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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백화점, 삼풍백화점 참사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경, 서초동 삼풍백화점의 5층짜리 건물 2개 동
가운데 하나가 무너졌다.
삼풍백화점은 단일 매장으로는 당시 한국 최대의 백화점이었다.
이 백화점의 주인은 이준 회장의 삼풍그룹이었다. 사실 삼풍백화점을 제외하면
삼풍그룹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였다.
삼풍그룹은 어떤 회사였을까?
창업주인 이준은 1922년생으로 일제의 밀정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나이로 보아서
그럴 확률은 높지 않다. 한국전쟁 후에 그는 통역장교가 되었고, 육군정보국 소속이
되면서 박정희, 이후락, 김종필 등 육군 정보 계통의 인물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는 5.16 쿠데타 이후 중령을 끝으로 군복을 벗고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가 되었다.
1963년에는 동경산업이라는 개인 회사를 설립하여 미군 시설 공사를 전담했다.
1967년에는 중앙정보부에서 퇴직하고 중정의 인맥을 활용하여 순복음교회, 주한미군
가족 주택, 을지로 삼풍상가 등의 건설을 맡아 적지 않은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그가 비약적으로 부를 축척한 계기는 1974년에 사놓은 서초동 땅 덕분이었다.
이 서초동 땅에는 미군 하사관 숙소와 식당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는 중앙정보부 근무
경력과 주한미군 인맥에 힘입어 매입할 수 있었다.
1987년, 그는 이 땅에 50평 대가 넘는 대형 평수의 삼풍아파트를 지었다.
1986년 11월 분양 첫날에 모든 계약이 완료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삼풍은 일부 대지의 용도를 사실상 상업용지로 변경하여 백화점을 짓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분명 특혜가 주어졌을 텐데—영구 보존되었어야 할—관계 서류가
사라져 진상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1987년 7월 18일, 지상 4층으로 건축 승인이 났고 우성건설이 시공사가 되었다.
하지만 1989년 2월 삼풍건설이 시공권을 인수하였고, 지상 5층으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같은 해 11월 30일 백화점이 완공되었고 다음 날에 예외적으로 가 사용
승인이 떨어졌다. 그 후에도 삼풍그룹은 여러 번 용도변경을 하여 증축을 ‘감행’했고
그때마다 서울시와 서초구청은 이런저런 편법을 동원하여 이를 승인해 주었다.
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13일 전인 6월 16일에 실시된 안전진단에서 삼풍백화점은
늘 그랬듯이 ‘이상 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사실 삼풍백화점은 5년 전부터 균열 현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직원들이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기는 사고 20일 전인 6월 9일부터였다. 그날 백화점 건물이
흔들렸고 이후 5층에서는 물이 새고 옥상에 금이 갔다. 6월 23일에 직원들은 옥상의
균열이 더 심각해졌음을 이준 회장의 차남인 이한상 사장을 위시한 경영진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하게’ 처리하려는 태도로 일관했다.
사흘 후인 6월 26일에는 5층 식당가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백화점 측은
이때 비로소 긴급대책위원회를 열었는데 여전히—그들의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즉각 안전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결국 사고 당일인 6월 29일. 오전 8시부터 5층 옥상이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고
일부는 침하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4층에서 ‘툭’ 하는 소리를 들었고 곧 천장의 일부가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다. 이한상 사장과 간부들도 현장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확인 직후 그들은 설계감리사인 우원종합건축사무소에 연락하고, 5층 식당가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옥상 냉각탑의 가동을 중단하였다. 동시에 4층 귀금속 상가는 귀금속을
금고에 넣고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영업 중지만 했어도 최소한 참극은 없었을 텐데,
보고를 받은 이준 회장은 중역회의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후 3시쯤, 우원종합건축사무소의 기술자들이 현장에 도착했고 다시 대책회의가 열렸다.
임형재 소장은 건물 폐쇄를 주장했지만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신공법으로
보수공사를 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으며 침하를 멈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경영진의 탐욕이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합리화되고 말았다. 이런 ‘전문성’은
결국 ‘참사’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되고 말았다.
4시에 끝난 대책회의에서는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마지막 기회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경영진의 바람과는 전혀 달리, 건물은 분초
단위조차 버티기 버거워하며 붕괴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5시 40분, 경영진들도 분명한 위험을 느꼈고 그들은 일단 자기부터 살고 보자고
백화점을 빠져 나왔다. 백화점 측은 1층에서 지지대를 세워가며 간신히 붕괴를 막으며
대비하였는데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엉터리 안내 방송을 세 차례나 하면서 고객들의
탈출을 막았다. 결국 5시 57분, 건물을 지탱하는 5층 기둥 2개가 쓰러짐과 동시에
옥상의 모든 시설이 와르르 무너지며 결국 건물 전체를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많은 직원과 고객들이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느끼고 빠져나가긴 했지만 아직 건물에는
무려 1천5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결국 경고를 줄 만큼 주고 나서
삼풍백화점 건물은 기술자의 전문성과 경영진의 탐욕을 비웃듯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사고가 일어나자 4분 만에 서초소방서의 소방차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어 군,
경찰, 서울시 직원, 민방위 대원 등이 투입되었다.
