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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차 한 잔의 즐거운 환상
오강석
시인, 사진작가
이미지로 보는 시
지난 6월 전북예술회관에서 ‘들어라 전라북도 산천은 노래다’라는 시화전이 열렸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 이 전시는 전북의 산천을 노래한 시 150편에 이호영 서예가가 글씨와 그림을 그려 전시한 것. 1, 2층 전시실을 모두 사용한 꽤 큰 규모였다. 화폭의 널찍한 안방을 차지한 그림에 비해 작품 속의 시는 글씨가 너무 작아 자신의 작품을 읽기도 어려웠다.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에게 글씨가 너무 작다고 불평했더니 화가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이미지로 보세요.”
시를 이미지로 보기 위해서는 문자의 의미가 해체되어 조형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전시된 작품 속의 문자와 그림들은 고집스레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 화가는 적어도 시와 그림의 협업을 의식하고 작품을 제작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유로 전시장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의미전달 체계의 구조와 변환에 대한 짧은 명상을 했었다. 그 단상을 독자들과 함께 되새겨보고자 한다.
이미지와 문자의 염기서열
문자와 이미지의 협업은 일찍이 중국에서 시작된 사군자가 효시이다. 사군자의 문자와 이미지는 단일 전달체계의 보완적 관계라는 점에서 개별적 전달체계를 유지하는 동시대 이집트 벽화와 형태적으로 구분된다. 이미지와 문자는 기능적으로 보면 이란성 쌍둥이에 해당한다. 둘은 DNA는 비슷하지만 염기서열이 서로 다른 것이다.
전통적 사군자의 틀을 깬 것은 추사의 ‘불이선란도’였다. ‘불이선란도’는 이미지와 문자 그리고 낙관들이 용해되어 이미지화한 것으로 각 분야들이 독자적인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자추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의 문자는 상징적 의미 도형이며, 시어詩語는 추상이미지를 형태이미지로 전환시켜 문자로 규범화하는 작업이다. 반면에 문자추상은 문자의 고유한 의미의 전부 또는 일부가 해체되면서 이미지 전달체계로 전환한 복합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산천은 노래다’의 작품이 위의 두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자와 이미지가 독자적으로 기능하며 조화롭게 배치된 것을 우리는 ‘시화전’이라고 부른다.
문자와 이미지의 다른 유형의 만남을 살펴보자.
전위음악가로 명성을 얻어가다 돌연 비디오아티스트가 된 백남준. 소설이랑 시 쓰고 그림도 그리는 이외수 소설가. 노래하다 그림도 그리는 조영남 가수. 시 쓰다 그림 그리는 김병휴 시인 등 쓰고 그리거나, 그리고 쓰는 작가들의 작품은 확실히 전통적 장르 규법에 속한다. 거기에 ‘다도’를 겸한 이일청 화백의 예술세계에서 차와 문자와 이미지가 조우하는 현장을 들여다보려 한다.
서해대학교에서 총장서리를 마치고 퇴직한 이 화백은 시골집에 화실을 마련한 뒤 크게 놀랐다. 자세히 보니 들꽃이며 풀잎 하나, 옥수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도 예전에 그렸던 모습이 아니었던 것. 그는 자연에 심취해 하루의 대부분을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그러나 이 화백은 오래지 않아 새로운 시련에 봉착했다. 텃밭의 옥수수 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이나 자주 찾는 섬진강의 적막감을 그림으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문이다. 그는 무형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시들은 시 이전에 심상의 이미지를 문자로 환치시킨 그림이다. 잡힐 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상이 아쉽기만 했던 이 화백은 오래 전에 술을 끊은 터여서 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전부터 차를 즐겨 마셨지만 더욱 친밀해졌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림의 모티브를 얻기 위해 시를 쓰고,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해 차를 마신다. 그에게 차는 예술적 표현의 도구이자 예술 그 자체이다. 그렇게 그는 시인보다 더 시를 열심히 쓰는 화가가 되었다.
해가 뜨고 지고
세월도 꽃처럼 피고 집니다.
섬진따라
봄
여름
가을
오직 사방은 겨울입니다.
오가는 이 없는
사방은 고요합니다.
날은 또 밝고 지고
강같은
지금은 오직 적막입니다.
- 이일청 〈섬진강Ⅱ 전문〉
그림과 시와 차의 문제적 협업
그의 개인전 도록 한 쪽을 다 차지하고 들어앉은 시들은 옆의 그림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의 그림은 시골집 뜨락의 옥수수를 스쳐가는 바람이고, 시는 섬진강의 적막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시와 그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차’가 등장한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이미지를 시로 쓰고, 시상을 그리기 위해 차를 마신다는 얘기이다. 그는 “차가 혈류를 순환하며 일상의 찌꺼기들을 순치시켜 명징한 사색의 길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개별 요소의 관계가 동일시되는 그의 작업에서 셋의 진리 집합의 상관관계가 필요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림은 시일 수 있다. 동시에 시는 그림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 인식의 한계라고 판단된다. 이 화백의 경우, 차를 그림이나 시의 자리에 놓아도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 화백은 이를 일반적이진 않지만 다수의 차 애호가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차가 없이는 시도 그림도 되지 않는 경지이다. 시와 그림이 차와의 협업(collaboration)으로 창출된다는 파격적인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뒤샹(Duchamp, Marcel)이 미술전람회에 〈변기〉를 출품했을 때도, 촛불이 만드는 그림자가 사진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도 ‘낯설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부정하는 견해가 절대 다수였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주장의 보조장치로 낯설지만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다.
