에릭 리들이 수용소 시절 새벽마다 커튼을 치고 호롱불 속에서 묵상했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가슴이 찡하게 저려 왔다. 그의 고백처럼,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참된 길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소중한 책이다 – 양영자, 책 추천사 중
故 옥 목사님께서도 추천해주신 제 남편의 책 ‘은혜로 새로워진 세상’은 복음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 능력에 대해 쓴 책이예요. 크리스천이나 넌 크리스천도 함께 읽어볼 수 있는 책이거든요. 이 책은 일반인에게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 공정히 평가할 수 있는 예를 제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넓은 시야와 깊은 확신을 갖도록 돕기위해 쓰여졌어요. 사회의 변화를 꿈꾼다면 이 책의 메시지에서 영감을 얻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류 역사상 기독교의 복음만큼 선한 영향력을 미친 것은 없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인류 역사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함과 동시에, 특별히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크리스천들이 역사 속에 나타난 복음의 찬란한 능력에 대해서 더욱 확신과 보다 넓은 안목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에 또 다른 복음의 능력과 위대함을 더하는 데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선교사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준비하는게 참 중요한데 예를 들면 언어도 기본적으로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다음에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분은 바이블 스터디라도 참여해서 공부하면 좋겠어요. 선교지에 가면 본인이 영성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보람이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신학 공부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체계적인 바이블 스터디를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또 실용적인 부분들의 준비로는 선교지에서 전기라도 하나 못 고치면 혹은 못이라도 하나 못 박으면 곤란할 때가 있어요. 선교지에는 당장 컴퓨터가 고장나면 고칠 곳도 없고, 한 번은 세탁기가 고장났는데 보름 정도 못 써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섬길 수 있는 기본자세가 되어있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요. 자기의 언어와 사고, 문화를 내려놓고 현지인의 언어와 사고, 문화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문화충격도 굉장히 힘들고요. 단기선교를 통해 경험하는 것도 좋고, 다른 문화를 많이 경험해봤으면 좋겠어요.기도제목
내몽골 성경번역사역이 끝나면서 철수를 하고 안식년을 지내면서 그 다음 걸음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외몽골에는 2000년도 성경이 번역이 되었는데 개정이 필요하거든요. 혹시 외몽고 성경번역 사역에 남편을 필요로 해서 초청을 한다면 안식년 끝나고 들어갈 생각도 하고 있어요. 혹은 국내에서 선교 동원하는 사역에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남편 같은 경우는 성경번역 컨설턴트 준비를 하고 있고, 성경번역에 관한 강의와 후배양성 지도에도 뜻을 품고 있고요. 늘 기도제목 중 하나는 시아버님의 구원이예요. 2년전에 시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데 방광암으로 14번을 수술하셨어요. 아직 시아버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데 굉장히 완고하신 분이세요. 지난 주에 처음으로 교회를 가시긴 했는데 이번 안식년의 목표가 시아버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아버님의 영혼을 놓고 기도만 했지 어떻게 해드린게 없었는데 이번 안식년에 꼭 예수님을 영접하셨으면 좋겠어요. 같이 기도해주시길 부탁 드려요.- 인터뷰 진행&정리 : 이일권 작가
- 사진.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출처-갓피아 컴- 도서관 내 마음의 서재-}
-♬위로의 말 한마디...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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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영자 선교사님의 사역에 고개 숙여집니다.. 이후의 계획하고 기도 하시는 일들 다 이루어 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역하는 모든 사람은 다 아름답습니다...기도하는 모든 일이 주 안에서 열매맺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