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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교회의 품안에 거하는 성도들
이사야66:10-14
모세가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을 때 아이는 바로의 명령에 의해 나일 강에 버려져야 했습니다.
얼마동안 숨겨서 키웠지만 더 이상 키울 수 없었을 때 부모는 아이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나일 강에 띄워 보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공주에게 발견되고 아이를 불쌍히 여긴 공주는 그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습니다.
공주의 아들이 되었지만 젖을 떼기까지는 친엄마에게 보내져 키워지게 됩니다.
친엄마의 품에서 젖을 떼기까지 모세는 한 사오년 정도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바로의 궁궐에 들어가 20년 이상을 공주의 아들로 자랍니다.
모세가 자라난 서로 다른 환경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간으로 따져도 4-5년 대 20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환경으로 보아도 보잘 것 없는 노예의 가정과 바로의 궁궐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교육이나 생활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친 엄마의 품에서 모세는 네가 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민족이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신앙 교육도 받았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철저한 애굽인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바로를 위하여 일하고 공주의 아들에 걸맞게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친 엄마의 나은 정와 공주의 기른 정이 모세에게 함께 존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환경에서 자란 모세의 선택은 어디였을까요?
한 번은 모세가 히브리인들의 노역현장을 방문했을 때 애굽의 감독관이
자기 백성을 때리는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해 감독관을 죽이고 몰래 모래 속에 감춥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 것인가? 아니면 히브리 민족의 아들로 살 것인가?
두 마음이 모세를 혼란스럽게 하였지만 모세의 선택은 친어머니였습니다.
공주의 기른 정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겠습니다만 기른 정보다 나은 정이 더 크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영향력이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엄마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창설자이며 유명한 종교 개혁자였던 존 칼빈은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와 같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교회가 어머니라는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 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기독교강요, 4장 1.1).
칼빈은 어머니가 아이를 케어 하는 과정을 교회의 역할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 군데 그의 주장을 더 들어보면,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4장 1.4). 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성숙할 때까지 보살피는 것처럼,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이들을 지속해서 인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칼빈의 독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곧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인데요, 이사야서는 보통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40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는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그리고 돌아온 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며 어려운 가운데서 성전을 세웁니다.
그러나 성전을 세운 이후에도 기대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2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들은 종말론적인 예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도
예루살렘 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장차 세우시는
주님의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예루살렘을 어머니와 같다고 말합니다.
11절 말씀에서는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와 같다는 칼빈의 비유는
정말 탁월한 비유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도들은 교회의 품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요즘에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가나안-거꾸로 하면 ‘안나가’ 입니다.
교회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등지고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해도 신앙생활은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을 떠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점점 신앙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요 나중에는 신앙을 떠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더 잘 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부족하다고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이가 살 수 없듯이 교회의 품을 떠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교회에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즉 교회에 어떤 축복을 주셨을까요?
첫째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10절 하 반절에 보면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기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너희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기쁨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기쁨을 실제로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하라, 노력하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이미 주셨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니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은 누구도, 어떤 환경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성도는 이 기쁨을 누리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12절 말씀에 보면,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주리니”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축복은 평강의 축복이요 평화의 축복입니다.
예루살렘은 오래 동안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축복은 단순히 정치적인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강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환경을 뛰어넘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환경을 뛰어넘어 평강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뭇 나라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12절 하 반절에서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했습니다.
여기에서 뭇 나라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어떤 번역에서는 평화라고 했고 어떤 번역에서는 부귀영화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성도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축복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시는 축복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노래한대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이런 축복을 아낌없이 무제한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이런 예루살렘의 복 즉 교회의 복을 누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교회와 함께 해야 합니다.
10절에서 계속 반복하는 말씀이 ‘성읍과 함께’입니다.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교회와 늘 함께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으면 만사 오케입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엄마만 있으면 먹을 것도 풍성하고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엄마 품안에서 평안하게 잠도 잡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교회와 함께 하기만 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먹을 말씀이 풍성합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행복합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실 때 도마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을 때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만 함께 하지 않을 때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와 늘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배도 늘 함께 해야 하고 교제도 늘 함께 해야 하고, 교육도 함께 해야 하고 성례전도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할 때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안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그 은혜로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말씀의 젖을 잘 먹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젖을 빤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은 살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우들이 신앙적으로 살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영적인 젖인 말씀을 먹는 것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서 교회가 성도들에게 주는 축복 중에 제일은 신령한 말씀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신령한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늘 묵상하시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교회의 축복을 받게 되고 말씀으로 잘 양육 받고 귀하게 쓰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 주님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품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에게도 교회의 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회의 품을 외면하거나 떠나면 성도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주시기로 약속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감당하시어서 교회의 축복,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3.07.16.)