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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배종찬
예정시간 | 답심지 | 주소 |
07:30 | 어린이 대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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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 성서 홈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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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건계정(建溪亭) | 거안로 1173-21[상림리 745-2] |
10:10 | 사락정(四樂亭) | 마리면 영승리 |
10:40 | 동계종택 (桐溪宗宅) | 위천면 강동1길 13[강천리 50-1] |
11:30 | 수승대(搜勝臺) 요수정(樂水亭) 황산(黃山)마을 구연서원(龜淵書院) | 위천면 황산리 890 일대 |
12:3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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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 | 갈천서당 (葛川書堂) | 북상면 갈계리 1073 |
14:00 | 은진임씨 정려각 | 북상면 강선대길 96-326[농산리 673] |
14:30 | 모리재(某里齋) | 북상면 강선대길 96-326[농산리 673] |
15:10 | 사선대(四仙臺) | 북상면 월성리 |
16:00 | 화림동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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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황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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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 | 어린이 대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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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次 先賢遺跡踏尋資料集 目次
11月 先賢遺跡 踏尋 日程 --------------------------------------- | 2 | ||
제 31次 先賢遺跡踏尋資料集 目次 ------------------------------- | 3 | ||
建溪亭 ----------------------------------------------------- | 4 | ||
退溪가 이름지은 迎勝마을 ----------------------------------- | 6 | ||
四樂亭 ----------------------------------------------------- | 11 | ||
節義를 상징하는 桐溪 鄭蘊 ---------------------------------- | 12 | ||
| 1. | 桐溪 鄭蘊 ------------------------------------------------ | 12 |
| 2. | 居昌 桐溪 宗宅 ------------------------------------------- | 13 |
搜勝臺 ----------------------------------------------------- | 15 | ||
| 1. | 居昌을 대표하는 명소, 搜勝臺 ----------------------------- | 12 |
| 2. | 搜勝臺를 둘러싼 門中 간의 알력 --------------------------- | 13 |
황산(黃山)마을 --------------------------------------------- | 16 | ||
樂水亭 ----------------------------------------------------- | 17 | ||
구연서원(龜淵書院) ----------------------------------------- | 20 | ||
居昌을 대표하는 儒學者, 葛川 林薰 -------------------------- | 20 | ||
| 1. | 葛川 林薰 ------------------------------------------------ | 20 |
| 2. | 葛川書堂 ------------------------------------------------- | 20 |
3 | 葛溪里 恩津林氏 旌閭閣 ----------------------------------- | 21 | |
四仙臺 ---------------------------------------------------- | 22 | ||
桐溪가 은거했던 某里齋 ------------------------------------ | 23 |
건계정(建溪亭)
1) 개설 : 거창 상림리 건계정(居昌 建溪亭)은 거창 장씨 문중에서 1905년에 세웠다. 고려 충렬왕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시조 충헌공(忠獻公) 장종행(章宗行)과 공민왕 때 개경에 침입한 홍건적을 토벌하고 개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아림군에 봉해진 아들 장두민(章斗民)을 추모하는 정자다.
2) 변천
삼국 시대에는 거열산성이 군사적 요충지였고, 구진동 계곡은 산성 아래에 있다. 1543년 1월 퇴계 이황(李滉)이 이곳을 지나다가 계곡 경치에 감탄하여 시를 읊은 바 있다. 거창 장씨 후손 권수(權洙)·운한(雲漢)을 위시한 종중 사람들이 이곳에다 선조를 추모하고 일족의 화목을 위하여 1905년 정자를 건립하였다. 중국 남당조에 건주(建州) 자사를 지낸 자조는 장씨의 시조이고, 북송대의 염계(濂溪) 주돈이는 신유학의 시조이다. 독립 운동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여기서 '건(建)' 자와 '계(溪)' 자를 가져와 선조의 고향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건계정’이라 이름을 짓고, 고려 문하시중 판삼사사 아림군 세적비(高麗門下侍中判三司事娥林君世蹟碑)의 기문을 지었다. 두 세대가 지나 정자가 퇴락하자 후손들이 1970년에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거창 장씨 종중에서 수리하며 관리하고 있다.
3) 형태
① 정자는 건계정과 장씨 정려 및 비석 등의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계정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 형태 기와집이다. 누마루는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배면 중앙에 판벽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공포 양식은 초익공 형식이고 상부 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 구조다. 자연 암반 위에 건축하여 아래 기둥이 암반의 높낮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설치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용 문양과 젓대를 불며 비천하는 선인과 호랑이·산수화 등을 그려 두어 신선 세계를 연상케 한다. 정자 안에는 조정희의 ‘건계정기’를 위시하여 후손들과 유림의 기문과 상량문 4편, 문인 27명의 한시가 걸려 있다.
② 정려 안에는 두 개의 정려비가 있다. 왼쪽 정려는 1592년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적의 선봉을 피하여 임금을 업고 10리 길을 안전하게 호종한 공로로 장만리(章萬里)에게 내린 정려이고, 오른쪽 정려는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장군 휘하에서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공로로 장헌부(章獻富)에게 내린 정려이다. 각각 1891년(고종 28)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와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정려는 본래 거창읍 대동리 비선 거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 공사로 1994년 12월 건계정 경내로 이전하였다.
