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이상으로 절친했던 김유신과 김춘추. 그런데 그들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은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입니다. 당시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신라사회에서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문희가 결혼도 하기 전에 김춘추의 아이를 갖자 김유신은 문희를 죽이려고 마당 가운데 불을 질렀는데 마침 그 날이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길을 본 여왕이 자초지정을 들은 뒤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명하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김유신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유신이 김춘추 집안과 결합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춘추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신라 25대왕인 진지왕의 아들이 김용춘이고 그의 아들이 김춘추입니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로 왕족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왕은 즉위 4년만에 폐위되고 맙니다. 삼국사기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4년만에 죽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와 다르게 나타납니다. 진지왕은 정사를 어지럽게 하고 음탕한 짓을 해 왕위에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진골귀족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행위를 진지왕이 했기 때문에 진골귀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해서 왕위를 쫓겨난 걸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김춘추가문은 왕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왕족이었지만 왕이 될 수 없었던 김용춘과, 패망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김서현. 이것이 바로 두 가문이 손을 잡은 이유입니다. 또 김춘추 계열로 볼 때는 자기가 왕족의 정통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의 파트너로서 구한 것이 가야계 김서현. 그러니까 서로 약자끼리 비 정통끼리의 하나의 정략적 접근을 한 것이 김서현과 김용춘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뤄졌으며 김유신이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을 도모한 것은 두 가문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61살이 된 김유신이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낳은 딸과 결혼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입니다.
이렇게 결속된 김유신과 김춘추 두 가문은, 서서히 신라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전쟁터에서 세운 공적이었습니다. 김유신이 전쟁에 참여한 제일 처음의 기록은 낭비성 전투입니다. 이때가 진평왕 51년인 629년. 김유신의 나이 서른다섯이 되던 해였습니다.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던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30대였던 김유신이 출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이후에도 김유신의 전쟁터에서의 활약은 화려한데 서른다섯 살 이후 무수히 많은 전쟁에 참여했던 김유신. 그는 필사적으로 싸웠고 그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쟁에서의 승리로 세력을 키워가던 김유신에게 드디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있었던 상대등 비담의 난입니다. 당시 상대등은 귀족세력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여주불능선리". 즉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담이 난을 일으킨 건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이미 16년이 지난 뒤였고 비담이 상대등이 된 지도 1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난을 일으킨 이유는 진덕여왕 때문이었습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 두 번째 여왕인데 이 진덕여왕의 즉위과정에 비담이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선덕여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에게 작은 아버지가 되는 국반갈문왕의 딸인 승만이 후계자로 떠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진덕여왕입니다. 이때 진덕여왕을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김유신과 김춘추입니다. 아직까지는 명분상으로나 반대세력들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부족함으로 시간을 벌기위해 다시 여왕을 왕위에 내세웠던 것입니다. 진덕을 왕위에 내세움으로써 여왕제위 기간 동안 체제를 정비하고 기반을 갖추어서 차기의 왕위 계승권을 김춘추가 이미 이때부터 노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진덕을 밀고 진덕의 즉위를 기정사실화 하자 당연히 상대등으로 차기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비담이 거기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겁니다.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것도 역시 김유신과 김춘추. 김유신이 이끄는 군대는 왕성인 월성에 주둔하였고 비담을 이끄는 반군은 왕궁으로부터 불과 10여리 떨어져있는 명활성에 주둔하게 됩니다. 그런데 난이 발생하고 10일만에 사건이 터집니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비담은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고 소문을 냅니다. 이때 김유신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이용한 것이 연이었습니다. 연 끝에 불을 붙여 다시 하늘로 올려 별처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 반군의 사기를 꺾고 난을 진압하게 됩니다.
비담의 난이 나던 그 해, 선덕여왕이 사망하자 곧바로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로써 김유신과 김춘추가 실권을 잡게됩니다. 그리고 즉위 8년만에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입니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52세 이었으며 김유신의 나이는 60이었습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 드디어 김유신도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신라사회에서 김유신의 위치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경주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의 능입니다. 신라의 여느 왕릉에 뒤지지 않는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흥덕왕 때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봉해집니다. 왕이 아니면서 대왕의 존호를 받은 건 김유신이 유일하였습니다.
나이 예순에 김유신은 평생의 과업이었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김유신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김유신의 아들 원술에 대한 이야깁니다.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나갔다가 패배하고 돌아오자 원술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김유신이 아들 원술에게 한 말이 삼국사기에 남아있습니다.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져버렸으니 마땅히 죽어야한다." 다행히 왕의 만류로 아들 원술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지만, 김유신은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결국 원술은 집을 나와 산 속에 숨어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김유신이 일흔아홉의 나이로 죽자 원술은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어머니 지소부인마저 아들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시 어머니 지소부인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원술은 이미 선군(김유신)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노릇을 하겠는가." 끝내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원술은 산 속을 떠돌다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