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친구는 자연으로 돌아 갔습니다.
친구여, 편안히 잠드소서!
자연을 아는 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길이다고 가르친 친구여,
자연의 친구들과 함께 평안하소서!
▲ "환경문제라 해서 거창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사람끼리도 이름이나 사소한 것을 알아가면서 깊은 내면까지 알아가듯 길가의 풀이나 나무, 새들의 이름이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점차 환경이 내 문제가 되어간다."(이승기 정책실장이 한 어느 인터뷰 중에서)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환경운동, 생명평화 지킴이의 외길을 걸어왔던 아름답고 정의로운 한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당신이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려던 곳에서 눈을 감으시다니…. 나는 환경운동가도 아닌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지만 너무 애통합니다.
평소 자연과 관련된 글을 올리고 있는 블로거 '게낭파'는 최근 실족사고로 생을 달리한 이승기 한국녹색회 정책실장의 죽음을 위와 같이 위로했다.
'굴업도를 지키는 시민단체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는 지난 12일,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생태탐사를 떠났던 이승기(52) 정책실장이 11일 오후 1시경 토끼섬 산호초 조사 중 실족사했다고 밝혔다.
연석회의에 따르면, 이 실장은 11일 오후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소속 사진작가들과 함께 굴업도를 방문해 토끼섬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후 뛰어난 해식지형으로 알려진 토끼섬 아래 산호초를 세밀히 살피고 촬영을 하던 중 바위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 사망했다.
이에 연석회의는 바로 이 실장을 애도하는 전문을 통해, 그가 무겁게 홀로 짊어졌던 굴업도 보전을 향한 너른 마음을 꼭 지켜주겠노라고 화답했다. 이어 굴업도의 수호신이 된 그의 풀지 못한 숙제를 꼭 해결하겠노라며 대자연이 숨 쉬는 굴업도에서 편히 쉬라는 말을 남겼다.
▲ 작년 11월 17일~18일, 기자가 이틀간 방문했던 연평산 정상에서의 굴업도 전경 모습 |
|
|
굴업도 산호초 조사 중 실족사... 14일 오전 인천시청 앞 노제
전문에 따르면, 이승기 실장은 명문대학을 나왔음에도 입신출세를 탐하지 않고 오롯이 환경운동에만 매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사람과 자연을 대했으며, 온갖 오해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한길을 걸어왔다.
이 실장은 굴업도 지키기에 온몸을 바치기까지 이 땅의 강과 산천, 바다와 섬의 뭇 생명의 보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또 밤섬과 동강, 4대강과 덕적도 섬을 돌며 불철주야 카메라를 들고 걷고 또 걸었다.
"굴업도에 무덤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굴업도를 지키겠다."
이 실장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 굴업도의 수호신이 됐다. 사랑하는 부인과 세 자녀를 남겨두고 끝내 그는 굴업도 보존을 위해 아름다운 재물을 자처한 것이다.
연석회의 관계자는 그의 죽음에 비통함을 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그가 없음으로 해서, 굴업도의 개머리 초지가 쓸쓸해지고, 굴업도가 주인을 잃어 끝내는 대기업의 거대한 욕망으로 인해 개머리 초지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뭇 생명의 위대한 대서사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나 아닌지…. 그 누가 있어 이승기 실장님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대신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승기 실장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대전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경북대 생물학 석사학위를 취득, 1997년부터 한국녹색회 정책실장 간부를 역임했다. 이후 2007년 굴업도를 지키는 시민단체 연석회의를 주도했고, 올해까지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이 실장은 또한 1992년 소설가 이호철 선생의 문하생으로 등단 후 <흔들리는 둥지> <그럴 듯한 집> 등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수 편을 발표했다. 그의 석사 논문 유작으로는 <한국 수달의 생태>가 있다.