③ 고려 문하시중 판삼사사 아림군 세적비는 건계정 건물 오른쪽에 있다. 비문 내용은 거창 장씨가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하게 된 내력과 충헌공 장종행, 아림군 장두민, 승지로 증직된 장만리, 참의로 증직된 장헌부, 이괄의 난에 인조를 호종한 만호공 장일남(章逸男), 무신란에 창의한 장봉익(章鳳翼) 등 공신들의 공적을 전하고, 옛 장득상(章得象)에게 주금당(晝錦堂)이란 독서당이 있었듯이 아림군에게는 건계정이 있어서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잊지 않고 추모하며 대대로 자손이 창성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면우 곽종석이 1905년 글을 짓고, 전 관찰사 하동 정태현(鄭泰鉉)이 글을 쓰고, 중추원 의관 연안 이준학(李埈學)이 전서를 썼다. 비석은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4) 현황
건흥산 구진동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건립된 정자는 거창의 관광 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휴식을 하고 있다. 비록 3번 국도의 터널이 가까이 지남으로써 경관이 훼손되긴 했으나 거창 장씨들의 선조 추모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거창 군민들이 자연 속에서 건강을 관리하고 산책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5) 의의와 평가
거창 상림리 건계정은 천연 암반 위에 세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건물이다. 비록 근대 개항기에 건립되었으나 전통적으로 자연 친화적이면서 도교적 건축 기법을 적용하였다. 정자 내부에도 신선 사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 두어 그 지향점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후기 한·중 교류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동화된 성씨의 후손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국가에 기여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자료로 의의와 가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창 상림리 건계정 [居昌 建溪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퇴계가 이름지은 영승(迎勝) 마을
1) 개설
영승(迎勝)은 삼국 시대의 역사와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의 3동 중 원학동에 자리 잡은 안의현 동리면의 중심 마을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면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비록 1960년대 이후 이농으로 인해 주민이 많이 줄었고 옛 집들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고 있지만, 한때 이 마을은 180여 호의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인 양 활기차게 살았던, 말 그대로 대촌(大村)이었다. 마을의 면모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지금도 영승 마을은 거창군 마리면에 있는 24개 자연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리면의 1,100여 세대 중 100여 세대가 이 마을에 살고 있으니 여전히 대촌임에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영승이 거창을 대표하는 마을 중 하나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2) 배산임수의 풍요로운 마을
영승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진산 삼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원학골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물길 너머 노목들 뒤에서 문득 영승 마을이 나타난다. 그 앞에서 나그네의 발길이 멈추는 것은 뛰어난 마을의 풍경 때문이다. 마을 앞에는 북쪽 덕유산에서 발원한 거창 위천(渭川)이 큰 내를 형성하여 남쪽으로 흘러가고, 마을 뒤에는 아홉산이 연이어 작은 봉우리를 만들면서 거창읍과 경계를 이룬다. 마을에서 위천 냇가에 이르는 공간에는 문전옥답인 수반들, 괭이들이 있고, 위천을 건너면 건너괭이들, 월계들, 애말리들, 비를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마을 앞에 서서 바라보면 논, 시냇물, 월계들, 학동 마을이 차례로 펼쳐져 배산임수 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다만 거창 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보니 마을이 서향이라 불편할듯하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가 보면 곧 지형적 약점을 해결한 옛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마을 가운데로는 뒷산에서 발원한 작은 냇물이 흘러내리고 그 양쪽에 집들이 가득하지만, 집의 본채는 대개 남향으로 지었다. 동네 앞에서 보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마을 왼편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 있어 마을 전체의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향 마을이라는 약점을 뒷동산에 의지해 남향집을 지음으로써 보완하여 편리성과 균형미를 함께 충족시켰던 것이다.
3) 국경 지대의 역사는 전설을 낳고
영승은 그 이름처럼 경치가 뛰어난 곳이지만 옛 이름은 영송(迎送)이었다. ‘영송’은 "객을 맞아들이고 보낸다."는 뜻으로 삼국 시대 백제가 신라에 보내는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원학동 상류에 있는 수승대의 옛 이름이 수송대(愁送臺)로, 역시 "슬퍼하며 사신을 전송한다."는 뜻이니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영승 지역은 삼국 시대 거열국에 속했다. 5세기 거창 일대를 통일했던 거열국은 대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외교와 전쟁 양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거열국의 최고 방어 기지는 거열산성이었다. 거열산성은 건흥산에 있는데, 건흥산이 바로 영승 뒷산이다. 하늘에서 보면 아홉산이 거창읍과 영승 사이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달리고, 그 마지막 자락에 거열산성이 있다. 옛 사람들이 거창읍과 영승을 드나들었던 취우재 고갯길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었던지 마을 뒤에는 시장이 열렸던 장하 터가 남아있다. 562년 거열국이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영승 지역은 이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7세기 들어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치열해짐에 따라 영승은 국경 지대가 되었다. 이곳은 624년 백제 무왕이 함양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백제 영토가 되었고 이후 30여 년 동안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였다. 특히 624년부터 642년까지는 영승 뒷산인 아홉산이 양국의 국경선이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663년 백제 부흥군이 거열국 부흥군과 연합하여 거열산성에서 신라에 맞서 싸울 때 영승은 그 배후 지대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신라군의 압승으로 끝남에 따라 영승 지역은 완전히 신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상고하면 이곳에서 백제 사신을 전송했기 때문에 ‘영송’이라고 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시에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사행 길에 나섰던 백제 사신을 위해 국경 지대의 명승지였던 영송과 수송대에서 전별식을 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국경 지대라는 역사적 경험은 또 하나의 설화를 낳았으니 이 마을에서 전래되는 선화 공주 설화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백제 서동 왕자와 신라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거니와 영승 마을에서 전래되는 설화는 두 갈래다. 하나는 서동 왕자가 선화 공주를 말에 태우고 영승 마을 뒷산인 취우령을 넘어 백제의 첫 동네인 이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부여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왕궁에서 쫓겨난 선화 공주가 취우령을 넘다가 영승에서 백제 수비대에 붙잡혀 첩자로 몰려 죽었다는 슬픈 결말이다. 서동 왕자가 바로 이 지역을 점령했던 백제 무왕이었다. 원래 설화가 다 그러하듯이 영승의 선화 공주 설화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설화가 무왕이 이곳을 점령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선화 공주 설화는 영승 마을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취우령(驟雨嶺)이 ‘비가 몰려오는 고개’라는 뜻이듯이 취우령에 비구름이 몰려오면 곧 마을에 비가 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예부터 “취우재 비 묻었다. 설거지해라.”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를 선화 공주의 눈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가뭄이 들 때 취우령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선화 공주 설화는 1986년에 처음으로 채록되었고, 2013년부터 매년 선화 공주의 넋을 위로하는 취우령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는 설화를 낳았고, 그것은 다시 문화가 되어 마을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4) 유교 전통이 뿌리를 내리다
영승은 고려 시대 내내 이안현의 영역에 속했지만 마을 내력을 전해 주는 사료가 없다. 영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시대 초기 새로운 사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정선 전씨, 광주 이씨, 선산 김씨, 파평 윤씨가 차례로 영승으로 이주해 왔다. 먼저 15세기 합천 군수를 지낸 정선 전씨 전맹겸이 정선에서 옮겨와 마을을 개척했다. 16세기 들어 연산군 때 중추부사 광주 이씨 이세걸이 전수온의 사위로 한양에서 이주해 왔고, 부호군 선산 김씨 김세염이 전식의 사위로 아들 김신옥과 함께 함양에서 이주하였다. 이어서 파평 윤씨 윤할이 한양에서 이주하였다. 이들 문중의 재실이 아직까지 마을에 남아 있다. 바로 정선 전씨의 경모재와 동원재, 광주 이씨의 영모재, 파평 윤씨의 서담재와 남호재이다.