그 뒤 20일 동안 공공 부문에서 연인원 7만 2,600여 명, 민간 자원봉사자와 구조대
1만여 명이 이 생지옥에서 땀을 흘렸다. 심지어 기공으로 생존자의 위치를
찾아주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동원된 장비만도 9천4백여 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7월 6일부터는 사실상 사체 발굴 작업으로 전환되었지만, 얼마 후 놀라운 인간
드라마가 연속해서 펼쳐졌다. 7월 9일에는 최명석 씨가, 7월 11일에는 유지환 양이,
7월 15일에는 박승현 양이 폐허 아래에서 구조되어 국민들에게 감동과 조그만 위안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슬프고 추악하고 한심한 모습이 훨씬 많이 드러났고 결코 감출 수
없었다. 인명 피해만 보아도 백화점 직원과 고객 등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한 해방 이후 최대의 참사였다.
7월 1일, 이준 회장과 이한상 사장의 구속을 시작으로 7월 5일에는 서초구청 주택과
정지환 서기가 구속되면서 부패와 부실의 추악한 맨 얼굴이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직자 중에서는 이충우 전 서초구청장을 비롯한 13명이 처벌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그나마 구속된 자는 6명에 불과했다.
한편, 삼풍백화점 일부 층에 대한 건설을 맡았던 우성건설의 임원진들이 검찰에
소환되었고, 이는 우성그룹이 부도를 맞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법과 탈법’ 자체였던 삼풍백화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최대의 법원단지 바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대참사의 주범인 이준 삼풍그룹 회장은 7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직후인 2003년 10월에 81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이한상 사장은
출소 후 자택인 삼풍아파트에서 살다가 몽골로 떠나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준은 몇 년 전에 나온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에서 ‘대성백화점’ 회장 ‘김진’의 모델이
되었다.
구조 작업에도 문제가 많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불과 두 달 전에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가 있었고 정부는 이후 대형 사고 시 현장 지휘를 총괄하는 응급구조본부를
가동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직후 교통 통제건
구조요원 배치이건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체적인 현장 통제도 난맥상을
보였다. 매몰자를 서로 먼저 구조하려는 경쟁이 벌어졌으며, 생존자를 확인하고도
구조하지 못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심지어 난지도 쓰레기처리장에서 유품과 사체
일부를 찾은 유족들이 당국에 거세게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쨌든 7월 18일,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은 특별재해지구로 선포되어 재난관리법이
적용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땀 흘려 봉사하는 이도 많았고 많은 위로금과 물품이 답지했지만 시민 의식에도 문제가
많았다. 현장의 계산대에는 10원짜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목걸이, 반지, 시계도 많이 사라졌다. 고가의 골프채를 훔쳐 가다가 카메라에 잡힌 자도
나왔다. 언론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장 요원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들도 마지막 생존자인 박승현 양에게 “물이 없으니
오줌을 먹을 생각을 안 했나요”라는 상식 이하의 질문을 하는 등 몰지각한 수준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적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하니 약 3천억 원으로 추산되었지만 5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마당에 물적 피해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워낙 초대형 참사였기에
보상 과정도 난항을 겪었고 인적 피해 보상은 8년이 지난 2003년에야 마무리되었다.
금액은 2,971억 원이 지급되었다. 1998년 두 개 동 가운데 남아 있던 B동이
철거되면서 지급된 영업권 피해 보전 등 2차적인 물적 피해 보상비도 820억 원이
넘었다.
삼풍그룹에 구상권을 행사해서 사실상 삼풍그룹을 ‘인수’한 서울시는 보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9년에 삼풍백화점 부지를 2,062억 원에 대상그룹에 넘겼다.
대상그룹은 여기에 대림건설과 함께 스카이라운지와 연회장, 수영장, 헬스장 등을 갖춘
초호화 주상복합인 아크로비스타를 건설하였다.
역사에 새길 만한 대참사가 벌어진 곳이라면 의당 추모공원 등 비극을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아직 그런 문화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건물이 새로 올라가는 동안에 거기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령을 보았다는 등
많은 괴담이 나돌기도 했지만, 아크로비스타는 성황리에 분양을 마쳤다.
한편 그러는 동안 연고를 찾지 못한 시신들을 화장하고 납골함을 안치한 위령탑을
만들었는데, 엉뚱하게도 양재시민의 숲 안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김현희의 대한항공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분들과 백마유격부대 전몰자들의
위령비도 함께 있다. 어쨌든 참사 현장에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 것은 참사를 빨리
잊게 하는 최고의 처방전임이 입증되었다.
현재 아크로비스타 앞에 표지석이 하나 있는데, 오해 마시라. 거기에는 삼풍백화점
참사와 아무 상관 없는 세종대왕의 몇째 아들의 후손들이 그곳에 살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사실 성수대교 참사 위령비 역시 강변북로 중간에 만들어져 있다.
물론 일반 시민이 접근하기는 아주 어렵다. 바로 옆에 서울시민의 숲이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일본을 향해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우리는 불과 20년 전의 참사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2년 전 우리는 대한민국 전체를 슬픔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를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개조와 과적, 선내에 대기하라는 무책임한 방송, 도망친 선장 등 일련의
과정은 어찌 보면 바다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삼풍백화점 참사였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를 찾아갔을 때, 왜 유가족들은 현장에다 위령비를 세우지
못하고 이곳에 세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세월호 참사 사후 과정을 보면서 의문이
풀렸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는 피해자 대부분이 단원고 학생들이라는 동질 집단
이었지만, 반면 삼풍백화점 참사의 경우에는—20년 전이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겠지만—
피해자가 직원, 고객 등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이 비극의 마지막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많은 희생자들이 당연하지만 삼풍아파트 단지의 주민과 가족이었고 이후 많은 이들이
이민이나 이주를 선택해 소유자가 미국이나 호주에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