미당시문학축제에 갔다가 미당시문학관 현관에 ‘디카시 공모전’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시의 합성어이면서 동시에 축약된 단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영상)과 문자를 함께 표현한 시를 말한다. 기존의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창작물로 결합한 멀티(multi)언어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난 세기 문화적 이변의 하나로 꼽히는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 ‘두뇌스포츠’라는 개념을 소개하겠다. 전통적 관념의 스포츠는 신체운동, 경쟁성, 규칙성 등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키고 유희성, 공정성, 참여성이 더해진 신체활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이라는 스포츠 제전에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45cm×42cm의 공간에 바둑알을 옮겨놓는 ‘생각하는’ 신체활동을 스포츠로 본 것이다. 2009년 2월 대한바둑협회가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가 되고, 바둑은 대한민국의 전국체육대회와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정식종목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둑과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단전호흡이라는 신체활동은 스포츠인가? 숨쉬기일 뿐인가? 바둑과 유사한 두뇌활동을 필요로 하는 장기, 체스, 고스톱도 두뇌스포츠인가? 아니라면 이들의 두뇌활동은 바둑의 두뇌활동과 어떻게 다른가? 명징한 시상을 얻기 위해 차를 마시며 시를 쓰는 것은 두뇌스포츠인가? 예술행위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고스톱이 두뇌스포츠인지 여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차의 경우만 숙고해보자.
‘차’ 또는 ‘차를 마신 뒤의 효과’를 협업으로 인식하는 이 화백의 예술활동은 1970년대에 출현하여 21세기 들어 융합형 예술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하이브리드 아트(hybrid art)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하이브리드 아트는 첨단 미디어를 다양한 인문학, 자연과학적 요소와 접목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 또는 형태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 코너에서 언젠가 문학과 과학의 협업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문학과 과학의 일촌맺기가 필요하다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때는 ‘차’가 예술의 영역을 넘볼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사실 필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 ‘다도’는 스님이나 산속의 숨은 기인들이 닦는 구도행위로 치부했었다.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의 차사랑 일화를 귀 아프게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꽃차의 일인자라는 이만우 동리문화사업회 이사장의 안내로 ‘도리화꽃차’라는 차모임의 황정민 회원이 해당화차 잔에 찻물을 붓는 것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더운 물을 붓자 찻잔 속에서 해당화가 피어나는 게 아닌가. 오래 갈무리해온 전신의 진기를 핑크빛으로 서서히 풀어내는 꽃잎의 은은한 향과 담백한 맛을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명징한 시상이 떠오르고, 부드러운 터치로 다실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영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용트림했다. 건축학과 심리학을 미술에 차용하거나, 캔버스와 붓 대신 컴퓨터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세상에 살다가 잠시 탈속한 사고 영역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건 ‘차’의 실체를 실감하게 된 때문이다. 그동안 투썸플레이스나 스위트번스에서 마신 ‘아메리카노’와 기능적으로 확연히 다른 ‘차’의 가능성을 보았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둑알을 놓을 자리를 결정하는 ‘생각’이라는 신체활동이 스포츠가 될 수 있다면 시상의 구상, 그림의 색과 선의 결정, 양자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생각’의 시나 그림과의 이종교배 또는 콜라보레이션은 예술로 가능하고도 남으리라.