영승 마을은 각 가문의 인물들이 당대 대학자였던 이황, 조식, 정온 등과 인적, 학문적으로 교류함으로써 반촌으로서의 명성을 더해 갔다. 그중 퇴계 이황의 방문이 가장 유명하다. 이황은 1543년 초 장인 권질의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 영승을 찾았다. 당시 권질은 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영승에 사는 처남 전철 일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권질은 전철이 마을 어귀 냇가에 정자를 짓자 한양에서 벼슬을 살던 사위 이황에게 작명을 의뢰하였다. 이에 이황은 1542년 정자의 이름을 ‘사락정(四樂亭)’이라 하고 ‘기제사락정병서(寄題四樂亭幷序)’를 함께 지어 보냈다. ‘사락’이란 네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이황은 이 글에서 영승에서 홀로 즐길 만한 것으로 농사짓기[農], 누에치기[蠶], 고기잡이[漁], 나무하기[樵]를 들고, 은거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이 시의 현판은 현재 사락정에 걸려 있다.
이황은 1543년(중종 38) 1월 3일에 도착하여 1월 7일 떠나기까지 5일간 영승에 머물렀다. 이황은 지역 사림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송’이 마을 이름으로 아름답지 못하니 음이 비슷한 ‘영승’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였고, 마을 사림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황이 직접 쓴 “영승 마을에 머물며 사락정을 짓다[迎勝村留題四樂亭]."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영승촌의 옛 이름이 ‘영송’이다. 그 이름이 고상하지 못하므로 송(送)을 고쳐 승(勝)으로 하였다. 그 소리가 비슷한 것을 취한 것이다. 영승촌에는 아름다운 시내와 바위가 있었고 마침 시절이 바야흐로 이른 봄이어서 마을이 새로움을 향해 가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영승의 빼어난 경치를 맞이한다.’라고 하여 한 시절의 빼어남을 기록하였다. 사락정은 시내에 임하여 새롭게 지었고 지난해 내가 이름을 지어 보냈다.”
이때 이황이 남긴 시가 “이른 봄의 영승[迎勝村早春]”이었다. 이 현판 또한 사락정에 걸려 있다. 당시 이황은 당시 수승대에 은거했던 신권의 초대를 받았으나 방문할 시간을 내지 못하자 글을 지어 ‘수송대’를 ‘수승대’로 고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신권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수송대’는 ‘수승대’로 바뀌었다. 이황의 방문을 계기로 ‘영송’이 ‘영승’으로, ‘수송대’가 ‘수승대’로 바뀐 것은 고대 국경 지대였던 이곳이 조선 시대 문화 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준다.
영승은 남명 조식과도 관계가 있었다. 선산 김씨 김신옥은 조식의 문하생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칠원 현감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비록 기록에는 없을지라도 조식이 두 차례에 걸쳐 북상에 살고 있던 임훈은 방문했으니 그 길목에 있었던 영승에 들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위천 출신으로 조선 후기 전국적 인물이었던 정온의 처가가 영승에 있었다. 정온의 장인 윤할은 당대 영승으로 이주했던 인물로 당시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부자였다. 윤활의 두 아들이 주인공인 서담재와 남호재의 품격에서도 당시 윤활의 가세를 읽을 수 있다. 병자호란 후 정온의 명성이 높아 갈수록 이 가문의 위세 또한 동반 상승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영승이 유교 전통 마을이었으니만큼 이름난 효자와 열녀도 있었다. 정유재란 때 왜구에 저항하다 목숨으로 정절을 지켰던 전형의 아내 초계 정씨와 딸 정선 전씨의 열녀비,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던 전택안 효자비가 마을 앞 국도변에 있다. 영승은 2012년에 효자 마을로 선정되었고 지금도 마을 앞에 효자 마을 지정비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효열의 전통이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알겠다.
5) 전통은 현대로 이어지고
이 마을의 유교 전통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으니, 1932년 영승서원이 건립된 것이 대표적이다. 1932년 이황을 추앙하는 모도계와 송준길을 추앙하는 모춘계가 사락정에서 열렸고, 이듬해에 이들 계원과 유림의 공의로 전철의 후손들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는 이황, 송준길, 전철을 모셨다. 송준길을 함께 제향한 것은 송준길이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잠시 영승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선 전씨 문중은 1923년에 이미 정선 전씨의 선조였던 전기를 기리는 이요정(二樂亭)을 건축한 바 있었다. 이기서 ‘이요’란 산수를 즐긴다[樂山樂水]는 뜻이다.
해방 후 영승은 외관상 큰 변화를 겪었다. 마을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건축물 중 정선 전씨 전식을 기려서 위천 냇가에 세웠던 농월정과 수척정은 홍수에 떠내려가 바위만이 그 흔적을 보여 줄 뿐이며, 파평 윤씨 윤면흠의 유적인 강정(江亭)도 그 터만 남았다. 또한 이 마을 출신으로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전병수의 후원으로 사락정, 영승 서원, 동원재, 이요당이 모두 개축되었다. 그중에서 중건된 이요당의 건물은 전통이 현대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원래 이 터에는 재실과 이요당이 따로 서 있었는데 중건 과정에서 통합하여 2층으로 지었다. 1층에 서양식 주택 양식으로 재실을 꾸미고 2층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이요당을 세워서 실용성과 미관을 겸비하였다. 전통의 현대화를 보여 주는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는 비단 전통 건축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마을 전체가 전통의 현대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구성되었던 마을은 어느 듯 한옥과 양옥으로 변모하였고, 마을 가운데 흐르는 냇물은 복개되어 자동차가 드나들기 좋게 바뀌었다. 주민 구성은 더 크게 변했으니, 그 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을 뿐만 아니라 노령화되었다. 2016년 6월 22일 현재 영승 마을에는 106가구에 184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60대 이상의 인구가 103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승은 여전히 옛 전통 마을의 풍모를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풍요로운 들판, 배산임수의 마을은 시대의 변천과 무관하게 옛 모습 그대로이다. 아직도 주요한 전통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의 전통 의식도 여전히 살아 있다. 한번 사락정에 올라 보면 운치 있는 마을 풍경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긴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퇴계가 이름 지은 영승, 역사와 전설이 깃든 전통 마을 [退溪- - - 迎勝, 歷史- 傳說- - 傳統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락정(四樂亭)
사락정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장인 권질(權礩 1483~1545)이 예안의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로 옮겨 살면서 자주 들렀던 정자이다. 권질은 사위 이황에게 편지를 부쳐 이 정자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황은 시골에서 누릴 수 있는 네 가지 즐거움(농사, 누에치기, 나무하기, 고기잡기)이라는 의미로 사락정(四樂亭)이라 이름 붙이고, 시(詩)를 지어 장인에게 보냈다.
