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7: 15-1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확고하신 뜻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와 관련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관련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연약성을 감안하셔서 그의 자녀로 주실 자의 이름을 거명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확정지으십니다. 이런 내용들이 은혜 위에 임한 은혜요,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확증하신 영원하신 언약의 내용입니다.
1. 본문 15-16절은
“⑮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⑯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사래에게서 합법적인 아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녀가 하나님 명령 없이 자기 여종을 자기 자리에 대신 앉힐 때 벌써 너무도 경솔하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을 너무도 어리석게 그리고 경솔하게 예측했던 그의 아내를 너무도 순진하게 따랐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합된 잘못이 하나님께 그들에게 그 자손을 주시겠다는 사실을 알리시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자기들이야말로 그렇게 자식을 가질 수 있는 기대에서 어느 면에서는 잘리워졌었습니다. 여기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스런 은총이 더욱 더 분명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자신들의 장애로 그 약속의 과정을 저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실상 그녀의 이전 이름에서는 탁월함이 제한을 받았던 사래의 이름을 개명하셔서 그녀의 뛰어남을 넓고 광범위하게 뻗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드라는 말이 히브리인들 가운데서는 소유 대명사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떼어 팽개치시고 사라가 어느 곳에서든지 예외 없이 군주며 여왕으로서 기념되게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하나님이 결국에 가서는 모든 민족과 왕들이 나게 될 아들을 그녀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실 때에 그 문맥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얼핏 보면 이 복이 가장 광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말들 속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풍부한 복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조금 후에 보게 될 것입니다.
2. 본문 17절은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입니다.
이런 표정과 말은 그의 경건성의 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믿음의 표도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아들에 관한 모든 약속된 것을 다 받아들이며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추론해 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한갓 우화적인 것으로 멸시하거나 배척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가장 희박하게 기대되는 일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벅차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든 감탄으로 도취되어 급기야는 그렇게 웃음으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웃음이 순수한 기쁨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하는 자들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놀란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는 묻기를 ‘백살이나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사자가 말한 것을 모두 헛것으로 여기며 배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마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들을 들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일의 신기함이 그를 너무도 강하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잠깐 동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혼동된 마음으로 땅에 부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자의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증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롬4:19).
사도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몸은 이제 정력이 감퇴되어 죽은 몸이며, 사라의 불임병을 생각했거나 또는 불신으로 인하여 동요된 마음으로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선언하기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 중에서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기서 ‘아브라함이 심중에 이르되’ 라고 말한 것을 마치 그가 분명하게 이것을 그의 마음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목적과는 상반되게 살그머니 숨어 들어오듯이 당황하게 하는 생각이 갑자기 그의 마음에 질주해 들어와서 ‘백세가 된 사람에게 아들이 태어나다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가?’ 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육신적인 이성과 신앙과의 사이에 벌어진 일종의 시합이라고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부복하고 있으면서 자기 마음도 하나님 말씀에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일의 신기함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의 과정을 차단하지 않은 이 경탄은 신앙에 전혀 대치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힘은 그렇게 꾸준히 장애를 극복하는 가운데서 더욱 더 찬란하게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사라가 했던 것처럼 웃었기 때문에 책망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3. 본문 18절은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그 자신 속에서 침묵 가운데 놀라움에 잠겨있지 않고 그의 소원과 기도를 아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직도 혼란되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상태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는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 주옵소서, 또는 내가 그렇게 원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모두 감히 바라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는 이미 출생한 그 아들에게 그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배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대함이 더 이상 뻗어나갈 수가 없을 만큼 그 자신이 이미 받은 그분의 호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여호와께서 제공하신 것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 표현은 그의 육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나오고 있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그의 첫아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다른 아들을 그에게 주시면서 전자의 아들을 데려갈까 하는 두려움이나 그렇지 않으면 후자의 총애가 이미 지금까지의 호의를 완전히 흡수하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상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대답이 이런 해석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묵종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인가되고 확증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돌이켜 볼 생각도 없이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하나님에게 들었던 것을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되어 있을 때 이 기도를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사는 것’ 이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되는 것과 그분에 의하여 복을 받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간절히 원하기를 그분이 이스마엘에게 주신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4. 본문 19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입니다.
1) 19절 앞부분에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사 (아발)을 ‘진정으로’ 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보다 더 올바로 추측하여 그 표현의 위력을 증가시키려고 사용되어지고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의 정신이 몽롱한 상태를 깨우치시고 계십니다. 마치 ‘네가 한 가지 호의에만 집착되어 그보다 더 차원높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네 생각을 너무 좁은 제한에다 국한시키고 있구나. 그러나 이제는 네 마음을 확 넓히고 내가 사라에게 관하여 너에게 약속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소망의 문을 활짝 열어 제쳐놓고 그 말을 그 액면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깨우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19절 뒷부분에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언약을 가족에게 국한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 사실에서 전에 약속된 복에 대하여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된 소망을 구상했기 때문에 이 거짓 소망은 먼저 그의 마음 속에서 철저하게 제거되어 더욱 더 충분히 하늘나라의 말씀을 신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확고한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상상으로 전에 동요되었던 그의 믿음의 닻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언약을 영원한 것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언약이 단지 한사람에게 국한될 것이 아니고 그의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 지속적인 계승으로 그 언약이 그의 후손들에게 내려가게 하셨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은혜를 박탈시키신 이스마엘을 할례를 받게 명령하신 것은 조금 모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여호와께서 이삭을 은혜로우신 약속의 원매개자로 세우시고 그로부터 구원의 언약이 흘러나오게 의도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이스마엘을 전적으로 배제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전 가족을 양자로 삼으심으로 이스마엘을 자기 형제 이삭에게 열등한 위치로서 연합하시고 그 상태가 이스마엘 자신이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을 단절시키고 그의 동생의 사회로부터 자신을 끊어 버리기까지는 유지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할례는 쓸모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할례가 이스마엘 자신이 언약을 버리고 배신하기 전에는 그 효력이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언약이 그에게는 기탁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동생 이삭과 함께 그것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호와께서 이 말씀으로 의도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이 약속된 복을 합법적으로 상속받는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