고인의 장례는 14일 오전 9시 인천시청 정문 앞에서 '굴업도를 지키는 시민단체연석회의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이승기 실장 추모시 |
굴업도에 묻히다
지난밤은 꿈이었어요
언 겨울 바다에서 오신 그대 소식에
검은 밤은 날갯짓을 하며 팔딱거렸어요
굴업도를 말하던 그대 뜨거운 입김이 기억나요
살붙이나 다름없다던 그대가 아니었나요
왕은점표범나비, 애기뿔소똥구리,
굴업도 어린 매의 눈동자를
얘기할 적마다 그대 눈빛은 깊었어요
개머리초지에서 연을 날리며
생명의 땅 굴업도가 부활하기를 그대는 소원했어요
봄여름가을 그대가 걸었던
굴업도에서 그대는 언 몸으로 왔어요
굴업도로 다시 태어 났어요
굴업도를 너무나 사랑했던 당신,
잘가요, 그대
굴업도를 사랑한 환경운동가
지금 토끼섬에 봄 바다가 오고 있어요
그대가 보았던 산호초는 잘 있을 거예요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굴업도는 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잘가요, 그대
목기미의 물때 이는 소리는 잘 있을 거예요
개머리초지 왕은점표범나비도 모두 잘 있을 거예요
굴업도 터주 먹구렁이도 잘 있을 거예요
연평산과 덕물산, 느다시뿌리
그대가 보았던 금방망이꽃과 검은머리물떼새
모두 잘 있을 거예요
잘가요, 그대
굴업도를 너무도 사랑했던 어여쁜 그대
누구보다도 굴업도를 사랑한 환경운동가
잘가요, 부디
이 생은 부끄러운 우리에게 맡기고
굴업도에 봄이 오고 있어요
선단여 화엄 바다가 일렁거리고 있어요
덕적군도 장엄한 아침햇살이 빛나고 있어요
굴업도에 봄바다가 오고 있어요
잘가요, 그대
부디 연꽃으로 태어나 굴업도에서 다시 보아요
- 이세기 시인(인천작가회의)
<인터넷 오마이뉴스에서 퍼온 글 편집> |
▲ 고 이승기 실장의 중학생 아들은 말 없이 그렇게 가슴 속 눈물을 훔쳤다.
"생이 다하도록 굴업도를 지키겠다던 그가 떠났습니다. 굴업도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가 굴업도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쳤습니다. 이제 그가 보고 싶고 그에 대한 그리움이 일거든 우리는 굴업도로 달려갈 것입니다."
14일 오전 9시, 인천 구월동 인천시청 앞 광장 마당이 노제 깃발로 가득찼다. 지난 11일 인천 굴업도에서 생태답사를 하다 실족사한 고 이승기(향년 52세) 한국녹색회 정책실장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강을 이루었다(관련기사 :<굴업도에 무덤을 쓰겠다던 당신, 결국은...>)
▲ 굴업도밖에 몰랐던 바보 이승기 실장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남겨두고 작별인사도 채 못한 채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1년, 그가 처음 환경운동에 발을 디딘 시점이다.
"자연보호는 단순히 쓰레기를 줍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태도와 정신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그는 자신의 미래를 정하고 흔들림 없이 30년간 외길을 걸어갔다. 환경운동에 필요한 이론을 다지기 위해 생물학 공부를 했고, 비무장지대(DMZ), 밤섬, 동강 등 직접 이곳저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몸소 환경보호를 실천했다.
▲ 그를 향한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강을 이루었다.
▲ 추도사 낭독 굴업도를 사랑했던 환경지킴이, 이승기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그는 굴업도 환경지킴이 활동을 자처하며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천혜의 자연사박물관으로 불리는 굴업도가 국내 대기업인 CJ에 의해 레저단지(골프장)로 훼손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 실장은 굴업도 주민 한 명 한 명을 만나가며 이해를 구했다. 또 학계에 굴업도의 가치를 알리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 덕분인지 다른 환경단체, 시민단체가 가세했다. 이어 지자체의 결단을 이끌어내 CJ의 굴업도 골프장 개발 포기선언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다른 꼼수 개발계획에 그는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 부디 이제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쉬시기를...
▲ 이승기 실장을 추모하는 살풀이 진혼무(향수)
그는 굴업도 섬 한 켠에 아예 들어와 살면서 해양환경센터를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보전과 개발의 조화를 꾀할 아이디어를 기획, 굴업도 국제공모전 준비를 열정적으로 했다.
이런 일환으로 그는 최근 1년에 몇 차례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토끼섬 산호초 촬영을 결심한다. 지난 11일 물때를 맞춰 토끼섬에 들어간 그는 험한 바위들 사이에서 촬영을 감행하다 미끄러져 끝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길을 떠나버렸다.
그리움이 일거든 굴업도로 오세요 고 이승기 실장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한 지인은 노제 내내 끝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움이 일거든 굴업도로 오세요 고 이승기 실장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한 지인은 노제 내내 끝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시청 앞 노제 당신이 사랑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이제 편히 잠드소서...
한국녹색회 창립부터 30년간 환경운동에 젊음을 바친 고 이승기 실장. 그의 돌연한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였다. 그는 중학생 막내, 대학생 둘째, 결혼을 앞둔 맏딸을 남겨두고 가족 곁을 말도 없이 떠났다.
외로운 환경운동가, 굴업도 바보 지킴이, 한국녹색회의 정신적 멘토였던 고 이승기 실장을 이제 떠나보낸다. 아니 그 길을 언제나 함께 가려 한다. 무덤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굴업도를 지키겠다던 그의 다짐을 기억하려 한다. 그 기억은 이제 굴업도를 비추는 하나의 별이 되어 언제나 푸른 섬을 지켜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