1543년 이황이 권질의 회갑잔치에 왔다가 이곳에 잠깐 머물 때 옛 지명이었던 영송촌(迎送村)이 고상하지 못하다 여겨 영승촌(迎勝村)이라 고쳤다 한다. 이황은 영승촌(영승리)을 방문한 후 ‘영승촌중영조춘(迎勝村中迎早春)’ 즉 ‘영승마을에서 이른 봄을 맞으니’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시를 지었다. 마을 개울가 근처에 세워져 있는 사락정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1998년에 중수되었으며 내부에 이황의 시를 차운(次韻)한 시판(詩板)이 여러 개 걸려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창 사락정 [居昌四樂亭] (두산백과)
절의를 상징하는 동계 정온(桐溪 鄭蘊)
1. 동계 정온(桐溪 鄭蘊)
1601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주 01)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선조 40)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동계 종택(居昌 桐溪 宗宅)
1) 개설 : 거창 동계 종택은 조선 후기 유학자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후손들이 사당을 모시고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이다. 종택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행랑채, 곳간채, 안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집 외곽에는 한식 맞담을 쌓아 영역을 구분했다.
2) 위치 : 덕유산 남쪽 끝의 금원산에서 흘러내린 산상천을 따라 위천에 이르면 동계 정온의 고택이 나온다. 거창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5㎞ 더 들어간 곳이다. 집 앞 위천을 따라 북으로 약 5㎞ 더 들어가면 유명한 수승대가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들어간 산속에 금원산 자연 휴양림이 있다. 동계 종택은 금원산[1,353m]의 지맥인 지백산이 동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 끝에 앉아 위천 초등학교를 향해 남향하고 있다.
3) 변천 : 동계 정온은 초계 정씨로 선대(先代)는 거창의 용산, 안음, 서마리 등지에 거주했다. 동계의 조부 정숙(鄭淑)[1501~1563] 때 이곳에 입향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의 가옥은 동계 정온의 후손들이 1820년에 중창하였다.
4) 형태 : 솟을대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의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전퇴(前退) 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 부분이 1칸 반 규모이다. 평면 구성은 정면 좌측에 사랑 부엌과 2칸 큰사랑방, 사랑 대청, 작은 사랑방을 일렬로 배열하고, 작은 사랑방 앞에 내루를 달아낸 형태이다.
동계 종택의 특징은 겹집형 평면 구성에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 주위에 눈썹지붕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랑채의 상량대에는 중창 연대를 알 수 있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는데,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숭정기원후 사경진 삼월)’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1820년(순조 20)에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정면의 전퇴에만 길게 툇마루를 시설하고, 배면과 우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큰사랑방 뒤에는 침방이 있으며, 이러한 침방은 안채 안방 뒤에도 있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왼쪽의 중문을 통과해야 하며, 중문채는 정면 3칸 규모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반듯한 안마당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안마당 좌우에는 각각 부속 건물이 마주 보며 배치되어 있다. 왼쪽 건물은 곡간채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방 아래에 판벽(板壁)을 들였으며, 뒤편에 여성들이 사용하는 내측(內厠)이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서향한 뜰아래채가 있는데 마루와 방으로 구성된 4칸 홑집이다. 안마당에 면해 남향한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구모로, 전·후퇴가 있는 겹집형 평면이 특징이다. 정면 왼쪽 끝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부엌[정지]을 두고, 이어 정면 2칸, 측면 2칸 도합 4칸 규모의 안방을 두었다.
안방은 가운데 미서기 장지문을 달아 공간을 둘로 구획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안방 옆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룻방을 시설하고 앞뒤에 각각 두 짝의 들어 열개 들문과 여닫이문을 달아 놓았다. 마룻방 오른쪽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통칸 온돌방을 두고 위쪽에서 꺾어서 또 1칸의 온돌방을 시설하고, 그 사이에 미서기 장지문을 달았다. 가묘는 안채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앞에 삼문을 시설한 네모난 담 안에 배치되어 있는 가묘는 전퇴가 있는 정면 3칸의 규모로, 내부에 불천위인 동계 정온의 위패를 비롯하여 4대조까지의 위패를 봉안했다.
5) 동계종택의 문화재적 가치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된 거창 동계 종택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으로서 규모가 크고, 부재가 넉넉하며, 구조가 견실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집 안채와 사랑채의 겹집형 평면은 19세기 이후 사대부들이 주택의 형식미와 주생활에서 격식을 중시했던 생활 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안채와 사랑채와 같은 주생활 공간의 확대 및 분화가 두드러졌으며, 이는 겹집형 평면의 발달을 가져왔다. 동계 종택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 준다는 데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개방적인 건물 배치 및 낮은 기단, 높은 툇마루는 남쪽 지방의 건축 특색을 잘 보여 준다. 이렇듯 동계 종택의 학술적 가치는 겹집형 평면 구성에 남부 지방의 개방적이고, 마루가 높은 고상식의 건축 형식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창 동계 종택 [居昌 桐溪 宗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승대(搜勝臺)
1) 居昌을 대표하는 명소, 수승대(搜勝臺)
어느 고장에나 고달픈 일상을 잠시 잊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숨구멍 같은 쉼터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거창사람들에게는 수승대(搜勝臺)가 그러한 곳이다. 품 너른 덕유산(德裕山, 1,614m)이 이룬 맑고 아름다운 골, 하면 누구나 무주의 구천동계곡을 떠올리겠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 그리고 거창의 원학동(猿鶴洞) 계곡을 그에 버금가는 것으로 친다. 예로부터 손꼽혀온 이른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다. 그 가운데 위천(渭川)이 남실남실 흘러내리는 원학계곡 한 구비에 수승대가 자리잡고 있다. 맑은 물이 있고 조촐한 정자와 누대가 있고 듬직한 바위가 있고 이들이 어우러지며 그려내는 풍광이 자못 명미(明媚)한 경승지가 수승대이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그 역사와 신화가 세월에 닳고 여러 입에 씻기면 사화(史話)로 바뀌고 전설로 굳어지는 것이리. 수승대에는 전설처럼, 사화처럼 옛이야기가 주절주절 매달려 있다.
거창지방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강약이 부동인지라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 하여 여기를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한다.