문화의 수용 또는 충돌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문화충돌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인류는 세계 각국의 이질적인 문화를 여과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국가와 민족의 고유문화들은 교류하고 때로는 충돌하거나 융복합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번세기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예측불가능한 문화적 변화를 생각하면 인류는 아직 문화충돌 시대의 도입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는 얼마나 빨리 변화하고 있는가.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25만 년 전이지만 음성언어를 사용한 것은 3만여 년 전이고, 중국 은나라에서 갑골문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00여 년 전의 일이다. 신문이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시대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문자가 지배계급이나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어서 중세까지도 대부분 문맹이었다. 이에 비추어 인류가 20세기에 이루어놓은 변화는 가히 ‘새로운 시대’라 불릴 만하다. 1904년에 라디오가 발명된 것을 기점으로 산정하면 텔레비전이라는 음성, 문자, 영상언어를 융합한 다기능 매체가 발명되고,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가 발명, 보급되는 데 소요된 기간은 110여 년에 불과했다. 세계는 우리 무두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바뀌고 있으며, 현대 인류는 지구촌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정보를 거의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이는 대중매체가 세계 각국에 급속히 보급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1970년대만 해도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최고의 인터넷강국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노인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기본적인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가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는가? 핸드폰이다. 핸드폰을 사용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는 과정에서 한글과 숫자를 배우거나 상호 정보교환을 통해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대 인류는 새로운 소통수단을 속속 발명해내고 있지만 핸드폰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융복합매체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지구촌 대부분의 인류는 지금까지 발명된 모든 매체와의 소통수단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보의 홍수와 매체의 급속한 발달, 표현수단의 다양화는 필연적으로 다원적 표현의 촉매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술 장르의 붕괴를 촉진시키고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발레와 국악의 만남이 특히 두드러진다. 2010년 10월 장선희발레단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시詩 읽는 시간’에서 기형도의 시 ‘빈집’이 발레 ‘빈사의 백조’와 만난 것을 비롯해 김춘수 정호승 류시화 등의 시가 발레 언어와 어우러지며 문학을 시각화한 역사적 공연이었다. 이후 원장현이 대금 산조 〈날개〉로 발레와 협연을 하는 등 국악과 발레의 만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무게 중심은 발레 쪽에 있었다. 반면 광주시립무용단이 광주시립관현악단과 협업한 국악발레 명성황후는 ‘국악발레’라는 타이틀에서 느낄 수 있듯 국악과 발레의 비중이 균형을 이룬 경우였다. 시와 음악의 만남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양명문의 〈명태〉 등은 가곡이 되었고, 〈세노야〉 〈개여울〉 〈푸르른 날〉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 대중가요가 된 시들은 일일이 꼽기도 벅차다. 로컬리즘과 글로벌리즘을 응축한 국악과 양악의 만남은 이제 하나의 유형으로 굳어지고 있다. 서예와 국악의 만남, 서양화와 도예의 만남, CD-ROM, DVD, 입체영상, 가상현실, 홀로그램, 레이저쇼, 뮤직 테크놀로지, 테크네 인문학, 비디오 아트, 미디어 아트 등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양한 비중으로 뒤섞인다. 영화와 음악과 그림과 전화와 건축이 만나는 예술의 형태를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지? 새로운 화학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하이브리드 아트는 뉴미디어 아트, 매체예술 등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어가며 최근에는 위성방송, 인터넷, 웹사이트, 컴퓨터를 이용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영역까지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생물학적 내용이나 지식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 ‘게놈예술’이라는 독립적인 용어까지를 포용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로 미루어 미구에 그림과 시와 차가 융복합된 새로운 하이브리드 아트 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출현하게 될 가능성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와 그림과 차
주술적 형태에서 시원한 예술은 문명의 발달과 인류의 급증에 따른 수요 분화에 따라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 다양한 장르로 세분화되었다. 포화상태에 이른 분화작업은 현대에는 장르붕괴 또는 장르 간 다원적 융복합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
뒤샹의 〈변기〉는 예술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그것이 미술분야에 속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예술 작품 중에는 장르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2000년에 프랑스 문화원이 아시아의 해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파리의 화가와 사진가의 협업 작품을 서울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다. 사진가의 작품에 화가가 임의로 형태를 변경하거나 전혀 새로운 그림을 그려넣기도 한 작품이었다. 작품이 사진인가? 그림인가? 묻는 관람객에게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사진도 그림도 아닌 새로운 것”이라고 답했다. 같은 전시에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량에서 찍은 영상과 위협적인 음악, 도로 위를 한 남자가 실제로 천천히 걷는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큐레이터의 대답은 같았다. 큐레이터가 장르를 특정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시도가 아직 진행되는 과정이어서 작가, 관객, 평론가 등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분야를 정의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시와 발레의 만남을 통한 문학의 시각화 등 예술의 다양한 분화와 융복합 관계를 알아보았다. 회화나 조각은 정적인 제작물로서 심리적 상호소통이 우선하는데 비해서 하이브리드 아트는 심리적 인터페이스를 통한 물질적 상호작용을 유발한다. 하이브리드 아트는 전통적인 장르처럼 대중과의 소통을 은유적인 것에서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전환하며 예술작품의 장르를 붕괴시키고 이어서 예술과 과학과 주거와 생활과 문화의 벽을 무너뜨린다. 예술의 경계를 넘어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하이브리드 아트는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구현된다. ‘상호작용’이라는 역할에서 하리브리드 아트와 ‘차’는 기능적으로 부합되는 일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와 그림과 ‘차’의 상호작용을 예술에서 찾는 작업은 하이브리드 아트 부근 어딘가에서 이루어지게 되리라고 예상된다. 바둑돌을 어디에 놓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스포츠가 되었듯 어떤 시어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명상, 또는 어떤 선과 색채로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구상이라는 정신활동이 차와의 협업을 거쳐 어떤 형태로 독자 또는 관객을 만나게 될 것인지 예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빈 찻잔에 찻물을 부으며, 그러나 그것은 분명 미래에 출현할 새로운 하이브리드 예술의 한 유형이 되리라는 결론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