어느 만큼 사실에 바탕을 둔 얘기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라는 이름에 담긴 본디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 속내에 백제의 옛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민중들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백제의 역사를 슬며시 얹어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불리던 이름이 지금처럼 바뀐 것은 조선시대다.
거창 신씨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권(愼權, 1501~1573)이 있다. 자(字)는 언중(彦仲), 요수(樂水)가 그의 호(號)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1540)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2) 搜勝臺를 둘러싼 門中 간의 알력
동계가 살았던 위천마을 옆에 위천이 흐른다. 위천에는 큰 바위가 있다.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고, 지금은 수승대(搜勝臺)다. 이름이 바뀐 해는 1543년이다. 바꾼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바위가 있는 원학동 계곡이 워낙 명승인지라, 유람 떠난 이황이 바위를 보려 했으나 조정 부름을 받고 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마음에 이황이 글을 써서 남긴다. "수송대(愁送臺)라는 이름은 슬픔(愁)이 담겨 있으니, '경치를 찾는다'는 '수승대(搜勝臺)'라 하시게." 수승대 근처 황산마을에 살던 선비 요수 신권이 대학자의 개칭 권유를 받아들였다. 신권의 큰 처남인 갈천 임훈은 내키지 않았다. 임훈은 이황보다 한 살 위다. 그래서 시를 썼다. "봄을 보내는 시름만 아니라 그대(이황)를 보내는 시름도 있네(不獨愁春愁送君)" 이황이 바꾸라 했던 '슬픔(愁)'이 두 번이나 들어 있었다.
은진 임씨 임훈 가문이 거창 신씨 신권 가문보다 거창 입향이 100년 앞섰으니, 임씨 문중에 수승대는 자기네 바위였다. 수승대 주변 황산마을에 살며 수승대에서 문중 제자들을 길렀으니 거창 신씨 문중에도 수승대는 문중 땅이었다. 사돈지간 시대에 개칭된 바위에 두 문중은 자기네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었다.
거창 위천에 있는 수승대. 임씨와 신씨 가문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거창 위천에 있는 수승대. 임씨와 신씨 가문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이름 석 자에 싸움이 한 번 벌어지고, 목숨까지 오갔다. 송사가 벌어지고 가산을 탕진하는 후손도 나왔다. "아름다움은 빼어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하다."(구한말 양명학자 겸 관료 이건창) "막대한 재산과 다수한 인명까지 희생하였으나 아모 해결을 엇지 못하며 지내"(1928년 1월 3일 자 조선일보) 일제강점기 법원 판결이 나왔다. 국유지이며 하천부지임. 그사이 바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위에는 여러 성씨 이름들이 자그마치 177개가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신씨와 임씨 이름이 각각 34개, 33개다. 그 모든 이야기가 수승대 바위 사방에 새겨져 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2/2017112200223.
html
황산(黃山) 마을
황산전통한옥마을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건너편에 있다. 1540년(조선 중종35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을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이 '구연재'는 1573년 신권선생이 죽자 사림에서 '구연서원'으로 개칭 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 하였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 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이 가옥은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사랑채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당시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재력을 엳볼 수 있다. 안채는 많이 개수되어 전통한옥의 격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여 준다.
수승대국민관광단지에 깨끗한 민박과, 호텔 등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지만, 이곳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황산전통한옥마을에서 옛 조상들의 주거생활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거창은 오래전부터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낮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황산마을에서 전통한옥체험을 한다면 여름 휴가철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황산전통한옥마을은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에서 가깝고, 인근에 송계사계곡, 거창조각공원, 금원산자연휴양림, 월성계곡, 거창박물관, 화계사, 쌍계사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산전통한옥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요수정(樂水亭)
신권 선생이 수승대 언덕에 지은 아담한 정자이다. 이곳에 앉아 내를 내다보면 암구대 등 수승대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이렇게 자연에 묻혀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십 리 아래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로부터 이튿날 거유(巨儒) 이황이 예방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안의삼동을 유람차 왔던 퇴계가 마침 처가가 있는 영송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골짜기의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1543년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마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그러나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는 양해의 말과 함께.
搜勝名新換‘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遠林花欲動 먼 숲 꽃망울은 터져오르는데
陰壑雪猶埋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未寓搜尋眼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惟增想像懷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他年一樽酒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巨筆寫雲崖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넘치지 않을 만큼 정이 담긴 시였다. 화답이 없을 수 없었다.
林壑皆增采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가는데
臺名肇錫佳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勝日樽前値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深荷珍重敎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殊絶恨望懷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行塵遙莫追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獨倚老松崖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옛사람들의 여유로운 만남이 부럽다.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새 이름을 얻은 암구대, 곧 거북바위에는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이 읊조린 시문이나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새긴 성명 석 자가 빈틈없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퇴계의 시와 나란히 새겨진 글은 역시 거창이 자랑하는 선비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의 시다.
花滿江皐酒滿樽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遊人連袂謾紛紛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春將暮處君將去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不獨愁春愁送君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거북바위에는 짤막한 전설도 얽혀 있다. 장마가 심했던 어느 해, 불어난 물을 따라 윗마을 북상의 거북이 떠내려왔다. 이곳을 지키던 거북이 그냥 둘 리 없어 싸움이 붙었는데, 여기 살던 거북이 이겼음은 물론이다. 그때의 거북이 죽어 바위로 변했으니 거북바위가 바로 그것이라 한다. 옛날 이곳을 범한 거북을 물리쳤듯 바위가 된 거북은 오늘도 이곳을 지키는 지킴이 구실에 어김이 없다는 얘기다.
시내 건너 바위 언덕에 선 정자가 요수정이다. 요수 선생이 처음 세웠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1805년에 다시 만든 것이 지금의 정자다. 정자의 볼품이야 대단할 게 없지만 옛 주인의 마음이 담긴 주련(柱聯)은 가볍게 음미함 직하다.
林泉甘老地 숲과 물이 함께라면 늙기도 수월할 터
小檻卜淸幽 작은 정자 그런대로 맑고 그윽해
洞鶴留仙跡 골짜기에 내리는 학 신선의 자취
巖龜送客愁 시름 달래기엔 거북바위가 안성맞춤
登臨惟自適 이곳에 노닐며 자신에 만족할 뿐
聞達不須求 헛된 이름을 좇지 않으리.
時看漁樵伴 풀 베는 아이, 고기잡는 늙은이 벗삼아
相尋碧澗頭 이따금 푸른 물에 발을 담그네.
요수 선생이 죽은 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재실은 서원이 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이다. 그 문루(門樓)인 관수루(觀水樓)가 볼 만하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층 누각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편으로 덩그렇게 놓인 크고 펑퍼짐한 바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천연스러움을 한껏 살렸다. 덤벙주초 위에 놓인 누하주(樓下柱)는 굽으면 굽은 대로 그저 껍질만 대충 벗긴 나무들을 그대로 썼다. 특히 안쪽 것들이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인데도 네 귀퉁이마다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왼편의 둘은 바위 위에 맞춤한 구멍을 뚫어 짧은 돌기둥을 박은 뒤 그 위에 올렸고, 다른 둘은 외벌대 기단 위에 길숨한 돌기둥을 마련한 다음 나머지를 나무로 이었다. 조금 되바라진 느낌이 있긴 하나 좌우로 뻗쳐올라간 처마선이 시원스럽고, 무엇보다 듬직한 바위와 어우러진 모습이 천연덕스럽다.
관수루를 찾을 때 반드시 생각해볼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와 함께 우리 회화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의 실마리를 풀어간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이다. 광해군과 세조, 그리고 숙종의 어진(御眞)을 새로 그릴 때 영조 임금이 그의 그림 솜씨를 높이 사 그때마다 그림 그리기를 명했으나 하찮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끝내 붓 잡기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관수루는 조영석이 안음(현재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다. 그때 그는 고을의 수령으로서 누각의 이름을 ‘관수루’라 명명함과 동시에 「관수루기」를 지어 일의 내력을 밝혔다. 관수루 다락에 오르면 지금도 그의 글과 시를 볼 수 있다.
수승대에서 찻길을 건너 마을길을 따라가면 황산마을에 이른다. 거창 신씨들의 씨족마을이다. 마을 뒤편의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면 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복판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마을을 둘로 나누고 있는데, 서쪽을 ‘큰땀’이라 부르고 건너편을 ‘동녘’이라 이른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큰땀에는 양반네들이 주로 살고 동녘에는 소작인이나 노비들이 살림을 꾸렸었다 한다. 그래 그런지 지금도 큰땀에는 기와집이 꽤 여러 채 남아 있는 반면 동녘에는 초가집이 바뀐 ‘신식집’들이 대부분이다.
마을에서 가장 번듯한 집이 솟을대문에 ‘猿鶴古家’(원학고가)라는 편액을 단 신도성 씨 댁으로, 주인은 요수 선생의 12대손이 된다. 1925년에 지은 집인데 근대적인 합리성과 기능성을 살린 한옥으로 평가받는다. 그밖에도 골목들을 찬찬히 누비고 다니면 ‘수부귀·다남자·만복래·황금출’ 따위 누구나 바라는 소망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귀를 비롯하여 갖가지 무늬가 놓인 망와를 구경하는 재미가 쑬쑬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승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돌베개)
구연서원(龜淵書院)
거창 구연서원은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요수 신권은 석천 임득번의 제자로 임득번의 아들인 갈천 임훈과 함께 지역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들은 남명 조식[1501~1572]과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명과 함께 영남학파 중 경상 우도 학파의 학풍을 형성하였으며, 요수 신권은 학문적 성격과 생활 자세에서 영남 지역 사림의 초기 학문과 사상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1) 건립 경위
거창 구연서원은 1540년(중종 35)에 요수(樂水) 신권(愼權)이 서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1694년(숙종 20)에 사림에서 ‘구연서원(龜淵 書院)’으로 개칭하여, 요수(樂水) 신권(愼權)과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을 제향하였다. 1808년(순조 8)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를 추향(追享)했다. 구연서원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강당은 1945년 실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음해인 1946년에 원형대로 재축한 것이다.
2) 위치 및 형태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황산리 769]에 위치하고 있다. 국민관광지인 수승대의 경내에 있다. 건물은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 사당,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관수루와 강당, 그리고 사당인 구연사(龜淵祠)를 직렬 배치하여 담장을 둘렀다. 관리사는 강당의 우측에 배치하여 쪽문을 통해 출입하고 있다. 뜰에는 구연서원 사적비가 있고 요수 신권을 기려서 세운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 그리고 황고 신선생 사적비 등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양측면에 각각 1칸씩의 방을 들인 구성이다. 공포는 직절익공의 소로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를 다섯 개 쓴 5량가이다. 사당은 1988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며 겹처마에 박공지붕 형식이다. 문루인 관수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중층의 누각으로 상부는 모두 개방하였고,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상부구조는 도리를 다섯 개 쓴 5량가이다.
3) 현황 및 가치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 사당,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원의 형식을 갖춘 배치를 보여 주고 있다. 동재와 서재가 생략되었으나 그 자리를 비석들이 대신하고 있다.
1945년 실화로 강당이 전소되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원형대로 복구하였고 그 형식은 조선 시대의 건축 기범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서원의 배치 형식과 특히 자연과 동화된 관수루의 건축 기법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역사와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연서원 [龜淵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거창을 대표하는 유학자, 갈천 임훈[葛川 林薰]
1. 갈천 임훈(葛川 林薰)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성(仲成). 호는 자이당(自怡堂), 또는 고사옹(枯査翁)·갈천(葛川). 아버지는 진사 임득번(林得蕃)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득구(姜得求)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독서(讀書)하였고, 1553년(명종 8) 관천(館薦)에 의하여 사직서참봉이 되었다가 이듬 해에 집경전참봉으로 옮겼다. 그 뒤 제용감참봉으로 옮겼으나 부임하지 않았는데, 1555년 전생서참봉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80세가 넘은 노부를 봉양하여 1566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효행의 정려를 받았다.
1566년 언양현감에 발탁되었고, 1569년(선조 2)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곧 비안현감을 거쳐 1573년 지례현감이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자,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뒤 장악원정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고, 1582년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안의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갈천집(葛川集)』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훈 [林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갈천서당[葛川書堂]
이 서당은 마학동(磨學洞)에 자리잡아 갈천(葛川)임훈(林薰)과 도계(道溪)임영(林英), 첨모당(瞻慕堂)임운(林芸)이 학문과 수양에 힘쓰고 제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임영이 요절하자 폐지되었다. 그 후 갈계동에 갈천서당이 건립되었다. 이 때 옥계(玉溪)노진(盧禛)이 도내 유생과 함께 건립하였으나 임란으로 소실되었다. 다시 석곡(石谷)성팽년(成彭年)과 역양(嶧陽)정유명(鄭惟明)의 주도하에 갈천의 서쪽 석담(石潭)의 아래에 있는 회암(廻岩) 위에 지었는데 화재로 폐지되었다.
임란이 끝나자 고장의 선비들이 의탁하여 강론할 곳이 없음을 개탄하였다. 이에 다시 건립되었는데 화재로 또다시 폐지되었다. 1877년에 개건하고 1882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의 중수에는 성재(性齋)허전(許傳)이 참여하였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295호로 지정되었다. 임훈과 임운의 문집책판인 갈천선생문집책판(葛川先生文集冊板)과 첨모당선생문집책판(瞻慕堂先生文集冊板)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되어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천서당 [葛川書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葛溪里 恩津林氏 旌閭閣
조선 명종 계해(1563)년에 안음 현감 박응순이 임훈, 임운 형제의 효행을 널리 알려 생전에 내려진 생정려 2위와 순조 임진년(1832)에 정려된 임한신과 한신의 처 고령 박씨, 고종 28년 신묘년(1891)에 정려된 임경원, 광무 9년(1905)에 정려된 임지예를 추가하여 모두 6위의 정려를 모시는 정려각이다. 하지만 6위의 정려 현판은 물론 정려기 현판도 전해지지 않고 현재 6기의 비석이 서있다. 이 정려각의 초창은 1564년 현감 이효언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1600년에 중수가 있었다고 하나(정온의 정려각중수기) 현존 건물은 1905-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갈계리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집. 다진 지반위에 통돌로 초석을 놓고 아래는 방형으로 위는 육각으로 깎아 그 위에 굵은 원주를 세웠다. 벽체는 배면은 판벽, 좌우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판벽으로 하였고 정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교살로 처리하여 환기를 고려하고 정면성을 살렸다. 내 2출목 외 1출목의 공포를 두고 주칸 사이에도 공간포를 두었으며 이를 위하여 창방위에 평방을 올렸다. 앙서형의 초익공식이며 익공위에는 대들보 끝단에 붙인 봉두가 올려져있다. 가구는 3량 구조형식으로 대들보 위 사각형의 판재에 초각한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형식이며 천장 측면은 빗천장으로 하고 종도리와 가로부재(중도리) 사이를 연결하여 우물반자 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처마끝은 막새로 처리하였고 양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외곽은 협문과 토석혼축 한식담장으로 경계를 지웠다.
정려 현판 없이 비석으로만 남아 정려각의 요건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건축물의 규모와 양식적 완성도는 경남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또한 학자이자 효자로 이름 높은 임훈, 임운 형제와 관련된 인물유적이기도 하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후손에 대한 전통문화 교육자료와 건축역사 연구자료로 보존함이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경남 거창] 갈계리 은진임씨 정려각(葛溪里 恩津林氏 旌閭閣)_경남문화재자료 434호 |작성자 엽토51
사선대[四仙臺]
사선대(四仙臺)는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 계곡에 형성된 토르 지형으로, 북상 13경 중 제9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방도 37호선 월성 1교에서 조망 및 접근이 가능하다.
1) 사선대의 유래
사선대는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포개져 있는 형상과 신선이 내려와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더해지며 ‘사선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190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1877~1955]이 이 지역 일대를 의병 봉기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다 하여 왕실의 선원(璿源)[임금의 집안이라는 의미]을 기린다는 뜻에서 ‘사선대(思璿臺)’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별칭으로는 조선 후기 문인인 동춘동 송준길(宋浚吉)이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송기(宋基), 송대(宋臺)라 불리며, 또는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송대(松臺)라고도 불린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윤겸(金允謙)[1711~1775]의 영남 기행 화첩에 포함된 ‘송대(松臺)’는 바로 사선대를 그린 것이다.
2) 자연환경
사선대가 위치한 곳은 중생대에 관입한 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화강암 지대에서는 사선대와 같은 토르 지형이 잘 발달한다. 토르(tor) 는 기반암이 지표 아래에서 풍화되는 심층 풍화(深層風化)가 되고 이를 덮고 있는 풍화토가 제거됨으로써 형성된다. 기반암에 형성된 수평, 수직 절리를 따라 수분과 공기가 침투하면서 풍화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지표와 가까운 기반암일수록 절리의 간격이 조밀해지고 풍화에 더욱 약한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수평, 수직의 절리는 기반암을 교차하여 지나므로 암석의 풍화는 모서리가 둥근 정육면체와 같이 구상(球狀)으로 진행된다. 이후 풍화토가 제거되면서 나타난 풍화된 화강암 기반암의 덩어리를 토르 지형이라 부른다. 사선대는 풍화된 기반 암괴가 탑처럼 쌓여 있는 형태이다. 사선대 주변의 계곡 일대는 화강암 암반이 계곡을 따라 노출되어 다양한 화강암 침식 지형을 보여 준다. 폭포 및 폭포, 거대한 물웅덩이인 소(沼), 포트홀 등의 지형이 나타나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선대 [四仙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은거했던 모리재[某里齋]
모리재(居昌 某里齋)는 조선 시대 광해군과 인조 때의 명신이었던 문간공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을 유림들이 기려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에서 ‘모리(某里)’라 하였으며, 산이름도 ‘모리산’이라 하였다.
1)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강선대길 96-326[농산리 673]에 위치한다. 북상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지방도 37호선을 타고 1.2㎞ 정도 진행하다가 보면 도로의 좌측에 ‘모리재’ 표지판을 만난다. 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면 강선대 마을에 이른다. 마을 내부 도로를 지나 모리산으로 연결되는 산길을 따라 계속 진행하면 모리산의 중턱에 건립되어 있는 모리재에 이른다. 거창 모리재는 강선대 마을 서쪽 2㎞ 지점에 있는 모리산 중턱에 있다.
2) 변천
1645년(인조 23) 유림에서 영당(靈堂)을 세워 영정과 유물을 보존하고 제향하다가 1704년(숙종 30)에 소실되었던 것을 1707년(숙종 33)에 중건하고 ‘모리재’라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선생의 유허비를 세웠고, 1806년에 문루인 화엽루를 세웠다. 1921년에 대대적인 중건을 하여 모리재, 사당, 동재, 서재, 화엽루로 구성하였다. 1948년에 훼손이 심한 동재는 철거하였다가 200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형태
모리재는 정자 모리재를 중심으로 정면에 화엽루, 좌우측에 동재와 서재가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모리재의 배면에는 사당이 있으며 전체적인 배치를 보면 서원의 형식을 갖추었다. 모리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의 반칸은 툇간을 구성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온돌방 2칸, 마루 2칸,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 양식은 직절익공 양식으로 소로 수장하였고 상부 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오량가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단청이 시문(施紋)되어 있고 정면에는 일각문이 있다. 화엽루는 중층 문루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며 단청이 시문되어 있다.
4) 현황
모리재는 강천리 마을 뒷산인 모리산의 북쪽에 있는 계곡 상류부에 동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강당 영역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 배면의 우측에 사당이 있다. 산지의 경사 지형에 건립하여 강당 영역과 사당 영역의 높이차가 크다.
5) 의의와 평가
거창 지역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지냈고 또한 당대의 학자이자 의사(義士)로서 지역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모신 재실로 그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서원 형식의 건축물도 학술적 가치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리재 [某里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약회 대구지회 청장년위원회 답심지역 정리
차수 | 지역 | 장 소 | 일 시 |
1 | 청송․안동 | 방호정 - 후송당 - 일송정 - 송소고택 - 사양서원 - 묵계서원, 만휴정 | 2012.03.17(토) |
2 | 영양 | 사빈서원 - 백하구려 -봉감모전석탑- 서석지- 주실마을 호은종택 -석계종택 | 2012.05.19(토) |
3 | 충청도 일대 | 동춘당 고택 - 우암사적공원 - 돈암서원 - 명재고택 - 파평윤씨종학당 | 2012.06.06(수) |
4 | 상주 | 존애원 - 체화당 - 창석사당 - 옥동서원 - 소재종가 - 우복종가 | 2012.08.05(일) |
5 | 구미 | 여헌,야은 묘소 - 창랑고택 - 지주중류비 - 왕산허위선생기념관 | 2012.08.26(일) |
6 | 영천 | 지산종택 - 도잠서원 - 임고서원 - 용계서원 - 은해사 거조암 - 청제비 | 2012.11.11(일) |
7 | 청도 | 남강서원 - 용강서원 - 자계서원 - 탁영묘소 - 청도향교 - 삼족대 | 2013.01.20(일) |
8 | 현풍․의령 | 한훤고택 - 12정려각 - 망우당묘소 -이노정 - 점필재 종택 - 죽유종택 | 2013.03.17(일) |
9 | 달성 | 녹동서원 - 남지장사 - 한천서원 | 2013.04.28(일) |
10 | 안동 하회 | 화천서원 - 옥연정,부용대 - 겸암정 - 양진당 - 충효당 - 겸암묘소 | 2013.05.26(일) |
11 | 전남 강진 | 다산초당 - 백련사 - 해남 녹우당 - 옥천서원 - 김영랑 생가 - 낙안읍성 | 2013.06.06(목) |
12 | 영주․봉화 | 무섬 마을 - 금광리 인동장씨 집성촌 - 영천이씨 집성촌 - 오계서원 - 野翁亭 - 괴헌고택 -덕산고택 만취당 - 두암고택 - 천운정 | 2013.10.06(일) |
13 | 의성 일직 | 오봉종택 - 탑리 5층탑 - 氷溪서원 - 빙산사지 5층 摸塼石塔 - 晩翠堂 - 대산종택 - 정평공 손홍량 유허비 | 2014.03.23(일) |
14 | 칠곡․선산 | 사양정사 - 박곡(이원록)종택 신도비 - 여헌종택 - 쌍암고택 | 2014.05.18(일) |
15 | 여주․용인 | 명성왕후 생가 - 세종대왕 英陵 - 효종 寧陵 - 기천서원 - 구정승골 - 화서 이항로생가 - 정약용 생가 - 정몽주 묘소 -심곡서원 - 조광조 묘소 | 2014.06.06(금) |
16 | 안동 도산 | 퇴계선생 산소 - 수졸당 - 예던길 - 농암종택 - 고산정 - 만산고택 | 2014.09.28.(일) |
17 | 성주 | 한 개마을 - 세종대왕 子 胎室 - 동방사지 7층탑 - 심산기념관 | 2014.11.24.(일) |
18 | 영주․봉화 | 충효당(화산 이장발) - 띠띠물 남양홍씨 집성촌 - 충재 종택 - 바래미 開巖 종택 - 龜l鶴亭 - 유연당 - 三判書故宅 | 2015.03.29.(일) |
19 | 영덕 | 해월종택 - 예주문화회관 - 충효당 - 갈암종택 - 만괴헌 - 갈암고택 - 난고종택 - 경수당 - 무의공 종택 | 2015.05.16(토) |
20 | 경주 | 독락당․계정 -> 옥산서원 - 관가정 - 무첨당 - 서백당 - 용계정 - 입암서원 | 2015.07.26(일) |
21 | 충청 일대 | 맹씨행단 - 외암민속마을․수당 고택 - 추사고택 - 추사묘소 - 화암사 | 2015.11.22(일) |
22 | 밀양 | 혜산서원 - 오연정 - 월연정 - 금시당 - 영남루 - 밀양향교 - 예림서원 | 2016.03.27(일) |
23 | 영주 | 연복군 장말손 종택 - 성오당 이개립 고택 -귀암 황효공 종택, 귀암정 - 금계 황준량 유적(욱양서원, 금양정사, 금선정) | 2016.05.22.(일) |
24 | 문경 | 지취헌 - 고병숙 가옥 - 근암서원 - 칠봉 황시간 종택 - 내화리 3층 석탑 - 약포의 연주패옥혈 - 경송정 - 문경새재 | 2016.07.24(일) |
25 | 김천 | 율수재 - 하로서원 - 방초정 - 섬계서원 - 청암사 - 수도암 | 2016.11.27(일) |
26 | 고령․합천․산청 | 점필재 - 죽유 종택 - 대야성 함벽루 - 미연서원 - 단속사지 동서 3층 석탑, 정당매 - 남명기념관 - 덕천서원 | 2017.03.26(일) |
27 | 동해안 일대 | 해월헌 - 척주동해비 - 죽서루 - 경포대 - 선교장 | 2017.06.06(화) |
28 | 성주 | 육신사 - 가실성당 - 동방사지 7층 석탑 - 한강묘소 - 동강묘소 - 회연서원 | 2017.11.18(토) |
29 | 거창․함안 | 김숙자사당 - 일원정 - 승안사지 - 오담고택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상림 | 2018.03.24(토) |
30 | 전남 | 귀래정-포충사-경현서원-금안마을 - 나주향교 - 금성관-백호문학관 | 2018.06.06(수) |
31 | 거창 | 건계정 - 사락정 - 동계종택 - 수승대 - 갈천서당 - 모리재 | 218.11.17(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